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파사분(破邪分)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 무지역무득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 無智亦無得 사리불이여,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한 것이며, 공한 그 모습이 곧 색의 실상이니, ~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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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파사분(破邪分)으로 그릇된 인식을 깨뜨려 반야의 공관을 비춰 보는 부분입니다. 반야(般若) 공관(空觀)으로 모든 법을 비추어 보니 일체 현상[諸法]은 곧 공(空)이요, 공이 곧 일체 현상의 실상임을 밝히고, 우리가 있다고 집착할 수 있는 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 六根 + 六境)ㆍ십팔계(十八界. 六根 + 六境 + 六識)ㆍ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내지 사제법(四諦法)까지도 모두 비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있다고 집착할 수 있는 삿된 견해를 부숴 버리는 부분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함께 공부해 보겠습니다. (1)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사리불(舍利弗)이여,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은 색(色)과 다르지 않으며, 색(色)은 곧 공(空)한 것이며, 공(空)한 그 모습이 곧 색(色)의 실상이니, 1) 사리자(舍利子) 우선 사리자(舍利子)에 대해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리자(舍利子)는 사리불(舍利弗)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 10대 제자 중에 지혜 제일이라 불리는 존자(尊者)입니다. 지금 부처님의 증명아래 관자재 보살이 사리불에게 반야(般若)에 대한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이 지혜에 대한 법문이 설해지는 경이므로 지혜 제일인 사리불이 청자(聽者)로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리불(舍利弗)은 범어 샤리푸트라(Śāriputra), 팔리어(語) 샤리푸타의 음역(音譯)이며, 추로자(鷲鷺子)ㆍ사리자(舍利子)라고도 합니다. 아버지는 대학자였으며, 어머니는 새눈 같다 해서 사리라 했는데 그의 아들이라 해서 사리자(舍利子)라 했다 합니다. 그는 인도 중부의 마가다왕국 왕사성(王舍城) 근처의 브라만 출신으로,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뛰어났는데, 당시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 밑에서 목건련(目犍連)과 함께 수학하며 그의 제자 250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불제자 앗사지(阿說示)를 만나 그의 위의(威儀)에 탄복하여 그의 스승이 누구며 가르침은 무엇인가를 듣고 그의 친구 목건련과 제자 250명이 함께 불교에 입문하여 반달 만에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올랐는데 부처님 제자 중 지혜가 제일 뛰어나다고 부처님의 칭송을 들었을 만큼 교단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석 달 후 열반 하실 것을 선언하시자 차마 부처님의 열반을 볼 수 없다고 하며 부처님 열반에 앞서 목건련과 함께 입적하였습니다. ※ <부처님의 10대 제자에 대해서는 상식방에 올려 놓았습니다. 참조하세요.> 2)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지난 시간에 공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했습니다만 다시 살펴보면 공(空)이란 범어 수냐(śūnya 舜若)의 역어로 '비었다' 혹은 '없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체법(一切法)은 인연을 따라서 생겨난 것이므로 아체(我體)라든가 본체(本體)라든가 실체(實體)라 할만한 것이 없기에 공(空)이라 했습니다. ① 물질의 과학적 이해 앞서 색(色)은 인식 주관에 드러난 대상성이라 했지만 보통 일반적으로 색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어떻게 이 경문을 이해하는가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 말미에 종합적으로 기술해 볼까 합니다. 제가 그동안 배웠고 거의 모든 불교서적에서 색(色)을 물질로 이해 하기에 이에 대하여 알아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기에 기술해 보고자 합니다. 색(色)은 물질적 존재로 형체 있는 것 일체를 말합니다. 이 색은 요소와 요소의 화합으로 이루어졌기에 무너져 변화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대물리학에서 물질 성분을 분석하면 분자(分子)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자를 분석해 보면 원자(原子)들이 모여서 이루졌다고 합니다. 또 이 원자는 원자핵(原子核)과 전자(電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陽性子)ㆍ중성자(中性子)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수백 가지의 소립자(素粒子)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흡수 되고 있는데 이 소립자 최소 단위를 쿼크라고 합니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이 초미립자는 쇠붙이도 통과한다고 합니다. 