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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현 기 영
창주는 개 짖는 소리에 얼핏 잠이 깼다. 선잠 깬 귓속으로 초인종 소리가 탈탈 무디게 파고든다. 아닌밤중에 누굴까? 발바리가 금방 숨 넘어갈 듯이 극악스럽게 짖어 대고 머리맡 사발시계의 야광침은 두시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리 늦은 시간의 방문객은 처음 겪는 일이다. 잠기가 싹 가신다. 도대체 누굴까? 창주는 기분이 언짢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내가 깨지 않게 이불 속을 살그머니 빠져나와 바지를 꿰입었다. 제까짓 게 기껏해 봐야 제 집 잘못 찾은 술주정뱅이겠지.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마당을 질러 성큼성큼 대문으로 다가가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누구우꽈?”
“저, 새밋드르 사는 강영조 씨 집에서 왔수다.”
가슴이 뜨끔했다. 강영조 씨?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대문 빗장에 손을 대면서 재우쳐 물었다.
“새밋드르 이장 하시던 분 말이우꽈?”
“예.”
그 노인네가 도대체 이 밤중에 나한테 볼일이 무언가? 야릇한 불안감에 짜증이 나서 창주는 옆에서 사납게 짖어 대는 발바리 배를 발로 밀어붙이고는 대문 빗장올 땄다. 대문의 누런 전등 불빛에 드러난 얼굴은 과연 강씨의 아들이다. 상고를 나와 어느 조그만 개인회사에서 경리일 본다는 스물 안팎의 앳된 청년이다. 강씨 아들은 자전거 손잡이를 잡은 채 꾸벅 인사를 한다. 얼굴과 잠바 앞가슴이 척척히 젖은 것으로 보아 자전거 페달을 속력껏 밟아 온 모양이다. 전등 불빛 주위로 성긴 눈발이 퍼뜩거리고 있었다.
“웬일인가, 이 밤중에?”
“저, 주무시는 데 죄송허우다. 실은 아버님이 오늘 밤을 넹기지 못함직해서 마씸.”
“아니, 그리 위독하신가. 와병중이란 말은 얼핏 들었네마는…….”
청년의 입에서 한숨이 가냘피 새어나왔다.
“숨거두기 전에 꼭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선생님한테 유언할 말이 있으신 모양이우다.”
창주는 너무 놀라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한테 유언이라고? 무슨 유언인데?”
“글쎄 마씸.”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이건 번지수가 영 틀리지 않은가. 일 년 가야 길에서 한두 번 마주칠까말까 한 남남인 처지에 유언이라니.
그러나 한밤중 시오리 밖 향리에서 느닷없이 날아든 강씨의 이름은 창주를 아연 긴장하게 만들었다. 30여 년 전 악명 높던 새밋드르 이장 강영조, 불길한 밤의 체취가 물씬 나는 그 이름과 더불어 당시 새밋트르를 뒤덮던 그 무서운 암흑이 일거에 달려와 그를 에워싸는 것만 같다. 그렇다. 비록 서로 얼굴 보는 일도 드물고, 나이도 열댓 살 차이가 나지만 그와 나는 결코 무관한 사이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은밀한 대립관계였다. 서로 간에 내색하는 법은 없었지만, 연기 없이 몰래 내연하는 재 속의 불씨처럼 적대감은 분명 속살 깊이 잠재하고 있었다.
30여 년 지속되어 온 이 불편한 관계는 그 당시 창주가 마을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 번에 걸쳐 강씨와 지서주임이던 임영준 씨를 대놓고 면박 준 일 때문에 발생했다. 온 섬바닥을 휩쓴 대공황의 난리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의 존재가 아직도 두렵게만 느껴지던 그때, 그는 젊은 혈기에 욱하고 그 금기의 말을 내뱉어 버린 것이었다. 첫번은, “수백 년 묵은 팽나무들을 벌목한 것은 아무래도 처사가 영 잘못된 것 닮수다”였고 그리고 두 달 후 사건의 핵심을 곧바로 찔러, “삐라 뭉치를 든 사람이나, 풀통 든 사람이나 매한가지 아니우꽈?”라고 말해 버렸던 것이다. 그 후 창주는 혹 보복이 있지 않을까 꺼려 오랫동안 예의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음해하여 온다면 창주도 일신이 파괴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범죄를 정식으로 문제 삼고 싸워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끝내 아무 일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혈기방장하던 장년의 그들은 차츰 이울어져 몰골이 추레한 노인으로 영락하고 말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 일로 오죽이나 부심했으면 강씨가 임종에 나를 부를까. 창주는 평생 그들의 약점에 달라붙은 아픈 가시였던 셈이다. 그렇다. 이제 강씨가 마지막 안간힘으로 보여 주고 있는 저 집념은 나에게 원망과 저주의 욕설을 퍼붓자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들려줄 유언이라면 “내 죄를 용서해 주게” 하는 말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강씨는 나를 통하여 그 유언이 마을 전체에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어서 가봐야지. 강씨 아들은 눈썹을 파르르 떨며 초조하게 이쪽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곧 택시 타고 뒤따라갈 테니, 어서 먼저 떠나게.”
그러자 청년은 안심한 듯 꾸벅 절을 하고는 자전거에 몸을 싣고 이내 골목 밖 어둠 속으로 빠쳐들어갔다.
창주는 안에 들어가서 옷을 단단히 껴입고 서둘러 밖을 나섰다. 입춘 추위를 하는지 하늬바람 끝이 제법 서슬겨 있었다. 토퍼 목단추를 채우고 모자를 올려 썼다. 바람 탄 눈송이들이 동백나무 가로수들 주위에 나긋나긋 휘감기고 있었다. 다행히 아스팔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차 타고 가기에 무리가 없을 듯했다. 찰기가 없는 눈송이들은 아스팔트에 닿자마자 푸실푸실 풀어져 이내 녹아 버리곤 한다. 동백나무 잎사귀에 달라붙은 눈도 녹아 젖은 솜처럼 후줄근히 늘어졌다. 그런데 큰길까지 걸어나와도 웬일인지 빈 택시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빈 택시는커녕 손님 태운 것마저 지나가는 게 드물었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택시들은 손을 흔드는 창주를 향해 강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면상에 쏘아 붙이고는 매정하게 달아나 버리곤 했다. 여느 때 같으면 밤새도록 차 왕래가 그치지 않건만 아마 궂은 날씨에 손님도 적어 일찌감치 들어가 버린 모양이다. 눈이 녹아 질퍽하게 젖은 아스팔트는 가로등 불빛에 번들번들 빛날 뿐 휑뎅그레 비어 있었다. 빨리 가야할 텐데. 강씨가 시방 이승 반 저승 반 하고 있는데 이리 지체해서야. 창주는 조바심에 쫓겨 어느새 새밋드르 쪽으로 발걸음을 떼놓고 있었다. 걸으면서도 혹시 차가 오지 않나, 연방 뒤쪽을 힐끔힐끔 돌아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강씨 아들의 자전거 뒤꽁무니에라도 매달려 갈 걸, 먼저 보내 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이렇게 차를 기다리며 얼마쯤 걷노라니 어느덧 주택가는 끝나고 앞길은 가로등도 없이 캄캄한 어둠이다. 어둠 속에 놓이자 본능이 시키는 것처럼 소심증이 뾰죽하게 일어난다. 어둠 속에서 눈발이 날아들어 선득선득 뺨을 핥는다. 어떻게 할까? 그만 돌아가 버릴까? 낮이라면 걸어서라도 갈 덴데…… 인적 끊기고 눈 내리는 이 밤길은 혼자 걷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차를 타면 10분도 채 안 결리게 가깝지만 걸어가자면 잰걸음이라도 40분 가량은 좋이 걸리는데…… 이렇게 망설이면서도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자석에 끌린 듯 새밋드르 쪽을 향해 움직였다.
얼마를 더 가니 인도마저 끊겨 발밑에 젖은 흙이 질척거린다. 아스팔트 위로 발을 옮겨 놓는다. 이왕 내친걸음 할 수 없다. 걸어서라도 가야지. 이렇게 맘을 다잡아먹은 창주는 아예 아스팔트 복판으로 나와 걸음을 빨리 떼놓기 시작한다. 그런데 걸으면서도 어쩐지 구름발을 디디는 것 같은 야릇한 비현실감올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은 웬일일까? 자신이 오밤중에 눈길 위에 끌려나와 걷고 있는 몽유병자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드는 것이다. 내가 진짜 길이 아닌 꿈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 타면 단 십 분 결리는 곳을 이렇게 걸어가게
될 줄이야.
걸어가는 고향길이란 버스 노선이 생기기 전인 십여 년 전, 더 정확히 말해서 시내로 이사오기 전의 이십여 년 전, 과거 속의 길이었다. 그 시오리 길을 창주는, 해방되기 이태 전 소학교에 입학한 뒤 구 제중학교 5학년을 나올 때까지, 십여 년의 긴 세월을 하루같이 타박타박 걸어다녔던 것이다. 시내에서 수의사 노릇 하는 당숙 댁에 별로 달갑지 않은 군식구로 얹혀 지내며 학교를 가깝게 다녀 본 것은 소학교 1학년 때뿐이었다. 부모의 품에서 갓 떨어져 나온 그는 젖 곯은 강아지마냥 일 주일 내내 골골 앓다가도 토요일 오후만 되면 고향길 위로 새 날듯 팔 벌려 달려가곤 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동산마루까지 마중 나와 그를 등에 업고 데려가 주던 아버지. 아버지는 그해 징용에 끌려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향길은 단 이틀만 걸어도 짚신 앞부리가 수세미 되게 헐어 버리고 마차 쇠테바퀴가 왈각달각 불똥 튀기는 생돌짝길이었다. 중도에 비 그을 처마 하나 없고 땀 들일 그늘도 변변치 못한 팍팍한 시오리 길, 걷는 일이 벌받는 것처럼 괴롭던 아이 시절이었다. 때로는 짐도 지고 다녔으니, 삭정이 땔감을 담임선생님 댁에 지고 가 공책 한 권이나 연필 한 자루와 맞바꾼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 길은 시련의 도정이었다. 비가 오면 벌건 감탕
몰이 발목 잠기게 콸콸 흘러 길바닥이 무섭게 패고, 갠 날이면 바람 타고 황진구름이 뿌옇게 떠올라 무명옷을 벌겋게 물들여 놓곤 했다. 그리고 더 큰 시련이 닥쳐왔다. 길가 전신주에, 삐라가 나붙고 창주를 비롯한 어린 통학생들이 노상에서 검문당해 삐라 뭉치를 찾는다고 책보따리가 헤쳐지곤 했다. 달구지나 다니던 길에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미군 지프차, 스리쿼터가 무섭게 질주했다. 길 가던 젊은 여선생이 미군 지프에 채어 가기도 했다. 그 길을 따라 새밋드르부터 서쪽은 폭도마을로 낙인찍혀 있었다. 사정은 더욱 파국으로 치달아 전봇대가 톱에 잘려 길바닥에 눕혀지고 절단된 전홧줄이 산발한 미친 머리칼처럼 어지럽고, 차바퀴가 빠지게 길바닥에 허궁다리가 패지곤 하더니 급기야는 길가 잔솔밭, 밭담 뒤 여기저기에 떼송장이 늘비하게 널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모진 시국의 풍우와 폭염에 전신을 드러낸 채 난타당하던 길은 30여 년 후인 지금 매끄러운 아스팔트 밑에 묻혀 감춰져 버린 것이다.
