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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민씨호참공파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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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의 역사 자료 모음 스크랩 여흥민씨氏 독립운동
대니민 추천 0 조회 141 10.02.26 13: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흥 민씨(閔氏) 독립운동

자 료 / 하얀그리움

민양기(良基) : 1899(광무 3)∼1922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고 군자금과 독립단원 모집에 크게 활약했다.
1920년 이명서(李明瑞), 고두환(高斗煥) 등과 독립단 파견대로 국내에 잠입하여 920년 황해도로 잠입하여 구월산(九月山)을 근거지로 항일 무장 투장을 전개하였다. 군자금을 마련하다가 일본 순경 모리모도가 검문하는 것을 사살하고 진남포 방면으로 도피했다.
동지들과 친일분자 은율군수(殷栗郡守) 최병혁(崔炳赫)을 살해하고 노성우(盧聖佑) 집에서 은신중 황해도경 경찰대에 포위되어 교전했으나, 여러 동지는 전사하고, 몇 명은 같이 체포되었다.
1921년 사형선고를 받고, 1922년 2월 25일 간수에게 이끌려 사형장으로 가면서 수없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교수대에 올라 머리 숙여 기도를 한 다음 입회한 검사와 전옥(典獄)에게 "내가 죽은 후 나의 어린 자식과 아내와 집안일에 관한 것은 백부에게 부탁하여 잘 보호하도록 전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12분만에 방년 24세의 나이로 교수대의 이슬로 살아져 순사했다.
위패는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안에 있는 무후선열(無後先烈) 제단에 모셔져 있다(국민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민필호(弼鎬)
호는 석린(石麟)이며, 1910년 휘문의숙(徽文義熟)을 졸업했다. 한.일 합방이 체결된 다음해인 1911년 어린 몸으로 상해에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이 경영하던 상해 박달학원(博達學院)에 입학하여 중국어와 영어를 학습하여 이듬에 7월에 졸업 남양학당에 진학했다. 동년 2월 학생의 신분으로 동제사(同濟社)와 신아동제사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며,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민족운동을 일으켰다.
1918년 미국 월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을 계기로 여러 동지들에게 일제 통치 반대 민중시위를 전개하라는 밀서를 작성하였고, 국내에 잡입하였다.
1920년 신규식의 딸(明浩)와 결혼하고, 정풍문학원에 입학 중국고문학을 전공하고, 신규식의 비서로 일했다.
1920년에는 신규식 특사의 수행비서로 광동의 중국호국정부를 예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승인을 얻는데, 보좌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임시정부의 경비를 조달하였고, 윤봉길 의사가 의거한 직후 1936년 5월 김구(金九) 등을 피신시키고, 요인의 신변을 보호하였다.
군자금과 항일 운동단체에 대해 비밀 통신 연락을 취하는데 전력하였고 장개석에서 대령급 대우에 임명되었다.
군사 위원회에 근무할 당시 한국청년 200명을 입교시켰고, 광복군 장교 육성에 진력했다.
1939년 5월 36종의 일본 외교, 군사 암호전보를 해독한 공로로 중화민국 육해공군 광화장장(光華奬章)을 받았으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복간하였다.
이어 임시정부 외무차장 겸 김구(金九) 주석(主席)의 판공실장(辦公室長)으로 중국정부와 협의하여 무장 경위대(警衛隊)를 편성하도록 했다.
공은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총액 약 9억원, 식량 매달 80석, 짚차 무기 등을 받아 임정(臨政)의 기반의 굳혔으며, 호위경호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광북 후에는 국민당과 교섭하여 환국 여비 6억원과 전세비행기 2대를 교섭하여 받았다. 그후에는 광복군과 교민들의 귀국알선, 재산보호 등에 주력하였다.
중국 농민은행과 교섭하여 재만(在滿) 교포 등의 영농 자금으로 6억원을 융자케 했다.
1948년에는 중공군의 침공으로 중국정부 요인들과 같이 임정 주화대표단원 및 교포를 대만으로 피난시켰다.
1949년 8월 우리 정부로부터 중화민국 대만주재 초대 총영사로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1951년 7월 신병으로 사임하고 1957년 귀국하여 한.중문화 협회를 재건하여 한.중간의 우호를 다지다가 1963년 4월 숙환으로 66세로 별세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저서로는 "한중회교 사화:가 있다.
