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미디어다음 블로거뉴스로 게재되었습니다 MY블로거뉴스▶
화가 주정이의 부산 미술이야기
<1> 화랑다실 시절
용두산, 예술인들이 등 비비던 언덕
시인 임명수 광복동 '목마'로 시작
기획전에 비중두는 '공간' 뒤따라
전문화랑 · 미술관련가게 줄줄이
며칠전, 오랜만에 광복동에 나갈 일이 있었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부산데파트 쪽에서 접어들어 우산을 두세번 폈다 접었다 하는 새 국제시장 입구 조명상가 앞에 다다랐다. 잠시 멈췄던 보슬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해 우산을 폈다. 우산을 받쳐 들자 시야가 눈높이 아래로 한정 되고 아스팔트 노면이 눈부시게 들어왔다. 조명상가에서 쏟아 내는 오만가지의 불빛이 빗물을 머금은 아스팔트 노면을 물들이고 그 위로 안개같은 보슬비가 스며들고 있었다. 아스팔트 노면은 한 폭의 현란한 색채화였다. 하지만 행인들은 무에 그리 바쁜지 무심한 발길만 재촉할 따름이었다. 70년대 화랑다실시절, 그 때였더라면 아마도 광복동 지킴이 독보(사진가 허종보)선생이 목도하고 목마나 공간으로 달려와 "너거들 멋진 작품 구경 안하고 뭐하고 있나"라고 일러 주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74년 광복동 어디선가 시인 임명수를 만났다. 다방을 차릴까 하는데 그냥 일반적인 다방스타일이 아니라, 벽면과 조명시설을 갖추고 미술전람회를 할 수 있도록 꾸미고 싶다고 했다. 억수로 잘될 것 같다고 맞장구를 쳤다. 임명수는 국제시장에서 유명제과회사의 부산대리점을 운영하다가 큰 손해를 보고 그만 둔 경험이 있었고, 그 직전에도 교복점을 열었지만 그 마저 별 재미를 못 보고 와신상담 하던 중이었다.
아무튼, 그 해 여름 광복동 외국서적골목 입구 모퉁이 건물 2층에 임명수의 목마화랑다실이 문을 열었다. 그 당시 부산에는 두세개 정도의 화랑이 있긴 했지만, 전람회가 주로 다방에서 열리던 시절이었는데 화랑다실은 다방에 비해 벽면이나 조명시설이 그럴싸했고, 또 화랑은 대관료를 내야하지만 화랑다실은 공짜였다. 그리고 화랑에서 전람회를 하면 대개 개막일 하루 북적거리고 전람회 기간 내내 관람객이 가뭄에 콩 나듯 하지만 화랑다실의 경우는 문턱이 낮아 관람객 말고도 많은 일반 차 손님들이 부담없이 드나들었다.
목마화랑다실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고 전람회가 줄을 이었다. 문을 연 지 불과 6개월 남짓한 그 해만 해도 목마화랑다실에서 열린 전람회 횟수가 19회나 될 정도였다. 시쳇말로 하자면 대박이 터진 셈이다. 목마화랑다실엔 미술인은 물론이고 항상 예술인들로 붐볐다. 목마화랑다실은 단박에 부산문화예술계의 사랑방이자,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는 목마에서 두어집 건너 원다방이 있던 자리에 공간화랑다실이 문을 열었다. 공간화랑다실은 서울신문 편집국에서 미술기자로 일하다가 건강관계로 낙향해 있던 신옥진이 차렸다.
공간과 목마는 같은 화랑다실이지만 운영방식에서는 약간 달랐다. 목마가 문화계의 마당발인 주인 임명수의 안면으로 많은 전람회를 유치했다면, 공간은 전람회 횟수보다는 그 내용에 방점을 찍는 자체기획전에 비중을 두는 경향을 보였다. 이른바 전시기획 면에서 얼추 전문화랑의 면모를 내보인 것이다. 오늘의 공간화랑을 예견 할 수있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임명수는 시인이고 신옥진은 미술인이라는 데서 비롯하는 전문성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임명수의 목마는 1년 뒤 동광동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는 명문화랑다실이 된다. 목마 명문 공간 등의 화랑다실에서는 여전히 많은 전람회가 열렸다. 그러나 무슨 속사정이 있었는지 명문이 76년 말에, 목마는 78년에 문을 닫게 된다. 전람회도 많이 열리고 손님도 많았는데 그런 것이 장사 셈으로는 때깔만 좋은 개살구였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공간은 77년에 잠시 쉰 뒤 광복동 한 가운데에다 이름에서 다실을 뺀 공간화랑을 개관한다. 본격적인 화랑시대의 개막에 무난한 환승을 한 셈이었다.
공간이 화랑다실에서 전문화랑으로 변신한 전후로 지금은 근대역사관인 미문화원에서 미화당을 거쳐 광복동 입구와 중앙동에 이르는 용두산 주변에는 전문화랑이 많이 생겨난다. 지금은 이 곳에 화랑이 하나도 없지만, 그 시절에는 항상 10개가 넘는 화랑이 있었고 70, 80년대를 통틀어 보자면 대강 30여 개의 화랑 이름이 기억 날 정도다.
70년대의 용두산 둘레, 그 곳에는 화랑뿐만 아니라, 화방 액자점 고미술점 등 여타 미술관련 가게들도 밀집해 있었다. 그래서 이래저래 미술인들의 발길을 끌기 마련이었다. 당시에는 예술인들이 분야를 불문하고 함께 곧잘 어울리고 술잔도 자주 나누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한솥밥을 먹는 식구 같았다.
70, 80년대의 용두산 근처의 주점에는 한잔의 술로 예술을 논하고 안부를 확인하고 함께 시름을 껴안던 문화예술계 인사들로 항상 북적거렸다. 그 곳은 화랑다실시절을 기점으로 한 자연발생적인 미술의 거리이자, 문화의 거리였고 부산 문화예술인들이 등 비비는 언덕이었다.
목마와 공간이 있었던 광복동 입구 외국서적골목 . 왼쪽에 보이는 모퉁이 건물의 2층이 목마화랑다실 자리이고 골목안 두어 집 건너 이층에 공간화랑다실이 있었다.
<2> 미술비평가 김강석씨
타협 몰랐던 지역화단 '파수꾼'
1960 · 70년대 평문 300편 남겨
차가운 논리 공격적 필치 일관
국제신보 등 영남신문 독무대
시인 임명수가 운영하던 목마화랑다실에는 후덕하게 생긴 30대 중반의 마담이 있었다. 나중에 목마가 동광동으로 옮겨간 뒤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명문화랑다실을 운영하게 된다. 그간 널리 알려진 탓인지 명문화랑다실에는 여전히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끓이질 않고, 전람회도 쉼없이 열렸다.
1974년 가을, 모닝커피 타임이 지나고 손님의 발길이 뜸한 시간이었다. 다실 안 광복동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남자손님 한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40대 초반 쯤 돼 보이고 지적인 외모에 깡마른 체구로 얼굴에는 어쩐지 병색이 비쳤다. 마담이 다가가 탁자 위에 찻잔을 놓는데 찻잔이 달랐다. 다방에서 사용하는 찻잔이 아니라 달인 한약 사발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여인의 얼굴로 향했다. 별다른 표정없이 그저 시선 한번 주는 것이 그 남자의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는 방식인 모양이었다. 그는 작고하기 서너달 전의 미술비평가 김강석이었다.
