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물건 별난 역사’ 선풍기
김윤식/ 시인
세계적으로 선풍기(扇風機)가 처음 출현한 시기는 1600년대라고 한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추의 무게를 이용하여 기어장치의 회전축을 돌려서 1장으로 된 커다란 부채를 시계추 모양으로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장치”였다고 한다. 그 후 태엽을 감아 사용하는 오늘날의 탁상선풍기 형이 출현한 때가 1850년대였다.
일설에는 최초의 기계적 장치를 가진 것으로는 1800년대 초, 중동에서 쓰인 ‘푼카’라는 선풍기와 1831년 러시아인 알렉산드르 사블루코프가 발명한 에어 펌프(Air Pump) 선풍기, 그리고 산업혁명 후 공장에서 물레바퀴의 동력으로 벨트를 돌려 바람을 일으키도록 한 선풍기가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은 전기식으로 된 선풍기는 미국의 에디슨이 고안해 낸 것이다. 미국에서 선풍기가 널리 보급된 것은 189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선풍기가 도입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른 외래 개화 문물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기록이 남아 있는데 선풍기에 대해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선풍기의 도입은 아마도 개항과 함께 입국한 서구 각국의 외교관이나 상인들, 혹은 일인들에 의해서였을 것이며, 시기도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일 것으로 추측된다.
“익일(翌日) 떠나 신가파(新嘉波, 싱가폴)로 향하니 <중략> 일기가 장마 날 같아 울증(鬱蒸)하기 짝이 없고 식당에는 선풍기의 바람이 없으면 식사를 못할 지경이 되었나이다.”
“물론 염열(炎熱)을 퇴치하는 방법에는 <중략> 고루거각 위에서 선풍기를 놓고 빙당수(氷糖水)를 마시면서 기국(棋局)으로 오로(烏鷺)를 쟁(爭)하는 것도 그의 하나일지요.”
“조선호텔이나 명월관, 국일관에서 선풍기 바람에 감기들 근심을 하면서 섬섬옥수가 따라주는 얼음보다 더 찬 맥주를 마시는 그러한 풍류는 오직 소수의 부신(富神)의 선민(選民)에게만 태운 복이다.”
인용한 글 중 맨 앞의 것은 1922년 3월호 개벽 잡지에 실린 박승철(朴勝喆)의 기행문 「독일 가는 길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8월호에 실린 야뢰(夜雷)라는 필자의 논설 「청량제(淸凉劑)」에서 발췌한 것이다. 마지막 글 역시도 같은 잡지 1923년 8월호에 실린 「서울의 여름」이라는 글의 일부이다.
글의 내용으로 보면 이때쯤은 선풍기가 도입된 후 이미 여러 해가 지나 일상 용품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던 것 같다. 필자들이 선풍기에 대해 별달리 낯설어 하거나 신기해하지 않고 덤덤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뒤의 두 필자의 글에서만 ‘선풍기 찬바람은 부자나 지체 높은 사람의 몫’이라는 뉘앙스가 풍긴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선풍기는 시일이 가면서 점차 시중에 널리 보급되었던 것 같다. 1926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는 선풍기의 원리에 대한 해설 기사를 싣고 있고, 1931년 여름에 들어서는 설치 요령이나 사용시 주의사항 같은 기사를 자세하게 일반 가정 상식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선풍기가 여전히 고가 사치품이라는 인식도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신문 1931년 1월 15일자는 “1931년식 모던(Modern)세(稅)”라며 ‘경성부에서 선풍기, 축음기, 라디오 같은 사치품에 일률적으로 세금을 부과할 것’이라는 기사를 싣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선풍기세’는 광복 이후인 1946년 9월, 미 군정장관이 법령 제109호를 발해 폐지할 때까지 부과되었다.
국내에는 1960년에 비로소 선풍기 양산 체제에 돌입했지만, 1970년대까지는 여전히 고가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거슬러 올라가 1931년 당시 경전(京電) 직원 정복을 차려입은 자가 수리를 빙자해 선풍기 3대를 사기한 사건에서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방, 미군부대 창고, 심지어는 국무회의실 선풍기까지도 절도의 대상이 되곤 했던 것이다. 귀하고 값나가는 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선풍기에 사용되는 전기를 훔치는 곧 도전(盜電) 기사도 심심치 않게 오르곤 했다. 일례로 전시(戰時)에도 그런 소행이 있었는지 1951년 9월 24일 민주신보가 개탄하고 있는데, 특히 ‘도전하는 종목이 주로 선풍기, 냉장고, 전열 네온사인 동력’이라고 지적한다.
장마가 그치면 뒤이어 찜통더위가 닥치리라고 한다. 그나마 이제 서민들이 이 혹서를 견뎌낼 수단은 ‘수고(手苦)로운’ 부채질 대신에 시원하게 땀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기계부채’ 선풍기뿐일 것이다.(2011. 7. 18. 굿모닝인천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