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 벌써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다. 영재 너는 한 달 째. 영등포행 기차를 탈 때마다 ‘어느 자리였을까?’ 몇 번 좌석이 영재의 이야기를 조용히 안고 있을까? 스무번 가까이 이 자리, 저 자리, 바꾸어 보았건만 어느 의자도 말이 없다. 수원역에서 영등포역까지 20분 남짓. 신은 없다. 아니, 신은 죽었다고 그토록 외치고 다녔건만 요즈음 기차에 몸을 실은 내내 기도를 한다. … 항상 남을 위하기만 하였던 그 친구가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하여 주십시오...” -한강성심병원 방명록 中 (경진여객 이태진)
박영재는 기억된다. ‘다른 일이 급한데 꼭 그래야 하느냐’는 핀잔을 들어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40여일간 성대역 앞 일인 시위를 했던 모습. 인기척도 없는 새벽, 고물트럭을 대놓고 혼자서 100여개의 행사 집기를 나르던 모습으로. 부지런함은 그의 몸에 배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가난에 익숙한데다, 아버지 마냥 동생들을 건사해 온 까닭이다.
박영재는 1968년 충남 서산에서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남의 집 농사일을, 모친은 허드렛일을 해주며 아이들을 키웠다. 영재 씨가 아직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부친의 별세로 살림이 더 어려워졌다. 그보다 다섯살 위의 형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가 돈을 벌었지만, 객지생활을 이어가기도 빠듯했다.
2000년대 초반, 딸 미송이와 함께ⓒ민중의소리
어린 영재는 머리가 좋았다. 같은 학교의 또래들이 건성건성 학교에 다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집안살림에 동생들까지 돌보면서도 반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동생 영석 씨는 지금도 둘째형(영재)이 막내동생과 자신을 앉혀놓고 국어와 천자문을 가르쳐주던 것, 같이 놀이를 해서 순번을 정하고는 방청소, 설거지, 마당쓸기를 나눠 하던 것이 생각난다고 했다.
공부 욕심이 많던 영재 씨는, 식당일에 논밭일까지 하는 어머니에게만 살림을 맡겨둘 수 없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서산의 서령버스에서 차장(안내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꼼꼼하고 성실한 성격 덕에 그는 어린 나이에도 직장일을 잘 해냈다. 요령이 붙을 무렵엔, 영재 씨는 양말에 동전을 숨겨와 동생들에게 용돈으로 나눠주며 어깨를 으쓱이기도 했다.
그렇게 버스 차장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영재 씨는 함바집 일에서 덤프트럭 운전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한 번은 몇달간 고기잡이 배를 타고 돌아온 적이 있는데, 산적 같은 머리에 얼굴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일은 힘든데 매운탕은 푸짐하게 먹었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서른 즈음엔 다시 버스회사로 돌아오는데 영재씨는 그곳에서 노동운동에 눈 뜨게 된다.
수원에서 ‘버스노민추’를 시작하다
영재 씨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시점은 분명치 않다. 다만 지인들을 통해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이태진(현 민주버스 경진여객지회 사무국장)은 2006년 4월 경진여객에 입사했다. 버스 노동자들은 노선에 투입되기 전 코스를 익히기 위한 연수를 받는데, 이 자리에서 이태진은 ‘박영재와 가까이 마라. 당신에게 피해만 갈 것이다.’라는 주의를 받았다. 연수기간이 끝나자 이태진은 박영재를 먼저 찾아갔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태진과 박영재는 금새 친해졌고, 두 사람의 인연은 박영재가 경진여객을 그만 둔 이후에도 계속됐다.