부산미술사의 60년대에서 70년대 중반을 들여다 보면 각 신문의 미술비평란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한 미술비평가 김강석(金綱石·사진)을 만나게 된다. 그의 고향은 경북 의성이지만 본적만 그렇고 1932년 일본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해방 후 영남대에서 수학한 후 철학과 문학을 섭렵하면서 대구지역에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 50년대 말 부산에 기착하면서 문학평론에서 미술비평으로 넘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평문 중에는 지연 학연을 비롯한 인간적인 연으로 다분히 미온적이고 의례적인 수사로 두루뭉실한 게 적지않다. 혹은 지극히 난해한 문장으로 그 어떤 난처함을 비켜가고 또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굴절부위를 위장하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김강석의 평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타협과 융화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평문은 차가운 논리와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필치로 일관했다. 그는 그 때문에 물리적 폭력을 감내해야한 적조차 있었지만 그의 평필은 끝내 굴절을 몰랐다. 실제로 어떤 화가는 평문이 마음에 안든다고 김강석을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1959년 민주신보에 '창작의 시공간 문제'를 기고함으로써 시작된 김강석의 비평활동은 60년대를 거쳐 그가 지병인 결핵으로 숨진 7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는 그 때까지 무려 300편이 넘는 평문을 남겼다. 그의 평문 대부분이 비록 신문 미술비평란의 단문이라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비평자가 15년 남짓한 기간에 써낸 평문으로는 많은 분량이 아닐수 없다. 더구나 당시의 열악한 매체사정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김강석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몇 푼의 원고료가 수입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미술비평이 직업이라면 직업이었다. 그의 평문들은 대부분 청탁을 받고 쓴 것이 아니었다. 어떤 전람회나 사안을 그 자신이 취사선택하여 쓴 원고를 신문에 기고하는 방식이었다. 쥐꼬리만한 원고료지만 그것이 유일한 수입원에 다름없는 그로서는 청탁이 오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의 열정 또한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김강석의 평문은 민주신보 국제신보 부산일보 대구일보 영남일보 마산일보를 비롯, 영남의 각 일간지를 망라하고 '월간 새시대' '홍대신문' 등에도 기고했지만 주로 민주신보와 국제신보에 집중되었다. 그가 쓰는 원고는 빠짐없이 신문에 실렸고 그 반향 또한 대단했다. 어떻든 그가 쓴 수많은 평문이 쓰면 쓰는대로 모두 신문에 실릴수 있었던 것은 오랜기간 그와 의기투합한 한 사람의 문화부 기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흡이 맞는 필자와 기자의 관계에 의한 흔치않은 결과라고 하겠다. 1987년3월 갤러리 누보의 개관기념 책자의 부록으로 발간한 '김강석 미술평론집' 에 실린 시인 김규태 선생의 발문을 보면 그점이 입증된다.
'그는 내가 재직하고 있던 민주신보, 국제신보에 전람회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미술평을 들고 왔다. 젊고 논리정연한 미술평론가를 갈망하고 있던 터에 그의 평필은 적어도 나에겐 직분상 꽤나 큰 소득으로 여겨졌다. 그가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나와 의기투합했던 것은 그의 평필이 반드시 정확하고 높은 안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글은 직접적이고 매우 건조했다. 지금에 와서 그에게 어떠한 평가를 내리든 부산화단의 60년대와 70년대 중반은 김강석이란 이름의 외로운 한 파수꾼에 의해 파장지워진 사실을 기억해 둘 만하다.'
<3> 화가의 비애
"그림 사는데도 자격이 있는기라"
윤종철씨, 고객 거만하게 굴자 그림에 칼질
외상으로 가져간 작품 연탄 비가리개 쓰여
화가·작가들 술자리서 안줏거리 삼아 화풀이
74년 가을, 목마화랑다실에는 '윤종철 유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람회 기간중 하루는 소동이 있었다. 그 날의 윤종철은 불 같았다. 다음 날 필자가 다실로 들어서니 윤종철이 좀 쑥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저쪽 창가의 김강석이 그쪽으로 오라는 눈짓을 했다. "오늘 원고료가 나왔거든요. 우리 바람쐬러 을숙도에 갈까요." 그나 저나 그러자고 했다.
김강석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마에 들르면 그에게 차를 대접하거나 그의 차 값을 대신 지불하곤 했다.
물론 그런 것을 본인은 항상 완강하게 사양했지만 대개 상대방의 고집이 더 셌다. 김강석에겐 그런 것이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그래서 원고료를 탄 날처럼 돈이 좀 있을 때는 누구에게든 돈을 조금 쓰고 싶어했다.
두 사람이 목마를 나서는데, 윤종철이 "어데 좋은데 가는 모양인데 같이 가면 안되겠소"라고 했다. 셋이 택시를 타고 을숙도로 향했다. 도중 차속에서 윤종철이 김강석에게 어제는 소동을 피워 미안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 날 윤종철은 말쑥한 양복차림의 어떤 손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화를 버럭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난데없는 소동에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이 마담인가 한 여사(임명수의 부인)인가를 밀치고 다실주방으로 들어가 칼을 들고 나왔다.
목마에 있던 사람들이 뜨악하는 순간 윤종철의 손이 그림 앞에서 엑스자를 그었다. 20호는 됨직한 그림 한 점이 화풀이의 제물이 된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림 한 점 사겠다며 폼 잡고 게다가 그림값까지 깎자고 하도 어깃장을 부리길래 부아가 치밀어 그랬다고 했다.
지금의 하구언 근처로 기억이 된다. 그 곳 갈대밭 속에 농막같은 장사집이 두 세집 있었다. 그 곳으로 갔다. 때마침 을숙도의 금빛 노을이 우릴 반겼다. 그리고 강 건너 명지 나루터 쪽에서 비상하는 한 무리의 새들이 노을을 수놓고 있었다. 건강이 좋지않은 관계로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던 김강석이 그 날은 금색노을에 취하고, 그 노을을 수놓는 새들의 아름다운 비상에 반한 탓인지 "나도 맥주 한잔만 해야지"하며 잔을 들었다. "윤 선생은 그래도 나은 편이오." 기분만으로는 술이 넘어가지 않는지 김강석은 채 반도 비우지 못하고 잔을 놓으며 S선생의 이야기를 했다.
60년대, S선생의 전람회장에 그 당시 부산의 이름난 양식집 사장이 와서 그림 한 점을 사기로 했단다. S선생은 전람회을 마치고 사람을 시켜 그 사장에게 그림을 배달했지만 그림값은 다음에 주겠다는 전갈이 왔다.
그 다음이라는 말이 수 차례 헛걸음으로 이어졌다. 참다 못한 S선생이 직접 그 사장을 만나서 그림이 마음에 안 들면 그림을 도로 돌려 주어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장은 옆에 있던 지배인에게 그림을 돌려 주라는 뜻의 눈짓을 했다. S선생은 더 이상 그 사장과 얼굴을 대면하고 있기가 거북했다. 그림을 돌려받고 인사고 뭐고 집어치우고 돌아갈 요량으로 지배인을 따라갔다. S선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림이 연탄의 비가리개로 쓰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S선생 경우에 비하면 윤 선생의 경우는 덜한편 아닌가요. 어제 일은 그만 털어요."
그 후 80년대 초, 부산의 모 대학에 재직하는 서양화가 O교수의 전람회가 원화랑에서 열렸다. 오픈파티 때였다. O교수와 친하다는 모 호텔 사장도 참석했다. 그 사장은 원래가 시끄러운 양철북이지만 그 날은 더 했다. 한참 요란을 떨던 그가 한 손에는 술잔을 또 한 손에는 비망록용 매직펜을 들고서 어느 한 작품 앞에 다가가더니 "이거 내가 한다"라고 큰소리로 호기를 부리고선 그림의 한가운데에 자신의 서명을 갈겼다. 유리가 끼워진 액자이긴 하지만 볼썽 사나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화랑 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게 뭐 재미있는 일이라고 큰소리로 한바탕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는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화가들의 웃음도 섞여 있었다.
