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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天 無比 큰스님 염화실 인터넷 법문]
信心銘-제9강 (將心用心 豈非大錯~) 2006년 2월 15일
[如天 無比 큰스님]
반갑습니다. 2월 15일 염화실 인터넷방송 강의 시작 하겠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제가 말씀드린 번호 수로는 42번이 되겠습니다. 어제는 法無異法(법무이법)이면 妄自愛着(망자애착)까지 했지요?
오늘은 將心用心(장심용심)하니 豈非大錯(기비대착)가 거기서부터 할 차례입니다.
지금 여기 범어사는 봄비가 아주 촉촉이 내리고 있습니다. 밤 인데 비가 이렇게 내리고 있어요. 그 봄기운을 재촉하고 온갖 초목들이 그 비를 맞고, 아주 활기차게 생동하는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봄은 참 생명의 계절이고, 생동하는 계절이고, 뭔가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그 어떤 교훈을 던져 주는 그런 계절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공연히 아주 몸부림이 나고 힘이 솟지요? 이런 계절에는... 모두 밝은 곳을 향해서 그 초목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이런 봄을 맞이해서 보면 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 모두 자라긴 자라요. 그런데 모두 밝은 곳을 향해서 이렇게 줄기와 가지를 뻗고, 새싹이 밝은 곳을 향해서 뻗어 갑니다.
대개 가정에서 키우는 식물 같은 것도 보면 은, 방안에 놔둬도 돌리지를 않고 그냥 두며는, 계속 베란다 쪽을 향하게 되지요. 그래서 자주 방향을 돌려줘야 곧게 큰다는 이치를 그런 데서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뭐 식물뿐만 아니라, 특히 사람들도 자기 성장, 자기 발전은 밝은 곳을 향해서 성장하고 발전하게 돼있습니다.
어두운 곳을 향해서는 타락하게 돼있고, 추락하게 돼있고, 그렇지요. 정말 밝은 곳을 향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어떤 그 마음의 밭을 갈고 닦게 되고, 그래서 조금씩 그 영혼이 그런 성장함이 없는 가운데서 또 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사람이 철들지 않는 본래의 모습이 있는 반면에, 또 그 가운데서도 성현의 가르침을 통해서 차츰차츰 철들어 가는 그런 것들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부처님 법을 만난 사람으로서는 뭐 끊임없이 공부하고, 또 공부함으로 해서 우리들 자신이
성장하게 되고 발전하게 되겠습니다.
그런 일들이 밝은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밝은 삶을 통해서 우리는 자꾸 성장하게 되고, 나아가게 되고 따라서 또 이웃에 빛이 되고, 주변에 빛이 되고, 그래서 한 가정을, 아니면 한 단체를 조금이나마 비출 수 있습니다
동네 어귀에 가로등 같은 것도 비록, 뭐 백 와트 정도 되는 등불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그 모퉁이 하나는 비치지 않습니까?
비록 크게 밝은 등불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 모퉁이 정도는 비출 수 있듯이, 우리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꾸 이렇게 성장하다 보면 은, 한 가정을 비추고 한 단체를 비추고, 한 이웃을 비추고 한 마을을 비추고, 나아가서 이제 한 사회를 비추고 그래서 온 세상을 이렇게 비추는, 부처님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將心用心(장심용심) 豈非大錯(기비대착) 마음의 문제를 우리가 잘 이해를 해야 되는데,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이거 참, 아주 쉬우면서도 어떻게 보면 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 이 신심명! 믿을 信(신)자. 마음 心(심)자를 써서 신심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신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本心(본심)이요. 佛心(불심)이요. 禪心(선심)이요. 또 법의 마음 法心(법심)이고, 모든 것의 마음이다.
그러니까 그 속에는, 신심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모든 이치를 다 포함하고 있고, 정말 진정한 진리를 그 속에 다 내포하고 있는 그런 가르침이 信心銘(신심명)이다. 이렇게 또 정리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원리중의 하나가, 將心用心(장심용심)이면 은, 豈非大錯(기비대착)가. 그랬습니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면 어찌 크게 그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마음은 그냥 마음으로 그냥 있을 뿐 이예요. 그냥 있도록 둬야 됩니다. 그래야 되는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어떻게 쓸려고 해요.