바람세가 누그러지면서 눈발은 점점 짙어졌다. 이제 창주와 새밋드르 사이에 놓인 어두운 공간은 숱한 눈송이들로 빽빽히 채워졌다. 가로등 불빛은 등뒤로 가물가물 멀어지고, 대신 시오리 밖 새밋드르의 암혹이 정면으로 밀려와 앞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러 댄다. 그것은 숯더미로 화하여 한낮에도 암혹같이 검던 새밋드르요, 그 폐허의 한 귀퉁이에 돌성 쌓고 들어가 살던 전략촌의 어두운 밤이었다. 창주는 이제 오그라드는 가슴을 심호홉으로 부풀리며 성큼성큼 과거 속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시오리 공간에 붐비는 눈송이들이 자꾸만 창주
에게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36년 전, 온 섬이 대난리를 만나 북새통일 때 이 시오리 길을 사이에 두고 읍내 순경들과 마을 남정네들 사이에 한때 야릇한 숨바꼭질이 벌어졌었다. 마을 앞 야트막한 도새기동산에서 홀연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와 함께 평소에 없던 소나무 한 그루가 불쑥 솟아오르면 마을 남정네들이 불 깐 돼지 튀어나듯 산 쪽으로 냅다 달음질 놓고, 읍내 쪽에서 검정 스리쿼터가 먼지구름을 끌면서 득달같이 달려들곤 했다.
한마디로 비극은 달음박질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달음박질은 5·10선거일에 있었다. 그날 선거인을 데리러 오는 경찰 스리쿼터 한 대가 동쪽 길 끝에 나타났을 때는 마을 주민들은 농민회 청년들이 뒤에서 감때사납게 몰아대는 대로 산으로 내달린 다음이었다. 중산간 부락은 물론 해변 부락도 반수 이상 선거에 불참한 이 사건이 바로 비극의 발단이었다. 미 군정이 이를 단순히 ‘좌익의 선거인 납치’로만 보지 않고 ‘주민의 선거 보이콧’으로 보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변혁을 고창하는 농민회 청년들의 눈은 불면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경찰도 무서웠지만 머리띠를 두르고 죽창 든 그들의 지시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비협조자는 자기비판에 회부하여 가차없이 린치를 가했으니, 한밤중 “왓샤 왓샤” 하는 횃불시위 소리가 들리면 마을 사람들은 오늘은 또 어느 집 누구가 애꿎게 당하나 가슴을 졸이곤 했다. 나중에 경찰로부터 호된 고문과 닦달을 당할 줄 알˙면서도 모이라면 모여야 하고 입산자를 위한 식량과 기부금을 내라면 또한 지체없이 내야만 했다. 농민회에 의탁하여 사사로운 원한을 푸는 자들도 있었다. 좌우 양단간에 어느 쪽에도 정처를 못 두고 양쪽 눈치를 살펴야 하는 괴로운 생활이었다. 아직 장가 안 간 스물 안팎의 장성한 두 아들을 둔 외할머니의 심경은 실로 난감한 것이었다. 읍내 차부에 취직하여 화물차를 끌던 큰외삼촌이 그 무렵 경비대 운전병으로 들어가 있었다. 막내외삼촌이, “절로 죽지 못해 환장난 것들! 제까짓 촌무지랭이들이 사상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냅뜨는 거여? 공부한 하이칼라들이나 하는 멋쟁이놀음일 뿐이여” 하고 투덜거릴라치면 외할머니는 질색하고 손을 홰홰 내젓고는 하였다. “아이고, 야야, 말조심허라. 바람벽에도 귀가 있져.” 심지어 할머니는 이런 말까지 더러 하여 퉁을 먹곤 했다. “늬 성이 경비대에 들어갔다고 저것들이 우리집을 사뭇 밉게 보는디, 언제 당해도 당하고 만다. 어느 쪽이 이겨 어느 시상 될런지 당최 알 수 없으니 느랑(너는) 농민회에 나가사 좋음직허다. 해변 사람들 바다에 나갈 젠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는 절대로 한배에 안 탄다고 하는디 느네들도 한쪽에만 모다져(몰려) 있다가 둘 다 몰사하면 느이 집안에 씨 멀족 아니가. 대가 끊어지는 거여.” 그것이 할머니의 시국관이었다.
선거 불참은 이런 정황 속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불상사였다. 아무리 무식한 농사꾼이라도 그 사건의 중대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본의 아니게 나라에 죄진 백성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죄’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산에서 기부 형식으로 뺏어 가는 쌀과 돈이 더 큰 문제였다. 그것이 입산자들의 피와 살이 되고 있으니 미상불 이것 또한 본의 아닌 ‘이적행위’인 셈이었다. 입산자들의 식량은 전적으로 새밋드르와 같은 중산간 부락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곤경에 처하여 마을 주민들은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젊은 축들은 혹시 잡혀가 피똥 싸고 나오지나 않을까 앉은 자리가 늘 바늘방석이었다. 이러한 주민들의 불안감을 휘어잡고 조직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농민회 청년들이었다. 도새기동산에 나팔이 울고 소나무가 세워지면 대피명령에 응하지 않는 자는 밀고하기 위해 남아 있는 자로 간주하여 철저히 이단시되었다. 일단 경찰심문에 걸리면 아는 대로 답변하지 않으면 무사히 놓여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 지경을 당하여 어찌하겠는가. 끈 달린 꼭두각시처럼 나팔 소리에 일제히 줄달음질칠 수밖에.
큰외삼촌이 군기대 교육 받으러 육지로 떠난 직후 창주는 난생 처음 팔자에 없는 차를 타보았다. 계엄령으로 길이 차단되어 때이른 방학을 맞고 았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남의 밭에 품앗이 김 매러 가서 창주 혼자 큰길가 조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데 돌연 스리쿼터 한 대가 들이닥쳤다. 밭둔덕 풀숲의 여치 소리가 일순 뚝 끊겼다. 어른들이 벌이는 숨바꼭질에 나 같은 아이까지 덩달아 숨을 필요가 없겠지 했는데, 웬걸 덜컥 걸려들고 말았다. 김매는 척하면서 척후 노릇하고 있다는 혐의였다. 하기는 창주 자신도 마을 아이들처럼 혹 차가 오거나 낯선 사람이 보이거든 즉시 어른들에게 알리라는 다짐을 받고 있는 터였으므로, 그런 오해를 살 만도 했다. 그러나 정작 몇 군데 길목과 도새기동산에 번들며 망보는 아이들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대개 창주보다 두세 살 위인, 아직 샅에 달린 씨주머니가 채 여물지도 않은 열네댓 살 나이에 한몫의 남정 노릇 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이미 아이들이 아니었다. 아이가 나이 먹는 게 두려운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국민학생답지 않게 키가 껑충한 창주를 늘 불안스럽게 여겨 바깥 출입에는 꼭 교모를 쓰도록 단속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쩌다 운이 없었던지 교모를 썼는데도 의심받고 말았다. 차가 오는 큰길가 밭에서 아이 혼자서 김매는 꼴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던 모양이다. 시키는 대로 김매던 호미를 그대로 손에 쥔 채 엉거주춤 차에 오르니 어른 셋이 뒷짐 결박진 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는데 그 중에 강영조 씨가 끼여 있었다. 강씨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길래, 너무 꽁꽁 묶어서 핏독 올라 그런가 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낯술 먹은 탓이었다. 아랫마을 어느 초상집에서 술 몇 잔 걸치고 돌아오다가 붙잡힌 것이었다.
차는 엔진 폭음을 엄청나게 부풀리며 돌짝길 위를 무섭게 달려갔다. 간담이 서늘했다. 아무리 처음 타는 차라 해도 붙잡혀 실려 가는 몸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으리라. 졸지에 중죄인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잔뜩 겁먹은 창주의 눈에는, 그 스리쿼터가 생돌짝길을 아가리로 후룩후룩 들이마시는 즉시 먼지구름똥을 만들어 꽁무니로 뿌옇게 내뿜는 무서운 괴물처럼 여겨졌다. 스리쿼터는 단숨에 시오리를 먹어치우고 휭하니 서문 지서 앞에 가 닿았다. 읍내가 그렇게 가까울 줄이야. 창주는 자신이 흡사 강풍에 날린 가랑잎처럼 읍내
한복판에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지서 마당 한가녘에 붉은 꽃무더기를 인 협죽도 한 그루를 뒤로 하고 청년 여남은 명이 새끼줄 울타리에 가두어져 뙤약볕을 맞고 있었다. 창주가 가슴을 죄며 다른 연행자와 함께 현관으로 들어서자 한 순경이, “폭도 인솔!” 하고 외쳤다. 그러나 취조는, “우리 삼촌은 국방 경비댑니다” 하고 말할 새도 없이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주임은 창주 차례가 오자 어이없다는 듯이 한바탕 실소를 터뜨렸다. 아버지 입던 걸 줄여 만든 헌 갈중의 일복에 새똥 깔긴 듯 허옇게 바랜 모자를 눌러쓴 행색이 영락없이 풍우에 삭은 허수아비 꼴인데다 한 손에 김매던 호미까지 그대로 달랑 들려 있는 것이 여간 가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얼나 요 새끼폭도가 날 찍으려고 호미까지 들고 있나?” 주임은 이렇게 농까지 섞어 가면서 마을 청년의 동태에 대해서 몇 마디 물어 보고는 그 즉시 석방이었다. “모처럼 출동에 기껏 가서 잡아온 게 겨우 젖내나는 소학생이여? 정신 빠진 것들!” 그 사람이 임주임은 아니었다.