민용운(用云, 당시 이름 龍雲)은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松山面)에서 3.1 독립만세를 하였으며, 만세운동을 조직화 하기 위하여 인접면의 주민을 설득하여 3월 28일 사강(沙江) 장날에는 500 여명의 군중을 동원 송산(松山)면 사무소 뒷산에 태극기를 계약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민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했다. 이 만세행렬을 제지하기 위해 순사부장 노구찌가 홍면옥(洪冕玉) 등에 발사하여 명중시켰다. 선생은 "왜적을 때려 죽이자"고 선동하여 격분한 군중은 곤봉과 돌로 순사부장을 타살했다. 이로 인하여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민영주(泳珠)는
1940년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 2지대와 총사령부에서 활동했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내무부원으로 복무했으며, 그 후 중경방송국(重慶放送局)을 통해 대일심리작전(對日心理作戰)을 하기 위해 방송요원으로 선발되어 활동하다가 광복되어 귀국했다.
민치도(閔致道)는
1868년 전남 광산군에서 출생했으며, 1907년부터 2년동안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1909년부터 18년까지 나주, 영암, 장승, 화순 등지를 순방하며, 한일합방 반대 운동과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백일하에 폭로하는 한면, 대한제국은 독립국가임을 주장하여 민족계몽운동에 전념했다. 3.1 운동 때는 향리에서 만세 시위를 지도했고, 그 후 대동단원(大同團員)으로 활약하며, 재산의 절반을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헌납했다. 또한 여러 동지들과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한편, 일제에 아부하는 한국인 관헌과 친일도배들에게 "대한민국의 천군이 왜노를 주살할 날이 멀지 않으니 관직에서 물러나 대한독입에 전념하라"는 권고 서한을 발송하는 등 내 몸과 가사를 돌보지 아니하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쟁취를 위해 투장을 계속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50년 형이 확정되었다. 옥고를 치루던 1921년 8월 왜적의 혹독한 고문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급보석으로 출옥시켜 당일 가족과 동지들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튼날(8월 10일) 병구를 무릅쓰고 전남 화순군 송석면(현 梨陽面) 품평리에 있는 오봉산 계곡으로 들어와 "我死之後 大韓子孫 獨立同盟 國權回復" 하라고 민족과 겨레에 보내는 간곡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향년 53세. 순절하던 날 왜적이 집으로 달려들어 유품을 모두 압수해갔다.
민제호(濟鎬)는
198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한일합방이 되자 1912년 중국 상해로 망명, 신규식(申圭植) 선생이 영도하는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다. 그후 대한민국청년단 재무부장, 임시정부 외무부 참사, 외사국장 등을 역임했다. 1923년 김상옥(金相玉)의 귀국을 주선했으며, 상해교민단 서구위원 임시정부 위정원 의원 등을 지내고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항주로 피신하여 계속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병사했다.
민형식(衡植)은
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민영수(泳秀)는
선친인 민필호가 임시 정부수립 때부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관계로 상해에서 태어나 학교교육을 받으면서 독립단체에 가담하여 활약했다. 1940년 9월 광복군에 입대하여 총사령부에 근무중 임정의 명령을 받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 18기생으로 졸업한 후, 광복군 제 2지대에 배속되어 본부요원으로 근무했다. 그 후 다시 임정의 명에 의해 본토에 상륙 국내전투를 전개하기 위한 한미합작 훈련인 OSS를 수료, 잠수함으로 본토상륙을 대기중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민영숙(泳淑) 여사는
1920년 12월 중국 상해에서 출생했다. 부친 민재호는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된 1910년 북경을 망명 신규식이 영도하는 동제사에 가입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7년 한국 독립운동가 자녀들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에 입학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성공하자 일제는 한국독립운동가들을 밀탐하여 체포함으로 이시영(李始榮), 김구(金九)를 비롯한 혁명동지들과 행동을 같이하는 부친을 따라 황주로 온 가족이 피신했다. 1934년 혜흥여중에 입학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 북경 천진을 점령한 일본군이 점차 남방으로 진격, 상해, 남경, 항주 등지로 침입함으로 임정요인들과 함께 호남성 장사로 피난 그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1937년 8월 임정 산하단체인 광복청년공작대에 가입, 한중 합작으로 중국선전부의 후원을 받아 대일항전 공작을 전담, 한중 양국민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1942년 9월 대공직업학교를 졸업함과 동시 임정 법무부 비서로 임명되어 임정 선전부에서 대일 선전공작임부를 겸임했다. 이때 중국 정부 방송국을 통해 매주 1회씩 임정의 활동상황과 중국 점령지구에서의 일본군의 만행을 국내 동포들에게 알렸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10월부터 임정 요인 22명환국하는 소식을 국내 동포들에게 알렸으며, 동련 11월에는 주화한국대표단에 근무하며, 각지에 산재해 있는 교포들의 귀국 수속을 도왔고, 매주 2회 교포상황을 방송하다가 월말게 귀국했다.