수원 민주버스노동자회 단합대회. 가운데 파란색 티셔츠를 입은 박영재가 사회를 보고 있다.ⓒ민중의소리
이태진은 박영재와의 대화들을 떠올리며, 2004년 무렵 박영재가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된 어떤 ‘결심’을 한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때는 영재 씨가 경진여객에 입사하고 1년쯤 뒤이다. “기사들의 처우가 너무 불합리하니까 영재가 회사에 항의하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으로)방향을 잡은 것이죠”
박영재와 절친했던 안동섭(현 통합진보당 사무총장)의 전언도 비슷하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못 배운 게 한이 맺혀 검정고시 공부를 했고, 운전 일을 하면서도 아는 것이 없으니 업신여기는 것 같고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해서 법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을 뿐이었다. 동지들과 만나기 전 전태일 평전도 그렇게 혼자 읽었다. 아는 게 있으니 동료들한테 설명해 주었고 회사에게 부당한 것은 따졌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노조가 어용이고 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따름이었다.”(박영재 당원 1주기 추모문집에서)
박영재의 2005년부터의 행적은 비교적 뚜렷하다. 그가 안동섭을 만난 게 2005년인데, 이 때는 그가 버스 ‘노민추’(노조민주화추진위) 활동을 시작한 직후로 보인다. 기댈 곳이 필요했던 영재 씨가 당시 안동섭 씨가 의장을 맡고 있던 민주노동당 수원시협의회를 찾아왔다. 영재 씨가 다니던 경진여객의 노동자들은 격일 근무로 하루 20~22시간을 일할 정도로 업주의 노동착취가 심각했지만, 사측과 결탁한 노조 때문에 근로조건 개선이 안되고 있었다.
경진여객엔 그를 포함해 서너명의 ‘야당’(노조집행부를 잡지 못한 민주파 활동가를 이렇게 부른다)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에 충실한 활동가는 박영재 뿐이었다. 다른 활동가들은 임금인상에 관심이 있을 뿐 이웃 버스회사 노동자들과의 연대에도 부정적이었다. 영재 씨가 주도한 야당은 대의원 선거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이 패배는 영재씨를 더욱 다그쳤다. 그는 수원 인근을 연고로 하는 경진여객, 삼경운수, 수원여객 등을 주축으로 ‘야당’을 묶어 수원 민주버스노동자회를 만들고 노조민주화 사업을 꾸준히 벌여나갔다. 박영재는 이태진에게 ‘노동자들이 좀 더 정치적으로 단결하고, 계획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이태진이 본 박영재는 “회사의 편법 운행에 맞서 홀로 정상운행을 하다 사측의 편에 있는 동료 기사에게 밥을 먹다 뺨을 맞아도 동료이기에 말없이 맞아 주었지만, 불만이 있어도 아무 말 못하는 동료들을 위하여 사장에게는 항변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추모문집)
“제가 서류 하나를 부탁했더니 ‘형님, 내일 몇 시 차에요?’ 그래요. ‘내일 5시 차다’ 이러면, 다음날 새벽 4시 반에 회사로 찾아와요. 서류 전해주러.”(이태진)
“한 동안 어떤 건설현장 입구에서 방송차 대놓고 혼자 싸움을 했어요. 업체사장이 임금을 체불시키고 있다는 거에요. 사장이 합의하자고 몇 번이나 연락이 왔는데 안 만나고 있대요. 그렇게 자기 일까지 못하면서 다른 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모두 받아준 거에요.”(안동섭)
선봉대 티셔츠를 ‘교복’처럼 입고
박영재ⓒ민중의소리
영재 씨는 2006년 말 경진여객을 나오게 된다. 박영재는 “영재, 힘들어서 관두는가?”라는 이태진의 질문에 “그런 점도 일말은 있겠지만, 좀 더 많은 버스노동자들을 위해 일하고자 합니다”라고 답했다. 박영재는 생계를 위해 덤프 운전을 하면서도 버스노동자회를 확장시켜 나갔고, 스스로의 약속처럼 더 많이 자신을 썼고 더 많은 노동자를 만났다.
이 무렵엔 안동섭과의 인연이 깊어졌다. 박영재가 새로운 모색을 하던 2007년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전국적으로 비정규직센터를 개척하던 시기다. 2년간을 곁에서 지켜보며 죽이 맞은 두 사람은 수원에 비정규직센터를 만들기로 하고, 각각 소장과 사무국장을 나눠맡았다.
낮에는 제조업 노동자들에서 식당 노동자들까지 다양한 업종의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밤에는 전태일 평전, 제종철 평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노동법해설 등을 읽어대며 그는 스스로를 조직가로 다져나갔다. 전태일 평전은 인상깊은 대목을 메모해 가며 여러 번 읽었고, 어떤 때는 노동운동을 하며 떠오르는 단상들을 시로 써놓기도 했다. 비정규직센터 일을 하다가 법 지식이 더 필요해진 박영재는 방송통신대에도 입학했다.