그날 몇몇 화가는 화랑 근처에 있던 작은 주막 은행나무집에서 그 일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은행나무집에는 화가 김종식 박윤성 김영주, 시인 임수생 이인영 등이 단골이었다. 은행나무집은 안이 너무 좁아 주객들이 대개 바깥 길바닥에서 사과상자 따위로 술상을 대신하곤 했다. 가을이면 그 거리는 오래된 은행나무 가로수가 멋져 술맛을 돋우었다.
옆에서 혼자 깡소주를 마시고 있던 시인 이인영이 우리 얘기를 들었는지, 노란 은행잎이 팔랑 팔랑 떨어지는 밤하늘에 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림 사는데도 자격이 있는 기라."
<4> 70·80년대의 화단
신진작가·화랑 속속 출현 '새바람'
추상 선도 그룹 '혁' 규모 자랑하며 활동
김정명·전태영 등 독립 작업군 내연확장
사인화랑 '부산청년비엔날레' 산파 역할
70년대 부산화단의 인적 구성을 살펴 보면,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국내에서 일본인 교사에게 미술교육을 받았거나 또는 일본유학을 다녀온 1세대와 출생은 일제강점기에 하였으나 미술교육은 1세대로부터 받은 2세대, 그 두 세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부산화단의 작품경향은 1세대 작가의 대부분이 구상계열의 작품을 했고 2세대 작가들 역시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2세대 중에는 추상미술의 유입기라 할 수 있는 60년대 초반부터 이미 추상미술을 수용한 작가가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추상미술로 시작한 작가도 있었다. 물론 사실이나 구상계열의 작가에 비해 적은 숫자이기는 했다. 미술그룹 '혁'의 김종근 김동규 김홍석 '습지전'의 김청정, 김인환 등이 그에 속한다 할 것이다.
70년대 부산화단의 주요 미술단체로는 1세대 작가가 대부분 참가한 '후기'를 비롯한 '혁' '공간' '신우회' '부산판화회' 'Work미술연구회' 'POINT전' 등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지속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한 그룹은 아무래도 '혁(爀)'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여기서는 작품의 성취도 문제는 논거의 대상이 아니다. 60년대 초에 창립된 '혁'에는 김종근 김홍석 김동규 서재만 조철수 이정수 이성재 등이 참가하고 허황이 중간에 잠시 합류했으나 곧 탈퇴했다. 언젠가 허황이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룹의 수직문화가 부담스럽더란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엔 김홍석도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의 재고와 사유의 내밀화에 의한 귀결로써 그룹활동을 접고 독자적 활동에 전념한다.
어쨌거나 '혁'은 개성이 각각인 미술인들의 집단으로는 드물게 회원간의 결집력이 강하고 작품활동 역시 왕성했다. 그런 점은 리드격인 김종근의 개인적인 역량도 한몫 했지만 부산화단에서 현대미술의 선구적 역할을 한다는 회원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자긍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혁'의 그런 성향은 일찍이 기존의 미술양식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미술양식을 수용한 그들의 진취성과 역동성에 근거한다 할 것이다. 또 그런 동력은 71년 '서울부산현대작가 교류전' 72년 '한일미술교류전' 그리고 73년 서울 '명동화랑전' 등 지방 미술단체로서는 쉽지않은 외연확장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혁'의 그와 같은 양태를 두고 화단의 일부에서는 외적 확장에 경사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혁'은 70년대 부산화단의 중심에서 가장 역동적 활동을 했고 또한 부산 현대미술의 개척자적 역할을 한 미술단체였던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사회의 70년대 중반은 새로운 인적 수혈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광복 30년은 광복 이후 출생한 세대의 사회진출의 적령기였다. 부산화단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작가군이 생성되고 다른 한편으론 화랑다실이 생긴 이후 단기간에 많은 화랑이 생겨나고 그것도 한 지역에 밀집해 있는 등 지리적 조건과 작품발표의 환경이 종전에 비해 월등하게 향상되었다.
그간에 신진작가는 대개 공모전을 통하거나 기존의 미술그룹의 회원이 되어 기성화단으로 편입되는 절차를 거쳤다. 그러나 70년대의 신진작가 중 일부는 공모전을 기피하기도하고 종전의 기성화단 편입 방식을 굳이 수용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의 그러한 의지는 일견 기성화단의 권위주의와 수직문화에 대한 거부로 비치기도 하였다.
그들은 개인전 또는 그룹으로 작품발표를 하며 자신들의 독자적 공간을 확보해 나갔다. 그런 것이 결과적으로는 부산화단의 내연 확장이라는 순기능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김정명 전태영 허황 이동순 김응기 이태호 박윤성 예유근 안창홍 정철교 등이 70년대에 개인전 또는 단체전을 통해 활발한 작품활동을 한 작가들이고, 이상식과 정광화는 대학생 신분으로 공간화랑에서 2인전을 열고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송혜수 김종식 오영재 성백주 등 원로작가와 기득권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던 김청정 이용길 김인환 등이 이런 신진작가에게 관심을 가졌고, 또 그들의 등장이 그저 그런 밥상에 입맛을 놓고있던 평론가들에게는 새로운 식단으로 구미를 당기게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후 그들, 젊은 작가들은 개인전도 자주 열고 'POINT전', '기류전'을 비롯한 여타 단체전을 통한 왕성한 활동을 저돌적으로 펴나간다. 또 80년대 들어서는 그들 중 김응기 박은주 예유근 정진윤이 대안공간 성격의 '사인화랑'을 운영하며 '신인전'을 기획하고 '미술통신'을 발행하는 등 부산화단의 자양분 역할을 하면서 '부산청년비엔날레'의 산파역이 되기도 한다. '부산비엔날레'의 근저가 '부산청년비엔날레'라고 하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면 그들이 현재 '부산비엔날레'의 초석을 놓았다고나 할까.
<5> 송혜수와 김종식
수많은 제자 양성…부산화단 두 밀알
송혜수 전업작가로 살다간 자유인
김종식 한평생 교직· 작품활동 병행
부산 최초 미술상 제정·그림碑 위업
전시장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송혜수(왼쪽)와
김종식(가운데) 오른쪽은 마산의 이상갑 화백.
그 때가 초여름 유신시절이었다. 거리에는 길목마다 장발단속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왠지 무성영화시대의 찰리 채플린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광복동 지금의 로얄호텔 근처, 남영나이론 건물의 쇼 윈도에는 팬티와 브래지어를 착용한 마네킹이 맵시를 뽐내고 있었다. 그 건물 2층에 문화인들이 제법 많이 드나들던 로댕다방이 있었다.
어느 날 로댕다방의 한쪽 구석자리에 화가 김종식 선생이 앉아 있었다. 얼굴이 옆으로 조금 젖혀진 채 고개를 숙인 모습이 언뜻 봐서 오수에 든 듯했다. 하지만 무릎위로 작은 화첩을 받쳐 들고 선긋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김종식은 늘 그랬다. 앉기만 하면 화첩에 선긋기를 했다. 다방이나 주점에서도 틈만 나면 잊지 않고 화첩에 선을 그었다. 그는 그렇게 평생 동안 손에서 화첩을 놓지 않았다.
마침 근처에 있던 필자가 전갈을 받고 로댕으로 갔다. 혼자라고 했는데 그새 송혜수 선생이 와서 동석을 하고 있었다. 송혜수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무슨 사단이 있었는지 얼굴이 상기된 상태였다. "무신 일이 있노 기분이 많이 상했는데 와?" 김종식이 채근을 하자 냉수로 부아를 좀 삭인 송혜수가 입을 열었다.
부산극장 앞을 지나오는데 경찰이 다짜고짜로 가위를 들이대더라는 것이었다. 장발단속에 걸린 것이다. 송혜수가 누군가. 그 당시 이미 이순을 넘긴 나이였다. 노랑머리에 빨강 양말을 신고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광포동(광복동과 남포동) 거리를 휘젓고 다닌 지도 20년이 훨씬 넘었다. 그런 그에게 새파랗게 젊은 경찰이 장발 단속한답시고 덤비다니 얼마나 가당찮은 일인가.