민병준(丙駿)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수원고등학교임학교 졸업하였고, 한국 학회사건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중 사망하였다.
민홍식(鴻植)은
의병장 이진용 장군의 참모로 항일 투쟁을 하여 3.1운동을 하고, 일본군헌병분소를 습격하여 3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자택에서 청소년들에게 애국독립사상을 주입시키고, 일제의 강압으로 폐쇄되었다. 1940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반대하자 인근 주민들이 이에 합세하였다.
민영순(泳舜)은
3.1 운동후 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구국운동에 일행을 몸바쳤다.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만주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0년 중국 길림성에서 영면했다.
민시식(時植)은
1906년 경북 영천에서 정환직 부자의 항일의병에 백여동지와 함께 만 3년간 태백산에서 진주에 이르기까지 수십 고을에서 80여회나 왜병과 항쟁하였으며, 상주땅 구두목골 등에서 숨어지내다가 1947년 영면하였다. 민홍기는 1909년 의병으로 투신하여 교육과 피신을 하면서 지병으로 요양 중 광복을 맞이하고 1947년 영면했다.
민순호(舜鎬)는
의장 이강년진에서 활약하면서 주로 군의 원동력인 무기 획등에 힘썼다. 제천 전투에서 왜병 수십여수를 베었고, 만평리 전투에서는 대적을 물리쳤다. 만년 전투에서 대패한 왜적은 이곳 주민들을 학사랗고 민가에 방화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의사는 가은면으로 이동하여 은신하며 자손의 교육, 의병 양성에 전념하여 1907년 의병의 수가 500명이 넘었다. 의장 이강년이 부상하자 민긍호 부대와 합세하여 적의 무기고를 파괴하고 다량의 총과 탄약을 노획 의병들에게 보급했다. 광복 후는 의장 이간연의 의병전사록을 간행했다. 1965년 91세로 타계했다.
민충기(忠基)
효서(孝恕), 호는 금포(錦圃). 1919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10년 창명학원을 설립 육영사업에 진력했다. 3.1운동을조직적으로 지도한 후, 일제의 체포망을 피해 5만원을 갖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1921년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잡입(潛入)하여 활약하다가 10월 대구(大邱)에서 체포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복옥한 후, 1927년 출옥하여 다시 투쟁하다가 1933년 청주객창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이종을(二種乙)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다.
민병길(丙吉): 1884(고종21)~1943
호는 蘇雲(소운), 서울 출신. 한일 합방후 1923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9년 남경(남경)에서 신익희(申翼熙), 윤기섭(尹琦燮) 등과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전력했다. 1920년 혁명잡지 "우리의 길"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같은 해 韓國國民黨(한국국민당)의 조직에 참여하여 中央委員(중앙위원)이 되었다.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 상임의원(議政院 常任議員) 및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서 계속 항일운동에 진력하다가 중경(重慶)에서 병사했다. 1948년 5월 백범 김구의 영식 김신(金信)에 의해 영령이 봉환되었다.