“노동법을 잘 알아야 되겠다. 그래야 기업주들한테 업신여김 당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 그래서 법학과를 다닌 거에요.”(안동섭)
박영재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늘려갔다. 활동을 위해 계속 새벽잠을 쪼개 시간을 만들다보니, 수면시간이 하루 3~4시간 뿐인 날이 많았다. 그럴수록 영재 씨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는 노동운동을 시작한 이후론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7만원 짜리 옥탑방에 살면서,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 행사 때 나오는 옷을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오죽하면 함께 노동운동을 하는 친한 동생이 ‘답답하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영재 씨가 덤프를 하면 못해도 250만원을 받을 수 있는데 과감하게 (비정규직센터 사무국장을 맡기로)결단을 했죠. 상근비 70만원도 꼬박꼬박 나오지는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내색하는 일이 없었어요.” (안동섭)
그로부터 3년 뒤인 2010년 영재 씨에겐 한차례 위기가 있었다. 수원에서 진보정치의 거점을 만들려 했던 노력의 잇딴 실패와, 두 자녀의 양육비를 보내지 못 할 정도로 어려워진 형편, 그리고 경진여객 시절 얻게 된 목 디스크의 악화 등 이런저런 막막함이 한꺼번에 그를 찾아왔다. 술을 가까이 하지 않던 영재 씨가, 하루는 당 행사 뒷풀이 자리에서 폭음을 한 뒤 ‘다 그만두겠다’며 핸드폰까지 내던지고 나간 일이 있었다.
“그 다음날에도 본인이 너무 잘못했다고, 당의 간부로서 너무 미안해서 (간부직을)못하겠다고. 힘들어했죠.”(안동섭)
그가 술을 완전히 끊은 것도 이 때였다고 한다. 영재 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박영재가 5년간 사무국장을 도맡은 수원 민주버스노동자회는 이 무렵 경기 전역으로 조직대상을 확대할 만큼 성장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뛰어다니다
당 행사에서 지역위 사람들과 함께ⓒ민중의소리
그 해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진보대통합’ 원칙에 합의했고, 2010년 6월 지방선거 이후엔 국민참여당도 진보대통합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전통적 진보노선의 민주노동당과 사민주의 색채의 진보신당 인사들, 그리고 자유주의 개혁 노선의 국민참여당의 통합이라는 이 역사적 실험은, 2012년 4.11총선까지도 순조롭게만 보였다. 실로 통합진보당은 진보대통합 노선을 통해,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최초로 13석의 단일진보정당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5월 2일 참여당 출신의 오옥만, 고영삼을 비롯한 부정선거 주범들이 만든 허위 ‘진상조사보고서’가 발표되고, ‘진보적 정권교체’ 전략의 한 축이었던 당권파에게 모든 혐의를 덮어씌우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다. 이 모략극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데는 6개월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 사이에 진보당과 야권연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진실은 양심적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드러났고, 검찰 수사에서도 이른바 ‘혁신계’ 인사들과 1,2차 진상조사위원들이 구속되면서 사건의 성격은 명명백백해졌다. 즉, 총선에서 명실상부한 제3당으로 떠오른 통합진보당에 대한 공안기관(민주-진보 야권연대가 본격화된 2010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국정원이 '진보적 정권교체'를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는 증거들이 최근 드러나고 있다)과 조선일보 등 우익진영의 공세, 통합진보당 내 ‘혁신계’의 권력욕과 당권파에 대한 시기, 그리고 색깔론에 대한 편승이 어우러져 초유의 매카시즘 광풍을 불러온 것이다.
