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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유 게시판 스크랩 <역사산책> 신라 화랑들이 제사하던 금강산과 마의태자 (3)
김상우 추천 0 조회 31 10.02.10 10: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오두의 역사산책 ?      (앞장에 이어)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 뒤에는 경순왕이 있었다 (3)

-신라 화랑들의 금강산 제사와 마의태자가 금강산 경유 배경 -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설이나 금강산 경유설은 신라 화랑들의 전통적 금강산의 관계에서 조명되어져야 한다. 금강산은 화랑들의 풍류도를 실행하며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때는 금강산에 대한 명칭은 상악(霜岳)이라 했다.

 

금강산의 여러 명칭들 가운데금강산이라는 말은  <화엄경>에서 등장하는 말이다. "동해 바다속에 팔만 유순(由旬) 곳에 금강산(金剛山) 있고 그곳에 12 담무갈 (曇無竭) 보살이 항상 머문다" 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금강산은 산천을 찾아 수도하던 화랑들의 신선산으로서 의미가 있었.

 

왜냐하면 설악산과 금강산은 색의 눈과 서리와 관련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신라 때는설악(雪岳)과 짝을 이루는 의미에서 서리가 많은 산이라 하여상악(霜岳)’이라 불렀다. 색은 산과 관련하여 산신의 의미를 지닌다.

 

 

3. 화랑들이 제사하던 금강산과 마의태자

 

산신에 대한 의미는 태양숭배시대에서 눈이나 서리가 많이 내리는 동지 새해 의식에서 덮힌 산에 의미를 부여하고 산신제를 지냈다. 금강산 해돋이는 신선도가 또는 화랑 풍류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삼국사기> 32 제사(祭祀)조에 보면 강원도 고성군의 상악(霜岳 오늘날 금강산) 강원도 수성군(지금의 간성군) 설악(雪岳)에서 소사(小祀) 산신제를 지냈다는 것은 금강산이 풍류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음을 의미한다. 비록 신라의 도읍 경주에서 너무 멀어 소사(小祀) 지냈다고 했으나 거기에서 산신제를 지냈다는 것은 산악의 장엄성과 함께 상악과 설악의 , 서리 대한 산신제의 의미가 강조되었다고 있을 것이다.

 

금강산의 서리는명사십리 모래 빛 흰색의 신비함과 함께 읽혀야 한다. 이중환(李重煥) 택리지(擇里志)에서동해안의 모래는 눈같이 희고 사람이으면 소리를 낸다.’라고 쓰고 있다. 명사십리는 간성, 고성, 통천에 이르는 모래 해변으로서 특히 소리를 내는 모래라는 뜻으로 명사(鳴沙) 불려 왔다.

 

모래소리 옛날 신비한 신선의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오늘날도 필자가 직접 현장에 가본 하와이의 최북단 섬인 카우와이섬의 해변이나 고비사막의 모래언덕들이 바람에 의하여 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갈 때 실크로드의 상인들은 '귀신 우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 등을 들었다는 것은 마른 모래가 바람에 한꺼번에 지속적으로 무너지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아름다운 명승 모래 길에서 들렸을 때 과학이 발달되지 못하던 옛시대에는 신선의 소리로 들렸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흰 모래 산 위의 , 서리와 바닷가의 소금과 모래는 신화적으로 서로 닿아 있다고 있다.

 

신라 금강산을 서리가 많은 상악(霜岳)으로 불린 것은 것은 그만큼 신선도가적인 명칭이었다는 것을 있다. 그렇기에 상악에 화랑들의 지도자들이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금강산과 지리산은 화랑들이 찾아다니며 수련장이 되었다는 증거들은 많이 남아 있다.

 

화랑은 본래 원화라 한 것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와 연관하여 시작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화랑이 무속적 의미로 남아진 무당이 여성적인데 비하여 남자 무당은 오히려 후대적 부속적인 의미가 되어 남무(男巫:) 또는 무격  남자 무당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을 보면 원화(源花) 의미는 원천적으로 모계적 여신 문화의 무속적 원류를 가진다는 것을 있다.


화랑은 신라 후기 때에 선랑(仙郞), 국선(國仙) 등으로도 불렸으며, 화랑도는  국선도, 풍월도, 원화도, 풍류도라고도 했다. 이러한 신선도가적인 칭호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불교적인 명칭으로 변이된다. 그래서 선랑은 팔관회(八關會) 무동(舞童) 의미하게 되었고 국선은 충렬왕 양반출신의 '군병'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화랑의 존재는 유교의 영향으로 더욱 변화되어 무속적인 존재로 남아지게 된다. 조선시대 후기에화랑이’, 무부(巫夫), 걸립승(乞粒僧) 무동, 사당(寺堂) 거사(居士) 등의 칭호는 신라 화랑의 전이된 명칭이라 있다.