민병태(閔丙台)
자는 경택(敬澤). 호는 화은(華隱), 한말 때 독립운동가이다. 조선말기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가하여 3.1만세를 불렀던 민병태 열사는 일본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어 1개월간 산 속으로 피하여 있다가 고향인 홍천군 동면 성수리로 돌아왔다. (사진 : 민병태 열사 추모비) 그는 4월 2일 아침 군중 수 백명이 모여 민병찬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하다가 민병선 면장이 내일 다시 하자고 제의하여 4월 3일 다시 모여 민병태 열사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홍천읍을 향해 행진하던 중 일본 헌병 지전 상등병이 길을 막자 열사의 동생 민병숙 열사가 항거하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분격한 병태 열사도 항거하다 쓰러지니 성난 군중이 노도와 같이 밀려가 난투극이 벌어졌으나 무차별한 관헌의 난사로 군중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이들 민병태, 민병숙 두 형제 열사를 기려 1965년 홍천읍 유지들이 뜻을 모아 높이 1.5m 폭 50cm의 추모비를 세웠다.
민병숙(閔丙肅)
자는 경운(敬雲), 한말 때 독립운동가이다.
민영팔(泳八)은
1907년 이병상과 함께 충북 단양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켜 좌군장으로 활약하다가 홍천에서 일헌(日憲)에 체포되어 전남 진도로 유배되었다. 민산해(山海)는 1915년 만주의 간도 용정에 제창병원(濟昌病院)을 설립하고, 부상입은 독립군들을 무로료 치료했다. 1920년 혼춘(琿春천)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교포대학살 현장을 사진에 담아 일제의 많애을 전세계에 폭로했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취이맣였다. 빈한한 환자를들을 무료로 치료하다가 일제에 ?겨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
민치영(致永)은
군자금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간 복역했다.
1919년 3.1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평양 형무서에서 8년감 복역했다.
민현호(炫鎬)는
선친인 민치도(致道)가 대동단의 일원으로 호남과 영남지방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파를 암살하는 등 국내공작을 하다가 동지인 박일봉만 남기고 남녀단원 50여명이 담양경찰서에서 검거되었다. 이때 학생신분으로 권총사건에 가담했다가 선친 및 숭일학교생인 김태오, 최윤상 등과 함께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일경은 이들 학생들을 꼬마 독립군으로 불렀다. 이 사건으로 선친은 5년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서에서 옥고를 치루던 중 1921년 8월 왜적의 혹독한 고문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급보석을 출옥시켰으나, 다음날 성속면 오봉사 계곡으로 들어가 겨레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경찰서에서 60여일간 고초를 겪고 풀려나자 곧 적지인 일본으로 건너가 선동선, 이계열 등과 항일투장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어 경도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복역하고 출옥했다. 항일 운동을 계속하다가 추방되어 귀국했다.
민창식(昌植)은
3,1운동에서 김포 지방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미결수로 1년동안 옥고를 치뤘다. 그후 정식으로 기소되어 6개월형을 받았다.
민영완(泳琬)은
1935년부터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항일 일선에서 투쟁했다. 1939년 임정의 공작 특파원으로 일했고, 1942년부터는 고압고군 공군양성에 진력했다.
민충식(忠植)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충남 대표로 임명되어 비밀국원으로 활약했다. 1929년 국내로 잡입하여 국내 공작을 합법화 하기 위해 발성영화제작소를 설립하고 군자금 모집등 공작을 했다. 민식(植)은 1910년 안일합방후 해산 의병장으로 황해도 일대에서 일본군에 항전했다.
민영룡(泳龍)은
105인 사건(安岳事件)의 주모자들인 김구 등과 회복(恢復)을 도모하다가 1911년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민영면(泳冕)은
1923년 독립의용단원으로 국내에 잡입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하다고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순절했다.
민관식(寬植)은
1921년 광복단에 군자금 모집을 주도하다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민순식(閔舜植)은
1986년 문경(聞慶)에서 이강연(李康년) 등과 함께 가재를 털어 의병을 규합하는 한편 일본군의 밀정인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경 이치윤, 김인담(金仁覃)을 붙잡아 죽인후 마성면 마고성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자 단양(丹陽) 산골로 피신했다. 1905년 이강연과 다시 의병을 일으켜 원산, 연풍, 영주, 강릉, 봉화, 충주, 안동, 문경 등 14개 지역에서 1907년 7월 제천에서 일분군 5백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이강연이 체포되자, 김상태와 함께 3년간 유격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는 동안 가산은 일경에 몰수되고, 전세가 불리해져 다시 단양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민찬호(燦鎬)는
1905년 미국 하와이에서 교포상조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며, 교포들을 규합했다. 1913년는 흥사단(興士團) 이사장에 피선된 후, 1919년에 국민회중앙회 임시위원에, 1921년에는 3월 동지회 창립위원으로 조국 광복에 힘썼다. 다음 해에는 하와이 교민단에서 발간하는 국민보사(國民報社을) 사장과 태평양잡지 주필로 일하며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했다.