송혜수의 얘기를 듣고 있던 김종식이 "그래서 우쨌노"라고 재차 물었고 송혜수는 "어쩌긴 뭘 어째. 너희들은 에미 애비도 없어라고 고래고래 호통을 치고 그냥 와 버렸지 뭐." 송혜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러자 김종식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진짜로 그랬나" 라면서 송혜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 봤다. 송혜수가 성가시다는 투로 다시 말했다. "그럼 제깟놈들이 어쩔건데 아주 혼쭐을 내주려다 자식뻘이라 참고 그냥 온거야. 그리고 걔네들이 무슨 죄가 있어 그따위 짓거리를 시킨 윗놈들이 정신나간 작자들이지."
잠시 예의 선긋기를 하고 난 김종식이 또 꼬리를 달았다. "송 선생 니 진짜로는 잡으러 올까봐 겁났제. 뒤도 못 돌아보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쳐 왔제. 그랬제." 김종식의 짓궂은 말에 송혜수가 약발을 좀 받았는지 "임자는 나보다 나이도 아래면서 왜 반말을 해"라는 엉뚱한 핀잔을 줬고 김종식은 꼬리를 내렸다.
송혜수는 평양 출신으로 6·25때 부산으로 피란 와 그대로 눌러 앉았다. 올해 초 94세의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줄곧 부산에 살았다. 송혜수는 도쿄제국미술학교 출신으로 평생 직업을 안 가졌다. 그 시대에 그만한 학력이면 취직하기가 그리 어렵지만도 않을 테지만 평생 전업작가로 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이 좋아 전업작가지 작품만 해서는 생활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작품을 하다가 놀고 놀다가 작품하고 그렇게 살았다. 송혜수는 세상의 일탈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언필칭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껏 멋 부린 삶을 살다간 자유인이었다.
송혜수는 작품 생활을 하면서 문하생을 받았다.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전준자 이강윤 김정명 허황 이동순 박태석 김응기 안창홍 등이 그 때 그의 화실 출신들이다.
김종식도 제자가 많은 편이다. 송혜수 제자가 모두 그의 화실 출신인 반면 김종식 문하는 사제간의 인연이 다양하다. 판화가 이용길, 평론가 김해성이 개성중 제자라면 서상환은 화실에서 사사한 제자이고 박춘재 김영주 박윤성 박상언 등은 학교도 화실제자도 아니다. 세상(화단)에서 만나 저절로 사제간의 연이 맺어진 경우다.
아무튼 송혜수는 실향민으로 평생 전업작가로 살았고 김종식은 부산 토박이로 45년 동래중 교사를 시작으로 83년 동아대에서 정년을 할 때까지 직업을 가졌다.
사후는 어떤가. 송혜수가 작고하기 직전 전 재산을 내놓아 부산 최초의 민간이 제정한 '송혜수 미술상'을 남겼는가 하면 김종식의 사후에는 제자들이 나서 부산 최초의 그림비를 세웠다. 이렇듯 송혜수와 김종식은 삶의 여러 가지가 면면이 확연하게 달랐다. 술도 그렇다. 송혜수는 술을 안 마셨고 김종식은 두주불사를 넘어 주신급이었다. 딱히 송혜수와 김종식의 닮은 점을 한가지 대라면 두 사람 다 제자 농사는 풍작을 거뒀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송혜수와 김종식은 당신들이 이룬 화업과 함께 부산화단에 많은 제자를 남기고 갔다. 무릇, 흙과 물을 내려 크고 작은 산과 강을 이루고 품는 산맥처럼….
<5> 30년 기념 전시회
지역화단 비합리성에 일침을 놓다
신인 등 젊은 비미협회원 초대작가 제외
김인환 김정명 등 10여명 이의제기 파문
기득권 껴안기 맞서 통제력 생성 청신호
1979년 한국미협 부산지부는 '부산미술30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부산화단의 상당수 젊은 작가와 70년대 중반에 활동을 시작한 신인작가는 대부분 미협회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부산미협이 한국미협지부 소속 회원의 대표성은 있지만 부산미술인 전체의 대표성은 없다는 논지를 폈다. '부산미술30년전'은 그 명칭의 상징성이 미협의 범위를 초월한다며 별도의 구성체로 추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사실 그간 미협지부가 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별로 없었다. 간혹 개인의 불평이나 몇몇사람의 이해관계에 의한 불협음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런 경우 대개 무시되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어렵지않게 봉합되고는 하였다.
그러기에 미협측의 반응은 한마디로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해 5월10일께 미협은 '부산미술30년전'의 초대작가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예상한 대로 문제제기를 한 작가쪽이 반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가 묵살되고 또 발표된 초대작가의 면면을 볼 때 선정기준이 모호하고 객관성이 결여된 무원칙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그날 당장 김인환 김정명 이태호 서상환 등 '부산미술30년전'에 이의를 제기한 쪽의 작가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양대신문(국제신문과 부산일보)의 미술담당 기자와 접촉했다. 그 결과 국제신문 5월10일자에 '부산미술30년전에 할 말 있다'라는 제하의 김인환의 기고문이 실리고 24일자 부산일보에는 '반발이는 부산미술30년전' 제하의 기사가 나오게 된다. 시쳇말로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었다.
그렇게 언론을 통한 공개적인 이의제기가 있자 그때서야 미협측도 사태해결을 위한 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운영위원회에서 위원중 한 사람인 판화가 이용길이 물리적으로 힐난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회의중 이용길의 발언내용이 반대(문제제기를 한쪽) 편을 든다는 오해를 받은 것이었다. 그 현장 스케치 기사가 사진과 함께 언론에 공개되었다. 여론의 증폭은 불문가지였고 문제제기를 한 쪽에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다음 수순을 도모했다.
5월28일 저녁 무렵, 대신동 구덕운동장 뒤쪽에 있던 대동중 숙직실에 젊은 미술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원래는 광복동에서 모일 예정이었으나 김인환이 그날 따라 숙직이었기 때문이었다. 화급한 사항을 두고 모임 날짜를 미룰 수도 없어 부득이 장소를 변경하고 부랴부랴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열댓명이 모였다. 온갖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한참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는 중에 어찌 알고 국제신문의 박숙자 기자가 나타났다.
당시 부산일보 미술담당은 박정인 기자였는데 언젠가 주점 갓집에서 국제의 박 기자가 하도 부지런해서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그 얼마전에는 기사 하나를 놓치고 부장으로부터 "박 기자 너는 맨날 갓집에서 술만 마시나"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했다. 요즘은 별로지만 당시는 두 신문이 경쟁지로서 취재경쟁이 심했고 박숙자 기자는 평소 취재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박숙자 기자가 잠깐 밖에서 보자는 눈치를 보냈다. "저렇게 의견이 분분해서야 언제 결론이 나오겠어요. 결의문이라도 작성이 되면 보내 주세요"라고 부탁하고 돌아갔다. 그날 자정이 얼추 다 되어서야 '부산미술30년전 개선과 시정을 위한 결의문' 채택이 있었고 다음날 배포를 했다.