 

신라의 화랑이 단순하게 명산대천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본래 산신제를 지내던 의미를 가진 선도(仙道) 제천의식에 연관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런 명산대천에는 선도성모와 같은 신라 신화에 나오는 아니 그보다 오래된 우리 민족의 토속적 여산신이 살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신라 때에 금강산 상악(霜岳) 특히 화랑들의 중요한 제의적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금강산에는 화랑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갔다거나 거쳐갔을 개연성은 그래서 충분한 역사적 근거를 가지는 것이다.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 단서(丹書) 마애단서(磨崖丹書) 36 봉비(峰碑), 강릉(江陵) 한송정(寒松亭) 사선비(四仙碑), 통천(通川) 총석정(叢石亭) 애상비(崖上碑) 동봉고갈(東峰古碣) 동봉비(東峰碑) 등은 화랑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산의 봉우리 가운데 영랑봉은 화랑 영랑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海東高僧傳》에는 신라의 200여 화랑들 가운데 최고 화랑인 사선(四仙)이 나온다. 영랑, 술랑, 남랑, 안상 등 이들 사선(四仙)이 금강산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신라의 신선도와 금강산 즉 ‘상악’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661, 김수로왕 후손이 금강산에서 속절제사로 차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사선(四仙) 화랑들의 금강산 순유(巡遊) 총석정의 사선봉, 금란굴, 삼일포에 전설이 남아 있다. 특히 삼일포의 경치에 감동하여 이들 사선이 3 동안 머물렀다고 해서 삼일포라 칭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곡의 <동유기> 의하면 삼일포의 작은 섬의 동북쪽 벼랑의 바위 벽에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했다. 안축(安軸 : 고려 충숙왕 때의 학자) <삼일포기문(三日浦記文)>에는 그것을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으로 쓰고 있다. 어느것이 맞는지 알 수 없으나 술랑이든 영랑이든 낭도의 행적임을 있다.

 

<동유기> 의하면  사선(四仙) 기념비가 삼일포, 총석정, 한송정 세곳에 있었는데,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벼슬을 했던 호종단(胡宗旦)이란 사람이 금강산에 갔을 때 삼일포와 한송정의 사선비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삼일포의 안상정(安祥汀) 사선 중의 안상 화랑의 이름에서 연유하고 있다. 조선시대 연산군 때의 홍귀달(洪貴達)바람은 영랑호에 높고 달은 안상정에 오르네(風高永郞湖 月上安祥汀)”라고 노래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신라의 화랑들과 금강산과의 관계에 대한 의미가 깊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설은 이러한 화랑도와 금강산과의 오랜 교류의 밀접한 역사에 이어진 내용이며 마의태자가 여진족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금강산을 거쳐간 배경이기도 하다는 것을 있다.

 

이러한 신선도적인 금강산 상악(霜岳) 고려시대에 들어와 급격히 불교적인 명칭들로 변화해 갔다는 것은 앞장에서 다루었다.  결과가 <화엄경> 근거하여 금강산이라고도 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칭호는 '풍악산'이었다는 것은 단풍이 좋다는 의미 이상 신라의 '풍류도'의 의미가 속에 숨어 있다고 필자는 풀이한다.

 

금강산을 흔히 '12천봉'이라고 것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12 보살 근거하여 나온 것이며 본래는 산봉우리마다 신선들이 사는 선도적 의미를 불교의 보살로 윤색 변형시킨 것으로 있다. 고려왕조와 불교의 합작으로 본래의 신라 전통의 풍류도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마의태자 금강산 입산설에서 끝내 불승이 되지 않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표현은 당시에는 금강산에는 불사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의태자가 금강산을 거쳐갔을 개연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앞선 장에서 다루었듯이 오늘날 강원도 인제에서 마의태자의 역사적 흔적이 상당히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그러나 인제의 유적들이 마의태자의 이름인김일(金鎰)’로서가 아니고 그의 아버지 경순왕인  '김부(金富)' 이름으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는 것에서 이 글은 집중하고 있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름의 차선적 최후를 대비했으니 그것이 마의태자의 행보이다.

 

 

4. 金나라를 건국한 '金衣太子'와 금강산에 입산했다는 '麻衣太子'

 

금나라 건국에 신라의 마의태자 후예가 세웠다는 설에는 몇가지로 나뉘어진다.

 

그중 마의태자 자신이 금나라를 세웠다는 설이나 마의태자 아들이 세웠다는 설도 있지만, 가장 유력하게 보이는 것은 금나라를 세운아골타는 마의태자의 5대손이라는 기록이 필자에게는 가장 유력하게 보인다.

