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의 의지로 형성된 東아시아의 기본틀
사회 오늘 좌담에서 토론할 주제는 新羅의 中古期, 즉 法興王(법흥왕)부터
眞德女王(진덕여왕)까지 140년 간(서기 514∼654)입니다. 이 시기야말로
新羅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른 준비기간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사상 세 번째 통일을 앞둔 오늘의 한국인에게 신라의 삼국통일은
대단히 교훈적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욱이 북한의 「조선전사」와 「조선통사」는 高句麗 중심주의를 교조화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있는데, KBS TV가 토요일 오후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방영하는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에서도 최근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은 고려의 후삼국통일」이라는 북한 측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許文道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高句麗가 통일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지만, 그것은 당시 高句麗의
실력이나 東아시아 세계의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東아시아 질서는 新羅의 삼국통일에 의해 그후 1300년을 지배하는 기본틀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唐(당)이 원한 것도,
倭(왜)가 원한 것도 아닌, 新羅의 의지로 이룩된 것입니다. 全세계적으로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안정된 국제질서의 틀을 만든 것은 그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통일전쟁은 660년의 백제 의자왕의 항복과 668년의 평양성 함락으로 끝났던 것이 아니라 676년까지 계속된 羅唐(나당)전쟁의 승전에
의해 종결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16년 간에 걸쳐 국운을 걸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신라의 체력, 그것이 과연 어디서 나왔는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金炯孝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발전사적 의미를 과소평가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스스로 허무는 자해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그러면 신라 中古期를 개막시킨 임금인 法興王(514~540)부터 얘기를 풀어 가기로 하죠. 524년에 건립된 울진 鳳坪里 新羅碑(봉평리 신라비)에서는 法興王을 牟卽智寐錦王(모즉지매금왕)이라고 했고, 울주 川前里
書石(천전리 서석)의 乙卯銘(을묘명: 535)에는 聖法興大王(성법흥대왕), 같은 書石의 己未銘(기미명: 539)에는 卽智太王(모즉지태왕)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法興王에 대한 칭호가 시기에 따라 달라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영토적·경제적 기반 마련
朱甫暾 鳳坪 신라비에 기록된 모즉지는 法興王의 이름이고, 매금은 麻立干(마립간) 또는 이사금+마립간을 뜻합니다. 이 碑에서는 法興王의 출신
部名도 기술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그가 斯盧6部(사로6부) 출신 귀족의 대표자라는 위상에서 완전히 탈각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울주 川前里 書石에서 法興王은 大王 또는 太王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은 法興王이 초월자의 위상으로 급격히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許文道 法興王에서 眞興王(진흥왕: 540∼575)까지의 정치과정은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 성립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신라는 法興·眞興王대에 정비한 中古期의 핵심적인 군사조직인 6停(정) 군단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정복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영토적·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朱甫暾 中古期의 신라는 汎내물왕(356∼402)系 귀족세력에게 집중되어
있던 정치권력을 중앙행정관부 단위로 분산시킴으로써 왕권 강화를 유도했습니다. 法興王 3년(516)에 兵部令, 法興王 4년(517)에 兵部, 法興王 18년(531)에 上大等을 설치하거나 임명한 것 모두가 그러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上大等은 法興王 14년(527)에 왕실 중심으로 불교를 공인한
데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을 제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습니다.
佛敎王名 時代의 전개
사회 신라는 法興王 때부터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죠. 불교 公認, 국가체제
정비, 영토확장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朱甫暾 병부의 설치, 公服(공복)의 제정, 律令(율령)의 반포, 독자적 연호의 사용 등 일련의 새로운 정치행위는 울진 봉평비의 내용에서도 확인됩니다. 신라는 불교 公認을 통해 사상을 통일하고, 정복전쟁을 합리화해 나갑니다.
사회 신라 사람들은 너무 화끈했던 것 아닙니까. 法興王과 眞興王은 모두
출가하여 각각 法空과 法雲이란 僧名을 가졌으며, 진평왕과 그 부인은 석가의 부모 이름인 白淨(백정)과 摩耶(마야)라고 일컬었거든요.