그런 며칠 뒤 미협측의 반응이 있었다. 언론의 비판기사에 반발작가들의 결의문 배포, 게다가 초대작가로 선정이 된 일부 작가의 결의문 서명 동참 등의 압박에 미협측이 한발 물러선 것이었다. 마침내 미협측에서 '부산미술30년전' 누락 작가에 문호개방이라는 개선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개선안을 두고 검토한 결과 개선안의 내용이 그간에 제기된 문제에 대한 여타의 내용은 거두절미하고 문제의 사안을 단지 초대작가 누락의 불만으로 호도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그 안을 받아들이는 경우를 가상해 본다면 그 때까지의 모든 주장이 초대작가 선정에서 누락된데 대한 불만쯤으로 치부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이에 문제제기에 나섰던 작가들은 '부산미술30년전'에 참가신청을 일절 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으고 그러한 뜻을 옥영식이 6월9일자 부산일보에 '초대와 참가신청의 의미' 제하의 글로 밝힌다. 미협이 내놓은 개선안이 무의미한 미봉책에 불과함를 비판하는 요지의 논지였다. 그리고 이들의 뜻에 동조한 김종식 송혜수 성백주 김원호 이용길 고수길 천재동 조일상 권상오 등이 초대작가로 선정되고도 참가를 거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 파란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절반의 성공에도 못미치는 한갓 딴죽걸기에 불과한 해프닝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로소 부산화단에 상존하던 기득권의 수직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에 대한 제어력이 생성되는 청신호였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정립을 위한 산고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할 것이다.
<8> 오영재의 의지
거액 제안 뿌리친 화가의 자존심
"정물·풍경 그려달라" 돈다발 보여줘
곤궁한 형편에도 "화풍 못꺾어" 거절
얼마전 중앙동의 오래된 주막 부산포에 갔다. 부산포에는 홀 안쪽에 나무막대기로 대충 칸을 질러 만든 가두리 방이 있는데 그 방의 한쪽 벽에는 오영재(사진)의 유화작품 '목련'이 걸려있다. 오영재의 목련은 언제 봐도 청아하고 극지의 빙하마냥 청정하며 작가와 작품의 합일이 빚어내는 단아함을 느끼게 한다.
1986년도 어느 봄날 김홍석이 전화를 해서 날씨도 좋은데 바람 쐬러 교외로 나가자고 했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봄을 다 타느냐고 했더니 덩치가 크면 가슴도 없는 줄 아느냐면서 핀잔을 주었다. 마침 영도 청학동에 살던 오영재 선생이 법기마을로 이사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바람도 쐬고 오 선생도 찾아볼 겸 행선지를 법기수원지로 잡았다. 부울 국도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마을 초입 구멍가게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집도 묻고 손에 들고 갈 것도 마련할 겸 가게로 들어갔다.
담배 한 보루와 정종 한 병을 달라고 하자 가게주인은 값부터 치루라고 했다. 돈을 받고난 주인은 우리가 달라고 한 것보다 값이 싼 담배 두 보루하고 정종대신 됫병소주 두병을 내 주며 어차피 바꾸러 올 것이니 그렇게 가져가면 된다고 했다. 매상은 매상대로 챙기고 오영재 선생의 기호는 기호대로 배려한 방식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영재는 산골집의 아래채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원래는 양잠사이던 것을 절반으로 잘라 그중 한 칸을 또 반으로 잘라서 부엌과 방을 만들고 남은 큰 칸을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작업실의 캠퍼스 앞에서 춘곤에 붓을 놓고 있던 그는 우리가 축담에 발을 올리자 그때서야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며 반겼다.
그는 청학동의 해풍보다 법기마을의 산바람이 너무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누가 오면 자랑하려고 벼르기라도 하고 있은 듯이 " 우리 집 전축 기막히게 좋아요"라는 생뚱맞은 말을 하며 신문지로 도배한 천장을 가리켰다. 과연 그랬다. 크게 작게 또는 짧게 길게 뭔 소리가 나긴 났다. 지붕과 천정 사이의 빈 공간에 바람이 들락거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흡사 아코디온 소리 같기도 하고 풀무질 소리 같기도 했다.
우리는 수원지 정문 앞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난 후 오영재가 엄청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고 했다. 며칠 전에 화상 J씨가 찾아와 그림을 많이 사겠다며 요새 하고 있는 작품 말고 전에 한 작품처럼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려달라고 하더란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리는 족족 다 사겠다면서.
오영재의 조형적 여정을 구상화 시기와 추상화시기로 나눈다면 그 화상이 원하는 것은 대상을 분활적 선과 면으로 표현하던 구상화 시기의 작품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 화상은 가방의 지퍼를 여닫으며 돈을 엿보이게 하는 수법으로 유혹인지 압박인지를 하였지만 오영재는 즉각 거절했다고 했다. "옳든 그르든 고심 끝에 이제야 겨우 반발자국쯤 나갔는데 다시 물리라 하니 그게 말이 되겠어요. 내 인생의 의지를 돈 몇 다발과 바꾸잔 소리와 마찬가지 아닌가요. 부아가 치밀어 돌아가라고 쫓아 버렸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 이런 저런 생각을 오래 하게 되면 마누라 얼굴이 떠올라 그 제안을 뿌리치지 못 할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했구요." 때마침 수원지의 편백나무 숲을 지나온 서늘한 산바람이 세 사람의 가슴을 식혀 주었다.
오영재는 그 일로 한동안은 외출도 못했다고 했다. 외출하고 없는 새 그 화상이 전화를 해서 마누라한테 말하면 큰일 난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며 지냈고 나중에는 마누라와 한집에서 얼굴 맞대며 지내기가 곤혹스러워 혼났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난감하기 짝이 없는 몇 날을 지새우고 나서야 가까스로 '까짓 거 잘 했다'는 쪽으로 마음을 다잡았을 수가 있었다고 했다. 오영재의 이야기를 듣고 난 김홍석과 필자도 "까짓 거 용기 있게 잘 했어요."라고 거들었다. 그런 훈수 말고는 달리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날 우리는 까짓 거, 까짓 거, 소리를 연신 해대며 만취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김홍석도 까짓 거 소리만은 마다않고 따라 했다.
그랬다. 오영재에게 그림은 돈 따위를 뿌리칠 수 있는 힘이자 현실의 곤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어 벽이며 삶의 의지처였다. 미술 평론가 강선학이 파도의 빛이라 한 그의 후기 작품의 중첩된 여러 꼴의 면에서 바람이 보이고 만장이 되어 다가오기도 한다. 하늘을 여는 만장, 바람에 나부끼는 그 만장엔 어떤 글들이 담겨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오영재의 전기 작품 '풍경' (위)과 후기작품 '파라다이스' 연작
<9> 바다미술제
데이트족, 설치작품으로 밤새 모닥불
87년 손병철씨 "신나는 전시회 만들자" 계기
관객 이해 부족, 초기엔 '이상한 짓거리' 비쳐
87년 초,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지부장 김대륜) 사무국장이던 손병철이 애천(옛 로댕)다방으로 필자를 찾아왔다. 그는 시청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며 다짜고짜 신나는 전시회 하나 만들어 보자고 했다. 시청 문화담당자와 얘기를 나누다 아이디어만 좋다면 시 지원금은 받을 수 있겠다는 감이 오더라는 것이다.
그때가 서울올림픽을 한해 앞둔 시점이니 만큼 올림픽 기념이라는 꼬리표를 단다면 시의 지원은 틀림없다며 뭐 좋은 아이디어 없겠느냐면서 어서 머리 좀 짜보라는 채근을 했다. 우리는 앉은 자리서 머리를 맞댔다.
당시 우리화단에는 설치나 퍼포먼스 분야는 겨우 시작하는 걸음마 단계였고 따라서 작품발표의 여건도 마땅찮은 형편이었다. 그래서 설치와 퍼포먼스 위주의 미술제로 만들기로 하고 부산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바다미술제'로 명칭을 정했다. 또한 장소는 국제적인 지명도 등을 고려, 해운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대강 그런 골격으로 기획초안을 작성해 그길로 손병철이 시청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 손병철로부터 예산 1200만원이 확정됐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의 '바다미술제' 예산에 비하면 미미했지만 당시 부산미전 지원총액이 700만원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커다란 액수였다.
