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하면 떠오르는,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보수적’ ‘휴머니즘’ ‘미국의 자존심’, 그리고 하나 더한다면 ‘인종 차별’ 등등….
2002년 제74회 시상식 때 <트레이닝 데이>로 덴절 워싱턴이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래
2년 만에 <레이>의 제이미 폭스가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게 돼
인종 차별적 성향은 다소 누그러진 것으로 보이나,
미국인들의 보수적 자존심을 찬양하는 작품과 휴먼 드라마에 후한 점수를 줘왔던
아카데미만의 정체성은 여전했다.
커다란 이변이 없었던 이번 시상식. 그렇다면 지난 10년,
그러니까 1995년 제67회부터 2004년 열린 제76회 시상식의 주요 부문별 결과는 어땠을까.
10년의 세월을 평정한 작품과 감독, 남녀 주연배우들의 면면을 훑어본다.
67th
1995년 | 작품상 · 포레스트 검프 | 감독상 · 로버트 저메키스(포레스트 검프)
남우주연상 · 톰 행크스(포레스트 검프)
여우주연상 · 제시카 랭(블루 스카이)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가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펄프 픽션> <쇼생크 탈출> 등을 제치고 작품상을 차지했다.
다리가 불편하고 지능이 떨어지는 포레스트 검프를 통해
‘인간 승리와 미국 만세’를 동시에 만족시켰던 작품이다.
68th
1996년 | 작품상 · 브레이브 하트 | 감독상 · 멜 깁슨(브레이브하트)
남우주연상 · 니콜러스 케이지(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여우주연상 · 수잔 서랜든(데드 맨 워킹)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영화들이었지만 작품상 트로피는 초대형 영웅 스펙터클을 자랑했던
<브레이브 하트>에게 돌아갔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러스 케이지의 연기는
훗날에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고, 수잔 서랜든 역시 깊은 인상을 남겼다.
69th
1997년 | 작품상 · 잉글리쉬 페이션트 | 감독상 · 앤서니 밍겔라(잉글리쉬 페이션트)
남우주연상 · 제프리 러시(샤인)
여우주연상 · 프랜시스 맥도먼드(파고)
로맨스 드라마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차지했다.
랠프 파인즈와 줄리엣 비노시의 연기도 호평을 얻으며 9개 부문을 석권했다.
전쟁과 사랑을 테마로 상투적인 멜로에 곁들여진 예술성이 높게 평가돼
<파고> <제리 맥과이어> <샤인> <비밀과 거짓말> 등을 눌렀다.
70th
1998년 | 작품상 · 타이타닉 | 감독상 · 제임스 캐머런(타이타닉)
남우주연상 · 잭 니콜슨(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여우주연상 · 헬렌 헌트(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 해 아카데미는 할리우드 영화 역사에 기록될 만한 작품의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타이타닉>은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무려 11개 부문을 석권할 만큼 엄청난 파워를 자랑했다.
화려한 스케일의 재난에 비극적 로맨스의 힘이었다. 제작비도 엄청났지만 흥행 또한 기록적이었다.
71th
1999년 | 작품상 · 셰익스피어 인 러브 | 감독상 · 스티븐 스필버그(라이언 일병 구하기)
남우주연상 · 로베르토 베니니(인생은 아름다워)
여우주연상 · 기네스 팰트로(셰익스피어 인 러브)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한 셰익스피어의 젊은 날 사랑을,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버무린
<셰익스피어 인 러브>. 명작을 탄생시킨 작가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에 포커스가 맞춰졌던 작품.
모두 7개 부문을 석권해 미국적 마인드에 충실했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5개 부문)도 따돌렸다.
72th
2000년 | 작품상 · 아메리칸 뷰티 | 감독상 · 샘 맨데스(아메리칸 뷰티)
남우주연상 · 케빈 스페이시(아메리칸 뷰티)
여우주연상 · 힐러리 스웽크(소년은 울지 않는다)
각자의 사랑 방식과 가족의 붕괴를 소재로 다소 침울한 결말로 이끌었던 <아메리칸 뷰티>가
8개 부문 후보에 올라 오스카 트로피 5개를 휩쓸었다.
신예 샘 맨데스 감독은 이 작품으로 데뷔 신고식과 아카데미 입성을 동시에 치른 셈.
케빈 스페이시와 아네트 베닝의 연기도 호평 받았다.
73th
2001년 | 작품상 · 글래디에이터 | 감독상 · 스티븐 소더버그(트래픽)
남우주연상 · 러셀 크로(글래디에이터)
여우주연상 · 줄리아 로버츠(에린 브로코비치)
후보 경쟁이 매우 치열한 해였다.