민태규(太圭)는
1919년 3월 17일 예안(禮安)장터에서 격문을 낭독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경의 예안 주재소를 습격했으나 체포되어 1919년 1년을 복역했다. 출옥 후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교역(敎役)생활을 계속하면서, 도합 수십차례 에비 검거되었으며, 68년 영면하였다.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은
고종의 외조부 민치구(閔致久)의 손자이고, 병조·이조판서를 지낸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서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요약 파보 참고).
그는 1877년(고종 14) 문과에 급제,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예·형·병·조의 판서(判書)를 비롯한 한성판윤(漢城判尹)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한 후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궁궐에 나가 이를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에 모여 상소를 의논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전동(典洞) 이완식(李完植)의 집에 가서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로 시작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지하실에 간직하고 그 방을 봉했는데 이듬해 봄 그 자리에서 대나무(竹)가 솟아 올라,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충절을 말하는 혈죽(血竹)이라 불렀다고 한다.
민긍호(肯鎬)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원주 진위대(原州鎭衛隊)의 특무정교(特務正校)로 복무하고 있을 때인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의 비보를 접하고 크게 분격했다. 다음 날 진위대장 홍유형참령(洪裕馨 參領)이 군부의 전령을 받고 진위대 해산에 따른 지시를 받고자 상경한 뒤 장군은 대장 대리인 정위(正尉) 김덕제(金德濟)를 설복, 의거(義擧)키로 한 다음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전 대원에게 나누어 주고 일부 대원을 저평(低平)으로 급파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홍대장을 붙들게 했다. 그 후 진위대를 지휘하여 서울로 진공하고자 했더니 洪은 거짓 응락으로 야음을 타서 여주(驪州)를 거쳐 서울로 내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군은 부득이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동일 죽산(竹山)에 이르러 동지를 더 규합하여 원주의 일인(日人)과 헌병분소를 습격하여 방화하고, 5일 정찰나온 충주 수비대장 니노미야가 이끄는 일병(日兵)과 2시간동안 교전하여 전승했다. 한편 김덕제 정위는 병력을 이끌고, 평창, 강릉, 고성, 통천 등 강원도 지방에서 일병 토별에 지력했고, 장군은 휘하병력을 여러 부대로 나누어 제천, 충주, 죽산, 장호원, 여주, 홍천 등의 기호(畿湖)지방에서 허준, 이경삼, 김윤필, 이강년, 김생산, 변학기, 조인환 등의 의진(義陣)과 제휴 맹렬히 활약했다.
이강년 부대와 합동으로 충주를 공략할 때, 장군읜 우익(右翼)을 이의장(李義將)을 좌익을 담당 진격했으나, 도중에 일군의 기습을 받아 죽령(竹嶺)을 넘어 풍기(豊基로) 와서 왜적을 토벌하고 봉화(奉化) 각췌사(覺萃寺)에 유진했다. 1907년 12월 양주(楊州)에 집결한 전 의병부대는 서울로 진격하이 위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했다. 이 때 이인영(李麟榮)을 13道 의병청대장(義兵廳大將)으로 추대하고, 장군은 관동군(關東軍) 6,000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관동군창의대장(關東軍倡義大將)에 임명되어 동대문(東大門) 밖 12 km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일군에 기선을 제압당해 패전했다. 그리하여 장군은 휘하 장병들을 재정비하여 기호(畿湖) 및 영남(嶺南)지방을 전전하며 많은 왜적을 살육했다.
장군은 군기가 매우 엄정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으므로 가는 곳마다 민심을 얻었으며, 일군도 장군의 인격을 존중했다. 장군은 가는 곳마다 주민들 앞에서 애국연설을 했는데, 나라 잃은 비장한 웅변에 감동되어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협조했다. 이때 원흉(元兇) 이또가 광무황제(光武皇帝)를 협박하여 각 의병진에 이른바 선유사(宣諭使)를 보내 의진(義陣)을 해산토록 했는데, 장군은 강원도 선유사(宣諭使) 서상윤(徐相崙)을 의진에 붙들어 놓고, 충의를 들어 엄하게 나마란 다음 돌려보냈으며, 강원도 관찰사 황철(黃鐵)이 귀순하기를 원하자, 위세에 아부하여 의병을 박해함을 크게 꾸짖어 쫓아 보내기도 했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적병을 도륙한 후, 원주의 치악산으로 들어가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비축, 장기전에 대비했다.