아무튼 그해 9월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바다미술제'가 열렸다. 조선비치호텔에서 파라다이스호텔에 이르는 해변에 20여점의 작품이 설치됐다. 피서철이 지난 가을 들머리였지만 백사장에는 놀러 나온 사람들로 꽤나 붐볐다. 밤에는 바닷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도 했다. 바다미술제 운영위원회측은 해운대구청으로부터 임해행정봉사센터를 빌려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전시기간 중 어느날 아침이었다. 현장을 둘러보고 온 부산미협 총무 김판조가 지난밤에도 전시작품이 많이 손상되었다며 투덜대고 있었다. 미술제 개막 이후 매일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작품을 발로 툭툭 차는 것은 약과였고 흔들고 비틀고 심지어 저만치서 달려와 공중발차기로 작품 넘어뜨리기 내기를 하는 청년들까지 있었다. 2회 때인가는 태극기를 모래주머니로 활용한 김명수의 작품이 경찰로부터 철거를 종용당했다. 또 장소사용허가에도 불구하고 잔디보호를 이유로 들어 해변의 녹지에 작품을 전시할 수 없다며 강제철거하려는 구청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지금은 설치작품이나 퍼포먼스가 보편적 미술양식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부산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작가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전람회 역시 드물 때였다. 심지어 일부 화가들조차도 뒷전에서 '저게 뭐고, 저것도 작품인가'라고 빈정댈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반인들의 눈에는 한마디로 이상한 짓거리로 비쳐지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때문에 경찰이나 구청직원의 그런 행동마저도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기도 했다. 더구나 해변의 나들이객에 의한 작품훼손은 예견됐던 바이기도 했다.
그렇게 설치나 퍼포먼스 작업에 대한 이해가 척박하던 시절이었으니 작품의 손상은 매일 있었고, 손상된 작품을 수습하기 위해 전시기간 내내 출품 작가들이 현장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날도 몇 점의 작품이 손을 탔다. 그중 정희욱의 작품은 훼손의 정도가 심했다.
그의 작품 '머리'는 나무 가지를 쌓아올려 머리형상을 하고 달집같이 속이 빈 설치작품이었다. 바닷가는 일교차가 심하다. 그런 점이 탈이었을까. 바닷가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한쌍의 청춘남녀가 새벽에 추워지자 달집 안으로, 아니 그의 작품 '머리' 속으로 들어가 자릴 잡았던 것이다.
그 데이트족은 그래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던지 모닥불을 놓았던 모양이고 땔나무는 따로 구할 것 없이 정희욱의 작품에서 한 개비씩 한개비씩 솎아내어 불을 지핀 것이다. 그러니까 그 데이트족은 밤새도록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주앉아 달콤한 밀애를 나누고 대신에 정희욱의 작품은 얼추 거덜나버린 것이다. 훼손된 작품을 수습하던 정희욱은 그래도 "제작품이 그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 겁니다"라며 해변에서의 전시를 마냥 신나했다. 모두에게 순수의 열정이 충만한 시절이었다.
근년에 손병철이 유럽여행 중에 보낸 엽서에 '바다미술제'가 출발 당시대로 설치와 퍼포먼스 그리고 나중에는 영상부문까지 아우르는 자연스런 방향으로 온전하게 발전이 되었더라면 특화된 미술제로 더 나은 자리매김을 했을 텐데 아쉽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나는 십년 넘게 본 적이 없어 모른다는 전화를 해줬다.
지난 87년 9월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열린 제1회 바다미술제에 응모한 방준호씨의 작품 '룸'.
<10> 허종배 돕기전
동료 입원비 마련 '한마음 전시회'
투병 사진작가 위해 예술인들 온정 답지
희사한 작품모아 전시…두고두고 '미담'
70, 80년대만 해도 광복동이 많은 부산문화계 원로들의 사랑방이었다. 광복동 입구의 희다방과 보리수다방이 그들의 아지트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만나 담소하다 해질녘이 되면 몇몇은 근처의 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그렇게 광복동의 하루를 마무리 하곤 했다.
당시 광복동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던 문화계 원로 중에는 베레모에 파이프가 썩 잘 어울리는 네 사람이 있었다. 불문학을 하던 양병식, 독립운동가이자 작곡가이던 먼구름 한형석, 사진작가 허종배, 시인 정영태 선생이다. 먼구름과 정영태 선생은 대략 한 주에 한번 혹은 두 주에 한번 꼴로 나타났다. 이들에 비해 양병식과 허종배 선생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모습을 보였다.
거구에 이목구비도 큼직큼직한 양 선생이 베레모에 파이프를 물고 한손에 원서를 다른 한손엔 지팡이를 든 채로 광복동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은 누가 봐도 폼나는 예술가의 풍모였다.
그에 비하면 허 선생은 몸이 가벼웠다. 희다방 보리수다방 로댕다방 백조음악다실에 앉아있다 어느새 전화국 골목의 카메라 수리가게에 나타났고, 또 태종대 자갈마당 혹은 범어사 계곡에서 찰칵대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허 선생은 어깨에 라이카(독일산 카메라)를 둘러 메고 또박또박한 걸음걸이로 광복동 거리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누비고 다녔다. 그런 허 선생이 며칠 동안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궁금해서 점심시간에 부산데파트 지하의 그의 단골밥집으로 가봤다. 밥집 모친은 되레 내게 "허 선생님이 안 오시는데 무슨 일이 있는가요"라고 물었다.
헛걸음을 하고 돌아오는데 길 건너 이층 보리수다방에서 부산문화계의 전령사 김상수 선생이 창문을 열고 오라는 손짓을 했다. 올라가니 동시인 조유로 선생과 함께 있던 김 선생이 "허선생 어떻든가"라고 물었다. 나는 지난 며칠간 부산에 없었기에 좀 전에서야 안 보이신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김 선생이 도로 그가 아는 그간의 경과를 말해줬다.
대연동 못골시장 안에 있는 해장국집 아주머니가 매일 새벽이면 오던 허 선생이 한 이틀 안보여서, 노인이고 더구나 혼자인지라 걱정이 돼서 집에 찾아가 봤더니 몸져 누워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는 부랴부랴 근처에 사는 작은 딸에게 연락을 해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다행히 급한 고비는 넘겼지만 입원비 때문에 걱정이라고 했다.
그날 저녁 무렵 주점 갓집에 부산일보 박정인 이진두 두 기자와 아동문학가 강기홍이 만나 허종배 선생 돕기전을 열기로 뜻을 모았다. 박 기자가 발기인 위촉을 맡고 직전 미술담당 기자였던 이 기자가 화가들의 작품희사를 맡는 등 각자의 역할도 대강 정했다. 유화랑에서 전시를 열기로 하고 전화를 하자 주인 유선화가 쾌히 무료 대관을 승낙했다.
허종배는 1914년 삼천포에서 태어나 일본 오리엔털사진학교를 졸업하고 개인전 15회, 66년 동아사진살롱 심사위원,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사진가보다도 화가 문인 음악인들과 잘 어울렸고 그의 작품 또한 차라리 회화에 가까웠다.
구연식 김규태 김상훈 김정환 박노석 오병규 이시우 오재봉 전상수 조순 최봉경 천봉 허천 등 문화계 원로들이 발기인이 되고 천재동 김원명 김수석 김일랑 안세홍 박춘재 신창호 박충검 박윤성 송영명 최봉준 진강백 수안 스님 등 40여명에 이르는 화가들이 희사한 작품으로 88년 6월 22일 유화랑에서 '허종배 돕기전'이 열렸다.
전시장에는 마산에서 소식을 듣고 작품을 들고 온 최운 화백이 "부산문화계의 이같은 훈훈한 정이 부럽다"고 했고, 김봉진 문계수 두 화백도 뒤늦게 알았다면서 작품을 가져왔다. 청남 오재봉 선생은 "참 맑은 사람이지, 멋도 있고"라면서 허 선생의 쾌유를 빌어 주기도 했다 .
