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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늘 3월 13일 염화실 인터넷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월요일 친불회하고 합동으로 법회하는 날인데 친불회 회원님들이 차가 막혀서 아직 도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친불회 회원들이 오면은 그때 이제 임제록을 가지고 하기로하고 일단은 증도가를 가지고 지난시간에 하던 다음부터 그대로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분들이 오면 다시 이제 임제록을 가지고 하도록 하고요.
지난시간에 유루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유루복도 알맞게 있어야 되지요. 전혀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만은 그러나 또 너무 유루복이 많아도 크게 사람 살아가는데 크게 보탬이 되는건 아닙니다. 뭐 유루복이라고 하는거야 기껏해야 뭐 의식주문제 해결하는 거지요. 물론 의식주문제 해결도 얼마나 질적으로 우수하게 해결하느냐하는 그런 문제는 있겠습니다만은 그건 뭐 한이 없는 것이구요.
그래서 영가스님의 깨달음의 안목에서 볼 때에는 이 유위법이라고 하는 것 조작이 있는 것 뭔가 이렇게 애써서 자연스럽지 못하고 무언가 애써서 하는 그런 것들은 늘 변화가 많으니까 그것은 사실은 믿을 수 없다는 거지요. 정말 변화가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위의 도리 또 우리의 본성, 또는 본연의 도리 이것이 이제 가장 믿을 만한 것이다.
그래서 상에 머물러서 보시를 하는 것은 천상에 나는 복이다. 마치 그것은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쏘는 거와 같아서 올라가는 힘이 있는 동안까지는 올라가지만은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내려오는데 내려와서 그냥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땅속 깊숙히 파고들기때문에 그것은 유루복이 다 하면은 현재상태보다도 더 못한 그런 삶을 살게된다는 것입니다.
뭐 정치인들이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보면은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그렇죠. 올라갈 수 있는데까지 올라갔다가 나중에 그것이 福盡墮落복진타락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다 되었을 때 떨어지는 것 보면은 보통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못한 그런 삶을 살게 되지요. 뭐 형무소에 간다든지 자신이 안가면 가족이 간다든지 하는 그런 사례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여기서는 이제 너무 지나치게 그렇게 치우쳐서 찾지 말라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다음구절이
爭似無爲實相門에 一超直入如來地리요 그랬어요.
쟁사무위실상문에 일초직입여래지리요
어찌 무위실상문에 한번 뛰어서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과 같겠는가! 거기까지가 이제 사실은 그 내용이 거기까지 이제 이어지는데 무위라고 하는 말 불교에서 참 많이 써요. 이건 인제 하지 않는 상태로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굳이 뭐 꾸며서 한다든지 어떻게 조작을 한다든지 억지를 부려서 분에 없고 인연에 없는 것을 만들어서 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유위법이고 그건 허상이라고 그러지요.
실상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상태에 있는 그 모습, 본연의 모습 그 거기에서 뭔가 완전한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 이걸 이제 무위실상문 이라 이렇게 합니다. 그런 도리에서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그것이 이제 제일이라는 거지요. 아무리 유위 복을 많이 지었고 노력을 해서 뭐 올라갔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것이니까 그래서 전혀 그런 것과 관계없는 그런 이치가 분명히 있으니 그런 이치에 그~ 마음을 두어서 거기에 어떤 그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하라. 행복을 찾도록 하라.
또 여기서는 이제 絶學無爲閒道人절학무위한도인이라고 했지요. 도의 삶을 누리는 그런 삶을 거기서 찾도록 하라. 이렇게 인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증도가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동안에 친불회 회원들이 모두 지금 오셨습니다.
지금부터 증도가는 여기까지하고 친불회교재 임제록을 가지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공부 시작했습니다.
그 임제록 공부하던 거 그대로 진행할테니까
임제록은 우리 교재 보통 교재 14-1부터 할 차례인데요.
14-1. 文字에 속지 말라
師示衆云 사시중운 하는 대목입니다. 제목을 나는 文字에 속지 말라. 그런 제목을 붙였어요. 문자라고 하는 것은 말이라든지 또 어떤 뭐 경전의 가르침이라든지 아주 뭐 조사스님들이 아주 정말 높은 지견에 의한 고도의 지견에 의한 그런 그 가르침까지도 이 속에 다 이제 포함됩니다.