불교는 마음 찾는 공부라고 이렇게 하고, 또 마음을 깨닫는 공부다 라고 흔히 그렇게 표현을 하면서, 그 마음을 잘 관찰해서 그 이치대로 흘러가게 이 마음을 그대로 두질 않고, 그 마음의 본래가진 이치와 상반되게 그렇게 마음을 쓰는 경우가 많아요.
불교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들이 더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로써 물을 씻는 것과 같지요. 물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어떤 물건을 씻는 것입니다. 과일을 씻고 채소를 씻고, 쌀을 씻고 그릇을 씻고, 뭐 일체 물가지고 다른 어떤 사물을 씻지 않습니까? 그런데 물로써 물을 씻는다고 하는 것은, 이건 맞지가 않는 일이지요.
그야말로 참, 將心用心(장심용심)이라고 하는 그 이치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는 사람이 보면, 물로써 물을 씻는다. 以水洗水(이수세수)다. 물로써 물을 씻는 그런 격이다.
그거는 아주 크게 잘못된 것이다. 어찌 크게 그르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이치를 모르게 되면, 迷生寂亂(미생적란)이요, 悟無好惡(오무호오)라. 마음의 이치를 모르면, 寂과 亂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고요하다. 어지럽다. 시끄럽다. 이런 것이 그냥 우리들 마음속에서 아주 시끄럽게 일어나지요. 뭐 일어나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고요한 것을 문제 삼고, 시끄러운 것을 문제 삼고, 마음의 이치를 모르면 마음은 고요할 수도 있고, 시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고요하다. 시끄럽다. 좋다 나쁘다. 그런 판단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속성이에요.
그야말로 공적한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것이 마음이지요. 끊임없이 작용하면서 또 한편 공적한 것이 마음입니다.
그래 그것을 공적이다. 작용이다. 이렇게 나누어서 그렇게 보면 그거는 寂과 亂을 내는 것과 같다. 어지러움과 고요함이 생긴다. 그 어지럽다 고요하다가 아닌데, 그것을 어지럽다 하고, 고요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마음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迷生寂亂(미생적란).마음의 이치를 모르면 寂과 亂이 생기고, 생겨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문제시 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悟無好惡(오무호오)라. 그랬어요. 마음의 이치를 알면 은, 好 惡 가없다.
고요한 것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을, 어지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 이미 시끄럽다. 고요하다 라고 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고요한 것을 좋아 하거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거나, 그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悟無好惡(오무호오)라. 깨닫고 보면 好와 惡가 없다. 깨닫는다는 것은 뭘 깨닫는다는 말인가? 마음의 이치를 안다는 것이고, 迷生寂亂(미생적란)이라고 하는 것도, 그 미혹 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의 이치를 모르면 고요한 것을 문제 삼고, 어지러운 것을 문제 삼는다. 그래서 고요한 것과 어지러운 것이 생긴다. 그게 상반되는 것이지요. 이변입니다. 치우친 것이고, 그건 중도가 아니지요.
마음은 모든 사물도 중도로, 중도의 원리로 존재하지마는, 특히 마음같이 중도의 원리가 철저한 것이 없습니다. 무슨 모든 그 존재에 중도의 원리가 뭐 철저하고 비철저하고, 이렇게 또 나눠서 생각할 것은 아니지마는, 말이라고 하는 것은 설명 하다보며는 편의상 좋을 대로, 설명하기 좋을 대로 이야기하게 되지 않습니까?
뭐 그렇게 감안하시고 들으신다면, 마음같이 철저히 중도적인 원리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없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물을 한 잔 마셔도, 물이 그게 우리가 보는 그런 물로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거기에 열을 가하면 수증기가 돼버리고, 또 차게 하면 얼음이 돼버리고요. 그 뭐 기체로 또는 액체로 고체로, 여러 가지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물이라고 하는 것의 중도의 속성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래요.
마음도 역시 고요할 수도 있고, 시끄러울 수도 있고, 어지러울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제 삼으면 그게 장애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혹한데서 그러한 것이 문제시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좀 이해하기가 쉽지요. 迷生寂亂(미생적란)이라고 하는 말을...
悟無好惡(오무호오)다. 그럼 이제 고요하다 시끄럽다 그것을 나누어서 좋다 나쁘다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마음의 이치가 본래 그런 줄을 알면, 뭐 그거 굳이 그럴게 있겠습니까?
사람이 뭐, 부처님도 어떻습니까? 식사하시고 화장실도 가시고 잠도 자고 설법도 하시고, 온갖 사람 하는 일 다 하지요. 우리가 하는 일 거의 반은 부처님도 하십니다.