 

마의태자는 결국 금강산에 남아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위에서 충분히 논했다.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완성하기 위하여 여진족 세력들을 업고 만주로 들어가 그의 아들 김준이 결국 금나라를 세웠다는 설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김준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순암 안정복은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으며 김준(金俊) 여진으로 들어갈 형제는 뒤에 두고 혼자서 넘어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고려사>에는 금나라에 대하여 지금의 흑룡강 일대로 기록하고 땅을 파서 집을 짓던 풍습이 있었으나 신라 왕실의 후예가 그곳으로 옮겨 뒤에 지상에 집을 짓게 되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김준은 김행이라는 이름으로도 나타난다.


"
흑수(黑水), 흑룡강의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 김행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짓는 제도가 생겼고 사람들이 지역을 납갈리(納葛里) 이름했다. 말은 한자로 거실이란 뜻이었다."

 

마의태자(김일) 아들 김준(金俊) 金나라를 세웠다는 주장은 <고려사> 금준(今俊) 金나라 시조라는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金나라 시조 아골타에 대하여 <고려사> 세가(世家) 13 예종 10(1115) 3월조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 금준(今俊)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 거주했으니 이가 金나라의 시조다'라고 하며.."

 

여기에서 '시조'라는 말은 나라를 건국한 임금 자신보다 그 임금의 조상이라는 의미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위의 <고려사> 기록에서 김준은 발음이 '금준(金俊)이었을 것이다. 金이 木인 李씨에 상극이 된다하여 '김'으로 발음을 고치게 한 조선시대 이전에는 ''으로 발음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금준 = 아골타' 설은 마의태자 아들 金俊에 대한 발음의 한자표기가 금준(今俊)'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해오고 있다금준이 마의태자의 아들이라는 학설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록한 <고려사> 바로 이어서 이와는 다른 전승도 함께 싣고 있다.

 

"혹은 말하기를 '평주 김행(金幸) 아들 극기(克己)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 장자)이라 하고 계자(季子 막내) 영가(盈歌) 했는데, 영가가 호걸이어서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 자리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오아속 아우) 섰다고 한다."

 

여기에서 김행(金幸) 마의태자 아들 김준(金俊) 동일인이거나 형제로 해석되어 왔다. <고려사>에서 말하는 마의태자 아들 김행에서 아골타까지의 혈통을 직계 아닌 형제들을 제하면 모두 6대가 된다. <고려사> 金나라의 시조 아골타의 조상을 기록하면서 전통적인 '시조의 육조(六祖)'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의 독특한 사관인 '시조 육조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아골타로부터 마의태자까지 7대가 되며 아골타의 조상은 육조(六祖).

 

 마의태자(1) - 김행(金幸) - 극기(克己) - 고을(古乙) - 활라(活羅) - 영가(盈歌) - 오아속(烏雅束)

                                                                                                                           아골타(오아속 아우)(7)

  

마의태자가 아골타의 6대조 되는 것을 말하며 모든 왕조들의 '시조의 조상들' 다룰 때에 6(六祖)  시조를 포함하여 7(七代) 포괄하는 시조 숭배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오래 전에  필자의 시리즈글의 주제로 <신화이야기83: 여섯 이야기 - 六祖의 돌림항렬과 창세기의 아담의 '조상' 창조 六日>에서 다룬 바가 있다. 더불어 필자의 <역사산책: 칠지도(七枝刀)와 신라 금관은 六祖 이은 7대 시조왕 숭배 상징>에서 구체적으로 논하였다.

 

http://cafe.chosun.com/club.menu.bbs.read.screen?page_num=1&p_club_id=dreamview&p_menu_id=61&message_id=543768

 

이러한 왕조의 시조의 육조(六祖) 대하여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은 조선왕조의 세종대왕의  '시조' 대하여서 다루는 <용비어천가>에서 '해동육룡'만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

 

<고려사> 金나라 시조부분 아골타 육조(六祖) 손자로 7대째

마의태자(1) - 김행(金幸) - 극기(克己) - 고을(古乙) - 활라(活羅) - 영가(盈歌) - 오아속(烏雅束)

                                                                                                                       아골타(오아속 아우)(7)

 

 

<용비어천가> 세종은 '해동육룡육조(六祖)의 손자로 7대째

목조(穆祖) (1)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 - 태조(태祖) - 태종(太宗) - 세종(世宗)(7)

 

오행사상에서 오대조까지 제사를 한다. 돌림자도 오대만에 바뀐다. 6조는 일반 서민용이 아닌 용 즉 왕조와 선승 계보에서 강조된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칭송하면서 시조는 목조(穆祖)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 · 태조 · 태종까지 6대조를 <용비어천가> 칭송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골타의 6대조가 마의태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육조(六祖) 전통에 대하여서는 앞서 소개한대로 따로 된 필자의 글들에서 상세히 다루어져 있다.    