강씨가 정보원의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바로 그날이 아니었을까? 그 임무라면 마을 젊은 축들의 성분을 ○×△표로 분류한 리스트 작성을 돕고 ×와 △표의 동태를 살펴 보고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창주는 그날 스리쿼터를 탄 뒤로는 전에 없던 불안감이 찾아들었다. 졸지에 온 세상이 자기를 어른이라고 지목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말마따나 1월생 꽉찬 나이 열세 살은 결코 안심할 나이가 아니었다. 큰집이 바로 이웃에 있었지만 뒤늦게 농민회에 나가기 시작한 원두형 대하기가 두려워 출입을 삼가했다. 다음 번에 스리쿼터를 타면 원두형 때문에 시달릴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동안 수수방관만 하던 경비대가 마침내 이 사태에 개입하자 날로 스리쿼터 출동은 빈번해지고 이에 따라 남정네의 달음박질도 다급해졌다. 창주
로 이제는 어른들 톰에 끼여 산길로 오 리 밖까지 내달려 새밭에 몸을 파묻고 숨었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랬다. 파국은 그 달음박질에서 비롯되었다. 이 숨바꼭질에서 번번이 한 발짝 늦어 검거 성과가 신통치 못했던 술래 쪽의 노여움도 헤아려 볼 만했다. 오죽 분통이 났으면 나 같은 아이까지 데려갔을까. 저들이 죄가 없으면 왜 도망치는가. 나팔수와 소나무까지 등장시킨 대피활동, 출동을 지연시키려고 길에 허궁다리 파놓기, 전신주 절단하기, 식량 조달, 이 모든 것이 진압하는 쪽에서 보기에는 주민들이 좌익에 부화뇌동한 증거일 뿐이었다. 정작 산과 줄을 대고 있는 축은 한줌도 못 되는 농민회 청년들이건만 떴다 하면 이렇게 너도나도 덩달아 달음박질이니, 그런 한심한 시국이 또 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궁지에 처하여 오직 달음박질만이 능사인 무식한 농투성이들의 심정을 헤아려 줄 만큼 시국은 너그럽지 못했다. 아니,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경비대 병사 백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연대장을 암살하고 한라산으로 입산한 사건이 발생한 후로는 시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반란군을 낸 향토부대는 소박맞아 육지부대와 교체되어 섬을 떠났다. 조가 누릇누릇 익을 무렵 해서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지만, 당장만 모면하려고 시작된 마을 주민들의 달음박질은 여전히 관성처럼 되풀이되고, 달아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죄는 눈덩이 불듯 점점 무거워져 갔다. 이제 입산자인 ‘산폭도’와 구별하여 부르던 ‘도피자’ 호칭은 그 본래의 뜻이 퇴색되고 도피자라면 무조건 모개로 싸잡아 폭도로 간주해 버리는 무서운 집단적 편견이 팽배해 갔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농민회측들은 아예 입산하여 밤중에나 나타나 식량을 털어 가는 밤손님으로 변신해 있었다. 그들의 입산으로 도새기동산의 대피 나팔·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달음박질은 여전히 멈춰지지 않았다. 아니, 이번에는 이중의 숨바꼭질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으로부터 중산간 마을에 만 15세 이상 남정들을 모두 입산시키라는 지령이 떨어져 한밤중 납치극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밭은기침 소리 하나 없이 돌같이 굳은 밤. 쿵쿵 돌담을 뛰어넘는 소리에 화들짝 잠이 깬 외삼촌은 뒤꼍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그러나 한 발짝 늦었다. 돌담 타고 넘으려는 찰나에 죽창에 허벅지 찔려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그 서슬에 무너진 돌덩이들이 와르르 몸 위로 덮쳤다. 죽창 맞은데다 돌에 짓찍혀 전신이 피칠갑이었다. 살 가망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동생을 살려 보려는 일념에서 계엄령으로 통행이 금지된 그 밤중에 겁도 없이 읍내 걸음질을 했다. 길이 무서워 내내 밭 위를 걸었다. 발담에 바싹 붙어 몸을 숙여 걷자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날카롭게 서슬진 조그루에 찔려 발바닥이 험하게 까졌다. 그러나 수의사 하는 창주의 당숙은 위험한 길 갈 수 없다고 소독약과 붕대만 내주었을 뿐이었다. 이틀 후 외삼촌은 끝내 숨을 거두고 상여도 못 탄 채 지게송장으로 마을 근처 밭에 임시로 가매장되었다. 차마 맨얼굴에 흙을 끼얹을 수 없어 보릿짚을 덮어 주었다.
납치된 남정들은 대개 취사를 맡거나 해변 습격 때 무장군을 따라가 약탈한 물건을 날라 오는 짐꾼 노릇을 했으니 비록 죽창을 가졌다고 하나 그것은 단지 짐꾼의 지게 막대기에 불과했다. 이른바 ‘지게부대’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폭도’로 간주되어 가차없는 응징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렇게 낮에는 아래에서 오고 밤에는 산에서 왔으니 마을 남정네는 그야말로 안팎 곱사등이 신세였다. 아래에서 보아도 도피자요, 위에서 보아도 도피자였다. 폭도 마을로 낙인찍힌 터라 특히 두려운 것은 해변 쪽이었다. 몸이 땅강아지만하게 오므라들어 단지 속에나 숨는다면 모를까, 석 자 몸을 머리카락도 안 보이게 꼭꼭 숨기기는 어려웠다. 산과 해변으로 붙잡혀가는 남정네가 늘어났다. 도피자를 자식으로 둔 늙은 아비어미들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자식의 행방을 대지 못해 얻어맞고 멍든 얼굴들이 생기고 라이터 불에 흰 수염이 타버린 노인들도 있었다. 젊은 자식이란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그 경황에도 조는 간신히 거둬들였으나 막상 보리를 갈려 하니까 사태는 가일층 악화되었다. 들녘에 총성이 낭자하여 도무지 보리갈이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검거가 토벌로, 선별 검거가 전면 토벌로 변했다. 미군 정찰기가 한라산을 감돌고 해안선 따라 노상 미 군함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오락가락했다. 이제 토벌대의 눈에는 섬주민이라면 모두 산폭도와 한통속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온 섬이 살기로 충만했다. 지상 2미터 아래로 뜨거운 쇠붙이들이 수없이 난무하여 양민들의 멀렁한 살 속을 헤집고 들었다. 한때 중산간과 똑같은 처지이던 해변 마을들은 차 타고 일주도를 무섭게 질주하는 토벌대의 손에 속속 접수되기 시작했으니 마침내 섬은 해변과 산, 두 세력으로 대치되었다. 두 적대세력의 치열한 각축의 와중에 휘말린 중산간 주민들의 운명은 특히 비참한 것이었다. 폭도 마을로 낙인찍힌 그곳 양민들의 희생은 컸다. 죽는 자는 자기가 무엇 때문에 죽는지를 몰랐다. 사소한 변덕이 생사를 판가름하고 생존은 전혀 우연의 소치였다 새밋드르 청년 다섯 명이 마을 어귀의 늙은 팽나무 밑에서 한꺼번에 처형당한 것도 이때였다. 마침내 소개령이 떨어져 곳곳에서 중산간 부락을 태우는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새밋드르 남정네들의 마지막 둔주는 섣달 그믐께에 있었다. 새밋드르 네 개 부락이 완전히 소각되어 주민들이 해변으로 소개되던 그날, 강제 입산을 피해 숨어 있던 남정네들은 이번에도 도리없이 산 쪽으로 줄행랑 놓았다. 그들이 숨이 턱어 닿게 오 리 밖까지 내달려, 쫓긴 기러기떼 먼 데 둠벙에 날아가 앉듯 전에 숨던 새밭 안으로 기어들었흔데, 새밭에 든 남정네 수십 명이 다른 포수에게 들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산사람들이 거기까지 내려와 있을 줄이야. 입산을 고의로 기피했다는 이유로 본보기삼아 한 명이 그 자리에서 흠씬 얻어맞고 모두가 곧장 산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이제 단순한 도피자가 아니라 빼도 박도 못 할 입산자로 전락된 것이다. 이리하여 반 년 넘게 계속된 마을 남정들의 필사적인 둔주는 결국 파국에 이르는 달음박질로 마감한 셈이었다. 이들 남정네 외에도 늙은이, 아녀자 백여 명이 그날 산에 올랐다. 호가 난 입산자 가족은 물론, 산으로 납치되어 졸지에 도피자에서 입산자로 처지가 바뀐 젊은 남정네들의 가족 다수가 해변이 무서워 스스로 산행을 결정했는데, 그 밖에도 창주네처럼 그 경황중에 쌀부대와 옷고리짝을 뒤꼍 채마밭이나 돌담 속에 파묻고 뒤늦게 피난길에 나섰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산사람들에게 뒷덜미 잡혀 산쪽으로 돌려 세워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총과 죽창을 거머쥔 산사람 다섯은 무겁게 등짐 진 이재민들을 좁은 목에 돼지 몰듯 오 리 밖까지 죽을 둥 살 둥 반달음질시킨 후에야 걸음을 조금 늦춰주었다. 얼핏 돌아본 새밋드르는 거대한 먹구름떼가 내리덮친 듯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오 리 밖에서도 물씬 풍기는 매캐한 연기 냄새.
개털모자를 눈 밑까지 폭 눌러써 얼굴을 가린 강씨가 소개민들을 임시 수용한 일주 도로변 덕천국민학교 운동장에 나타나 입산자 가족 색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그날이었단다. 눈비가 섞여 치는 매운 날씨였다. 삼엄한 경비 속, 모두들 눈감은 채 숨죽여 앉아 있는 가운데 누구한테 향할지 모르는 그 손가락질, 그 손가락총. 강씨가 우물쭈물하는지, “날래 못 하가서?” 하고 무섭게 다그치는 이북 사투리. 손가락질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이고, 자식 죄가 어찌 부뮈 죄가 됩네까? 자식을 겉 낳지 속 낳습니까?” “아이고, 선상님네들…….” 강씨도 제정신이 아니었던지 엉뚱한 사람을 짚기도 했다. 아기 업은 채 열 밖으로 떠밀려 나온 그 젊은 아낙은 곧장 강씨에게 달려들어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아이고, 생사롬 잡지 맙서! 그놈이 마을 정자나무 아래서 총 맞아 죽은 줄 은 마을이 다 아는 사실인디. 당최 이런 법은 없수다. 죽은 놈이 어떵해연 입산자우꽈? 그놈이사 죄값으로 죽었지만 난 무신 죄우꽈, 아이고, 아이고, 제발 이분들한티 잘 말해 줍서.”
울부짖는 소리에 강씨는 넋나간 듯 멍한 표정이더란다. 곧 강씨의 실수가 인정되어 그 여자는 무사했다. 그날 길가 옴팡진 밭에 들어 한꺼번에 죽어 널브러진 사람이 십여 명에 이른다고 했다.
임씨가 낯 검은 야차의 모습으로 새밋드르 주민들 앞에 처음 선보인 것도 그날이었다. 우물쭈물하는 강씨를 윽박지르며 그 무서운 장면 속을 휘젓고 다니던 임씨…… 이 두 사람의 동반자 관계는 아마 이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창주네 식구는 모두 셋이었다. 서 말들이 퉁퉁한 쌀부대를 짊어지고 어기적어기적 힘겹게 발을 떼놓는 어머니, 그 뒤로 흘러내린 질빵을 붙잡고 종종걸음치며 따라가는 다섯 살배기 용주. 열세 살의 창주는 이불짐을 지고 있었다. 볼타는 마을에서 바람에 날린 검은 연기가 머리 풀고 흐느끼며 자꾸만 뒤쫓아왔다.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한바탕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데 범 갈은 산사람들은 빨리 걸으라구 무섭게 윽박질러 댔다. “하이고, 납은 양식은 이것뿐인디, 이 고생 하며 산에 지고 가면 산사람들이 또 얼마나 빼앗아 갈꼬.” 어머니는 이렇게 나직이 중얼거리면서 한숨을 토했다. 그래서 그런지 창주도 남의 짐을 얹혀 진 듯, 등에 무슨 악귀가 달라붙은 듯 짐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빨리 짐이 가벼워졌다. 괭이오름 모롱이를 굽이돌자 먼저 끌려간 남정네들이 좁은 길바닥에 덜덜 떨며 쪼그리고 앉아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 그들이 짊어질 분량만큼 양식을 덜어 내라는 것이 무장군의 명령이었다. 어차피 빼앗길 것, 산까지 고생스럽게 지고 가지 않게 된 것만도 다행이랄까. 순식간에 전체의 삼분지 이 가량의 양식이 남정네 등으로 옮겨졌다. 창주는 어머니와 짐을 바꿔 졌다. 절반이 훨씬 넘게 축난 쌀부대는 거렁뱅이 동냥자루만큼이나 가뿐했다.