박영재 당원은 처음엔 심상정, 노회찬 등 과거 민주노동당을 깨고 나간 세력과 다시 통합하는데 반대했지만, 그 후론 주위사람들에게 진보대통합의 필요성을 설득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영재 씨는 2012년 총선을 앞두고는,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40여일 간 통합진보당을 알리기 위한 일인 시위를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했다. 다만, 스스로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책임감이 강하고 우직한 성격이었기에, 박영재는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혁신계 인사들의 행태와 종북몰이에 더 많이 분노했고, 결국 분신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통합진보당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조선일보부터 한겨레에 이르기까지 언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혁신계는, 허위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로 이석기, 김재연 당선자 제명 등 당권파 숙청을 시작한다. 5월 12일 중앙위 의장을 맡은 심상정 공동대표가 중앙위원 1/3의 반대에도 ‘만장일치’를 선언하며 당헌개정을 강행하자, 박영재는 당원들과 함께 의장석을 점거한다. 이 중앙위에서의 물리적 충돌 직후 진보당에 대한 외부의 압박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중앙위 이후에도 박영재는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태진은 박영재의 분신 이틀 전인 2012년 5월 12일에 그를 찾아온 박영재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형님, 신문에 난 거하고 실제하고 많이 다르요”
“그런 이야기 안 해도 다르다는 거 (사람들이)다 알기다”
두 자녀와 함께ⓒ민중의소리
이태진에 의하면 영재 씨는 주위 사람들에게, 또 자신이 아는 사람의 주위사람들에게 사태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친구는 어딜 가도 이 사람, 저 사람 전화하고 만나러 다녔습니다. 혹시나 잘못 알까 하여, 이게 진실이라고 알리기 위해서요”(이태진)
다음날인 13일에도 영재 씨는 덤프 운전을 나갔다. 그가 분신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4일 새벽의 전자 중앙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혁신계는 초유의 전자 중앙위를 열어 과반수 참석 규정 등을 어긴 채 경쟁부문 비례의원 총사퇴안(사실상 이석기, 김재연 강제 사퇴안)을 처리했다. 새벽 3시경 전자중앙위를 지켜보던 영재 씨는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에게 남기는 편지를 작성했다. 이 편지에서 영재 씨는 평소 활동할 때처럼 꼼꼼하게 당헌당규를 근거로 이 전자중앙위의 절차적 하자를 지적했고, 허위사실로 가득찬 진상보고서의 폐기, 의장단의 독재 중단 등을 요구했다.
영재 씨는 날이 밝은 뒤 수원시당 동료들과의 점심식사 자리에도 참석했다. 그는 음식을 많이 남기기는 했지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고 평소와 같이 말없이 웃어보이곤 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오후 2시가 넘어 박영재는 우체국에 갈 일이 있다며 일행과 헤어졌다.
“일 안 나가니까 바람 좀 쐬려구요. 우체국도 가야 되고요”(박영재)
영재 씨는 실제 우체국에 갔고, 거기서 지문을 날인한 유서를 몇몇 지인들에게 보냈다. 그가 유서에 지문까지 날인한 것은, 과거와 같은 검찰과 국과수의 ‘유서대필’ 조작극이 재현될까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곧바로 수원역에서 서울 영등포역까지 열차로 이동한 뒤, 5분 남짓인 대방동 통합진보당사까지 택시를 탔다. 그가 이 택시 안에서 작성한 문자메시지 역시 예약발송 기능을 선택해 15일에야 지인들에게 도착했다. 박영재가 통합진보당사 앞에서 분신한 것은 오후 6시경이었다.
분신 당시에도 박영재 씨는 평소처럼 작업복 바지에 안전화를 착용하고 있었고, 가방 안에 남겨진 유품으로는 허기를 달랜 듯한 비닐랩 조각과 음료수캔, 그리고 반쯤 불에 탄 제종철 평전이 있었다.
박영재는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붇는 순간부터, 목격자들에 의해 불이 전부 꺼질 때까지 꼿꼿이 서 있었다고 한다.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화기를 들이마신 그는, 분신 40여일 뒤인 2012년 6월 22일 영면에 들었다. 늘 동지를 위하고, 자신을 위해선 무엇 하나 바라지 않았던 박영재는 유서에 그런 자신의 삶이 “행복했다”고 썼다.
동지들에게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함께 가자!”
행복했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고 학습하고 실천했던 나날들이 말입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자주 민주 통일 조국을 만들어 주십시오.
2005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저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당당한 노동자가 되었고 민중의 삶과 나의 삶을 바꿔내는 일도 했습니다.
...(중략)...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계획하고 있는 것과 약속한 일들, 이러한 것을 다 이루지 못하는 심정은 아프지만, 일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소중한 일, 중요한 일, 급한 일, 그 중에서 선택을 해야 되겠죠.
저의 판단이 또 다시 파국으로 몰고 가면 어떻게 하나 많은 고민과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책임이 있는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합니다.