소립자 이론은 상대론적인 장(場)의 양자론(量子論)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장의 양자론에 의하면 장의 양자로 광자(光子)가 나타나 입자성(粒子性)과 파동성(波動性)을 보이며, 광자가 발생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광자(光子)란 양자론에서 빛을 하나의 입자로 본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장을 양자화 하면, 그 장에 따르는 양자가 나타나서 발생과 소멸을 되풀이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자는 공간을 차지하여 그 영역 안에 다른 물체를 포함하지 않는[不可浸透性]데 비해, 장은 공간 내의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서로 침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물질의 기본 구조를 분석해 들어가니 물질이라는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장(場)만이 근본적인 물리적 실체이며, 소립자들은 장의 국부적인 응결체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물질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장이 되었다가 입자가 되고, 입자가 되었다가 다시 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소립자들이 진공으로부터 스스로 생겨났다가, 다시 진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명백히 밝혀져 물질과 빈 공간과의 구별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② 불교의 석공관(析空觀) 그런데 불교에서도 색(色)을 분석한 것이 있습니다. 이를 석공관(析空觀)이라 합니다. 공(空)을 분석하는 하나의 관법(觀法)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색에 대하여 분석적으로 말씀하신 부분이 있는데 놀라운 일입니다. 먼저 색(色)을 아주 작게 쪼개 보는 것이 극유진(隙遊塵)입니다. 극유진이란 눈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문틈으로 태양빛이 들어오면 광선에 비추어 보일 정도의 작은 티끌입니다. 또 그보다 1/7 작은 것이 우모진(牛毛塵)이라 하는데 소의 터럭 끄트머리 정도의 티끌을 말합니다. 이 우모진(牛毛塵)을 7배 한 것이 극유진(隙遊塵)인데 한 우모진이 사방상하(四方上下)로 결합된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분자(分子)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우모진(牛毛塵)을 1/7로 더 쪼갠 것을 양모진(羊毛塵)이라 합니다. 이는 원자(原子)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이 양모진(羊毛塵)을 1/7로 쪼개 것을 토모진(兎毛塵)이라 합니다. 이는 전자(電子)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이 토모진(兎毛塵)을 1/7로 쪼갠 것을 수진(水塵)이라 합니다. 이는 양자(陽子) 또는 원자핵(原子核)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이 수진(水塵)을 1/7로 쪼갠 것을 금진(金塵)이라 합니다. 이는 소립자에(素粒子)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이 금진(金塵)을 1/7로 쪼갠 것이 미진(微塵)입니다. 소립자의 최소 단위를 쿼크라 하는데 여기에 해당한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부처님의 분석력은 첨단 물리학을 뛰어넘고 있음을 봅니다. 아무런 현대적 장비도 없으시면서 오직 직관력(直觀力)으로 분석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미진을 1/7로 쪼갠 것이 극미(極微)입니다. 이 이상은 더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입니다. 이를 인허진(隣虛塵)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하도 작아서 있다고도 없다고 못하는 비공비유(非空非有)라 합니다. 공(空)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진공(眞空)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일체 만물은 텅 빈 진공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묘유(妙有)지요. 이 진공으로부터 극미가 모여 결국은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산하대지(山河大地) 일체 만물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색불이공(色不異空). 위에서 색을 분석해 본 결과 색(色)은 공(空)으로 돌아감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물질들이 고정적으로 보이는 것 같아도 속에서는 끝없이 원자를 중심으로 분자가 돌고 원자 속에는 수많은 소립자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없이 변화생멸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 존재(色)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실체(實體)ㆍ주체(主體)ㆍ자성(自性)이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예를 들어 책상 앞에 있는 책이나 컴퓨터 심지어 사랑하는 이도 고정적이고 실재하는 것 같아도 시간이 흘러 인(因)과 연(緣)이 다하면 반드시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결국 공(空)입니다. 그래서 색은 공과 다르지 않다 하는 것입니다. 공불이색(空不異色)은 색불이공을(色不異空) 뒤집어 본 것인데 뒤집어 봐도 모두가 공이이라 색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은 자성(自性)이 없음을 말하고 자성이 없다는 것은 연기(緣起)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은 연기하는 존재의 실상입니다. 색은 모두 연기하는 존재인데 색은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인 것입니다. 그런데 색(色)은 일정한 자성이 없기에 공(空)한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여기 볼펜이 하나 있다고 했을 때 볼펜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몸체와 볼펜심, 그리고 스프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몸체도 세 부분으로 분리 되고, 볼펜심은 관과 잉크, 볼펜촉으로 되어 있지요. 이것이 결합되면 볼펜이라 하지요. 그런데 그 낱낱의 것을 놓고 볼펜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볼펜은 여러 가지로 조합되어 있습니다. 볼펜을 색이라 놓고 보면 부품은 여러 요소로 결합된 인(因)과 연(緣)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과 연인 부품이 결합되었을 때 볼펜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과 연인 부품도 수많은 인과 연이 모인 것이지요. 인과 연이 연기(緣起)하여 볼펜(色)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연기되는 것은 공이라 했으니 공이 아니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 예를 들면 여기 물이 있다고 할 때 물(色)은 h2 + o(空)의 화합물입니다. 수소와 산소는 보이지 않는 기체이지만 결합하면 물이 됩니다. 두 요소가 연기하여 물이 되었습니다. 물이 다시 분해 되면 수소와 산소가 됩니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입니다. 이와 같이 색은 곧 공한 것이며 공한 그 모습이 곧 색의 실상입니다.