그렇듯 부처님이 하는 일 거의 반은 우리도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 거의 반은 부처님이 생활 속에서 한다고 해서, 그게 뭐 부처님이 아니다 기다 아, 이럴 순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게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삶이란 것이 그렇게 되어 있는 거라고요.
거기에 뭐 부처다 아니다 무슨 중생이다. 부처다. 이렇게 나눌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치를 알면 好惡가 없는 것입니다. 저건 중생의 짓이다. 저건 부처의 짓이다. 이렇게 해서 좋다 나쁘다를 나눌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뭡니까? 어떤 지혜의 가르침이지요. 우리가 불교를 왜 하는가? 저는 불교를 왜 하는가? 뭐 이렇게 표현합니다. 참선은 왜 하는가? 염불은 왜 하는가? 공부는 왜 하는 것인가? 식으로 불교는 왜 하는가? 뭐 불교공부는 왜 하는가? 불교는 왜 믿는가? 그렇게 표현할 필요 없이, 바로 불교는 왜 하는가? 바로 지혜로운 삶을 위해서지요.
지혜로운 삶이란, 모든 존재의 본래 가지고 있는 그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이치를 알고 그 이치에 맞게 살면 끝이에요.
一切二邊(일체이변)은 良由斟酌(양유짐작)이라. 그랬어요.
모든 치우친 생각. 그것이 二邊 이지요. 善(선)이다 惡(악)이다. 일체가 다 그렇게 상대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세속법이다. 뭐 불법이다. 그렇게 나누는 것은... 이 말입니다. 이변이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것을 二邊이라고, 상대적인 것이라고, 상반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문제 삼을 때, 그 때 비로소 이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라고요? 良由斟酌(양유짐작)이로다. 그랬어요.
良由 를 어떤 데는 妄自斟酌(망자짐작)이로다. 그렇게 되어 있는 데도 있습니다.
妄自라는 말은, 그 위에 41번에 妄自愛着(망자애착)이라는 말이 있어서, 또 그대로 바로 밑에다 妄自라고 갖다 놓으면, 뭐 뜻은 틀리는 것은 아니지마는, 글로서 조금 재미가 적지요. 그래서 여기서는 良由斟酌(양유짐작)이라고 보는 것이 더 글 모양상 좋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진실로 짐작하기 때문이다. 짐작을 말미암는다. 짐작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고려하고 따져보고 계산하고 머리 굴리고, 이런 것이 전부 짐작이지요. 그러니까 좋다 나쁘다. 이것은 불법이다. 이것은 세속법이다. 무슨 뭐 법당에 초가 꼽혔는데 또 하나 더 꼽으면 된다. 안 된다. 향이 꼽혔는데 또 꼽히면 된다. 안 된다. 이걸 가지고 얼마나 오늘 이 시간도, 곳곳에서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하고 있습니까?
그거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법당 관리하는 사람들은, 하도 된다. 안 된다. 해 가지고 모처럼 절에 와서 부처님한테 정성을 쏟아서 공을 들이려고 하는데, 아니 뭐 자가 가져온 거. 자기 향 한번 꽂고 싶고 꽂혀 있더라도, 당신이 사 가지고 온 초. 설사 초가 꼽혀 있더라도, 또 한번 불을 붙여서 올리고 싶은데, 그것을 되느니 안 되느니, 이렇게 하면 참, 기가 차지요.
우리가 신심명 공부하면서 이런 이야기 할 계제는 아닙니다마는, 한 예로서 그렇습니다.
뭐 알고 보면 그게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도 안 올려도 뭐 부처님이 왜 안 올렸느냐고 할 사람이 아니고, 많이 올렸다고 왜 많이 올렸느냐고 할 사람도 아니지요.
그러니까 그런 시시비비는 결국은 자기 나름의 그 주관. 자기의 어떤 소견을 딱 설정 해놓고,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시시비비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거기에 문제가 생기고 고통을 야기하게 되고, 그래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래 행복하게 살게 되어 있는데, 행복하고 편안한 삶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지요. 자꾸 그것이 옳다 그르다. 옳다 그르다 이렇게 사니까요.
그것 참,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 따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의 所依經典(소의경전)! 반드시 의지해야 될 바의 경전이라고 하는 것이 금강경인데, 그 금강경 모르는 우리 불자들 없지요?
거기에 아주 건사한 말. 하나 있지 않습니까?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다. 一切法이 皆是佛法이예요.