물론 문자를 가지고 그 어떤 진리를 또는 도를 전하는 하나의 수단방법은 되지만은 그것이 또 어떤 결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쫓아가고 거기에 집착하면은 그건 이제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이런 수단 방법인 문자를 손가락이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 하나의 방편이다 수단이다 그런 뜻입니다. 달은 따로 있지요. 달은 따로 있는데 달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이제 가리키는 것이지 그러면은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고 그것이 모두인 양으로 그렇게 알아서는 안된다하는 그런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것이 이제 문자라는 거지요. 문자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師示衆云 사시중운
임제스님이 대중스님들에게 보여서 말씀하시기를 요즘 학도인은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또한 요컨대 스스로를 믿을 것이고 自信 스스로자字 믿을신字입니다. 스스로를 믿을 것이요.
莫向外覓 막향외멱하라
밖을 향해서 찾지 마라. 여기서 이제 바깥이라고 하는 것은 나 자신 이외에 다른 것은 전부 바깥입니다. 자기 자신의 어떤 진실을 믿을 일이지 그 외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어떻게 한다든지 조사가 나타나서 어쩐다든지 아니면 무슨 보살이 나타나서 어떻게 한다든지 하는 것 그건 다 남이지요 경계에 불과 합니다. 아무리 뭐 부처님 아니라 어떤 그 훌륭한 그런 경계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 아닌 다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을 향해서 찾지 마라.
總上他閑塵境하야
총상타한진경하야
모두들 요즘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보면은 부질없는 그런 경계를 숭상해서
都不辨邪正하나니
도불변사정하나니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가리지 못하니 거기에 무엇이 邪사인지 무엇이 正정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이 손가락인지 무엇이 달인지 무엇이 실법實法인지 무엇이 방편方便인지 이것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뭐 지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말로서 전달하는 것인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을 쓰기는 쓰지만은 이 말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말에 너무 집착하거나 떨어지지 말라고 하는 그런 가르침을 부처님도 누누이 말씀하시고 조사스님들도 말씀으로써 하시면서 역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말에도 집착하거나 떨어지지 말라. 그런 말을 하지요.
다만 저 조사가 있고 부처가 있는 것은
皆是敎迹中事라
개시교적중사라 그랬어요.
뭐 부처가 있느니 조사가 있느니 하는 또 보살이 있느니 나한이 있느니 얼마나 경전상에 많이 있습니까? 교적중사敎迹中事 교敎의 자취 가운데 있는 일이다. 이거 우리가 잘 기억해야 돼요.
예불할 때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시아본사라고 그렇게 합니다. 본사 본 스승 그래요. 그 외에는 사실은 전부 본 스승이 아닙니다. 전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소개받은 분들이에요. 관세음보살이든지 지장보살이든지 문수나 보현도 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소개받은 분들이지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을 本師 근본本字 스승師字 본사라고 그렇게 표현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敎迹中事 교적중사
교의 자취가운데 있는 일이다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고 만나게 되는 그런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조사라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조사라는 것도 전부 어떻습니까? 뭐 기록상의 근거를 두고 우리가 조사님 조사님 하는 거지요. 임제스님도 지금 우리 입장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임제록을 보고 있는데 임제록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임제스님을 우리가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교는 그런 점이 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철저히 자신까지도 부정을 하고 있다는 거지요. 자신까지 부정했을 때 그때서 비로소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그런 그 이치 그런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은 남겨두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만 부정한다면은 그건 이제 서로 잘못된 견해가 되겠지요. 그건 이제 있을 수 없는 거지요.
그런데 철저히 자기 자신의 말씀까지도 부정해 버림으로 해서 진정 당신이 전하고자하는 그 의미가 듣는 사람에게 전달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주 뛰어난 점이고 또 특별한 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사가 있다 뭐 당연히 조사가 있다 부처가 있다하는 말 속에는 임제스님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지요. 그 다 敎迹中事라 교적중사다. 임제스님 임제스님 하지만은 이게 다 임제록을 통해서 우리가 다 아는 거지요. 그렇지 임제스님은 아니잖습니까?