덕천국민학교 운동장에 추적거리는 진눈깨비는 산에서는 그대로 눈이 되어 떨어졌다. 괭이오름을 지나자 일망무제로 하얗게 눈 덮인 목장지대가 나와 산길은 눈에 파묻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백 명 가까운 이재민들은 시키는 대로 일렬 종대로 늘어서서 눈밭길을 허위허위 올라갔다. 불타는 마을은 검은 구름만 무성할 뿐 불길은 햇빛에 바래어 보이지 않았다. 맨 후미에 따라오는 무장군들이 솔가지로 눈 위의 발자국을 쓸어 지우고 있었다. 내내 말 한마디 없이 걸어가던 어린 용주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발이 시리다고 했다. 창주가 쌀부대를 어머니의 이불짐 위에 얹고 질빵을 걸어 동생을 둘쳐업었다. 서편 하늘 옅은 구름장 뒤에 얼굴 가린 해는 어린 동생의 시린 낯빛처럼 창백하게 보였다. 구름자락이 내려와 닿고 있는 한라산 기슭까지 광막하게 펼쳐진 눈벌판 위에 꾸불거리던 그 실날 같던 행렬. 해변에서 강풍이 들판을 쓸며 치달아올 때마다 뿌옇게 눈보라가 일어나 행렬의 자취를 가뭇없이 지워 버리곤 했다. 고난은 벌써 시작이었다. 눈 깊은 산 밑에 이르자 짐 진 채 눈구덩이에 빠져 나뒹구는 사람들이 속출하더니 청년 한 명이 탈출하려고 계곡 아래로 몸을 굴렸다가 총 맞고 죽었다. 청년이 홀린 피는 휜 눈에 번져 소름끼치도록 붉었다. 눈 속에 피는 마을의 동백꽃도 그렇게 붉지는 않았다. 행렬은 저물녘에 한라산 밑굽까지 드리운 구름 아래로 빨려들어갔다.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 나온 자들은 이렇게 옛날 말을 한다. “비바리가 늙어 가민 맷돌짝 지고 산으로 달음질헌다는 속담은 있어도 멀쩡한 사람 양식 지고 겨울산 눈구덩이에 살림살이하러 갔다는 말 못 들었네. 어찌하여 우리가 그 지경이 되었던가.” “다른 굴엔 실제로 맷돌까지 날라다 썼다는 걸세. 우리야 도정 안 한 꺼끌꺼끌한 겉조 거죽째 먹었주만.” “연 이태째 거퍼 숭년이더니 그해 조농사는 어찌나 잘 되었던지. 즈 이삭이 거짓말 보태서 방망이만 했주. 허허 그 난리 불에 죄 태워 먹자고 그리 풍년이던가.” “밭담, 산담(묘지담) 속에 숨겨 둔 것마저 읍내 해변 마을 것들이 들어서 다 털어 갔으니.” “그건 그 사람들 원망할 게 아니라. 불탄 마을에 곡식이 남아 있으면 산사람 양석이 된다고 관에서 시킨 거주.”
창주가 동생을 업은 채 눈 속 허궁다리에 빠져 발목을 삔 것은 어리목에 다 와서였다. 발목 부상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설화가 하얗게 핀 상수리나무숲에 이르러, 어린아기 안 데린 젊은 여자, 중늙은이, 열서너 살의 소년 등 여남은 명이 징발되어 짐 진 남정네 뒤를 따라 계속 산으로 오르게 했는데 창주는 발목 부상으로 용케 징발을 모면했다. 산에서도 창주 또래의 나이를 한 몫의 남정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구름발에서 안개눈이 떡가루처럼 부슬부슬 내리고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멀리 볼타는 고향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햇빛이 시들자 마을을 휩싸고 있던 검은 연기는 온통 벌건 불로 변해 있었다. 이어서 입산자 가족이 떨어져 나가고 나머지 삼십여 명의 이재민은 근처 계곡으로 들어섰다. 마을은 이제 상수리숲에 가려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에 떠오른 불빛은 시시각각으로 커져 가고 있었다. 일행은 계곡의 비탈에 뚫린 암굴에 수용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았다 간 무장군은 한쪽 뺨에 백납 먹은 흰 어루러기가 있어 창주도 마을에서 본 적 있는 농민회 청년이었다. “이 굴은 전에 내가 약초 캐러 댕기다가 봐둔 건데 서른 명 들어갈 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수다. 고생은 될 뎁쥬만 참고 기두립서. 길게 잡아 한 달포면 왼 섬이 우리 손에 해방될 거우다. 당최 도망갈 생각일랑 하지 말아 마씸. 여러분 중에 감시자가 몰래 끼여 있수다. 도망치다 들킨 자는 살지 못하니 명심합서. 해변으로 내려가면 살아질 것 같수꽈? 발세 마빡에 입산자 낙인이 꽉 찍혀 부렀는디.” 이렇게 말하고는 그는 모자란 양식, 칡뿌리나 캐어 보태라고 삽 한 자루를 던져 주었다.
그날 밤 창주는 어른들 틈에 끼여 밤늦도록 동굴 앞에 앉아 상수리나무숲 위 하늘에 질펀하게 번져 있는 불빛을 처연한 심사로 바라보았다. 30리 밖의 불이 그렇게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숲 위 하늘에 번진 불빛은 이상하게도 해가 바뀐 그 이튿날 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밤불은 종잡을 수 없는 거여. 아마도 저건 다른 마을 타는 불일 거라” 하고 한 노인이 일러주었다. 과연 하늘에 뜬 불빛은 밤마다 여기저기 그 위치가 달랐다. 그제야 사람들은 불행이 자기에게만 닥친 게 아님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던 불빛이 아주 사라진 것은 대엿새 후였다. 그 동안 해가 바뀐 줄도 몰랐다. 창주는 이제 열네 살이 되었다.
두 달 동안의 암굴생활은 참담한 것이었다. 굴은 목이 길쭉한 호리병같이 생겼는데 입구에다 외풍을 막느라고 청솔가지를 잔뜩 쌓아올리고 굴 바닥 역시 청솔가지를 두텁게 덮어 그 위에 이부자리를 깔았지만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본 격으로 노상 냉기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땔감은 지천으로 많은데 마음놓고 불을 필 수 없는 게 한이었다. 굴 앞이 무성한 잡초덤불로 가려져 자연 은폐가 되었지만 연기와 불빛은 절대 금물이었다. 밤에는 불빛이 샐까, 낮에는 연기가 샐까, 걱정이었으니 그 겁먹은 불이 오죽 컸을까? 가랑잎 한줌 타는 정도 이상의 불꽃은 키울 수 없었다. 눈 맞은 삭정이는 습기가 많아 연기를 많이 내므로 껍질을 벗겨서 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불기가 오죽잖았으니 제대로 어한이 될 리가 없었다. 동상이 무서워 수시로 귀와 손발을 비벼 대고 잘 때는 서른 명이 한덩어리가 되어 꼭 붙어서 잤다. 양식도 한데 모아 공동취사했다. 빼앗기고 남은 양식은 먹으면 보름도 못 넘기겠기에 죽을 섞어 끼니를 이어 갔다. 그나마도 곡기를 아끼려고 하루 두 끼에 죽 한 사발이 고작이었다. 허기진 배는 칡뿌리를 곱씹어 단물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칡뿌리를 많이 캐두어야 하겠기에 매일 세 사람씩 번들며 나가 삽 한 자루에 의지하여 부지런히 눈 덮인 계곡 비탈을 뒤졌다. 아기들마저 어미 젖이 말라붙어 좁쌀 미음을 먹었다. 젖아기들은 모두 넷이었다. 젖에 곯은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 아기 때문에 언제 들켜도 들키고 말 거라고 사람들의 불평은 대단했다. 아기 데린 아낙네들은 아기 울음소리가 굴 밖에 새어나갈까 봐 맨 안쪽에서 지냈는데 아기가 울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급한 불 끄듯 얼른 이불을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아래 내려가 배춧국 먹으면 젖이 나올 텐데…….”
평소에 걸핏하면 울기 잘 하던 용주는 용케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킬 줄 알았다. 어린 속에서도 무서움이 어떤 건지 절실히 깨닫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 없이 먹는 멀건 죽은 매양 싱거웠고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도 염기 없어 싱거웠다. 못 먹어 허기진 몸에 이까지 들끓어 아까운 피가 축났다. 창주는 자다가 무심중에 득득 긁어 손톱자국에 딱지가 앉고 양 오금탱이가 헐어 아물 날이 없었다. 어느 눈 어두운 할머니는 옷솔기에 입을 대고 이를 톡톡 깨물어 죽였는데 피 묻어 벌건 입술을 혀끝으로 날름 핥는 모습이란 차마 끔찍한 것이었다. 볕 좋은 날이면 굴 앞에 우거진 덤불 아래 한 가족 서너 사람씩 나가 앉아 이를 잡았다. 덤불 새로 비쳐드는 햇볕에 속곳을 펼치면 옷솔기에 붙어 있던 이들이 떼를 지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데, 이때 옷을 탁탁 힘껏 털어 내면 이가 흰 눈 위에 까맣게 떨어지곤 했다. “야! 흰 곤밥에 깨소곰 뿌린 것 닮구나” 하고 언젠가 용주가 탄성을 질렀다.
얼굴에 백납 먹은 청년은 새밋드르 이재민 담당인 듯 그 후에도 이따금 굴 안에 머리를 디밀고 허기지 늘비하게 누워 있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때마다 해변에 내린 사람들이 많이 죽었느니, 불빛도, 연기도, 아기 울음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라는 소리로 잔뜩 주늑을 들여 놓곤 했다. 그의 말대로 굴속에 과연 감시자가 있었을까? 그러나 감시자가 없었더라도 감히 도망갈 엄두를 낼 사람은 없었다. 온 섬 하늘이 벌겋던 재앙불에 크게 놀라 버린 그들이었다. 산야에 총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홀몸도 아니고 식구를 데린 채 허허벌판이 된 중산간 지대를 통과한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설사 무사히 해변에 닿는다 해도 본의는 아니나 일단 산에 올랐던 사람을 과연 따뜻이 대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섬 출신 산사람보다 육지 토벌대가 더 두려운 게 사실이었다.