1908년 2월 29일 충주수비대에 배속된 한국순사대(韓國巡査隊) 권경시(權警視가) 이끄는 동족(同族)과 3시간동안 교전했으나 패전하여 동족인 권경시에 의해 피체되었다. 이날 밤 의병들은 장군을 탈환하기 위해 적진을 기습했으나, 적의 완강한 반격을 받았다. 이때 한 의병이 "우리 민장군은 어디계신지 큰 소리를 지르시오"라고 외쳤다. 이 소리를 들은 장군은 소리치려 했으나 권경시에 의해 살해되었다. 1907년에 8월에 기의(起義)하여 1908년 2월 순국하기 까지 강원, 충청, 영남 일대에서 크고 작은 전투 100여회를 벌였으나 끝내는 동족인 주구에 의해 피살되었다.
유족은 물론, 묘소도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復章)이 수여되었다.
민강(강)은
1909년 안희제, 서상일, 신성몸 등과 비밀결사 대동 청년단(大東靑年團)을 조직,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3.1 운동 때는 만세운동을 지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민족대표 손병희를 비롯한 266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표면으로 동화약방 등을 경영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비밀문서를 나무판에 새기다 일경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해로 망명하여 항일 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했다.
민영구(泳玖)는
3.1 운동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11세의 어린 몸으로 중국 상해로 갔다. 그곳에서 만국항해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중.일 전쟁에 참전하여 군수품 수송 등의 임무를 맡아 활약했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항주로 가서 항일 운동을 하였다. 김구(金九) 주석을 도와 잡지 "광복(光復)"을 발간하였다. 광복후 김구 주석의 지령으로 중국당국과 교포 등의 교섭을 맡았고, 귀국후에는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참모부장, 해군사관학교교장 등을 역임하고 해군소장으로 예편했다.
민종식(宗植)
公은 판서 민영상(泳商)의 맏아들로 1861년 출생하여 충남 정산(定山)에서 자랐다. 1881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185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참변을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정산으로 돌아와 일제와 역적들을 토벌하고 국권을 바로 잡기로 결심하여 1898년 10월부터 3남(三南)일대를 순회하며, 동지를 규합에 진력했다.
1905년 을사위약(乙巳僞約이 체결(締結)되자 가산을 기우려 무기를 제작, 또는 구입하여 의거를 준비했고, 1906년 육군정위로 헌병대장 서리를 지낸바 있는 이세영(李世永), 채광묵(蔡光默, 안병찬, 박창선 등과 함께 토적(討賊)키로 결의하고, 정산의 천압리(天壓里를) 근거지로 삼아 국민에게 보내는 격문 및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청원문을 작성하고 계속 군용품 준비와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 의거 정보를 사전에 탐지한 일본 헌병대가 진압차 출병했다는 정보를 입수, 3월 13일 밤중 동지 30∼40명을 이끌고 홍주(洪州)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그곳에는 다수의 일본헌병이 주둔하고 있어 보령(保寧)으로 진격하던 도중 17일 미명에 합천에서 일헌(日憲)의 습격을 받아 항전했으나, 군장비의 미비로 패전했다. 이 전투에서 다수의 병력을 잃고 청라(靑羅)로 피신하고, 다시 동지를 규합했는데, 많은 전직관리들이 가맹했다. 어느정도 군세가 확장된 5월 14일 남포(藍浦)에서 일대 의병봉기를 감행했다. 이때 남포군수와 보령군수에게 병마와 군자금 제공을 명령하는 한편, 일인들을 포박하여 징치했다.