皆是敎迹中事라
개시교적중사라
有人拈起一句子語하야
유인념기일구자어하야
유인은 어떤 사람은 한 구절의 말을 잡아 일으켜서
或隱顯中出하면 便卽疑生하야
혹은현중출하면 변중의생하야
곧 은연중 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은隱이라 그러고 잘 알려지는 것을 현顯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알듯 말듯하게 그 말하자면은 드러나는 듯 숨은 듯 이렇게 이제 그 뭔가 사람을 한번 떠 보는 그런 형식으로 그렇게 이제 한마디를 내 놓을 것 같으면은 거기에 곧 의심을 낸다 이거지. 뭐 우리화두가 다 그런 거죠.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했을 때 없다라고하면은 거기에 그만 또 자기의 어떤 그 불교적인 지식을 동원을 해서 없다라고 하는 그 말에 매달려서 이러쿵저러쿵 이제 의심을 일으키게되고 사량을 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지금은 이제 그런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이 요즘사람들에게 이해가 안 되니까 그게 전부 공안公案 화두話頭가 되고 문제가 되고 그렇지 제대로 알려 그 당시 스님들은 일부러 그렇게 의심하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에요. 이제 모르니까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은 그래서 이제 어떤 구절이던지 어떤 말씀이든지 그렇게 내놓게 되면은 거기에 들어붙어서 곧 의심을 낸다 이거죠.
그래서 照天照地에 조천조지에 이건 이제 이리저리 생각한다는 거에요. 하늘을 비추고 땅을 비춘다 라고 하는 말은 이리저리 생각하는 거죠. 이게 뭐 그래서 무자 십종병 이니 이런 말이 있지요.
무자화두가 이제 보통 간화선에서 제일 많이 거론되는 화두가 무자화두고 또 간화선을 제일 처음에 크게 주창한 이가 대해종고선사인데 그 분이 무자화두를 많이 권했었어요. 그러면서 뭐 무자십종병이니 하는 그런 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照天照地조천조지라고해서 이리저리 생각한다. 하늘을 비치고 땅을 비친다라고 하는 말은 어디 구석구석 생각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 다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열 가지 병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요. 이게 진짜 있다는 소린가? 아니면 누구를 뭐 한번 떠 보려고 하는 소린가? 유와 무의 상대적인 무인가? 별별 그런 궁리를 다 한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열 가지나 그렇게 나올 수 있는지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게 정말 여러가지죠. 그러니까 없다라고 하는 그 한 마디 말에 열가지 병이 붙을 수 있다.
방가심문傍家尋問이라 그래요. 앞뒤로 옆집으로 앞뒷집으로 옆집으로 좌우로 그냥 찾아다니면서 또 묻고 그렇게 한다는 거지요. 그게 이제 뭐 전적을 뒤진다든지 뭐 참고서를 뒤진다든지 아니면 조사어록을 뒤진다든지 등등 이리저리 그저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고 경전이나 어록을 뒤지기도 하고 하는 그런것을 照天照地 傍家尋問 조천조지 방가심문이라.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해서 야태망연也太忙然이로다. 그렇게 해봤자 해결이 안 되지요. 그래서 또한 크게 망연하다 아득하다 이겁니다. 전혀 크게 바쁘다 바쁠 망 忙字지요 바쁘다 또한 아주 그 이것저것 뒤지고 찾고 헤아리고 분별하느라고 아주 뭐 바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말입니다.
大丈夫兒여 莫祇麽論主論賊하며
대장부아여 막지마론주론적하며
그렇게 그런 식으로 문자상이나 또 조사스님들의 어록이나 이런 것을 쫓아가면서 그렇게 주인을 논하고 그 다음에 적을 논하고 이게 이제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은 틀리고 이런 뜻이죠. 여기서 주인과 적. 이건 이제 정치적인 그런 그 당시 어떤 상황으로 이런 용어를 썼는데 누가 주인이냐 누가 도적이냐 성공한 사람이 주인이고 뭐 패한 사람이 도적이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뭐 주인과 도적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성공하면 도적도 주인 노릇하는 것이고 패하면은 정치에서 패하면은 주인도 도적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뭐 주인을 논하고 도적을 논한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용어를 그렇게 써서 그렇지 어느 것이 맞는거냐 어느 주장이 맞는거냐 이런 이야기죠.
論是論非 논시론비
옳은 것을 논하고 그른 것을 논하며
論色論財 논색논재
색을 논하고 재물을 논해서 별별 그 많은 그냥 동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다 해서
論說閑話過日하지말라
론설한화과일하지말라
논설로써 부질없는 말하며 세월을 보내지말라 말 막자 莫 字를 거기다 해석하지요. 그런 식으로 세월을 보내지 말라 이거에요.