朱甫暾 그래서 신라의 中古期를 佛敎王名 時代(불교왕명 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 불교 공인은 신라보다 무려 150년이나 빨랐으나 그것이 밑바닥 백성들에게 확산되는 덴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신라에서는 불교가 수용되자마자 그 확산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으며 기념비적인 불교 건축물이나 예술품 등을 가장 많이
창출했습니다.
金炯孝 신라 불교의 護國性(호국성)은 매우 특이합니다. 고구려 승려의
경우 道敎를 중시하고 불교를 푸대접하는 등의 종교정책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나라 밖으로 나돌며 국제적 활동에 전념한 승려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불교를 篤信(독신)한 梁武帝(양무제)와 깊게 교류하면서 불교철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僧朗(승랑), 일본으로 건너가 쇼도쿠(聖德) 태자의 스승이 되었던 惠慈(혜자), 일본에 먹과 벼루를 전하면서 法隆寺(법륭사)의
금당벽화를 그린 曇徵(담징), 일본 三論宗의 시조가 된 惠灌(혜관) 등은 모두 국제적으로 활동한 고구려 고승들입니다. 고구려 승려 惠亮(혜량)은 眞興王 때 신라의 國師로 초빙되기까지 했습니다.
朱甫暾 거기엔 사연이 좀 있었죠. 신라의 居柒夫(거칠부)가 소시적에 고구려를 정탐하기 위해 머리를 깎고 고구려에 잠입했다가 惠亮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때 惠亮은 居柒夫가 신라 사람인 것을 눈치채고 급히 귀국하게 함으로써 체포를 모면케 했습니다. 귀국 후 환속한 居柒夫는
신라의 장군으로 출세하여 한강 이북으로 북진하다가 마침 고구려의 내분을 피해 남하하던 惠亮과 재회했습니다. 惠亮은 곧 신라 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僧統(승통)의 지위에 올라 신라의 百座講會·八關會를 주재했습니다.
종교를 국가에 종속시킨 先進性
金炯孝 고구려 승려는 국가의식보다 불교의 보편주의를 더욱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慈藏(자장), 圓光(원광), 元曉(원효), 義相(의상) 등 신라
승려들은 자기 나라를 신성시하는 상징조작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신라의
승려들이 양양 낙산에서 관세음보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등의 佛國土 사상과 관련한 설화가 그런 것들입니다. 물론 불교 자체는 중생을 제도하는 고등종교이지만, 신라인들은 그런 불교의 보편성에다 고유의 국가의식을 결합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신라의 정신문화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가 왜 삼국통일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를 특수한 가치의 국가에 종속시키는 선진적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거기엔 지도층의 분골쇄신, 위국헌신, 솔선수범과 같은 행동윤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朱甫暾 신라인들의 국가의식이 강하고 불교가 호국적이라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만, 고구려인들에겐 그런 모습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저는 그 이유를 고구려가 너무 다양한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지배층은 貊族(맥족)이며 그 바탕을 이루는 종족으로서 濊族(예족)이 있고, 그 변방지대에 靺鞨族(말갈족)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엔 국가 중심 의식보다 자기 종족 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百濟의 경우 다수의 피지배층은 馬韓族(마한족)인데, 지배집단은 북쪽에서 남하한 맥족이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는 종족구성이 복잡했던 만큼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결속력이 굳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許文道 신라의 경우도 결코 단일 종족국가라고 할 수는 없지요. 신석기시대에 숱한 고인돌을 남긴 토착 농경민, 중국 秦(진)나라의 혹정을 피해 망명해 온 사람들, 고조선 유민, 낙랑 유민 등의 후예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朱甫暾 그런 것들은 중국 쪽 기록에 의한 것입니다. 저는 신라인의 주류가 고조선 유민 계통으로 그 구성이 그렇게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같은 집단에서 신분적 분화가 이뤄진 만큼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新羅 金씨가 북방 기마민족 출신임은 문무왕의 陵碑文(능비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신라 上古期에 8人의 임금을 배출한 昔(석)씨 가계도 鐵(철)을 다뤘던 북방 출신이었습니다. 신라 역시 다종족국가라 생각됩니다.