'허종배돕기전'은 병상에서 외롭게 투병하고 있는 한 예술가를 위해 많은 화가들이 기꺼이 작품을 내놓고 또 많은 사람들의 성금이 답지한 부산문화계의 아름다운 미담으로 남기에 충분했다.
전람회가 끝나고 박정인 강기홍이 퇴원한 허 선생을 찾아갔다. 그동안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허 선생을 돌보느라 고생한 따님에게 성금을 전하고 나중에 묘비라도 세우게 되면 쓸 종자돈도 함께 맡겼다. 허 선생에게는 따로 현금을 두둑하게 쥐어드렸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음악평론가 김점덕 선생과 주위의 어려움을 하도 많이 감당해 부처님 비서실장이란 별명을 가진 박기찬씨의 수고로 금강공원에 '허종배사진비'가 세워졌다.
<12> 화가의 삶 - 어떤 단면
치열한 작품활동 뒤켠엔 생활고 허덕
엄청난 작업 비용 지방화가엔 언제나 부담
작품 성과 못지 않게 작가 삶의 궤적도 중요
올해 초 경남 진주의 한 시민단체가 진주성 의기사에 있던 미인도(논개영정)를 강제로 떼내는 사건이 있었다. 친일화가의 손으로 그려진 논개의 영정 봉안이 의기정신에 맞지 않다는 시민단체와 계속 봉안하겠다는 관리기관과의 옥신각신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소동이었다.
결국 양쪽이 문제의 영정은 떼어내 창고에 보관하고 새로운 영정을 제작해 봉안하기로 합의하고 일단락되었다. 그 영정을 그린 화가는 생전에 한국화단의 대가로 명예를 누렸지만 사후에는 친일화가로 수모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지난 8월에 발표된 친일인사 명단에 그 화가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세상살이 고달프다는 얘기를 흔히들 한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아무렴 삶의 시름이 없기야 하겠냐마는 보편적 삶의 잣대로 본다면 아무래도 예술가의 삶이 조금 더 고달프지 않을까 싶다. 예술가의 삶이라는 것이 일반적 삶과는 간격이 있는 일탈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화가의 삶이 좀 더 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현실적인 문제로 본다면 펜과 종이 또는 컴퓨터 한 대 있으면 그만인 문인과 달리 화가는 작업에 소용되는 비용이 엄청 많고 그 부담이 예사가 아니다. 교직에 있거나 따로 직업이 있는 경우는 그래도 근근이 꾸려나가지만 작업만하는 전업화가의 사정은 말이 아니다.
작고한 서양화가 김홍석이 생전에 한 푸념이 생각난다. 그전까지 실밥 연작을 해오던 그가 80년대 중반 들어 우리의 멍석을 원용한 작품을 할 때였다. 멍석 짤 사람이 필요했다. 멍석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일이라 옛적에도 마을에서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나 할 수 있던 일이다.
여기 저기 수소문한 끝에 경남 함양 산청 언저리에서 용케 한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작업장으로 모셔와 한 열흘 남짓 일을 시켰는데 숙식비와 품으로 교수월급 한 달치가 다 들고도 모자라더라고 했다.
작품 활동이 남달리 왕성했고 더구나 대작을 주로 했던 그에겐 작품 제작비와 작품발표에 드는 비용이 항상 버거웠다. 그렇다고 작품이 팔리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미술시장이 10년 넘게 바닥을 치고 있다지만 김홍석이 작업을 한창 왕성하게 하던 80년대 전후에는 미술시장이 전성기라 할만큼 흥청댈 때였다. 그때 서울의 엔간한 화가는 다 돈 좀 만졌다. 그러나 지방화가에겐 예나 지금이나 그런 호사가 해당되지 않았다. 김홍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김홍석은 35년 경남 김해출생으로 75년 제13회 브라질 상파울로비엔날레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78년 제4회 인도트리에날레에서는 대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인도국립미술관 미국 테네시주립대학미술관 등 국내외 유수한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있고 한국현대미술의 중심 작가군의 한사람이다.
그러나 그딴 것도 다 소용없었다. 미술품 구매자는 전문지식을 쌓은 수집가라기보단 대부분이 졸부거나 호사가들이다. 그들의 잣대는 긴 안목에서 작품을 보지 않는다. 진정한 작품성은 도외시 되고 소위 인기화가에게만 눈길을 돌린다. 그런 실정이라 그는 작품 활동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순전히 월급만으로 충당해야 했고 늘 쪼들리는 형편이었다. 한동안 교환교수로 일본에 가있을 때는 제자 뻘의 후배작가 유명균의 자취방에 얹혀 기숙하기도 했다.
아무튼 대학교수라는 반반한 직업을 가졌던 김홍석도 항상 작품제작비와 활동비용의 부담에 엄청 짓눌리며 살았다. 하지만 그는 용케 견뎌냈고 또 달리 한눈 팔지 않고 그런 고충을 되레 작업에 매몰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가 작고하기 전 입원해 있을 때다. 병실 한쪽구석에 가져다 놓은 작업재료를 보고선 내가 "아예 장기전 준비를 했네요"라고 하자 "우짜겠노 저승 가서도 저거나 하지 뭐"라며 찡그리듯 웃었다.
얼마 전 박은주 남순추 이상식 허황을 비롯한 그의 후배들이 뜻을 모으고 그와 교우했던 일본작가들까지 힘을 보태 부산 구덕산 공원에 김홍석 추모비를 세우고 그의 예술혼을 기렸다.
미인도 소동은 안타까운 일이다.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봐야 한다는 항변도 있겠지만 사후에 기억되는 작가가 있는 반면에 단박에 잊혀지는 작가가 있다. 또 사후 위상이 바뀌어 추락하는 작가도 있기 마련이다. 모름지기 작가란 작품의 성과 못지않게 삶의 궤적 또한 주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하리라.
<13>두 원로작가의 고백
가슴 한구석 열망을 어쩌지 못해…
이상향의 풍경 속 사회참여 작품에 목말라
맨 정신에 붓들기가 두려워 술을 청하고
84년 가을, 미술평론가 김해성과 함께 목가적 풍경화로 유명한 양달석 선생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양 선생은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방안에서 의자에 앉은 채로 우릴 반겼다.
양 선생은 1908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1932년 제11회 선전에 '전원의 사람'을 출품하고 39년 부산에서 제3회 수채화 개인전을 가진 뒤 줄곧 부산서 활동했다. 그는 부산화단의 1세대로서 86년 작고 할 때까지 수많은 단체전과 줄잡아 30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부산화단에서 드문 전업 작가이기도 했다.
오래전 어느 해인가 부산미협지부장을 맡고 있던 X씨가 양 선생을 찾아와 그해 부산시문화상 미술부문 수상자 후보로 추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X씨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사전에 심사위원들에게 인사를 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전업작가의 생활이 빤한 것 아닌가. 그 시절에 비하면 세상형편이 하늘과 땅차이인 요즘도 어려운데 그 시절이야 오죽했겠는가. 양 선생은 속으로 상금을 타면 생활에 상당한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X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당장은 형편이 안되지만 상금을 타게 되면 그때 가서 꼭 인사를 하겠노라고 했다.
얼마 후 수상자 발표가 있었다. 신문에 난 명단을 보니 양 선생이 아니었다. 수상자는 어처구니없게도 다른 사람이 아닌 X씨였다. 양 선생은 그런 일이 있고는 세상이 두렵고 사람도 무섭더라고 술회했다. 양 선생은 화단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 일이 은둔의 빌미를 제공한지도 모를 일이다.