山僧此間에는
산승차간에는
산승의 바로 이 자리 그러니까 임제스님 회상에는 임제스님이 많은 대중들을 모아놓고 사람들을 지도하는데 내가 펼치고 있는 바로 이 법석에는
不論僧俗 이요
불론승속이요
승과 속을 논하지 않는다 이거야 그걸 따지지 않는다 이거지 그게 뭐 도라고 하는 것이 승속에 관계되는 것도 아니고 하기 때문에 도의 본질에 있어서 본다면은 승속을 따로 이야기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어떤 살아가는 형식이 다소 이제 다르다면 다를까 그것도 뭐 꼭 다르다고 할 수도 없는 거에요. 세속에 사는 사람도 스님 출가한 승려 이상으로 스님같이 사는 사람이 있고 출가한 승려도 세속인 이상으로 속되게 사는 사람도 있고 그거 뭐 전혀 그런 분별이 없지요.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은 그러니까 당연히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不論僧俗이라
불론승속이라
승속을 논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내 앞에 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盡識得伊라
진식득이라
그들의 정체를 다 알아본다 숨길 수 없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디에 관심이 있고 얼마나 어떤 그 문자나 어떤 그 역사나 아니면 그런 그 지식 이런데 휘둘리고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환히 내다보고 있다 이거야
盡識得伊다
진식득이다
다 그것을 내가 알아본다 그들의 정체를 내가 알아본다
任伊向甚處出來하나
임이향심처출래하나
그대들이 어느 곳을 향해서 왔던 간에 어디에서 왔던 간에 이건 이제 뭐 장소를 뜻하는 게 아니지요. 장소를 뜻하는 게 아니고 평소에 그 사람 살림살이 뭐 지식이나 사상이나 관심사나 이런 것들이 무엇이었던 간에
但有聲名文句하면
단유성명문구하면
다만 성명문구 대개 뭐 스님 찾아온 사람이 다른 장사하러온 사람이야 있겠습니까? 어쨌든 도에 관해서 알려고 오는 사람들이니까 자기 나름대로 경전이나 어록이나 이런 것을 가지고 이제 들고 오는 거지요. 거기서 들은 지식과 거기서 이제 자기 나름의 어떤 그 공부한 것을 가지고 이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성명 문구에요. 경전어록을 성명문구라 그렇게 이제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다만 그런 성명 문구를 가지고 올 것 같으면
皆是夢幻이라
개시몽환이라
그런 것은 전부 몽환이다 이거야 꿈이고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그건 그들 그 들고 온 그 사람은 진짜인지 모르지만은 그들이 들고 와서 내 놓는 거 입을 통해서든지 뭐 하여튼 내놓는 그들의 살림살이는 전부 몽환이다 이거지. 여기에 이제 뭐 들고 온 그들 자신은 이런 이제 내가 말을 했지만은 그런 말은 여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지요. 그러나 그들이 들고 온 물건은 다 가짜다 이겁니다. 그게 뭐 부처님 화엄경이 되었던 뭐 열반경이 되었든 법화경이 되었던 금강경이 되었든 어떤 그 대승불교의 진수라고 하는 것을 들고 오더라도 그건 다 가짜다 이거지 몽환이다 이거야 들고 온 그 사실 그 사람 그 당체는 좀 다르지요. 그건 다를지 몰라도 그들이 들고 와서 귀중하다고 내놓는 그런 것을 근거로 해서 질문을 하게 되니까 그래서 이제 이런 말이 ......
다음은
14-2. 사람에 따라 모습을 나타낸다.
却見乘境底人하니
각견승경저인하니
도리어 경계를 타고 오는 사람을 보니 이랬는데 이제 경계에 끄달리는 사람 또는 경계를 사용하는 사람 그 어떤 경계 여기서는 이제 타고온다 라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좀 능동적인사람, 경계를 부리는 사람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어요. 탈乘 字기때문에.. 그런 사람을 보니
是諸佛之玄旨라
시제불지현지라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경계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거야 능동적으로 是諸佛之玄旨라 제불지현지라 이것은 모든 깨달은 사람의 안목이다 깊은 뜻이다 이거죠.