색은 무상하여 변하고 흩어지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색의 실상은 공합니다. 공한 모습이 색의 실상입니다. 이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이상과 같이 색(色)을 물질로 번역하여 이 경문을 이해하였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렇게 물질로 놓고 이해를 해도 제행무상의 이법에 속하니 이해 못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이제 우리는 색(色)을 대상성이란 관점에서 이 경문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색(色)은 범어로 루파(rūpa 色)라 합니다. 물질이라고 보통 번역되는 말이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눈 앞에 펼쳐진 대상은 우리 인식 주간에 파악되어 대상성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지난 번 오온(五蘊)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나온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하면 우리는 사과를 본다고 하지만 실은 내 마음에 있던 사과에 대한 정보(種子)가 드러나 사과라고 보게 됩니다. 이것은 과거에 경험한 사과란 어떠 어떠한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기에 사과를 보는 순간 저것이 사과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사과에 대한 특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색(色)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식 주관에 드러납니다. 그러니 내마음이 내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 앞에 어떤 대상이 있다고 할 때 우리 인식 주관에 드러난 대상은(色)은 이렇게 저렇게 주관에 따라 다르게 인식 되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없다고 했습니다.(空) 중생들은 어떤 대상이 나타나면 늘 분별망상을 일으킵니다. 늘 유위법(有爲法)으로 바라봅니다. 유위법(有爲法)이란 어떤 법(法 現象)에 대하여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어떤 여성(혹은 남성)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보는 순간 제각기 눈은 어떻게 생겼고 코는 어떻고 피부는 어떻다는 등 생각이 분분합니다. 잘 생겼네 못 생겼네 판단하면서 쌍꺼풀 수술을 했네 안 했네 코를 성형했네 안 했네 하며 바라보고 키가 크다 작다, 뚱뚱하다 날씬하다는 등등 온갖 분별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인식 하는 사람의 분별망상일 뿐 여인이란 대상의 참모습은 아닙니다.(空) 그래서 그 드러난 모습(色)은 제각기 다르므로 진정한 본모습이라 할 수 없으므로 공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진정한 모습이 아니더라도(空) 여인이라는 드러난 모습은 있습니다.(色) 여기서 유의할 것은 공이란 성품이 비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일정한 자성(自性)이 없는 것을 공(空)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야바라밀을 성취한 성자(聖者)는 여인이라는 대상을 바라 볼 때(色) 분별망상을 떠나 있기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空) 즉 무위법(無爲法)으로 바라봅니다. 무위법(無爲法)이란 어떤 법(法 現象)에 대하여 분별망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여인을 바라보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미추를 떠난 여인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납니다.(空) 그래서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습니다. 색불이공(色不異空)입니다. 여인이라는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지만(空) 그 여인은 그 여인일 뿐입니다.(色) 그래서 공한 그 모습이 색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불이색(空不異色)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의 분상인 입장에서는 색(色)은 곧 공(空)이요 공(空)은 곧 색(色)의 실상임이 드러나기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늘 분별(分別)을 일으킵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고 했으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중생들의 늘 따지기를 좋아해서 분별을 일으키고 번뇌에 빠지게 됩니다. 늘 있다-없다에 골몰하고 곱다-밉다에 고민합니다. 그 모습이 공(空)하다고 하면 허무에 빠지고, 있다고 하면 망상에 빠집니다. '색(色)은 공(空)하다' '공(空)은 색(色)의 실상이다' 이렇게 알면 미혹에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이런 중생들의 특성을 잘 아시기에 색은 공과 다르지 않음을 설하시고 공은 다시 색과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 아리송하게 긴가민가하는 의심을 떨쳐 버리고자 직설적으로 색(色)은 곧 공(空)이요 공(空)은 곧 색(色)의 실상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분별망상을 떨쳐버리라는 선언적인 말씀입니다. 