보령군수 신석구(申奭求)는 의빈에 포정(砲丁)과 양총(洋銃) 80정을 지원했는데, 뒤에 충청남도 관찰사 김?진(金?鎭)이 이 사실을 정부에 보고해 파면되었다. 군세가 크게 확장된 의군은 군비를 정비한 후, 19일 오후 5시에 홍주성을 공략했다. 이때 의진(義陣)은 총기류를 휴대한 의병이 600명, 창을 든 병사가 200명이었고, 맨주먹으로 종군한 유생(儒生)이 300명으로 총병력이 1,100명의 대부대였다. 이 공략전에 앞서서 선생은 창의군대장(倡義軍大將)에 추대되었고, 정재호, 황영수를 참모장에 임명했다가 뒤에 이세영과 교체했다. 선봉장에선 박영두 등을 임명하고, 군사(軍師)에는 김상덕(金尙德)을 배치했다. 창의군(倡義軍)은 화포(火砲) 6문를 앞세우고 맹렬한 사격전을 전개하며 공격했다. 홍주성(洪州城)에 있던 일헌병(日憲兵) 2명과 우편국원들이 남문의 성ㅂ겨을 의지하고 화포로 맞섯으나 창의군 공격을 지탱할 수 없어 북문으로부터 덕산으로 패주했다. 승전한 창의군은 지축을 흔들며 입성, 성내의 병기, 군량, 탄약 등을 징발한 후 전군을 동서남북의 사진군(四陣軍)과 호위대로 편성하여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일제는홍주성의 탈환을 위해 5월 20일부터 24일까지 4차례나 공격했으나 패퇴하여 화가 치민 총감 이또오(이등박문)는 주차군사령관(駐箚軍司令官)에 대하여 출병을 명령했다. 일본사령관 하세가와는 경성남부수비사령관 본죠오 소장에게 "필요한 병력을 홍주 방면에 파견해 헌병 및 경찰관과 협력하라"고 훈령하고 헌병대장 고야마 대좌에게는 홍주에 있는 헌병으로 하여금 중원부대와 협력케 하고, 그 중원 부대장의 명령을 받도록 했다. 이러한 병력 규모는 당시 한국에 주둔한 일본의 전병력을 총동원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경성남부수비대 사령관은 곧 보병(步兵) 제 60 연대장에게 대대장(大隊長) 다나까 소좌를 지휘관으로 하여 보병 2중대로서 1개지대를 편성하고 기관총 2문을 배치했다. 그리고 전주수비대의 보병 1소대를 합세시켜 최강부대를 편성했다. 27일 천안에 도착한 이 부대는 다음날 기병은 신예원(新禮院)에, 주력부대는 신창(新昌)에 야영시킨 다음 30일 오전 1시를 기해 홍주를 포위하고 진격을 개시했다.
창의군은 즉각 일군을 맞아 항전했다. 그러나 이날 오전 11시 40분쯤 서쪽으로부터 기관총을 난사하며 달려든 일병과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장비가 불충분한 창의군이 몰리자 일본 주력부대는 북문을 파괴했다. 이럴 즈음 최익현(崔益鉉)으로부터 "존양토복(尊攘討復)"의 기호를 받고 선봉을 맡은 중군 남규진(南奎振)과 같이 예산에서 400명의 의병을 모아 기의(起義), 해미성을 진공하려던 곽한일(郭漢一)이 이 급보를 듣고, 홍주성으로 입성하여 창의병의 참모가 되어 일군의 공격을 막게했다. 30일밤 12시 30분 일군은 서문 밖의 민가에 방화한 후 맹렬히 공격을 가해 동문과 북문을 파괴하고 성안으로 진격해와 일대 시가전이 벌여졌다. 아직 동이 터지 않은 이른 새벽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병과 일제 침략군의 공방전을 불을 뿜었으나, 창의군의 조국 소호전도 불충분한 장비, 훈련의 미숙으로 패전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일군 10여명을 살해하고, 포로 4명을 총살했으나, 창의군을 군사 감상헌을 포함한 83명이 전사하고, 154명이 체포되어 그중 79명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 중 윤석봉, 이상두, 이재균, 이강룡 등은 일본헌병대가 공급하는 음식을 일식(日食)이라는 이유로 단식 항쟁했으며, 나머지 의병들도 망국의 모진 고초를 겪었다. 선생은 몸을 피해 재기를 도모하다가 이해 11월 20일 일헌에 체포되어 1907년 7월 3일 평리원(平理院)에서 형법대전 제 195조"정사를 변경하기 위해 난을 작한 자" 률에 의해 교수형의 선고를 받았고, 이용규, 박윤식, 김덕진, 정한일, 정재호, 황영수 등 간부는 종범으로 종신형을 받았다. 교수형 선고를 받은 선생은 이또오의 종용으로 각의(閣議)에서 "특감 1등"이 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2월 특면으로 풀려났으나 옥정에서 당한 혹형의 여독으로 신음하다가 1908년 6월 26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康川面) 가야리(伽倻里)에 안장되었다.