건설노동자 박영재
문형구 기자 Copyrights ⓒ 민중의소리 & vop.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6월 10일 벌써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다. 영재 너는 한 달 째. 영등포행 기차를 탈 때마다 ‘어느 자리였을까?’ 몇 번 좌석이 영재의 이야기를 조용히 안고 있을까? 스무번 가까이 이 자리, 저 자리, 바꾸어 보았건만 어느 의자도 말이 없다. 수원역에서 영등포역까지 20분 남짓. 신은 없다. 아니, 신은 죽었다고 그토록 외치고 다녔건만 요즈음 기차에 몸을 실은 내내 기도를 한다. … 항상 남을 위하기만 하였던 그 친구가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하여 주십시오...” -한강성심병원 방명록 中 (경진여객 이태진)
박영재는 기억된다. ‘다른 일이 급한데 꼭 그래야 하느냐’는 핀잔을 들어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40여일간 성대역 앞 일인 시위를 했던 모습. 인기척도 없는 새벽, 고물트럭을 대놓고 혼자서 100여개의 행사 집기를 나르던 모습으로. 부지런함은 그의 몸에 배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가난에 익숙한데다, 아버지 마냥 동생들을 건사해 온 까닭이다.
박영재는 1968년 충남 서산에서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남의 집 농사일을, 모친은 허드렛일을 해주며 아이들을 키웠다. 영재 씨가 아직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부친의 별세로 살림이 더 어려워졌다. 그보다 다섯살 위의 형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가 돈을 벌었지만, 객지생활을 이어가기도 빠듯했다.
2000년대 초반, 딸 미송이와 함께ⓒ민중의소리
어린 영재는 머리가 좋았다. 같은 학교의 또래들이 건성건성 학교에 다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집안살림에 동생들까지 돌보면서도 반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동생 영석 씨는 지금도 둘째형(영재)이 막내동생과 자신을 앉혀놓고 국어와 천자문을 가르쳐주던 것, 같이 놀이를 해서 순번을 정하고는 방청소, 설거지, 마당쓸기를 나눠 하던 것이 생각난다고 했다.
공부 욕심이 많던 영재 씨는, 식당일에 논밭일까지 하는 어머니에게만 살림을 맡겨둘 수 없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서산의 서령버스에서 차장(안내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꼼꼼하고 성실한 성격 덕에 그는 어린 나이에도 직장일을 잘 해냈다. 요령이 붙을 무렵엔, 영재 씨는 양말에 동전을 숨겨와 동생들에게 용돈으로 나눠주며 어깨를 으쓱이기도 했다.
그렇게 버스 차장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영재 씨는 함바집 일에서 덤프트럭 운전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한 번은 몇달간 고기잡이 배를 타고 돌아온 적이 있는데, 산적 같은 머리에 얼굴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일은 힘든데 매운탕은 푸짐하게 먹었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서른 즈음엔 다시 버스회사로 돌아오는데 영재씨는 그곳에서 노동운동에 눈 뜨게 된다.
수원에서 ‘버스노민추’를 시작하다
영재 씨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시점은 분명치 않다. 다만 지인들을 통해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이태진(현 민주버스 경진여객지회 사무국장)은 2006년 4월 경진여객에 입사했다. 버스 노동자들은 노선에 투입되기 전 코스를 익히기 위한 연수를 받는데, 이 자리에서 이태진은 ‘박영재와 가까이 마라. 당신에게 피해만 갈 것이다.’라는 주의를 받았다. 연수기간이 끝나자 이태진은 박영재를 먼저 찾아갔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태진과 박영재는 금새 친해졌고, 두 사람의 인연은 박영재가 경진여객을 그만 둔 이후에도 계속됐다.