분별이 사라지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게 됩니다.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 공한 마음입니다. 공한 마음이 진여(眞如)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걸림없는 마음입니다. 색(色)에도 걸리지 않고 공(空)에도 걸리지 않는 그대로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색불이공(色不異空)이면 되는데 굳이 공불이색(空不異色)라 설한 뜻은 무엇일까요? 색(色)은 주관에 드러난 현상계(現象界)를 말합니다. 이 현상계는 공[理法界]과 다르지 않다고 하여 현상계를 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색(色)은 곧 공(空)이요, 공(空)은 곧 색(色)의 실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여 공부해 왔습니다. 무아(無我)란 곧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이니 무아(無我)는 곧 공(空)을 말합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은 색(色)이 곧 무아(無我)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설명이 좀 길어졌고 번다한데 이해가 되셨는지요? ^^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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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부분은 지난 번 올린 바 있으나 대폭 수정하여 올렸습니다. 왜냐하면 색을 물질로 파악하여 왔으나 최근 색을 단순히 물질로만 해석하는데는 문제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수정한 것입니다. 널리 양해 하시고 다시금 새롭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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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부처님은 과학적인 눈으로 바라보셨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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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이해가 되셨는지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대하여 색을 분석적으로 보아 공인 것이 아니라 색 저대로가 공이요 공이 곧 색인 것입니다. 이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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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사상이 아우러져 있다고 하니, 그 내용이 심오하고 방대하여, 몇마디로 설명하기는 쉽진 않을 겁니다. _()_
심오합지요. 시간을 내서 이에 대하여 진지하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법우님들과 함께 논의해 보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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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란 어떤 단순한 내용을 말하는것이 아니고, 있는 현상과 없는 형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 서도 이러한 유와 무의 세계를 초월한 내용이 공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꾸만 어려워 지는 공부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요....나무묘법연화경()()()
예, 공이란 없다는 말이거나 허무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은 연기(緣起)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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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긴 글을 읽기도 어려운데 해석하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저는 그냥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좋은 말이려니 하고 계속 쓰기만 했더니 조금씩 뜻을 알아가니 더욱 마음이 차분해 지네요.
예, 반야심경 속에 불교의 대의가 모두 깃들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살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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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님의 공부는 상당히 객관인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얼마나 많이 하셨기에... 덕분에 초심자인 저는 쉽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공부는 色卽無我이군요? 색은 곧 自性이 없는 것, 대상성이고, 마음작용이고, 고정적, 불변적인 실체로서의 我가 없는 것... 저는 마음속의 필름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_()_
예, 감사합니다. 이 부분은 반야심경을 이해하시는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지나시면 좀 수월하실 겁니다. 반야심경은 워낙 기본교리를 많이 깔고 있어서 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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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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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공부 하고 갑니다....나무묘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