민용호(龍鎬)
호는 복재(復齋). 고려의 충신인 두문동 민안부의 16세 손으로 1895년 국모(國母)의 시해소식을 전해듣고 분통함을 참지 못하여 전국의 유림(儒林)들에게 통문(通文)하기를 "일찌기 우리나라는 수차례 긍하여 변방 오랑케들의 침입은 고금에 있었던 환난이었으나, 왜적과 같이 잔인무도함 흉악배는 사상 그 유례를 보지 못하였다. 임잰왜란때 이륙(二陵; 成宗과 中宗)을 발굴하여 임금의 시신을 욕되게 하여 3백년동안 그 원한을 씻지 못한 이때에 이젠 범궐까지 국모를 시해하였으니 어찌 이 땅의 피를 받은 백성들르서 앉아서 좌시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총궐기하여 위로 나라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 국민을 보호하여 자손만대로 평안을 도모코저 하노라" 하고 외치고, 격문을 보냈다. 수백명의 장(將)이 되어 친일 세력인 경무관 고준식을 효수하고, 왜병 111명의 목을 베는 한편, 원산에 집중된 왜노를 공격코자 관북 서북 서북 의병진과 합세하여 왜적 축출의 전략을 세우니 이때 군세는 2,300명에 이르렀다.
1896년 2월의 안변의 선평전에서는 왜병 182명을 사살했다. 김택수(金澤秀)가 왜적에 붙어 북청병(北靑兵) 백여명을 이끌고 의병(義兵)을 포위하여 오므로 후일을 기약하면서 白頭山아래서 동지들과 이별했는데, 공은 비통한 감회를 시에 붙이기를 "풍진 속에 출몰한지 몇 해나 되었는데, 한바탕 승부는 도시 천운의 탓이로다. 관동 자제들을 그대에게 모름지기 부탁하니, 말타고 돌아와서 다시 채찍을 정비할 걸 믿어다오." 이란 포부를 노래했다. 중국에 건너가 1897년에 중국군 원세개와 만나니 공의 애국충절을 감탄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해 10월 고종황제의 귀국 명령을 받고, 돌아와 1898년 3월에 친일세력이 영도하는 독립협회를 격파하고, 황국협회를 조직했는데, 고종은 벼슬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국내의 모략으로 190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02년 귀국하여 벼슬을 하였으나,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하다가 왜적에게 입은 화병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다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건국훈장국민장 수여).
저서로 의병활동을 기록한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1895)이 있다.
민기희(閔基熙)
이득년(李得年)=이연년(李延年) 1874(고종 11)∼1944. 한말의 의병. 일명 득년(得年)·목년(穆年). 경기도 양평출신. 양반으로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07년 7월초 양근에 거주하는 민기희(閔基熙)로부터 현재 정부의 대신을 믿을 수가 없으니 우리가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을 물리치고 구제도를 회복하자는 제의를 받고, 포수 30여명과 함께 경기도 지평군 우곡에 가서 김춘수의진(金春洙義陣)에 입진하여 종사가 되어 항일의병투쟁을 하였다. 같은해 10월 24일 여주군 대송면 곡수에서 순사 한명을 사살하였고, 같은해 11월 보름경에는 홍천 남창에서 의병장 김춘수 및 동료의병 100여명과 함께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같은해 12월초에는 여주 천양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8년 음력 정월 관동병영장 정대무(丁大武)가 의진을 해산하자, 그의 선봉장이었던 김응서(金應西)가 의병부대를 재조직하기 위하여 지평에 왔다. 이때 의병을 소모하는 전령문을 작성하는 등 함께 의병모집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해 3월 일본군 지평수비대에 잡히고 말았으며, 서울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고 1908년 5월 22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유형 10년을 선고받았다. 198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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