佛境이不能自稱我是佛境이요
불경이불능자칭아시불경이요
부처의 경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능히 스스로 자칭해서 낳은 부처의 경계다 하는 경우는 없다는 거지요. 그런 소리 한다면 그건 뭐 백발백중 그거는 엉터리고 잘못 자신이 착각에 떨어져있는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착각에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은 사기 치거나 둘 중의 하나죠.
還是這箇無依道人이 乘境出來니라
환시자개무의도인이 승경출래니라
무의도인 또한 그 이 무의도인 저개무의도인 하는 말이 참 중요한 말인데 의지함이 없는 도인 일 말입니다. 여기 뭐 임제스님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임제스님께 물으러온 학인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고 그야말로 본래인本來人 임제록에서 자주 말하는 무의진인無依眞人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인本來人 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아무 그런 치장도 어떤 그 장식도 없는 그런 그 본래인, 본분인 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고 왜 이제 그런 이를 무의도인이라고 하는가 하면은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라고 하는가 하면은 우리는 참 어디에 근거하고 의지하고 어디다가 살아온 어떤 경험과 역사와 자기의 어떤 상식과 관습과 이런데 전부 기준을 하고 거기에 근거해서 살아와요. 그래도 정말 그것도 아닌 뭐야 잎도 다 떨어지고 가지도 다 떨어지고 나무로 치면 이제 원 둥치 하나만 남아있는 듯한 그런 그 본래인, 본연의 사람 이걸 이제 무의도인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표현도 잘 써요. 피부탈락기이라 무슨 뭐 잎도 가지도 다 떨어지고 껍질마저도 다 벗겨진 그런 알짜 원줄기만 남아있는 듯한 그런 그 어떤 본연의 인간 그걸 이제 말하는 거지요.
무의도인
這箇無依道人이 乘境出來니라
자개무의도인이 승경출래니라
경계를 타고 온 것입니다. 경계를 부리면서 경계에 끄달리지않고 경계를 활용하면서 온 것이다.
그게 이제 저 앞에서 말한
乘境底人이 諸佛之玄旨다
승경저인이 제불지현지다
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 뜻 이죠
若有人이出來하야 問我求佛하면
약유인이출래하야 문아구불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서 부처 구하는데 대해서 묻는다 부처되는 것 성불하는 것을 묻는다 이거야 성불하는 것을 물었으니까 아주 대단히 존귀한 것을 물었지요.
그러면 나는
卽應淸淨境出하고
즉응청정경출하고
바로 그 부처의 경지에서 응해준다 맞아준다 이거에요. 부처의 경지에 응해서 내 놓는다 이거지 뭐든지 뭐 묵묵히 있는 게 부처라고 한다면 묵묵히 있는 것으로 보여주고 아니면 뭐 이 사람 수준에 맞춰서 그 어떤 태도나 자세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보살에 대해서 묻는다.
有人이問我菩薩하면
유인문아보살하면
부처보단 좀 차원이 좀 낮다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런 보살의 경지에 대해서 물으면
我卽應慈悲境出이라
아즉응자비경출이라.
보살은 자비가 위주니까요. 그래서 나는 곧 자비에 맞춰서 그 자비의 경지에다 응해가지고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出출이라는 것은 내놓고 보여주고 그러니까 근기 따라서 보여준다는 거지요.
또 有人이問我菩提하면
유인이 문아보리하면
보리는 깨달음이니 도니 뭐 이런 말을 쓰지요. 그러면은 나는 곧 응해가지고 淨妙境 정묘경에 응해서 내어 놓는다. 淨妙境 그건 이제 바로 깨달음의 경지, 도의 경지 여기서 말하는 보리의 경지니까 거기에 맞춰서 내놓는다.
有人이 問我涅槃하면
유인이문아열반하면
나에게 열반에 대해서 물으면은 열반은 고요한 것이니까 모든 망상이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고 뭐 편안함까지도 사라진 그런 상태죠. 그건 적정입니다. 적정에 맞춰서 적정경계에 맞춰서 내놓는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러한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 境界인즉은 萬般差別이나
경계인 즉은 만반차별이나
묻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서 내놓으니까 그런 그 내놓는 경계가 보여주는 경계가 만 가지로 차별하지만은
人卽不別이라
인즉불별이라.