金炯孝 高句麗는 원심력이 강한 반면, 구심력이 약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잘 나갈 때는 원심력의 작용으로 國運 상승의 속도가 빨랐지만, 위기
때는 안에서 당겨 주는 구심력의 부족으로 급격히 붕괴했던 것입니다.
朱甫暾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룬 시기가 廣開土王(광개토왕)과 長壽王(장수왕)代였습니다. 이런 전성기가 지나면 고구려는 몇 개의 그룹, 즉
국내성파·평양성파 등의 파벌로 나눠졌고, 왕위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상습적인 내분 또는 내란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벼랑 끝 외교와 강성대국 지향하면 망해
許文道 나중에 다시 거론하겠지만, 고구려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의 무단독재로 인한 민심 이반과 그 아들들 사이의 권력투쟁에 의해 사실상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强盛大國을 지향하면서
융통성 없는 벼랑 끝 외교를 되풀이하면 망하지 않을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사회 경주 국립박물관에 가서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을 보면 신라 화랑들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유교적 교양도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金炯孝 한자로 적힌 불경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유교적 기초지식을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신라에선 유교 이데올로기가 별개로 기능한 것이라기보다는 불교 속의 유교로 혼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許文道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했던 신라가 조령과 죽령을 넘어 북진한 시기는 眞興王 11년(550)이었습니다. 551년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세를 꺾고
한강 상류 10개 군을 획득했습니다. 이때 신라와 동맹관계였던 百濟는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6개 군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깨고 553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6개 군을 횡탈했습니다. 이와
같은 신라의 배신행위로 인해 고구려를 主敵으로 삼았던 羅濟 동맹은 120년 만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554년 백제 聖王(성왕)은 백제-가야-왜국 연합군을 형성하고 왕자 餘昌(여창)을 장수로 삼아 對신라 복수전에 나섭니다. 그러나 왕자 餘昌이 진중에서 갑자기 병을 얻자 이를 걱정한 聖王은 불과 50기를 거느리고 전선사령부가 설치된 管山城(관산성: 충북 옥천)으로
달려가던 중 대전 동남쪽의 식장산에서 신라의 복병에 걸려 생포되어 참수당했습니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이어 신라군은 관산성을 공격하여 백제-가야-왜 연합군 2만9600명을 참살했습니다. 신라는 여세를 몰아 562년에는 대가야를 정복했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의 곡창지역인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신라의 군사적 성공은 어떻게 가능했다고 보십니까.
국토를 세 배 이상 확장한 정복군주
朱甫暾 眞興王은 法興王의 동생인 立宗 갈문왕의 아들로 이름이 三麥宗(삼맥종)인데, 일곱 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후가 섭정을 했습니다.
태후는 병부령 異斯夫(이사부) 등 能臣의 보좌를 받아 先王인 法興王 때부터 추진해 온 제도적 정비를 지속하는 한편 화랑제도를 개선하여 국가와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眞興王은 특히 대외팽창 노선을
추진, 신라의 영토를 즉위 초년에 비해 세 배 이상 넓힌 정복군주가 되었습니다.
사회 신라는 法興王 19년(532)에 金官伽倻를 병합한 데 이어 眞興王 23년(562)에는 대가야를 병합했습니다. 가야연맹국과 왜국은 일찍부터 鐵 무역 등으로 깊은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신라가 가야연맹국의 全판도를 병합한 데 대해 왜국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許文道 日本書紀에 따르면 왜국은 527년 오미 노오미케누(近江臣毛野)를
장수로 삼아 6만의 병력을 동원, 신라 정벌을 기도합니다. 그같은 6만 병력 동원 운운은 당시 왜국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했던 만큼 과장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중앙정부의 무리한 동원에 불만을 품은 쓰쿠시(筑紫: 지금의 후쿠오카)의 親신라系 호족 이와이(磐井)가 北규슈의 여러 호족들과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반란을 일으켜 원정군을 가로막았습니다. 반란이 평정된 529년, 近江臣은 가야로 건너갔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와 이후 신라의 가야 침입이 격화되었다는 것입니다. 554년 관산성 전투 때 백제 측에 가담한 왜병의 숫자는 1000명 정도였습니다.