정월 그믐께로 접어들자 산은 구름 벗는 날 없이 연일 눈이 내려 굴 밖의 계곡은 눈보라를 휘몰아가는 바람 소리가 스산스러웠다. 토벌대나 산사람이나 모두 눈에 빠져 맥을 못 추는 듯 총성도 뜸해졌다. 맹목적으로 펄펄 끓던 그 무서운 혈기는 겨울의 한기에 차츰 식어 가는 듯했다. 하산하려면 이때가 기회련만 하루 두 끼 멀건 죽으로 한 달간 버텨 온 창주네 굴속 사람들은 이제 심신이 모두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눈이 깊어 칡뿌리는 더 이상 못 캐고 세 사람씩 번갈아 삭정이나무 분질러 오는 일 이외는 퀭한 눈을 허공에 걸고 종일 드러누워 지냈다. 갈무리해 둔 칡뿌리를 오래오래 반추하면서. 반듯이 누우면 뱃가죽이 등에 가 달라붙어 괴로웠으므로 새우처럼 몸을 안으로 구부리고 모로 누워 지냈다. 아기가 울어도 기겁하게 놀라거나 아기를 울린다고 타박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기는 못 먹어 버썩 여윈 아기들인데 울어 봐야 찬바람 맞은 늦가을의 여치 울음보다 더 크지 않았다. 창주는 이따금 고향 마을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으나 그곳은 여전히 무덤 같은 침묵 위로 바람에 날리는 잿가루가 안개처럼 뿌옇게 덮인 죽은 마을일 뿐이었다.
이렇게 한겨울 극지 추위나 다름없는 천 미터 고지에서 겨울 토끼처럼 굶으며 혈거생활을 한 중산간 이재민은 천여 명에 달했다. 총알이 넘나드는 전선의 한가운데 납작 숨죽여 엎뎌 있던 양민들. 죽은 사람은 동사자, 아사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산사람들의 아지트가 산속 깊이 박혀 있는 데 반해 양민들이 처한 동굴들은 대개 산기슭에 있었으니 토벌대 진격에 맨 먼저 노출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두 달 후 해동기를 맞아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졌을 때, 이 동굴들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적의 아지트로 간주되어 무참히 파괴된 곳도 있었다.
적설(積雪)을 녹이는 봄, 엠원총의 강인한 무쇠빛 봄이 해변으로부터 낮은 포복으로 기어올라 완전히 한라산을 포위하여 총성을 낭자히 터뜨릴 때, 정찰기 날아간 하늘에서 철 그른 눈발처럼 하얗게 떠내려오던 삐라들. 창주가 상수리숲에서 삭정이를 줍다가 주운 삐라에는 대강 이런 내용이 씌어 있었다. ‘이제 정부가 수립된 지 어언 6개월이 지났다. 36년간 일제의 쇠사슬에 묶여 신음한 것도 서러운데, 해방되고 독립된 오늘 무엇 때문에 우리가 서로 죽여야 하는가? 우리는 같은 동포요, 형제이다. 이 글을 보는 즉시 지체 말고 따뜻한 조국의 품 안으로 귀순하라. 백기를 들고 하산하는 자에겐 결코 총격을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귀순의 시기를 놓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약 불응할 시는 국가가 내리는 벌은 실로 엄격할 것이다.’ 옆에서 함께 삭정이를 줍던 노인이 질겁하며 산사람이 알면 큰일나니 버리라고 하는 걸 몰래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튿날 얼굴에 백납 먹은 그 청년이 오랜만에 찾아와서는 삐라는 허위선전이니 결코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산의 시기는 의외로 빨리 왔다. 다른 굴과는 달리 용케 한 사람의 동사자도 아사자도 내지 않고 그 혹독한 겨울을 견뎌 낸 창주네 동굴은 굴 밖에 송곳처럼 뾰죽뾰죽 얼어붙었던 똥무더기들이 녹아 냄새를 피우는 해동의 봄이 되자 오히려 속수무책이었다. 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얼음 녹은 물에 이불과 옷이 젖어들어 여간 고생이 아니더니, 마침내 굴 천장에 눌어붙어 있던 바위만한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 그 아래 누웠던 두 모자를 한꺼번에 요절내고 만 것이었다. 죽은 아이는 창주네 학교 2학년짜리였다.
사람을 죽여 먹기 시작한 굴속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이튿날 새벽, 사람들은 두 시신 위에 이불을 덮어 주고 골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시간에 맞춰 굴 밖을 나섰다. 아기들을 울음이 새어나오지 않게 요포대기로 단단히 뒤집어씌웠다. 기운 없어 못 걷는 용주는 어머니 등에 업혔다. 동상 걸린 이들은 발뒤꿈치로 걷느라고 연방 뒤뚱거렸다. 발이 성한 사람도 걸음걸이가 시원찮았으니, 워낙 쇠약한 몸인데다 두 달 만에 처음 하는 걸음걸이라 다리도 허청허청 헛놀았다. 살얼음 밟는 소리, 서리 앉은 풀섶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자꾸만 불길하게 숲의 정적을 깨뜨렸다. 금방이라도 안개를 뚫고 총알이 날아들 것만 같아 가슴이 오그라붙는 듯했다. 산에 안개가 끼면 토벌대는 감히 산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밖에서 안개 걷히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이때를 잡아 하산해야지, 자칫 작전의 와중에 휘말렸다간 눈먼 총알에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어서 안개가 스러지기 전에 산을 벗어나야 했다. 이렇게 불안에 쫓겨 정신없이 안개 밑을 기어가는데 문득 숲이 흔들리며 산바람이 일어났다. 바람 소리에 발짝 소리가 지워져 다행이다 싶었는데, 아뿔싸, 안개가 바람에 밀려 벗겨지는 게 아닌가! 휜 안개가 급류처럼 쉭쉭 소리를 내며 옆을 스쳐가고 눈앞에 새벽 하늘이 번히 트여 왔다. 일행은 오도가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해가 반공에 치솟자 총소리가 작렬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이틀간 겪은 일을 창주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서 잊힌 게 아니다. 하산 직후 읍내 주정공장 창고에 수용되어 심문을 받을 때, 그 이틀간의 경험을 제대로 되살려 내지 못해 얼마나 야단을 맞았던지. 그것은 악몽의 뒤끝처럼 흐릿한 기억이었다. 게다가 금방 들은 말도 까먹어 몇 번씩 되묻는 일이 그 후에도 얼마간 계속되었으니 아마도 일시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이틀 내리 굶고 잠 한숨 못 잔 채, 찬비를 맞아 가며 총소리에 갈팔질팡 쫓겨 다녔으니 도대체 제정신이었을 리가 없다. 총도 쌍방이 쏘아 대는데다, 꼬리 물고 일어나는 산메아리에 도무지 총소리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총소리가 바싹 뒤꽁무니에 따라올 것만 같아 허둥지둥 자리 옮기기를 그 벚 번이나 했던가. 대중없이 퍼붓는 산비에 옷이 흠뻑 젖어 한기가 뼛골에 사무치고 풀 위를 흘러가는 빗물에 잠긴 발은 끊어지는 듯 아팠다. 젖은 요포대기 속에서 아기들이 그악스럽게 울어대어, 사람들이 이를 피해 저만치 달아나면 아기 어미들은 우는 아기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기를 쓰고 따라왔다. 대여섯 살짜리 아이들도 대개 용주처럼 어른 등에 업혀 다녔는데 퍼렇게 질린 입술을 실룩이며 연상 춥다고 훌쩍거렸다. 그러나 용주는 여전히 어금니를 꽉 사려 몰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종일 찬비를 맞았다. 총도 무서웠지만 비가 더 무서웠다. 빗물이 사태져 흐르는 풀숲을 뻘뻘 기어 살던 굴을 다시 찾아갔으나 산비에 내가 터져 건널 수가 없었다. 비를 모면할 도리가 없었다. 한 계집아이가 제 할머니 등에 업힌 채 얼어죽어 메갈대밭에 버려졌다. 어머니 등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용주를 보고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그 아기 울지 않는 걸 보니 죽은 것 닮수다. 부려 던져 버립서” 하자 깜짝 놀란 어머니는 동생의 허벅지를 모질게 꼬집어 울린 적도 있었다. 울음 소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어머니는 안도감에 주루룩 눈물을 홀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창주야 용주야, 아무래도 못 살 것 닮다. 우리 같이 죽어 불자.” 그러나 등에 업힌 용주는 완강히 도리질이었다. “아니라, 난 살 커라(살 테야).”
종일 벼락치듯 하던 총소리는 해가 떨어져서야 멎었다. 비도 다행히 그쳤으나 일단 한속이 단단히 낱몸은 좀처럼 더워지지 않았다. 그날 밤 열두 명의 이재민들은 솔수평이에 기어들어가 체온을 잃지 않으려고 한데 엉겨붙어 서로 열심히 몸을 비벼 대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용주는 어머니의 앞가슴을 파고들고 창주는 둥에 달라붙어 덜덜 떨었다. 언 몸속으로 자꾸만 졸음이 소록소록 스며 고개를 떨굴 때마다 어머니 손이 허벅지를 아프게 꼬집었다. “졸지 마라. 졸면 죽는 거여.” 그날 밤에도 동사자가 발생했다. 그 중 제일 많이 운다고 늘 손가락질받던 양당장집 아기가 끝내 어미 품에서 싸늘히 식고 말았다.
새벽에 일행은 다시 하산길에 올랐다. 극도의 공복과 추위와 불면으로 창주는 정신이 혼미했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어머니 발 뒤축만 보며 터벅터벅 힘겹게 걸어갔다. 어디를 어떻게 해서 내려갔던지, 그날도 한차례 산비를 만나고 엉덩이까지 차오르는 개울물도 건너고, 시신이 허옇게 널린 참나무숲도 지나쳤다고 하지만 창주는 기억이 아리숭하기만 했다. 그보다도 오히려 앞에서 할딱할딱 젖혀지는 어머니의 닳은 고무신 신창만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이틀간의 막심한 고생 끝에 간신히 산을 벗어난 일행은 토벌대를 만나기 전에 서둘러 여자 머릿수건 두 장을 소나무 가지 끝에 매달아 높이 쳐들었다. 그것이 말하자면 ‘귀순의 백기’인 셈이었다. 폭도 아닌 양민의 하산이 귀순의 백기를 들어야 할 만큼 시국은 이분법 논리에 철저했던 것이다.