나 자신은 변하지 않는 것 아니냐 이거지. 다르지 않은 내 한 사람이 그런 여러 가지 상대에 따라서 그렇게 이제 나타내 보인다.
所以應物現形은 如水中月이니라
소이응물현형은 여수중월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應物現形 응물현형 중생에게 맞추어서 사람에게 맞추어서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뭐와 같은 고 허니 물에 비친 달과 같다 水中月 물에 비친 달과 같다. 그래 이제 달이 보름달이면은 물에 보이는 달도 보름달일 것이고, 그믐달이면은 역시 그믐달로 나타날 것이고, 초생달이면 역시 초생달로 나타날 것이고, 칠팔일의 달 같으면 역시 칠팔일의 달 모습으로 그대로 나타날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제 이걸 이제 보통 천강유수천강월 千江有水千江月 이라는 이런 말을 쓰는데 천 강에 물이 있으니 천 강에 달이 비친다. 달 비치는 것도 그때 달의 모양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렇게 이제 강에 비친 달도 늘 다르죠.
그게 이제 부처님의 그 응신 또는 화신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상대에 따라서 나타내 보이는 차별된 모습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은 사실은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달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지요. 달은 뭐 그믐달이라 하더라도 가려서 그믐달로 보이고 초생달로 보이는 것이지 원달은 뭐 전혀 변동이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임제스님이 오는 상대에 따라서 이런저런 경계를 내 보인다 하더라도 임제스님 자신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건 뭐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사람마다 다 같을 거 에요.
그 다음 또 한 대목 하겠습니다.
14-3. 大丈夫
道流야 그대가 若欲得如法이면
도류야 야욕득여법이면
만약에 그대들이 만약에 여법함을 얻고자 한다. 여법.. 불교에서 여법이란 말 잘 써요. 아주 뭐 사람이 아주 여법하다. 행사를 여법하게 한다. 그럴 때 아주 잘 씁니다. 하는 일이 생활이 또는 뭐 사람 됨됨이가 이런 모든 것들이 여법하게 한다. 여법하게 살자는 그런 소리도 결제 때마다 잘 쓰는 말이고 그렇죠.
그 여법함을 얻고자한다면
直須是大丈夫兒라야 始得다
직수시대장부아라야 시득다
바로 모름지기 대장부라야 된다. 여기서 여법이란 내가 설명한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법에 맞는, 진리에 맞는, 도에 맞는 그런 것을 여법이라고 하고 있죠.
若萎萎隨隨地하면
약위위수수지하면
시들시들하거나 흐물흐물할 것 같으면 그걸 이제 형용한 말입니다. 위위수수지 만약에 그 시들시들하거나 萎萎위위는 이제 시들시들 그 어떤 식물이 시들시들 하다는 거 에요. 흐물흐물하다는 것은 隨隨地수수지라고 말하고 萎萎隨隨地 위위수수지할 것 같으면 則不得也즉불득야하야 그래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지 대장부가 그럴 수가 없지요. 천하를 삼킬 그런 기개가 있는 사람을 대장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또 夫如시[斯瓦]嗄之器는
부여시[사와]사지기는
이제 깨진 소리 또 깨진 그릇을 이제 시라고 하고 갈라진 목소리를 사라고 그렇게 하는데 어떤 깨진 그릇 같은 그런 깨진 소리그릇은 이 말이야
不堪貯醍醐이나
불감저제호이나
다 깨진 그릇에 제호같은 아주 좋은 음식을 담을 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만약 큰 그릇 이라면은
直要不受人惑이라
직요불수인혹이라
이 참 임제스님 잘 쓰는 말이지요.
곧바로 不受人惑불수인혹 사람들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남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남에게 안 속는다 이 말입니다. 그 남이라고 하는 것은 경전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이나 뭐 불보살까지도 다 사람에 해당돼요. 그들의 가르침도 역시 다 그 속에 포함됩니다. 어떤 뭐 고준한 그런 그 설법의 내용도 역시 사람에 해당되는 거지요. 나 내가 아니니까 첫째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어떤 것에도 그것은 경계가 되고 어떤 상대가 되 면은 그건 이제 아니라는거죠.