수원 민주버스노동자회 단합대회. 가운데 파란색 티셔츠를 입은 박영재가 사회를 보고 있다.ⓒ민중의소리
이태진은 박영재와의 대화들을 떠올리며, 2004년 무렵 박영재가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된 어떤 ‘결심’을 한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때는 영재 씨가 경진여객에 입사하고 1년쯤 뒤이다. “기사들의 처우가 너무 불합리하니까 영재가 회사에 항의하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으로)방향을 잡은 것이죠”
박영재와 절친했던 안동섭(현 통합진보당 사무총장)의 전언도 비슷하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못 배운 게 한이 맺혀 검정고시 공부를 했고, 운전 일을 하면서도 아는 것이 없으니 업신여기는 것 같고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해서 법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을 뿐이었다. 동지들과 만나기 전 전태일 평전도 그렇게 혼자 읽었다. 아는 게 있으니 동료들한테 설명해 주었고 회사에게 부당한 것은 따졌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노조가 어용이고 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따름이었다.”(박영재 당원 1주기 추모문집에서)
박영재의 2005년부터의 행적은 비교적 뚜렷하다. 그가 안동섭을 만난 게 2005년인데, 이 때는 그가 버스 ‘노민추’(노조민주화추진위) 활동을 시작한 직후로 보인다. 기댈 곳이 필요했던 영재 씨가 당시 안동섭 씨가 의장을 맡고 있던 민주노동당 수원시협의회를 찾아왔다. 영재 씨가 다니던 경진여객의 노동자들은 격일 근무로 하루 20~22시간을 일할 정도로 업주의 노동착취가 심각했지만, 사측과 결탁한 노조 때문에 근로조건 개선이 안되고 있었다.
경진여객엔 그를 포함해 서너명의 ‘야당’(노조집행부를 잡지 못한 민주파 활동가를 이렇게 부른다)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에 충실한 활동가는 박영재 뿐이었다. 다른 활동가들은 임금인상에 관심이 있을 뿐 이웃 버스회사 노동자들과의 연대에도 부정적이었다. 영재 씨가 주도한 야당은 대의원 선거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이 패배는 영재씨를 더욱 다그쳤다. 그는 수원 인근을 연고로 하는 경진여객, 삼경운수, 수원여객 등을 주축으로 ‘야당’을 묶어 수원 민주버스노동자회를 만들고 노조민주화 사업을 꾸준히 벌여나갔다. 박영재는 이태진에게 ‘노동자들이 좀 더 정치적으로 단결하고, 계획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이태진이 본 박영재는 “회사의 편법 운행에 맞서 홀로 정상운행을 하다 사측의 편에 있는 동료 기사에게 밥을 먹다 뺨을 맞아도 동료이기에 말없이 맞아 주었지만, 불만이 있어도 아무 말 못하는 동료들을 위하여 사장에게는 항변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추모문집)
“제가 서류 하나를 부탁했더니 ‘형님, 내일 몇 시 차에요?’ 그래요. ‘내일 5시 차다’ 이러면, 다음날 새벽 4시 반에 회사로 찾아와요. 서류 전해주러.”(이태진)
“한 동안 어떤 건설현장 입구에서 방송차 대놓고 혼자 싸움을 했어요. 업체사장이 임금을 체불시키고 있다는 거에요. 사장이 합의하자고 몇 번이나 연락이 왔는데 안 만나고 있대요. 그렇게 자기 일까지 못하면서 다른 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모두 받아준 거에요.”(안동섭)
선봉대 티셔츠를 ‘교복’처럼 입고
박영재ⓒ민중의소리
영재 씨는 2006년 말 경진여객을 나오게 된다. 박영재는 “영재, 힘들어서 관두는가?”라는 이태진의 질문에 “그런 점도 일말은 있겠지만, 좀 더 많은 버스노동자들을 위해 일하고자 합니다”라고 답했다. 박영재는 생계를 위해 덤프 운전을 하면서도 버스노동자회를 확장시켜 나갔고, 스스로의 약속처럼 더 많이 자신을 썼고 더 많은 노동자를 만났다.
이 무렵엔 안동섭과의 인연이 깊어졌다. 박영재가 새로운 모색을 하던 2007년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전국적으로 비정규직센터를 개척하던 시기다. 2년간을 곁에서 지켜보며 죽이 맞은 두 사람은 수원에 비정규직센터를 만들기로 하고, 각각 소장과 사무국장을 나눠맡았다.
낮에는 제조업 노동자들에서 식당 노동자들까지 다양한 업종의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밤에는 전태일 평전, 제종철 평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노동법해설 등을 읽어대며 그는 스스로를 조직가로 다져나갔다. 전태일 평전은 인상깊은 대목을 메모해 가며 여러 번 읽었고, 어떤 때는 노동운동을 하며 떠오르는 단상들을 시로 써놓기도 했다. 비정규직센터 일을 하다가 법 지식이 더 필요해진 박영재는 방송통신대에도 입학했다.