영웅 서사극 <글래디에이터>는 <트래픽>과 <에린 브로코비치> 등을 제치고 작품상을 받았지만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라는 복병과도 경쟁해야 했다.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던 <글래디에이터>는 5개 부문 수상이라는 결과에 만족해야 했다.
74th
2002년 | 작품상 · 뷰티풀 마인드 | 감독상 · 론 하워드(뷰티풀 마인드)
남우주연상 · 덴절 워싱턴(트레이닝 데이)
여우주연상 · 할리 베리(몬스터 볼)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들의 경합보다 화제였던 건 단연 흑인 배우들의 수상이었다.
덴절 워싱턴과 할리 베리가 나란히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
유색 인종에게 인색했던 아카데미였기 때문에 더욱 커다란 반향이었다.
러셀 크로는 2년 연속 작품상 후보에 오른 배우가 됐다.
75th
2003년 | 작품상 · 시카고 | 감독상 · 로만 폴란스키(피아니스트)
남우주연상 · 에이드리언 브로디(피아니스트)
여우주연상 · 니콜 키드먼(디 아워스)
작품상 <시카고>에 쏟아진 찬사는 대단했다.
무엇보다도 노래와 춤과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배우들의 활약이 컸다.
13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그 중 6개를 휩쓸었다.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의 <피아니스트>는 전쟁과 인간, 그 드라마의 극치를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표현했다.
76th
2004년 | 작품상 ·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 감독상 · 피터 잭슨(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남우주연상 · 숀 펜(미스틱 리버)
여우주연상 · 샤를리즈 테론(몬스터)
<반지의 제왕> 완결편이 11개 부문을 완벽하게 휩쓰는 기록을 세우며 결국 아카데미에 발을 들여놨다.
판타지 영화로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케이스였다.
<미스틱 리버>의 숀 펜도 탁월한 연기를 선보였지만,
<몬스터>에서 냉혈 연쇄살인마로 변신한 샤를리즈 테론도 돋보였다.
한국에서의 아카데미 효과 - 소문난 잔치, 맛있는 거 있더라
단가(?)로 다지면 고작 6만 1,200원 정도밖에 안 된다는 오스카 트로피.
하지만 그 후속 효과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불어난다.
미국 영화학자 홀 브르크의 연구에 의하면, 1975년부터 1984년까지 미국에서 개봉된 작품 중
아카데미 남녀주연상은 830만 달러, 작품상은 2,700만 달러의 흥행 상승 효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당시의 화폐 가치를 현재로 환산한다면 그 1.5~2배 가량의 경제 가치가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LA의 한 경제 연구소는 아카데미 수상 이후 해당 영화의 흥행 수입과 부가 판권 수익의 증가분이
약 4억 달러에 달한다는 기사도 있었다.
또 <버라이어티>는 1985년부터 10년 동안의 아카데미 작품상의 경우,
1주일 동안 24퍼센트의 관객이 늘었다는 분석도 내놨다.
‘아카데미 효과’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그렇다면 국내의 사정은 어떨까.
해외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은 우리나라 작품들 중 상당수가
국내 흥행에는 실패해왔던 상황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국내 관객들에게 번번이 외면당했던 김기덕 감독 작품이 그 대표적이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아카데미의 경우에 대해서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다.
오스카가 인정한 ‘명성’이라는 라벨이 하나 더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서 무슨 상을 받았대” 하는 정보는 영화를 고를 때 분명히 반영된다.
볼까 말까 망설였던 ‘유동표’를 확실히 잡아주는 보증이 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러한 작품들이 관객들을 완벽하게 배반하는 일은 흔치 않다는
믿음 또한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명불허전의 확인 사살에 다름 아니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경우, 11개 부문을 독식한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은
선풍적인 인기가 식어갈 때쯤 아카데미 석권 소식과 함께 재개봉해 막바지 재미를 봤던 케이스.
제75회 때 <피아니스트>는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후,
제73회의 <글래디에이터>는 작품상, 남우주연상, 음향상, 시각효과상, 의상상을 받은 후,
<와호장룡>은 외국어작품상, 편집상, 음악상, 미술상을 받은 후 재개봉한 전력이 있다.
극장 개봉뿐 아니다.
이렇게 아카데미에서 트로피를 받았거나 후보에 올라 경합을 벌였던 작품들은 비디오, DVD 시장에서도
톡톡한 효과를 나타낸다.
‘극장에서는 못 봤지만 아카데미 타이틀까지 붙었으니’ 하는 확고한 믿음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공중파나 케이블 방송 역시 이들 작품의 판권을 확보, 시청률을 높이는 경우다 다반사.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입사와 홍보사들은 아카데미 노미네이션과 수상 결과를
발빠르게 언론에 노출시키게 마련이다.
그 효과는 또한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고.
2005-03-08 | 송지환 기자 | 무비위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