여기서 이제 임제스님은 한결같이 본래인, 진정한 자기 자신 그걸 이제 무의진인 이라는 그런 표현을 쓰는데 그걸 가장 중요시 여기지요. 그거 하나만 제대로 우리가 깨닫고 그것이 자기 살림살이가 만약에 된다면은 더 이상은 없다는 거에요. 부처고 조사고간에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성불이니 열반이니 하는 것도 전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 다 그 속에서 포함되어 있고 그 속에서 해결이 다 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말이 따르네요.
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아주 임제스님 말씀 가운데 無依眞人무의진인 또는 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런 말이 아주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런 유명한 말입니다. 곳을 따라서 주인을 지으라. 글자대로 해석을 하면 그거죠. 어느 곳에 있던지 어느 상황에 있든지 자기가 처해진 상황이 무엇이건 간에 항상 주인으로서 있으라. 이런 말이에요. 주인으로서 있으라. 이게 이제 참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隨處作主 우리는 현재 내 자신 진정한 내 자신을 대개 이제 망각하고 그저 시시각각으로 다른 것에 눈을 돌립니다. 없는 것에 눈을 돌리지요. 있는 현재 내 자신에 만족하지 않고 매~ 시시각각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립니다. 이미 주인을 망각한 것이고 주인이 주인 노릇을 못하고 객 노릇을 하는 거지요. 나그네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 자기를 두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니까 隨處作主 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잘 이해를 해야 돼요. 그렇게 隨處作主 하면 어느 곳에 있던지 주인 행세를 하게 되면은 立處皆眞이라. 서 있는 그 곳이 자기가 처해 있는 그 곳이 자기가 뭐 사장이 됐던지 사원이 됐던지 뭐 노동자가 됐던지 사용자가 됐던지 어떤 그 입장이 되었든지 간에 자기 있는 그 곳이 진리의 세상이다. 진실한 세상이고 진리의 세상이다. 개진皆眞이라 그랬어요. 자기 처해있는 자리가 무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장소에 처해있던지 내가 내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내 자신으로서 있느냐 아니면 어디에 휘둘리면서 어디에 미혹되고 거기에 놀아나면서 있느냐 하는 것 이 이야기입니다.
이건 아주 임제록 전편이 이 한마디 가지고 이야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팔만대장경 전체가 바로 이 문제를 설명했다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은 아니지 않겠나. 그처럼 이제 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이란 말이 중요하고 임제록의 뭐 안목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但有來者어든
단유래자어든
다만 나에게 오는 사람이 있으면
皆不得受니
개불득수니
말하자면은 미혹을 받지 않는다. 받지 않는다 이거야. 미혹을 앞에서 이제 不受人惑불수인혹이라고 했는데 그 인혹을 받지않는다.
儞一念疑하면
이일념의하면
그대들이 한 생각 어떤 그 의심을 갖게 되면은
卽魔入心이라.
즉마입심이라.
자기 자신에서 1mm라도 벌써 거기서 어긋나게 되면 그건 이미 마가 우리 마음에 끼어든 것이다.
예컨대 보살이 의심하면은
生死魔得便이라
생사마득편이라
보살이 의심할 때 그러니까 상당한 수준에 있는 사람이 마음에 틈이 생기면 그대로 생사의 마가 편리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但能息念이요
단능식념이요
그러니 다만 망상의 생각을 쉴 것이고
更莫外求
갱막외구
다시는 밖을 향해서 구하지 말라.
오늘 아주 중요한 얘기가 참 여러 번 나오는데 임제록의 핵심이 바로 이거죠. 언제나 자기 자신 챙기라는 겁니다.
임제록이 내가 좋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얼마를 알았든 전혀 불교와 불교공부가 없는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이 임제록 같은 이런 그 제대로 된 가르침을 우리가 접해서 안목을 바로 세워야 앞으로 불교공부하는데 다른 길을 헤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교 공부하면서 다른 길로 헤매가지고 불교 안 믿는 것보다 더 못하게 된 그런 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들여다보면 더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안타까워요. 그거 뭐 조사어록 그 차원 높은 조사어록을 불교 하나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서 되느냐 하지만은 임제스님이 그런 것을 분별하지 아니했고 모르는 사람일수록 이런 정견을 바른 소견을 세워주는 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평소에도 늘 합니다.