“노동법을 잘 알아야 되겠다. 그래야 기업주들한테 업신여김 당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 그래서 법학과를 다닌 거에요.”(안동섭)
박영재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늘려갔다. 활동을 위해 계속 새벽잠을 쪼개 시간을 만들다보니, 수면시간이 하루 3~4시간 뿐인 날이 많았다. 그럴수록 영재 씨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는 노동운동을 시작한 이후론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7만원 짜리 옥탑방에 살면서,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 행사 때 나오는 옷을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오죽하면 함께 노동운동을 하는 친한 동생이 ‘답답하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영재 씨가 덤프를 하면 못해도 250만원을 받을 수 있는데 과감하게 (비정규직센터 사무국장을 맡기로)결단을 했죠. 상근비 70만원도 꼬박꼬박 나오지는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내색하는 일이 없었어요.” (안동섭)
그로부터 3년 뒤인 2010년 영재 씨에겐 한차례 위기가 있었다. 수원에서 진보정치의 거점을 만들려 했던 노력의 잇딴 실패와, 두 자녀의 양육비를 보내지 못 할 정도로 어려워진 형편, 그리고 경진여객 시절 얻게 된 목 디스크의 악화 등 이런저런 막막함이 한꺼번에 그를 찾아왔다. 술을 가까이 하지 않던 영재 씨가, 하루는 당 행사 뒷풀이 자리에서 폭음을 한 뒤 ‘다 그만두겠다’며 핸드폰까지 내던지고 나간 일이 있었다.
“그 다음날에도 본인이 너무 잘못했다고, 당의 간부로서 너무 미안해서 (간부직을)못하겠다고. 힘들어했죠.”(안동섭)
그가 술을 완전히 끊은 것도 이 때였다고 한다. 영재 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박영재가 5년간 사무국장을 도맡은 수원 민주버스노동자회는 이 무렵 경기 전역으로 조직대상을 확대할 만큼 성장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뛰어다니다
당 행사에서 지역위 사람들과 함께ⓒ민중의소리
그 해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진보대통합’ 원칙에 합의했고, 2010년 6월 지방선거 이후엔 국민참여당도 진보대통합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전통적 진보노선의 민주노동당과 사민주의 색채의 진보신당 인사들, 그리고 자유주의 개혁 노선의 국민참여당의 통합이라는 이 역사적 실험은, 2012년 4.11총선까지도 순조롭게만 보였다. 실로 통합진보당은 진보대통합 노선을 통해,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최초로 13석의 단일진보정당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5월 2일 참여당 출신의 오옥만, 고영삼을 비롯한 부정선거 주범들이 만든 허위 ‘진상조사보고서’가 발표되고, ‘진보적 정권교체’ 전략의 한 축이었던 당권파에게 모든 혐의를 덮어씌우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다. 이 모략극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데는 6개월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 사이에 진보당과 야권연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진실은 양심적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드러났고, 검찰 수사에서도 이른바 ‘혁신계’ 인사들과 1,2차 진상조사위원들이 구속되면서 사건의 성격은 명명백백해졌다. 즉, 총선에서 명실상부한 제3당으로 떠오른 통합진보당에 대한 공안기관(민주-진보 야권연대가 본격화된 2010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국정원이 '진보적 정권교체'를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는 증거들이 최근 드러나고 있다)과 조선일보 등 우익진영의 공세, 통합진보당 내 ‘혁신계’의 권력욕과 당권파에 대한 시기, 그리고 색깔론에 대한 편승이 어우러져 초유의 매카시즘 광풍을 불러온 것이다.