 

<고려사> 앞선 인용에서 말한 아골타가 마의태자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위의 6대손이든지 金나라는 신라의 후예가 세웠다는 것은 분명한 방증들이 많이 등장한다. <고려사> 예종 4(1109) 6월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여진 사신이 와서 말을 <고려사> 거짓으로 필요는 없다. 금나라는 신라의 후예가 만든 것이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대방'이란 한사군의 이름이 아닌 ' 나라' 또는 '위대한 나라'라는 의미의 고려를 말한다. 금나라가 우리의 핏줄을 가진 나라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합병되었을 때에도 언급되었을 정도다.


백암(白岩) 박은식은 일제때에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 글에서 꿈에 금태조가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꾸지람을 했다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이것은 나라가 망해가자 그를 안타까워 하면서 같은 신라 왕실 혈통을 가진 금나라의 후신인 후금 청나라가 조선을 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표현한 면이 있다. 비록 꿈을 빌었던 글이지만 박은식이 가졌던 금나라에 대한 견해를 있는 내용이다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 맞아 왕위에 앉히고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신라 종실의 김준(금준)의 아들 극수가 완안씨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왕은 성씨를 쓰지 않고 ''이라는 의미의 고을 이름 '완안' 으로 대신하여 왕의 성을 삼은 것을 있다.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금나라의 '완안씨' 대하여 재확인하여 "옛날 金나라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고려에 돌려주었다"라고 했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는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고향)'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 썼다.

 

결론적으로 신라 멸망과 함께 고려왕조에서 '麻衣太子' 표현되었던 신라의 마지막 왕자는 사실상 金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6대조 할아버지이며 金씨 왕국을 건설한 '金衣太子'였다고 있는 것이다.

 

나라를 창건한 시조의 신화들에는 언제나 그 발원이 하늘이 아니면 보다 큰 나라의 왕실에 핏줄이 닿아 있는 것을 강조하는 왕조실록들의 기록 습관이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고려시조 왕건은 당나라 황제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든지 궁예가 신라 경문왕의 서자였다는 기록들은 그 한 예이다. 그것은 사실을 바탕할 가능성도 있고 출신 배경이 만만치 않음을 선전하는 윤색일 수도 있다. 태봉(후고구려 전신)을 세운 궁예는 신라 왕실의 후예라는 것으로 이승휴는 다음과 같이 궁예가 신라 왕실의 서자임을 기록하고 있다.  


羅王景文生庶子(나왕경문생서자) : 신라 경문왕이 서자를 낳았는데
齒有兩重含付聲(치유양중함부성) : 두 겹으로 이가 나서 어물어물하는 소리
相是害君乃放逐(상시해군내방축) : 임금을 해칠 상이라 방축되어
託迹浮圖潛遊行(탁적부도잠유행) : 종적을 절에 의탁하여 가만히 돌아다녔다네.

                                                                       - < 제왕운기> -

                                      

 

이미 필자는 앞선 장에서 궁예는 후고구려 계승 이전 처음에는 '신라복원'을 의도로 병사를 모으고 있었을 개연성을 제기한 바 있다. 고려왕조가 신라를 포용적으로 받아들인데는 왕건이 이러한 궁예의 세력을 바탕했기 때문이리라.

 

신라왕실은 분명 후고구려처럼 금나라 시조에게도 그 혈통적 아니면 국제적 권위를 가졌던 나라의 왕실임은 분명한 것이다.

 

신라 왕실의 마지막 망명 왕자의 후손인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운데 이어 나중에 조선시대에 들어와 금나라 왕실의 후예를 자처한 누르하치가  後金(청나라) 세운 것은 신라의 '망명동포' 역사가 조선에 대한 또다른 형제지국을 건국하는 역사를 반복하는 것을 있다.

 

그러한 배경에는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이 있었고 배후에는 경순왕의 철저한 왕자들을 빼돌리며 당부한 밀명이 역사의 물밑에 함께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것이다.  

 

신라는 간단히투항 것이 아니었다. 금나라와 후금() 이르기까지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을 위한 화랑의 기상이 역사 속에 이어져 것이다.  필자가 지난 90년대 초 처음 제기한 '-淸남북국시대론'은 근년에 관심을 받기 시작했지만, 그 원천은 신라와 금나라에서부터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거기에는 경순왕의 한과 밀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03/22/09 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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