아침 햇살이 흥건하던 그 넓은 들판, 양미간올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눈에서 불똥이 뒤고 심한 어질증이 일어나 창주는 비틀거리면서 자꾸만 눈을 슴벅거렸다. 그러나 두 달 가까이 글속 연기에 쏘여 상한 눈에는 여전히 풍경들이 흐릿하게 흔들려 보이고 물체마다 언저리에 달무리 두른 듯 야릇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두 달 석 달 산 생활을 한 사람들 중에는 노년에 들어 눈이 짓물러 일쑤 눈물 홀리는 이들이 많은데 아마 창주 자신도 몇 해만 있으면 그 꼴이 될지 모를 일이다. 비만 오면 개머리판, 몽둥이에 얻어맞은 해묵은 장독(杖毒)이 되살아나 삭신이 쑤신다고 드러눕기가 일쑤이고 겨울만 되면 울 일도 없는데 공연히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다니는 고향 노인네들…… 너무 공포에 질린 나머지 한번 맘 놓고 울어 보지 못한 그들에게 겨울만 되면 아무 뜻도 없이 자동적으로 눈물이 나도록 눈병을 선사했으니 시대는 이토록 가혹했던 것이다.
백기를 앞세우고 얼마쯤 내려가노라니, 마른 풀 우거진 둔덕 위로 갑자기 산까마귀가 날아오르면서 토벌대 댓 명이 민첩하게 몸을 드러냈다. “손들엇!” 너무 놀란 나머지 아주머니 몇 명이 손을 든 채 엉덩방아를 찧고 다른 사람들도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지탱 못 해 무릎이 엉거주춤 오그라들었다. 몸 수색에서 귀순 권고 삐라가 창주 것 말고도 여러 장 나왔다. 한 대원이 비에 젖어 곤죽이 다 된 삐라를 한데 뭉쳐 땅바닥에 패대기치며 눈알을 부라렸다. “쌍놈의 폭도년들! 이거 갖구 있으문 무사통관 줄 아나? 이것이 통행중이야, 뭐야?” 한 아이가 바지가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손을 쳐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험악한 욕설은 단지 엄포에 불과했다. 때는 이미 가차없는 응징 일변도에서 선무(宣撫)공작을 겸한 양면작전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상급자로 보이는 대원이 결론적으로 말했다. 그의 말은 연설하듯 힘에 넘쳤다. “저 피골이 상접한 얼굴들을 보라. 오죽 못 먹고 얼었으면 저렇게 비참한 꼴이겠는가. 자, 여러분. 이제 따뜻한 조국의 품안에 안겼으니 안심하라. 섬백성도 같은 단군의 자손인데 왜 우리가 미워하겠는가.”
이렇게 별탈 없이 귀순의 첫 관문을 통과한 일행은 오라위 근방에서 죽성 부락 귀순자들과 합류, 읍내로 인솔되었다. 중간에 또 한차례 비를 맞고 지친 다리를 질질 끌며 반나절 넘게 걸린 괴로운 하산길이었다. 들에는 여기저기 고기만 발라 내간 마소의 잔해가 앙상하게 버려져 있었다. 그날 오후 이재민들은 읍내 주정공장 창고에 수용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모닥불에 언 몸을 녹이고 주먹밥 한 덩어리로 허기를 끌 수 있었다. 물결레처럼 젖고 헐디헌 몸들이 허발대며 모닥불을 얼싸안고 김을 모락모락 피웠다. 불은 따뜻하기보다는 차라리 시원했다. 언 속살 녹인 물이 몸 속에서 분류처럼 시원스럽게 퍼지면서 웅어리진 억하심정도 함께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소금으로 간한 주먹밥은 또 어찌나 그리 맛이 있던지! 비록 도정 안 한 거친 밀밥이긴 해도 명색이 밥인데 어디 싱거운 좁쌀죽이나 칡뿌리에 비할까. 고소한 소금기, 입 안에 쫀득쫀득 달라붙는 그 감칠맛이라니! 창주는 그제야, 이젠 살았구나, 하는 희열이 용솟음쳐 올랐다. 산에서 손녀를 잃은 그 할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 하루만 더 살아 이 밥 먹고 죽은들 내 무사(왜) 이리 섧을꼬…… 아이고, 아이고, 불쌍헌 내 새끼” 하면서 끅끅 흐느껴 울었다.
이렇듯 조국의 품안은 따뜻했다. 그러나 두서너 살짜리 어린것들에겐 그 따뜻함이 오하려 과도한 것도 사실이었다. 푸르딩딩하게 시린 아기들은 불을 쬐고 더운 죽 몇 술 먹더나 이내 모두들 촛농처럼 방울방울 녹으면서 축 늘어져 버렸다. 아기들은 밤새 열에 떠 비몽사몽 간을 헤맸는데 그 중 한 아기가 이튿날 죽었다. 죽성 부락 사람인 그 아기 어머니가 외출허가를 받고 읍내에 아는 유일한 친척인 시사촌 동서를 찾아가 병원비를 꿔달라고 사정했으나 폭도 각시라고 문전박대당했다는 것이다. 그 여자를 박정하다고만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입산한 남정네라면 입산 경위가 어떻든 간에 일단 산폭도로 간주되어 한 집안의 큰 우환이 되는 것이 저간의 실정이었으니, 그 척족이 혹시 구정물 튀지 않을까 방색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산한 지 이틀 지나 귀순자에 대한 개별심사가 있었다. 열네 살이 된 창주도 무장폭도를 따라다닌 비무장폭도로 일단 의심받아 꽤나 추궁이 날카로웠지만 결국 별일은 없었다.
하산자들은 연일 그치지 않고 들어왔다. 새밋드르의 입산자 가족들도 반송장의 참혹한 떼거지 몰골로 돌아왔다. 큰집 식구들도 그 중에 끼여 있었다. 개미목 밑 어느 초기밭 관리인 집에서 겨울을 난 이들은 막판에 들어 창주네처럼 싸움의. 한가운데 휘말렸던 것인데 닷새 밤을 한숨 못 자고 이 골짝 저 수풀로 갈팡질팡 헤매다가 총 맞아 죽고 얼어죽은 자가 십여 명이라고 했다. 입산자 가족에 대한 취조는 특별히 까다롭고 집요했다. 호명 소리가 날 때마다 아주머니들이 파랗게 사색이 되고 조금이라도 동정을 사보려고 업은 아기를 꼬집어 울려 놓는 이들도 있었다. 산에서논 아기가 운다고 입을 틀어막고 해변에서는 일부러 꼬집어 울려 놓고…….
보름 후, 주정공장 넓은 창고 두 개는 이재민들로 가득해졌다. 눕기는커녕 발 뻗고 앉을 자리도 마땅찮아 세워 놓은 보릿단처럼 서너 명씩 등을 맞대고 말뚝잠을 자야 했다. 창고가 넘쳐 더 이상의 수용이 어렵게 되자, 먼저 들어온 사람들부터 내보내기 시작했다. 창주네는 일곱 밤 자고 나와 수의사 하는 당숙 댁에 머물렀다. 고향길은 여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밥값을 하느라고 창주는 당숙네를 대신해서 성담 쌓는 울력에 나가고 어머니는 그 집 허드렛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당숙네도 살림이 퍽 오그라들어 전과 같지 않았다. 목장에 방목중이던 마소들마저 난리 만나 혹은 총에 맞아 죽고 혹은 올가미에 결려 수없이 죽어 버린 판국에 가축병 고치는 당숙의 영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당숙모가 의붓자식 먹여 살리듯 한줌씩 집어 주는 먹거리는 검정 모래가 잔뜩 섞인 듯 반쯤 탄 좁쌀이었다. 그것은 묻지 않아도 새밋드르나 연동, 오라위 같은 읍내에서 가까운 중산간 부락에서 나온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소개 직후 중산간 부락에서 타고 남은 양식을 해변으로 실어 나를 때, 당숙모도 한몫 끼여 쌀말깨나 가져온 모양이었다. 이를 두고 훗날 중산간 부락 사람들은 해변것들한테 양식을 도둑맞았다고 한다.
검게 탄 좁쌀을 처음 보던 날, 어머니는 그토록 오래 참아 왔던 서러움이 일시에 복받쳐 올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이고, 내 팔자 닮은 이 불쌍헌 좁쌀의 신세를 보라. 이건 우리집 곡석이여, 우리가 농사지은 거라. 노적가리 불살라 튀밥 줏어먹는다는 말 그냥 우스갯소린 중 알았더니…… 그 풍년 조 다 불태워 놓고 이렇게 탄 좁쌀마저 놈(남)한테 빼앗겨 빌어먹어야 하니, 아이고, 창주야, 대관절 이것이 무신 놈의 시상고…….” 탄 좁쌀은 그나마도 모자라 주정공장에서 썩었다고 퇴짜 놓은 고구마 무거리에 겨우 종지 하나 분량을 섞어 범벅해 먹었다. 어린 용주는 그 시꺼먼 범벅에서 좁쌀만 골라 먹으려고 콕콕 닭 모이 쪼듯 하여 어머니한테 자주 핀잔을 들었다.
하산자의 행렬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노인, 아녀자들뿐이더니 얼마 뒤에 입산자 가족까지 석방시켰다는 소문이 퍼지자 남정네들도 속속 뒤따라 내려왔다. 그들은 하산한 즉시 일정한 귀순 절차를 밟은 다음 선무공작대에 편입되어 토벌대를 도왔다. 귀순자들의 정보 제공으로 산폭도의 아지트는 속속 파괴되고 있었다. 이따금 포로로 잠힌 입산자들이 수십 명씩 관덕정 마당에 끌려와 구경꾼이 잔뜩 모인 가운데 큰 소리로 습격 몇 번, 도로차단 몇 번 하는 식으로 죄상을 자백하게 하고는 다시 차에 태워 어디론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실어 가곤 했다. 모두가 한결같이 영양실조로 낯빛이 파리하고 머리칼이 뺨을 덮게 길었다. 때로는 간부급 입산자들의 잘린머리통이 이름표와 함께 전시되기도 했다. 이제 한라산 정상까지 쫓겨가 하늘로 솟아오를 재주가 없는 바에야 입산자의 운명은 불 보듯 빤한 것이었다.
창주네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하산한 지 한 달 보름 만이었다. 해변 마을 여기저기에 소개해 있던 사람들도 돌아왔다. 원래 새밋드르는 네 개 부락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전략촌을 건설해서 살아야 하므로 모두가 창주네 부락인 멍굴로 합쳐들었다. 서로들 살아 돌아온 것이 반가워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고 돌아오지 않은 이웃들 소식에 한숨을 지었다. 육지로 전출되었던 큰외삼촌은 지리산 토벌에서 전사했다는 기별이었다.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외할머니는 덕천 부락 이모 집에서 머문 채 몸져누워 있다고 했다. 남정네는 아직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족도 그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설사 천행으로 하산하여 보도연맹과 선무공작대에 들어갔다고 해도 그것이 때로는 산사람으로 위장하여 산속 깊이 투입되기도 한다니 어찌 위험스럽지 않겠는가.