모든 것이 다 부처님의 법이예요. 깨달음의 법이예요. 깨달음의 세계 속에 다 존재하는 것이다. 이거예요. 거꾸로 가든 옳게 가든 뭐...
심한 표현으로 전봇대로 귀를 후벼도 역시 그것도 불법이다. 이거예요. 이렇게 까지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까지 이해하면 모든 자질구레한 그런 문제는, 아무것도 되지 않지요.
一切二邊(일체이변)은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 편견으로 상반되게 보이는 것. 그것은 무얼 가지고 그렇게 생겼느냐? 진실로 짐작함을 말미암는다.
우리가 따져보고 저울질하고, 고려하고 이렇게 머리 굴리고, 옳다 그르다 하는 그것을, 그 툭 터진 그런 안목으로 보질 못하고, 아주 작은 소견으로 뭐 [小見狐擬(소견호의)하야, 그런 말도 있지요? 아주 轉急轉遲(전급전지)로다.]-32번. 그랬는데, 작은 그 견해는 의심하고 의심해서 아, 저게 옳은가 틀리는가? 가만히 내가 생각에 이게 옳은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서 더욱 멀어지지요.
본래의 모습과는 더욱 멀어지고 바람직한 삶과도 더욱 멀어진다. 처음에 말한 至道(지도). 또는 大道(대도). 지극한 도나 큰 도와는 멀어진다. 지극한 도나 큰 도가 뭐겠습니까? 뭐 툭 터진 인생입니다.
불교는 바로 그 툭 터진 삶을 살자는 것이지, 다른 거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夢幻空華(몽환공화)를 何勞把捉(하로파착)가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
제가 또 이렇게 분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전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들이 있듯이, 신심명 에서도 제가 아주 그 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구절이 이 대목 입니다.
夢幻空華(몽환공화)를 何勞把捉(하로파착)가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 하이고, 이거 생각하면요? 가슴이 서늘하지요. 우리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뭐 어떤 그 가치보다도 더 우선하는 가치로, 이렇게 설정 해놓고 도저히 뭐 꼼짝도 안 하고, 요지부동의 가치관. 또는 요지부동의 그 어떤 인생관. 요지부동의 그 어떤 우리들 삶의 기준들. 이게 뭡니까?
꿈이요. 환영이요. 헛꽃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수고롭게 그 뭐 생명보다도 더 중요하게, 붙들고 막 놓치지 않으려고 그러지요.
그것을 그냥 꽉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에게도 그렇게 피해가 가고, 옆에 사람에게도 피해가 가고, 도대체 자기가 그 어떤 아는 것이, 뭐 얼마나 지혜가 있어서 제대로 꿰뚫어 보고, 아는 겁니까?
따지고 보면 뭐 하나도 아는 게 없지 않습니까? 하나도 옳은 게 없어요. 전부 우리 나름의 살아온 어떤 경험과 알량한 그런 작은 지식 가지고, 기준을 딱 설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고집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 신심명의 저자인 승찬 대사는 참으로 정말 그 아픈 삶을, 누구보다도 가장 그 아픈 삶을 살았고, 진한 인생을 살았고, 아주 절절한 삶을 살아온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으로서 정말 그 한 생각 돌이키고 나니, 무슨 뭐 참선을 했거나 이분이 경을 봤거나, 무슨 염불을 했거나 그런 것도 아니예요.
그저 혜가 스님 만나서 한 마디에 탁 어떤 그 이치를 깨닫고 보니까 어떻습니까?
夢幻空華(몽환공화)요. 그 夢(몽)! 꿈이요. 환영이요. 헛꽃이라. 그런데 뭘 그렇게 수고롭게 붙들고. 붙들고. 또 붙들려고 하는가?
把捉(파착). 把나 捉이나 전부 그냥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꽉 잡는 거지요. 그래서 심지어 뭐, 일일이 예를 들기는 참 그렇지만, 목숨을 갖다가 자기의 그 어떤 가치관에다 던져 버리는 사람들도 있고, 평생에 어떤 멍애가 돼서 사는 사람들도 있고, 뭐 그게 다 참, 알량한 자기의 그 어떤 지식과 자기 관습에 의해서 하나의 기준으로 설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거 다 탁 털어 버려야 돼요. 그걸 잡고 늘어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夢幻空華(몽환공화)를 何勞把捉(하로파착)가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
소득이 되느니 손실이 되느니, 자기 이득이 되느니 손실이니, 옳으니 그르니, 전부 그거지요. 뭐 우리가 그 일상생활 하고 있는 것이 전부 得失是非 입니다.