사회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그의 저서 「騎馬民族國家」(기마민족국가)에서 夫餘系(부여계)의 기마민족이 한반도의 駕洛(가락: 김해)지방을 거쳐 北규슈로 진출하여 倭를 정복하고, 본래의 근거지인 가락지방과 서부 일본을 합친 倭韓(왜한)연합 왕국을 세웠다가 4세기 말 5세기 초에 한반도에서 작전을 하는 한편 일본 畿內(기내)를 정복하여 통일왕국을
이루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許文道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이 伽倻에 세웠다는 이른바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으려고 수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한편 騎馬民族說과는 달리 日本열도에 백제, 신라, 임나의 分國이 산재해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이른바 日本列島 分國說(일본열도 분국설)입니다. 어떻든 일본 지배층들은 그 先祖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갔던지라 그 출발지인 伽倻 지역에 어떤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朱甫暾 가야는 신라와 친연성이 깊은 나라였습니다. 흔히 가야가 弁韓(변한), 신라가 辰韓(진한)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두 곳을 합쳐 弁辰(변진)이라고도 했습니다. 伽倻諸國이라고 하면 대충 3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前期 伽倻聯盟을 주도했던 金官國 그룹,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했던
대가야 그룹, 지금의 咸安을 중심으로 했던 安羅國(안라국) 그룹 등입니다.
사회 그런 세 그룹에 대한 신라의 합병 정책도 다소 차이가 있었죠.
朱甫暾 金官國 그룹은 532년 합병 당시 저항다운 저항 없이 항복하여 신라로부터 대접을 받은 셈입니다. 신라는 가야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金官國의 왕족을 진골로 우대했습니다. 安羅國 그룹은 백제-왜국과 가까웠던
만큼 합병 후 그 유민들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대가야 그룹의 유민들은 멸망 전에 이미 다수가 이탈하여 신라에 흡수되었습니다. 신라는 이들을 忠州 지역에 모여 살게 했는데, 大伽倻系의 대표적 인물이 음악가 于勒(우륵), 문장가 强首(강수) 등입니다. 그들은 신라 문화와
학문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으며, 그들이 거주했던 忠州는 신라 5小京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화 세력과 귀족 중심 연합세력의 각축
사회 法興·眞興王대에 추진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화 경향은 귀족세력의 일정한 양보 또는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眞興王을 이은 眞智王(진지왕) 때는 귀족세력의 반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金炯孝 역사기록에 의하면 眞智王은 眞興王의 차자인 舍輪(사륜)인데, 태자였던 銅輪(동륜)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신라에는 장자상속의 원칙이 확립되었던 만큼 眞興王 이후의 왕위는 당연히 銅輪의 적자인 白淨에 의해 계승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舍輪이 白淨을 배제하고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귀족세력을 대표하던
居柒夫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眞智王대를 전후한
시기에 신라의 귀족사회는 두 집단으로 나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法興王 이후 왕권 중앙집권 체제에 적응하려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智證王(지증왕) 이전 귀족 중심의 연합정치 체제로 복귀하려는 세력이었습니다. 眞智王을 즉위시킨 세력은 후자로 보여집니다.
사회 眞智王은 재위 4년 만에 폐위당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朱甫暾 眞智王은 왕위계승 원칙에서 벗어나 非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왕권 강화를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고, 결국은 귀족회의인 國人에 의해 政亂荒淫(정란황음)을 이유로 폐위당한 것입니다.