박영재 당원은 처음엔 심상정, 노회찬 등 과거 민주노동당을 깨고 나간 세력과 다시 통합하는데 반대했지만, 그 후론 주위사람들에게 진보대통합의 필요성을 설득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영재 씨는 2012년 총선을 앞두고는,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40여일 간 통합진보당을 알리기 위한 일인 시위를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했다. 다만, 스스로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책임감이 강하고 우직한 성격이었기에, 박영재는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혁신계 인사들의 행태와 종북몰이에 더 많이 분노했고, 결국 분신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통합진보당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조선일보부터 한겨레에 이르기까지 언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혁신계는, 허위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로 이석기, 김재연 당선자 제명 등 당권파 숙청을 시작한다. 5월 12일 중앙위 의장을 맡은 심상정 공동대표가 중앙위원 1/3의 반대에도 ‘만장일치’를 선언하며 당헌개정을 강행하자, 박영재는 당원들과 함께 의장석을 점거한다. 이 중앙위에서의 물리적 충돌 직후 진보당에 대한 외부의 압박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중앙위 이후에도 박영재는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태진은 박영재의 분신 이틀 전인 2012년 5월 12일에 그를 찾아온 박영재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형님, 신문에 난 거하고 실제하고 많이 다르요”
“그런 이야기 안 해도 다르다는 거 (사람들이)다 알기다”
두 자녀와 함께ⓒ민중의소리
이태진에 의하면 영재 씨는 주위 사람들에게, 또 자신이 아는 사람의 주위사람들에게 사태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친구는 어딜 가도 이 사람, 저 사람 전화하고 만나러 다녔습니다. 혹시나 잘못 알까 하여, 이게 진실이라고 알리기 위해서요”(이태진)
다음날인 13일에도 영재 씨는 덤프 운전을 나갔다. 그가 분신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4일 새벽의 전자 중앙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혁신계는 초유의 전자 중앙위를 열어 과반수 참석 규정 등을 어긴 채 경쟁부문 비례의원 총사퇴안(사실상 이석기, 김재연 강제 사퇴안)을 처리했다. 새벽 3시경 전자중앙위를 지켜보던 영재 씨는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에게 남기는 편지를 작성했다. 이 편지에서 영재 씨는 평소 활동할 때처럼 꼼꼼하게 당헌당규를 근거로 이 전자중앙위의 절차적 하자를 지적했고, 허위사실로 가득찬 진상보고서의 폐기, 의장단의 독재 중단 등을 요구했다.
영재 씨는 날이 밝은 뒤 수원시당 동료들과의 점심식사 자리에도 참석했다. 그는 음식을 많이 남기기는 했지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고 평소와 같이 말없이 웃어보이곤 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오후 2시가 넘어 박영재는 우체국에 갈 일이 있다며 일행과 헤어졌다.
“일 안 나가니까 바람 좀 쐬려구요. 우체국도 가야 되고요”(박영재)
영재 씨는 실제 우체국에 갔고, 거기서 지문을 날인한 유서를 몇몇 지인들에게 보냈다. 그가 유서에 지문까지 날인한 것은, 과거와 같은 검찰과 국과수의 ‘유서대필’ 조작극이 재현될까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곧바로 수원역에서 서울 영등포역까지 열차로 이동한 뒤, 5분 남짓인 대방동 통합진보당사까지 택시를 탔다. 그가 이 택시 안에서 작성한 문자메시지 역시 예약발송 기능을 선택해 15일에야 지인들에게 도착했다. 박영재가 통합진보당사 앞에서 분신한 것은 오후 6시경이었다.
분신 당시에도 박영재 씨는 평소처럼 작업복 바지에 안전화를 착용하고 있었고, 가방 안에 남겨진 유품으로는 허기를 달랜 듯한 비닐랩 조각과 음료수캔, 그리고 반쯤 불에 탄 제종철 평전이 있었다.
박영재는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붇는 순간부터, 목격자들에 의해 불이 전부 꺼질 때까지 꼿꼿이 서 있었다고 한다.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화기를 들이마신 그는, 분신 40여일 뒤인 2012년 6월 22일 영면에 들었다. 늘 동지를 위하고, 자신을 위해선 무엇 하나 바라지 않았던 박영재는 유서에 그런 자신의 삶이 “행복했다”고 썼다.
동지들에게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함께 가자!”
행복했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고 학습하고 실천했던 나날들이 말입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자주 민주 통일 조국을 만들어 주십시오.
2005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저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당당한 노동자가 되었고 민중의 삶과 나의 삶을 바꿔내는 일도 했습니다.
...(중략)...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계획하고 있는 것과 약속한 일들, 이러한 것을 다 이루지 못하는 심정은 아프지만, 일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소중한 일, 중요한 일, 급한 일, 그 중에서 선택을 해야 되겠죠.
저의 판단이 또 다시 파국으로 몰고 가면 어떻게 하나 많은 고민과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책임이 있는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합니다.
건설노동자 박영재
문형구 기자 Copyrights ⓒ 민중의소리 & vop.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첫댓글 박영재 동지처럼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