그러니까
息念식념
다른 생각을 쉬는 것. 그리고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둘이 아니죠. 생각 쉬는 게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않는 것이고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않고 모든 게 내 자신에게 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생각을 쉬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物來卽照하라
물래즉조하라
사물이오면 곧 그대로 비춰보라
儞但信現今用底하면
이단신현금용저하면
그대들이 다만 현금용저現今用底 지금에 쓰고 있는 것만 잘 믿으면
一箇事也無니라
일개사야무니라
하~ 일도 어떤 일도 아무런 일도 없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게 뭐겠습니까? 말하는 사람은 말하게 하는 것, 듣는 사람은 듣는 그 사실, 보는 사람은 보는 그 주인공 이게 현금용저에요. 그거 가지고 현금 사용하고 있는 것. 뭐 손을 움직이는 사람은 손을 움직이게 하는 그것일 것이고, 걸어가는 사람은 걸어가게 하는 그 주인공일 것이죠. 그거만 우리가 제대로 확신을 하게 되면은 아무 일도 없다. 뭐 육바라밀 닦는다 무슨 뭐 참선이다 염불이다 간경이다 이런 일이 하등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一箇事也無일개사야무 어떤 일도 거기에는 붙을 수가 없다 필요치도 않고. 일 끝난 거지요.
어떻게 보면 임제록 그 가르침이 불교공부로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것입니다. 가장 간단하고 쉬운 것인데 또 이게 이제 어렵게 들리는 사람도 많죠. 뭐 무슨 뭐 삼천 배를 해라 뭐 주문을 외워라 이러면은 오히려 쉽게 생각을 하고 그런 것은 잘 따라서하고 잘 이해를 하는데 이렇게 아주 쉽고 간단한건 또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 참 그것도 아주 묘한 일이지요.
一箇事也無니라 일개사야무니라.
오늘 공부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단락이 덜 끝났습니다 만은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첫댓글 종교 사상을 뛰어 넘어서는 스님의 가르침에 엎드려 예경 합니다. 미륵골님 ! 감사합니다._()()()_
본래인!... 진정한 자기자신! 그것 하나만 제대로 깨닫고 자기의 살림살이가 된다면, 부처고 조사고 성불이고 열반이니 하는 것도,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 속에서 다 해결이 된다... 자기 자신을 잘 챙겨라!!.... 큰 스님! 감사드립니다... 미륵골님! 감사드립니다..._()()()_
진정한 자신을 믿어라...감사합니다._()()()_
친불회 회원 원일과 금선행은 호주 브리스번에서 인터넷으로 법회에 참석하였습니다. 隨處作主하야 立處皆眞이니라. 임제록의 핵심입니다. 남은 삶의 등불로 삼겠습니다. 큰스님, 감사합니다.
접속하는 것 한국에서처럼 쉽지 않으셨을텐데요....큰스님의 법음이 허공에 긴 포물선을 그어 지구 반대편에 닿았습니다. 제가 조금 스케일이 작네요. 원래 우주로 뻗어나가는 건데 ^^ _()()()_
원일님 금선행님 먼 곳에서 참석하셨군요.좋은 인연으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_()_
큰스님! 모든 법우님 감사 드립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밖으로 찾지 말고 스스로를 믿는 것이다.대장부라면 주인이니 도적이니 옳거니 그르거니 색이니 재물이니 하며 쓸데 없는 이야기로 세월을 보내지 않는다.대장부란 양변에 떨어지지 않는다.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위도인이 경계를 부리면서 나타난다.
경계는 수만가지로 차별하지만 사람은 차별이 없다 사람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물 속에 비친 달과 같다(화신).큰 그릇이라면 다른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고 어딜가나 주인이되어 곳을 따라 주인을 지어라.다만 망상의 생각을 쉬고 바깥을 향해 구하지 말며 사물이오면 오는대로 곧 비춰보라.
그대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만 믿으면 아무런 일(육바라밀,염불,참선,간경)이 없다.
관음성 님의 꼬리글이 정리를 잘 해 주어서 감사, 무비 스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어서...
감사합니다._()()()_
^^ _()()()_
항상 최고의 것을 가르쳐주시려 하시는 큰스님 감사드립니다_()()()_
온라인 공간이지만 칠불회 회원님들과 함께하니 더 꽉찬 느낌입니다~고맙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상태에 있는 그 모습, 본연의 모습 그 거기에서 뭔가 완전한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 ----> 無爲實相門
자기안에 부처가 있구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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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법체 강령하시어 항상 사자후를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스님 건강하십시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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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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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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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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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