거기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고, 뭐 그것 심부름 하고. 그것 쫓아다니고 그저 그렇지요. 오늘도 내일도 그저 어제도 그저께도 늘 그것의 심부름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어떤 기본적인 것은, 당연히 해야 되겠지요. 그렇다고 뭐 손발 묶어놓고 하늘만 쳐다보고, 살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처해진 그런 일들은 당연히 현명하게 처결해야 되고, 처리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고 전부라고 이렇게, 목을 매달 정도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자들도 이 세상을 보는 눈이 첫째, 훤하게 좀 툭 터져야 되고, 그것이 좀 가정에, 불자들의 그 가정에는 좀 그런 안목이 모두 다 갖추어 져야 되고, 그래서 그것이 친지들에게 형제들에게 또 이웃에, 또는 동료들에게 그것이 전염이 되고 전파가 되어서, 조금이라도 지혜의 안목이 좀 더 확산되어서, 좀 세상을 조금이라도 그렇게 정화할 수 있으면, 그것이 아주바람직한 그런 불자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 우리가 잘 외우는 천수경에, 受持心是神通藏(수지심시신통장) 受持身是光明幢(수지신시광명당). 그랬어요.
이 불법을 받아 가지는 사람은, 바로 광명의 깃발을 들고 세상을 리더 하는 그런 안내자가, 또 불법을 받아 가지는 그 마음에는, 신통의 창고가 있다. 受持心是神通藏. 그랬지 않습니까?
바로 그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그런 안목이다. 그래서 이제 神通의 창고라 그랬지, 무슨 뭐 특별한 요술 방망이가 있어서 그 요술 방망이를 가지고,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필요한 물건을 다 만들어 내는 그런 식이 아니지요.
원리를 알고 이치를 아니까 그 이치대로 다 해결 한다 이겁니다. 이치대로 해결을 해서 안 될 일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이 神通이지요. 그럼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자는 것. 이것이 神通이 아닙니까? 그것이 이치거든요. 이치대로 사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그 가르침을 우리가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공부가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확대가 돼서 많이 전파가 된다면 그야말로 광명의 깃발을 들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또 주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그래서 가는 인생의 길을 밝혀드릴 수가 있는 것! 이것이 불교가 이 땅에 있게 된 의미인 것이고, 또 보람이고요.
우리가 또 불교를 하는 의미와 보람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 너무 그렇게 목을 매달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놓아버려라. 이것은 放下着(방하착)이라는, 우리 화두에도 그런 말이 있는데 그런 그 어떤 큰 의미 보다는, 하나의 그 일상생활에 어떤 그 좌우명으로 좋은 말이지요. “놓아버려라.” 어떤 수행자가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아니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하니까 조주 스님이 계시다가, “놓아 버려라. 放下着하라.” 벌써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아니 했다고 하는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의 의식 속에는 뭐, 온갖 망상이 부글부글 끓지요. 수천 근의 망상의 무게가 그 한 마디 말 속에 보입니다.
조주 스님은 그것이 보였지요. 조주 스님 눈에는 그것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방하착하라. 놓아버려라.” 그랬지요.
그래 “한 물건도 안 가져 왔는데 뭐 어떻게 ‘놓으라’고 합니까?” 하니까, “정 놓기 싫거든 짊어지고 가거라. 放不下(방불하)하거든 擔取去(담취거)하라.” 놓기 싫거든 짊어지고 가거라. 어떻게 하겠어요? 놓기 싫다는데... 또 자기가 지고 있으면서도 지고 있는 짐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참, 이 불교라고 하는 것은 뭐 조주 스님뿐만 아니라, 자고로 그 어떤 선지식이라 하더라도 이런 아주 그 햇빛에 번뜩이는 서슬 퍼런 칼날과 같이 어떤 그 정말 놀라울 그런 지혜! 지혜의 칼이 번뜩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선은, 뭐 특히 禪佛敎(선불교)는 말하자면 어떤 삶의 태도지요. 그 태도라고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불교적인 태도! 이것이 불교가 우리의 삶을 바로잡아주고 또, 바람직한 길로 안내해주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그런데서 우리가 또, 이런 승찬 스님의 아주 뛰어난 가르침 속에서, 이러한 지혜로서 우리의 삶이 좀 밝아져야 되고 약간은 바뀌어져야 되지 않나?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夢幻空華(몽환공화)를 何勞把捉(하로파착)가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
사실 지내놓고 보면 알게 될 것인데, 지내놓기 전에는 그것이 다 모든 것 인양 그렇게 생각이 들어가지고, 아등바등 그렇게 붙들고 있지요.