김종식
양 선생이 따님에게 서가 위에 있는 작은 그림 두 점을 내리도록 했다. 그는 알려진대로 목가적 풍경을 주로 그렸지만 그와 상이한 '판자촌 풍경' '도시풍경'과 같은 당시의 현실을 담은 유화작품도 그렸다. 양 선생은 우리에게 흡사 중요한 근거를 대듯 작품들을 보여 주며 "이런 작품도 한해에 한두 점씩은 했지요"라고 말했다. 굳이 그 작품을 보여준 그의 심사가 궁금했다.
양달석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하고 불혹의 나이에 6·25전쟁을 겪은 세대다. 작품의 대종은 현실세계를 떠나 몽환적(목가적) 세계에 머물렀다. 그런 작풍의 그가 거꾸로 진저리나는 현실세계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또 하나의 자아를 항시 품고 있었다는 점이 헤아려진다. 목가적 풍경화로 유명해진 양달석이 그 이상향의 풍경과 상반되는 사회참여 성격의 작품에 대해 늘 목말라 했다는 이율배반의 고백인 셈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가슴속에 어떤 응어리를 한 움큼씩 안고 살아간다. 이상과 현실의 충돌로 튕겨져 나온 파편 따위도 그중 하나일 게다. 양 선생 역시 가슴 한구석에 달리 열망의 파편 하나를 안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생전의 김종식 선생이 화포를 마주하면 항시 웅얼거리던 말이 있다.
김 선생은 스케치를 나가면 쉬이 붓을 들질 않고 술을 마시며 한참 뜸을 들이는 습관이 있다. 혼자라도 그랬고 옆에 누가 있으면 더 했다. 70년대 말 어느 가을날 김 선생이 나더러 스케치 나가는데 바람도 쐴 겸 같이 가자고 했다. 따라 나섰다. 그날은 통도사 근처로 갔다. 노송 아래 자리를 잡자 동행한 아들 헌에게 동동주와 안주로 더덕구이를 사오도록 시켰다.
공기 맑고 안주 좋으니 술맛이 절로 났다. 김 선생은 술이 떨어지면 또 사오도록 시켰다. 그러기를 얼추 한식경을 넘겼다. 스케치 나와서 스케치는 뒷전이고 술만 계속 마시기가 아드님 보기에 좀 뭣하다고 말려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암만 그래도 김 선생은 붓 들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아들 헌이 비닐봉지를 들고 주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빈 동동주 통이 댓 개를 넘었다.
해질녁이 다 돼갔다. 그때서야 김 선생이 붓을 들 심산으로 화포를 건사했다. 화포 너머로 보이는 단풍으로 물든 가을풍경이 아름다웠다. 단풍은 석양의 역광에서 바라보면 한층 더 아름답다. 김 선생이 술로 시간을 끈 것은 때를 기다린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인자 됐다"며 붓을 든 김 선생이 웅얼거렸다. "겁난다. 맨 정신 가지고는 당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술기운에 용기를 내야 돼." 그는 평생을 그림으로 살아왔지만 화포만 마주하면 겁이 난다는 고백을 했다. 김 선생의 붓끝이 화포에 닿았다. 화포위로 흡사 서예의 획 같은 붉은 선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14> 광복동 마지막 화랑-갤러리 누보
누보가 연어처럼 돌아올 날을 위해
고경숙씨 87년 문열어 비영리 운영
2000년 문닫자 '미술의 거리' 쇠락
87년 겨울 어느 날 미술평론가 이시우 선생의 호출이 있었다. 광복동 용두산공원 계단 입구 모퉁이 건물 2층의 카페로 갔다. 어떤 젊은 여인과 신조형연구소 이추복 소장 등과 함께였다. 이 선생이 여인을 소개하며 화랑을 열려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맞은편 건물 2층을 임대했으며 며칠 뒤 이 소장이 화랑공사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개관 전시기획을 부탁했다. 그 여인이 87년부터 2000년까지 14년간 갤러리 누보를 운영한 고경숙 사장이었다.
개관전 준비에 착수했다. 개관전 명칭을 '부산의 작가10인'(김종식 김홍석 김청정 서상환 김정명 허황 김응기 박윤성 이종빈 유명균)전으로 정했다. 그리고 전시회 도록은 당시엔 파격적인 250쪽 분량의 책자형식으로 하되 김강석 미술평론집을 부록으로 엮기로 했다. 그 일은 자료채집과 정리를 맡은 이용길씨와 편집과 교정을 맡은 손병철씨의 노고가 있어 가능했다. 또 욕심을 부리다가 책자의 쪽수가 계약분량보다 훨씬 넘는데도 흔쾌히 넘어가준 도서출판 국제의 윤광선 사장의 배려도 있었다.
그렇게 준비를 한 끝에 87년 3월 갤러리 누보가 문을 열었다. 갤러리 누보는 순수하게 비영리로 운영됐다. 대신에 적지 않은 사재를 털어넣었을 걸로 짐작된다. 갤러리 누보는 부산화단에 음양으로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2000년 여름 어느 날 저녁, 광복동 입구 한 일식집으로 미술인들이 하나 둘 모이고 있었다. 방안에는 김정명 허황 김응기 박은주 강선학 박윤성 이상식 예유근 유명균을 비롯한 미술인 열명 남짓이 먼저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얼마 후 몇 사람이 더 오고 뒤이어 갤러리 누보 고경숙 사장이 왔다. 모여 있던 미술인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올 만한 사람이 얼추 다 오고 자리가 정돈되자 당시 부산미술협회 이사장이던 허황이 고 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어서 꽃다발도 한아름 증정했다. 그날의 자리는 갤러리 누보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접한 미술인들이 그 간의 고 사장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마련한 조촐한 자리였다.
70년대 중반, 광복동에 화랑다실 목마와 공간이 문을 연 것을 전후로 용두산 둘레에는 현대화랑(허창) 사인화랑(김응기 박은주 예유근 정진윤) 원화랑(김재성) 수로화랑(황수로) 국제화랑(지문길) 유화랑(유선화) 맥화랑(전정일) 진화랑(진이근) 중앙화랑(김재범) 로타리전시장(박한기) 부산탑미술관(김창섭) 등 수없이 많은 화랑이 밀집해 있었다.
판화가 이용길의 부산미술일지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에 그 일대에 대강 무려 100개 가까운 화랑이 명멸을 거듭했고 광복동에만도 20여개나 되었다. 그만하면 용두산 둘레는 미술의 거리로서 손색이 없었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87년 공간화랑이 광안동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90년을 전후로 광복동에서 화랑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도심의 분화에 따른 주도심의 쇠락이 가져온 현상의 하나였다.
갤러리 누보는 2000년까지 광복동에 남아있던 마지막 화랑이자 유일한 순수 문화공간이었다. 그러기에 갤러리 누보의 폐관은 화랑 하나가 없어진다는 단순한 의미 그 이상이었다. 광복동은 오랜 세월 부산문화의 중심거리로서 미술인뿐만 아니라 지역예술인 모두의 애환이 구석구석 배여있는 곳이다. 갤러리 누보의 폐관은 미술인을 위시한 부산예술인 모두의 안식처 하나가 사라지는 의미이기도 했다.
지금의 광복동 거리는 지난날 부산예술의 중심거리였던 그 위상은 흔적도 없이 지워졌고 예술인들의 발걸음도 끊긴지 오래다. 얼마 전 국제시장 지하상가에 미술의 거리를 조성했다기에 가봤다. 옛날의 광복동 정서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옛날 용두산을 중심으로 근대역사관-광복동입구-부산호텔-대청동에 이르는 그 거리의 분위기가 영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젠 광복동에 나가도 들어가 편하게 차 한잔 마실 화랑 하나 없다. 휘적휘적 거리를 둘러봤자 마주치는 반가운 얼굴도 찾기 힘들다. 문화예술인들로 북적대던 광복동의 풍경은 아련한 추억일 뿐이다. 연어의 꿈이라도 꾸어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