사회 眞智王 때 일시 표출되었던 中古 왕권의 강화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은 동륜계의 백정이 즉위함으로써 극복되었습니다.
眞平王은 善防의 군주
朱甫暾 眞平王은 즉위와 동시에 同母弟(동모제)인 伯飯(백반)과 國飯(국반)을 각각 眞正 갈문왕과 眞安 갈문왕에 책봉함으로써 왕위의 장자 계승
원칙을 천명한 다음에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 구축을 위한 관제 정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진평왕 3년(581)에 설치된 位和府는 인사행정을 전담하는 관부로서 眞平王의 인사권 장악을 통한 관제정비의 기본방향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眞平王 8년(586)에 임명한 禮部令은 문교적 기능도 없지 않았겠지만,
외교행정의 책임자로 보여집니다. 이런 조치 등에 의해 행정권을 총괄하던 상대등의 권한이 축소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한편 군사권을 총괄하던 병부에서 車乘관계의 업무를 분리하여 乘府令에게 이관하고, 艦船(함선)관계의 업무는 신설된 船府署에서 담당토록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재정권을 총괄하던 稟主(품주)의 典大等은 貢納(공납)의 수납에 관한 권한을 調府令에게 이관함에 따라 국가재정에서 지출하는 권한만 행사하게 합니다. 이런 조치 역시 귀족세력의 권력을 再분산시켜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金炯孝 眞平王은 法興·眞興王대 이래 추진되었던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한 임금이었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 天賜玉帶(천사옥대)로 상징되는 고대적 전제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 眞平王 시대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한 2正面 작전을 강요당하고 있었습니다. 600년에 즉위한 백제 무왕은 554년 성왕 敗死(패사) 이래 거의 반세기 만에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신라를 위기로 몰아갑니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탈취당한 한강 유역을 회복시키기 위해 명장
溫達(온달)을 출전시킵니다. 온달은 590년 阿且山城(아차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지만, 7세기에 들면 고구려의 공세는 더욱 치열해집니다. 고구려군은 603년 북한산성, 608년 우명산성, 636년 칠중성(경기도 적성)을 공격했습니다. 신라는 확대된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고전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진평왕은 善防(선방)의 군주였다고 생각합니다.
許文道 삼국의 쟁패전은 589년 중국 대륙에서 통일제국 隋(수)가 대두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金炯孝 608년 고구려군이 침범하자 眞平王은 圓光法師에게 隋나라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쓰게 했습니다. 이때 圓光은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의 할 바가 아니나, 빈도가 대왕의 나라에서
그 水草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왕명을 좇지 않겠느냐』면서 乞師表(걸사표)를 작성했습니다.
사회 원광법사는 화랑도의 근본사상인 世俗五戒(세속오계)를 지은 고승입니다. 신라 호국불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군요.
金炯孝 원광은 南朝의 나라 陳에 유학을 갔는데, 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攝論宗(섭론종)을 연구하고 般若經(반야경)을 강의했습니다. 귀국 후인
진평왕 22년(600) 대승경전을 강의하면서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일러준 것입니다.
사회 세속오계 중 「殺生有擇」의 의미는 싸움터에서 적군을 죽이더라도
가려서 죽이라는 것으로 알았는데, 가축을 마구 죽이지 말라는 것으로 풀이하는 분들도 있습디다.
朱甫暾 사람이든 짐승이든 생명이 있는 것이면 가려서 죽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金炯孝 사람을 죽이든 가축을 죽이든 殺生인 만큼 불교의 금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가피할 때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데 신라불교의 특이성이 있는 것입니다. 弗國土인 신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승려가) 殺生도
할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許文道 612년 隋煬帝(수양제)는 130만 대군을 고구려 원정에 투입했지만
패전했습니다. 이 해에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金庾信이 18세의 나이로 신라 화랑도의 제1인자인 國仙에 올랐습니다. 隋나라는 그후에도 고구려 정벌을 계속 추진하지만, 내란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618년
隋의 江山은 唐의 天下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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