사실 그 한 생각 돌이켜 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래 놓아버려야 할 그런 일입니다.
眼若不睡(안약불수)하면, 諸夢自除(제몽자제)요. 心若不異(심약불이)하면, 萬法一如(만법일여)다. 그랬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그 꿈을 꾸는 일은 잠을 자니까,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이 만약에 잠들지 아니하면, 眼若不睡하면, 諸夢自除라. 온갖 꿈들이 저절로 없어지지요.
그 뭐, 그런 말이 있지요?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본다. 그런 말이 있는데, 그렇습니다.
잠 안자고 꿈을 꿀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잠 안자면 꿈을 안 꾼다는 것입니다.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고요. 心若不異(심약불이)하면, 萬法一如(만법일여)라. 그랬습니다.
꿈은 비유이면서도 또 우리의 삶과 너무 깊은 관계가 있는 그런 가르침으로서,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자주 인용하는 것입니다.
心若不異(심약불이)하면, 萬法一如(만법일여)라. 그랬습니다. 마음이 만약 다르다고 여기지 아니하면, 어떤 상대적인 존재들. 善(선)이니 惡(악)이니, 뭐 고요하다느니 어지럽다느니 하는, 그런 것들을 다르다고 여기지 아니하면 萬法이 一如다. 다르다고 여기니까 일여하지가 않지요. 그 마음이 다르다고 여기니까 만법이 일여하지 못하다. 다르다고 여기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같은 것이다.
“建立(건립) 水月道場(수월도량) 하라.” 그런 말이 있지요? 물에 비친 달과 같이 텅 빈 도량이지만 열심히 건립하라. 그 공하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또 열심히 절을 짓고 도량을 건립하고, 또 열심히 도량을 건립하고 절을 짓지만, 그것이 또한 공하다고도 생각할 줄도 알아야 된다. 이것이 말하자면 중도적인 안목인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뭐 空(공)하다고 치우쳐서 생각하거나 이것은 뭐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사찰이다. 도량이다. 라고 생각 하거나, 이렇게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고, 그것을 다르다고 보는 것이고, 다시 말해서 공한 것과 있는 것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고, 다르다고 보지 아니하면 그 있는 것이나 다른 것이나,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일여한 것이지요.
萬法(만법)이 一如(일여)니라.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일여하게 보면 그 나머지 뭐, 있는 것에서의 차별된 것은 그건 두 말할 것 없이 일여합니다. 한결같습니다. 없는 것에서의 차별도 역시 한결같고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별을 한결같다고 보면, 있는 위에서의 어떤 그 차별된 현상들은 그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한결같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그런 소견은 늘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 하는 그런 것을 어떤 자기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고, 정의 내리고 그것을 또 자기 판단에 옳다고 하면 그저 좇아가고 하는, 이런 것이 너무 습관이 되어가지고요, 깊이 우리 의식 속에 박혀 있어 가지고는, 참, 이것이 쉽게 이런 말 들어가지고 쉽게 될 일은 아닌데, 그렇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또 이겁니다.
이런 선지식들의 시원한 깨달음의 말씀을 우리가 자주 접하고, 또 그것을 우리가 마음에 새기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밖에 없어요. 그리고 깊이 사유하고, 제가 사경하는 것을 자꾸 권하는데, 사경하는 데는 우리 마음도 탁 이렇게 한 곳에 집중하는 그런 훈련도 되지만, 그 공덕도 뛰어나고 특히 그 뜻을 깊이 이해하는데 아주 좋은 그런 방법이 돼요. 뜻을 깊이 이해하는데 아주 좋은 그런 방법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런 아주 뛰어난 지혜의 말씀이, 어느 날 내 가슴에 확 다가오게 되고, 확 다가오면 뭐 그야말로 인생졸업이지요.
공부다 마친, 無事(무사)한! 일 없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이런 기대도 해봅니다.
오늘 신심명 강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록: 수경심. 정리: 대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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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법문 고맙습니다, 스님! _ () () () _
고맙습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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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心若不異하면, 萬法一如라 마음이 만약 다르다고 여기지 아니하면 만법이 한결 같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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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