축담과 울담만 남은 채 폭삭 주저앉은 집터는 아직도 탄내가 물씬 풍겼다. 축담엔 시꺼먼 그을음이 눌어붙고, 그 안쪽 바람벽의 흙은 불에 구워져 붉은빛인데 타다 남은 벽지 한 쪼가리가 바람에 너풀대고 있었다. 쌀독, 장독도 죄다 사금파리만 남았다. 혹시나 하고 뒤꼍 채마밭으로 달려가 봤으나 쌀항아리를 묻어 숨겨 두었던 곳은 파헤쳐져 빈 구덩이만 입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슬픔에 젖을 겨를도 없이 당장 축성 울력이 시작되었다. 이때 부락에 일인(一人) 지서가 생겨 그를 임주임이라고 불렀는데 임주임과 새로 이장이 된 강영조 씨가 축성 감독자였다. 남자라곤 노인과 아이들뿐이라 여자들이 충심이 되었다. 그 흉몰스럽게 서 있던 울담과 축담이 죄다 허물어져 성 쌓는 데 쓰였다. 관에서 잠시 빌려 준 천막 속에서 새우잠 자며 보름간 우천을 불문하고 강행한 그 축성작업은 실로 고된 것이었다. 구호양곡으로 나온 밀가루에 들나물 넣어 쑨 풀떼죽 먹고는 도무지 기운을 쓸 수가 없었다. 돌 모서리에 손끝이 닳아 조막손이 되는가 싶었다. 무슨 비는 그리 자주 오던지, 돌짐지고 젖은 땅을 딛노라면 푹푹 발목까지 빠져 허위적거리기가 일쑤인데 그때마다 임주임의 무서운 호통이 떨어지곤 했다. 때로는 개머리판이 날아들기도 했다.
축성의 진행중에 마을 어귀 한길가에 서 있는 수백 년 묵은 팽나무 두 그루가 벌목되었다. 그 나무 밑에서 여러 사람이 처형되고 시신이 가지에 매달렸으니 불길하기 짝이 없는 나무들이다, 차라리 베어서 지서 후생비와 마을 건설에 보태 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말을 꺼낸 것이 강이장이었다. 말을 떠듬거리는 걸로 보아 임주임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못해 나선 꼴이 분명했다. 모두들 아무 말이 없자 임주임이 버럭 성을 내며, 다른 부락들엔 경찰 후원회가 있어 보조를 받는데 새밋드르도 뭔가 성의를 보여야 할 게 아니냐고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냈다. 마을 설촌(設村) 때 심었다는 그 팽나무들은 무더운 여름철에 백 평 넘는 무성한 가지로 오고 가는 바람을 잡아들여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기 때문에 대대로 마을의 큰 대청마루 노릇을 해온 귀물이었다. 잔가지만 꺾어도 베 열 자 벌금이었으니 나무를 해치는 것을 철저히 금기로 여겨 오던 터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유구무언이었다.
늙은 팽나무들은 통가리톱 세 개를 아주 못 쓰게 망가뜨리고 나서 이틀 만에 우지끈 꽝 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에 쓰러졌다. 나무둥치에 무수히 박힌 엠원, 카빈 총알에 톱날이 걸려 톱 세 개가 이빨 빠져 망가졌던 것이다. 새 톱 가지러 읍내에 세 번이나 걸음질한 임주임은 나뭇값보다 톱값이 더 들겠다면서 입이 퉁퉁 부어 있었다.
축성으로 부락 내 돌담이 다 치워지자 곧 양팔 간격으로 촘촘히 움막집이 들어섰다. 창주네는 집터에 타죽은 감나무를 기둥삼아 꼭 돼지막만한 움막을 지었다. 돌은 성 쌓는 데 다 쓰여 버렸으므로 억새풀 엮어 둘러치고 지붕을 덮었으니, 이 고장 설화에 자주 나오는 ‘생기기둥 외기둥에, 거적문 낭(나무) 돌쩌귀에, 별 보이는 막사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재 속에서 푸르딩딩 불기 먹은 숟갈을 줍고 동강난 무쇠솥을 기울여 끼니를 끓였다. 밀가루 배급은 축성기간에만 그쳐 가축사료인 마른 고구마 줄기, 썩은 고구마 무거리, 보릿겨 같은 것을 들나물과 버무린 범벅을 일상으로 먹었다. 그 수많은 마소, 돼지가 난리통에 죽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 먹이를 놓고 사람과 가축이 다툴 뻔하지 않았던가. 돼지사료를 먹으니 밥과 똥이 구별이 안 되어 인분이 돼지똥과 구별 안 되고 또 돼지막과 조금도 구별이 안 되는 움막에서 이불 대신 검불을 뒤집어쓰고 잤으니, 실로 인축(人畜)의 구별이 어려운 생활이었다. 재 속에서 자루가 타버린 낫과 호미도 찾아냈다. 보리농사를 거른 묵정밭은 잡초만 무성했다. 쟁기 없이 호미질로만 손목이 휘도록 밭을 일구어 좁씨를 뿌렸다. 쟁기는 불에 타 보습만 남고 마소는 방목 중에 도살당했으니 어느 집 할 것 없이 모두 호미농사였다. 저녁 일몰과 함께 성문이 닫히면 야간습격에 대비해서 죽창 들고 여덟 군데 초소에 나가 번들며 성을 지켰다. 성문에는 수류탄 하나 매달려 있고 성 안에는 임주임의 카빈총 한 자루가 있었다.
모진 게 목슴이라 이렇게 가축사료를 상식하면서도 가을 추수 때까지 병들어 죽은 사람이 없었다. 산사람의 습격도 없었다. 이제 그들의 수는 수십 명에 불과하여 완전히 전투능력을 상실한 채 자멸의 길에 들어섰다는 소문이었다. 산을 탈출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귀순의 시기를 놓친 이웃 마을의 어떤 입산자는 마을 근처 친척네 고구마밭 한가운데 쌓인 돌무더기 속에 살며 그 밭 고구마를 축내다가 발각되기도 했단다. 돌무더기를 수상히 여겨 지서에 고발한 밭 주인은 차마 그 속에서 제 친척이 나올 줄 몰랐다고 했다. 아무튼 공식적인 공표만 없었지 난리는 사실상 끝난 거나 다름없어 보였다. 선무공작대로 수자리 살던 남정네들도 그해 저물 무렵 해서 돌아왔다. 일 년 반 사이에 마을 남정의 수는 절반 가깝게 축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듬해 창주는 당숙의 반연으로 남선전기에 급사로 들어가 숙직실에서 기거하면서 중학교 야간에 입학했다. 상급반에는 물론 신입생 중에도 난리를 겪느라고 2,3년간 공부를 놓았던 나이 든 학생들이 많았다. 창주는 이제 열다섯 살이었다. 토요일 저녁마다 고향에 가 하룻밤 성 지키는 불침번 서고 일 주일분 양식과 땔감을 지고 돌아오곤 했다. 어머니는 홀로 밭일을 하는 짬짬이 말총갓을 지으면서 한시도 일손을 놓지 않았다. 목장의 말은 죽어서 썩지 않은 말총을 남기고 있었다.
하루는 고향에 갔더니 임주임이 성문 앞에서 창주를 불러세우고 책보 검사를 했다. 일기장올 꺼내 읽던 임씨가 낯을 찌푸렸다. “야, 넌두 입산했던 놈이라 사상이 별로 안 좋구나야.” 쓰기 시작한 지 며칠 안 된 그 일기장에는 난리에 고생한 얘기와 애꿎게 죽은 마을 사람들을 슬퍼한 대목이 있었는데, 특히 임씨의 심화를 건드린 것은 마을 정자나무를 벌목한 데 대한 언급이었을 것이다. 창주는 가슴이 철렁했으나 마음을 다잡고 또라지게 응수했다. “아니우다. 일기를 끝까지 읽어 봅서.” 당시는 『웅변과 식사(式辭)』라는 책이 중학생들간에 유행하던 때라 창주의 일기는 그 어투를 닯아 다분히 비분강개조였을텐데, 앞부분은 새밋드르 주민이 겪은 고난에 대해 써내려 가다가도 나중에는 반드시 새 나라에 대한 부푼 기대와 새 시대의 역군이 되겠다는 결의가 피력되어 있곤 했다. 임씨는, “좋아, 좋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일기를 돌려주긴 했으나 아무래도 입맛이 떫은 표정이었다. 불안해진 창주는 며칠 후 첫 월급을 받자 어머니와 의논해서 임씨와 강씨에게 필기용구 일 습씩 사서 선사했다. 물자가 귀하던 그 시절에 투명한 유리 잉크스탠드, 철필 두 자루에 잉크 큰 병으로 하나이면 꽤나 값진 선물이었다. 선물 효과는 당장 나타나 임씨, 강씨가 창주를 여러 사람 앞에서 입 모아 칭찬하더라고 어머니가 전해 주었다. 글 잘 쓰고 똑똑한 학생이라고.
그러나 양력 6월 말경에 뜻밖의 위기가 닥쳤다. 밤사이에 느닷없이 불온 삐라가 성담 두 군데 나붙어 온 부락이 대경실색하고 있던 아침 나절에 읍내에서 스리쿼터가 들이닥쳐 범인을 색출한다고 남정네들을 연행해 갔다. 그것이 육지에서 큰 동란이 터져 입산 경력이 있는 남정네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예비검속인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밤중에 몰래 삐라를 붙여 부락 내의 불온분자의 소행처럼 조작극을 꾸민 자가 다름아닌 임씨와 강씨였다. 그러잖아도 예비검속에는 으레 위험시되는 인물들은 가려내어 제거되게 마련인데, 애꿎게도 새밋드르 청년들 여럿이 끼여 죽게 된 것은 순전히 그 조작극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 삐라 붙이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공교롭게도 어머니였다. 그날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등잔 석유를 아끼려고 동편 성담 근처의 친구 집에 가서 자정이 넘도록 함께 말총갓을 잣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 혼자만 본 게 아니라, 골목 끝까지 배웅하러 나왔던 어머니 친구도 보았다. 그날 읍내로 헐레벌떡 창주를 찾아온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전하면서, 절대 마을에 나타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논 것이었다.
창주는 이제 위험한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외딴 가교사 건물에 예비검속자들이 계속 들어오는 것을 보니까 마옴이 더욱 불안해졌다. 다른 학생들도 불안한 눈치가 역력했다. 고향 가는 발길을 끊는 것만으로 안심할 계제가 아닐 듯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중학생들을 상대로 육지 전쟁터에 지원할 학도병 모집이 그것이었다. 나중 목숨이야 어떻게 되든, 우선 지긋지긋한 섬 땅을 뜨고 볼 일이었다. 주야간 학생 전원을 운동장에 앉혀 놓고 모병관은 격앙된 목소리로 모병의 취지를 피력했고 몇몇 상급생들이 앞으로 나가 혈서를 썼다. “자, 그러면 제군들! 모두 눈을 감으라. 눈을 감고 잠시 손을 가슴에 얹고 생각한 다음, 지원자만 조용히 눈뜨고 일어나 대열 오른쪽으로 나가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우긋우긋 일어나더니 전 학생이 삽시에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남아 앉아있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병관이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음은 물론이다. 자기 연설 솜씨에 감화받은 결과라고 자만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만 열다섯에서 한 살 모자라 하마터면 탈락될 뻔한 창주가 동급생 댓 명을 응원대로 데리고 가 지원을 받아 달라고 씩씩하게 요구했을 때는 모병관은 차라리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며칠 후 창주네들은 신문사에서 나눠 준 ‘ㅈ중학생 200명 펜 대신 총을 들다’라고 대서특필한 신문지 한 장씩 손에 움켜쥐고 군가를 합창하며 부두를 떠났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태극기 걸어 놓고 천세 만세 부르세
한 글자 쓰는 새야 두 글자 쓰는 새야
나라님께 병정 되길 기원합니다
총알이 스쳐 지나가면서 턱살을 찢어 놓은 흉측한 상처를 달고 삼 년 만에 전쟁터에서 돌아온 창주는 자신이 임씨, 강씨와 대등한 위치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고향에 돌아온 날이 마침 어머니 친구 집에 혼인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창주는 먼저 그 집 부엌에서 아궁이 불을 보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내 부엌 땅바닥에 너부죽이 엎드려 절했다. 어머니의 거친 손을 붙잡고 눈물 한 줄기 쏟을 겨를도 없이 마당에 멍석 깔고 국수 먹던 아주머니들이 좁은 부엌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아예 저만치 제껴 놓고 서로 다투어 창주를 만져 보면서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아이고, 넌 어떵해서 죽지 않고 살아와져니?” “삼싱할망 복 탄 아이여.” 그러나 그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도 이내 치밀어오르는 오열을 참느라고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열여덟 살 청년의 모습에서 어쩔 수 없이 죽은 남편, 죽은 자식이 생각난 것이었다. 3년간의 육지 난리를 포함하여 5년 계속된 그 무서운 재앙 속에서 끝내 살아 남은 마을 젊은 남정네는 여섯에 하나 꼴인 열 명 안팎에 불과했다. 다른 죄는 없고 오직 젊다는 것만이 유죄였던 그들…… 남편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무엇으로 달랠까. 창주의 눈에도 더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이때 어머니가 등을 밀었다. “이젠 너두 어른 되어시니, 정지 구석에 있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라.”
방에는 임씨, 강씨 외에 마올 어른 대여섯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정중히 허리를 굽혀 두루 인사를 올린 다음, 창주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인사말이란 게 삼이웃이 다 들리게 언성이 높았다.
“이장님, 그간 마을 재건에 얼마나 노고가 많읍디까? 그런디 마을 재건에 얼마나 보탬이 됐는지는 몰라도 수백 년 묵은 마을 팽나무들을 벌목한 것은 아무래도 처사가 잘못된 것 닮수다.” “그리고 임주임님, 아까 오다가 길에서 들은 말이우다만 읍내 칠성굴에 고무신가게 크게 냈다는디, 장사는 잘 되엄수과? 워낙 요지라 집세만 해도 웬만한 농가 두 채 값은 될 거라예.”
서른 넘은 노총각이던 임씨는 그 동안 순사옷 벗고 마을 처녀와 결혼도 하여 읍내와 새밋드르 사이를 왕래하며 여봐란 듯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늙은 팽나무 두 그루는 임씨의 사복에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민간에 행악질이 자심하여 옷 벗기고 쫓겨난 서른 명 가량의 이북 출신 중에 임씨도 끼여 있을 거라는 소문도 있다고 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팬츠 하나만 달랑 차고 삼팔선을 넘어온 사람이니까 옷 벗기려면 그 팬츠 한 장만 남겨 놓고 아주 벗겨야 옳지, 읍내 고무신가게는 무엇이며 아직도 새밋드르를 얼쩡거리며 누구도 범접 못 할 위세를 가지고 유지 행셰 하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이것이 그때 창주의 생각이었다. 아마도 창주의 말투에서 사나운 전장의 화약 냄새가 물씬 풍겼나 보다. 임씨, 강씨는 어안이 벙벙했던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 소문은 곧 온 마을에 퍼졌다.
이렇게 마을의 금기에 도전한 창주는 내친김에 더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가, 석 달 후 이웃집 소상날에는 장본인들의 면전에서 삐라 날조 사건을 문제삼았다. 현장 목격자인 어머니와 그 친구가 감히 귓속말로도 발설하지 못하고 삼 년 동안이나 묵혀 온 그 비밀을 면전에서 보기 좋게 터뜨려 버린 것이다. 언성도 높이지 않고 단지 임씨와 강씨를 은근히 암시하면서, “그날 밤에 삐라 뭉치 든 사람이나 풀통 든 사람이나……”라고 한 한마디 말이었으나 전후 문맥에 적절히 끼워 놓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누구나 그 말이 내포한 충격적인 의미를 충분히 깨닫고도 남았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공공연히 그들의 죄악을 들먹거린 창주는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보복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 한번은 제대 학생 열 명쯤을 마을에 데리고 와 어머니가 좁쌀 한 말 들여 곤 소주를 먹여 군가를 불러 대게 하면서 은근히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아무 일도 없었다. 창주도 그 이후로는 여간 처신을 조심하지 않았다. 오고 가는 길에 만나면 어색한 대로나마 인사도 깍듯이 했다. 그때 죽은 자는 모두 폭도다, 폭도가 아니면 왜 죽었겠느냐, 하는 식의 강변과 무서운 집단적 편견이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어찌 조심스럽지 않겠는가.
창주는 얼핏 상념에서 깨어났다. 벌써 동산마루에 다다른 것이다. 이 고개를 넘어 조금만 더 가면 새밋드르다. 어린 시절의 낯익은 무섬증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귀신이 나온다고 한때 해만 떨어지면 인적이 끊기던 곳이다. 우르르 소소리바람이 일어 길 양옆의 검은 솔숲을 흔든다. 그 음산한 소리에 몸이 오싹해진다. 죽은 혼령들의 울음인가. 나무들 사이로 희끗거리는 눈빛도 거기에 어지러이 널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시체들의 휜 옷인 양 가슴이 섬뜩하다. 저 키 큰 소나무들은 아직 어린 다복솔일 때의 기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까? 그러나 지금 창주가 걷고 있는 아스팔트가 저 검은 숲의 기억보다 더 강인하다. 눈이 녹아 흐르는 아스팔트는 냉랭한 강철빛 광택이 떠올라 있다. 풀씨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 아스팔트. 어떤 생명력도 그 강인한 불모성을 꿰뚫지는 못한다. 비정의 아스팔트. 산 자는 이렇게 말한다.
“비행장에서도 사람 많이 죽어 무데기로 묻혔쥬. 아이고, 활주로 넓히길 잘했쥬기. 아스팔트로 꽉 봉해 불고 비행기 소리가 벽력같은디, 귀신들이 당최 맥을 쓸 수 있나.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도 귓것들이 막 해코지하려고 냅뛸 거라.”
그렇다.3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사람들은, 마을의 홀어미들도, 생활이 예전만 못해 간고해진 강씨도, 임씨도 파뿌리마냥 호호 늙어 가고, 20여 년의 교직생활 끝에 모교인 ㅈ중학교 교감이 된 창주도 그 뒤를 따라 점점 늙어 가는데, 유독 그 집단적 편견만은 저제나 이제나 여전히 세월의 풍화작용을 받지 않은 채 견고하다. 과연 얼마나 오래 대를 물리며 이 편견은 살아 있올 것인가? 그러므로 이 밤에 강씨가 죽음에 임박하여 창주를 부른 것은 그 뜻이 각별한 것이다. 도대체 그때의 가해자가 잘못을 뉘우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창주의 발설 이후 마을의 노인 홀어미들이 앞에서는 다소곳이 웃어 보이다가도 뒷전에서는 손가락질한다는 사실이 강씨에게 일생 큰 부담이 되어 왔던 게 틀림없다. 그렇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할 줄 아는 것이 인간일 것이다. 그런데 임씨는? 섬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 낳고 이 섬 땅에 뿌리내려 살아왔으니, 그도 역시 갈데없는 섬 백성이 분명하다. 그러나 임씨는 이 섬 땅에 그리고 저 반도 땅에 드리워져 있는 그 집단적 편견이 걷히지 않는 한, 아마 끝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지 않을까?
우르르 솔숲이 또 한번 흔들리면서 음산한 냉기를 후욱 끼친다. 창주는 쫓기듯 얼른 숲을 지나쳐 고개를 내려간다. 눈은 연상 내려 창주의 몸을 너울처럼 감싼다. 부드럽게 뺨을 핥는 감촉. 자정이 넘은 시간 어둠 속에 봄비는 이 눈송이들은 필경 사자들의 혼령이리라. 두런두런 뭐라고 저희끼리 속삭이는 소리. 산야 여기저기 풍우에 곱게 닦인 휜 백골과 삭은 고무신들……·그러나 눈송이들은 아스팔트를 뚫지도 못하고 덮어 싸지도 못한다. 눈송이들은 다만 견고한 아스팔트 위에 부딪혀 허망하게 바스러지고 녹아 버릴 뿐이다. 아스팔트는 물샐 틈도 없이 치밀하다. 36년 전의 애달픈 과거를 깔아 봉해 버린 아스팔트, 관문인 공항에서 시작하여 비극의 산야를 종횡으로 질주하는 아스팔트의 관광도로…… 창주는 우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거세게 머리를 혼들었다. 어서 가야지. 강씨가 숨거두기 전에 어서 당도해야지. 창주는 더욱 걸음을 빨리한다. 이때 맞은편 길 끝에서 불빚이 번쩍 하고 나타났다.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다. 처르륵, 자전거가 금방 앞에 와 멎었다. 강씨 아들이다.
“웬 일인가?”
창주는 혹시 강씨가 그 사이에 운명했나 싶어 다급하게 물었다.
“눈길에 얼마나 고생헙디가. 택시 못 잡으신 중도 모르고……하도 안 오시길래 눈길에 차사고라도 났나 하고 급히 가는 길입쥬…….”
청년은 사뭇 무안한 듯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자, 선생님, 뒤에 타십서” 했다
자전거는 물 젖은 아스팔트 위를 처르륵처르륵 기분 좋게 달려갔다. 반시간 동안 과거의 애달픈 주술에 결려들었던 창주는 그제야 제 정신이 든다.
“마을 어른들도 와 계신가?”
“예, 모두들 선생님 오기만 고대햄수다.”
“임씨도?”
“그인 왔다가 눈치챘는지 돌아가 버렸수다.”
“음…… 내 그럴 줄 알았지. 자네도 아버님이 무슨 유언을 하실지 알고 있구면.”
“예…….”
혹시 이 청년이 아버지를 설득한 것은 아닌지?
창주는 청년의 넓적한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쳤다.
“좋은 일이여. 참말로 좋은 일이여. 사람 사는 게 이래야 되는 거라.”
눈발이 뜸해졌다. 낮게 흐르던 바람이 이제 꽤 높은 공중을 달리는지 구름이 밀려가는 하늘엔 뿌옇게 달무리가 섰다. 어린 시절에는 달무리를 달이 갓 썼다고 했지.
“달아 달아, 밤중에 갓 쓰고 어디 감시니(가니)?”
“섯동네 강서방 집 조문하레 감져;”
(『아스팔트』, 창작사, 198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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