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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계 2009 상반기 신인상 발표
더 큰 기대와 가능성을 보는 작가
백금태의 <시선> 외 4편
심사위원
박양근(수필가, 문학평론가, 부경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최원현(수필가.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한상렬(수필가 수필시대 주간)
심사평
1.
수필의 시대일 거라는 21세기에 우리는 수필시대의 위기를 맞는 것인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지원금 대상에서 수필 장르만 빠진 것뿐만 아니라 서울문화재단의 창작지원 대상에서도 수필이 빠져 있었다. 수필을 문학장르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가. 우린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숫자를 내세우면서까지 강력히 이의를 제기 했지만 별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독자들이 까무러칠 정도로 좋은 수필작품을 많이 생산해 내서 누구든지 문학 하면 수필을 생각하게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결국 실력으로만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될 터였다. 그런데 때로는 수필가보다 더 좋은 수필을 써내는 시인, 소설가의 수필 앞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신인의 작품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늘 기대감으로 넘친다.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 여지껏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선보여지는 신선한 만남의 충격적 순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시보다 상큼하고 소설보다 재미있는 수필, 지혜와 삶의 철학이 넘치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쾌감을 느낄 수 있는가 하면 넘치는 해학(諧謔)으로 박장대소(拍掌大笑) 통쾌함을 갖게 하는 그런 수필들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가슴으로 스며드는 서정성만 고집하기 보단 시대와 세계를 품는 크고 넓은 수필의 세계도 기대해 본다.
바야흐로 세계적인 추세는 분명 에세이 시대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한국적인 사고에만 갇혀있다. 사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곧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음이지만 우린 그러한 위치 내지 경지에 올리질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예전의 신변잡기와 좁디좁은 내 체험 영역의 의미화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선하고 충격적인 에세이적 사고(思考)로 수필의 시각 및 영역도 확대하고 변화시켰으면 하는 바람을 가득 안고 수필세계 신인상 응모작들을 펼친다.
수필세계 신인상 당선자 백금태의 <시선> 외 4편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에서 깊은 사색을 끌어내는 능력이 보이는 작품들이다.
2.
<시선>은 극적 전환이 있는 작품이다. ‘며칠 전의 초라한 밥상과는 다른 진수성찬이다.’가 암시하는 ‘며칠 전’은 “둘이서 한 그릇요? 오백 원어치 더 얹어서요?” 의 국수 사건이다. 삼천 원을 넣고 나선 아침 산행 길, 오백 원짜리 차 여섯 잔의 값이건만 그날 아침엔 2,500원짜리 잔치국수에 두 사람의 눈이 간다. 결국 돈만큼 한 그릇에 오백 원어치를 더 얹어 받은 3천원어치의 국수 그릇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부가 국수를 나눠 먹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느꼈던 초라함, 부끄러움, 주위의 시선 등이 작자의 심적 묘사로 잘 그려진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시선은 그가 느끼고 생각했던 그런 시선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다움, 부러움의 시선이었다. 국수집 아주머니의 한마디에 무너지는 오해들, 삶이란 어쩌면 그런 무수한 오해 속에서 필요 이상의 위축과 불안과 부끄러움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닐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다.” 수필은 이렇게 밝게 끝나야 읽는 이의 마음도 밝아진다.
<김치와 고등어>는 상생을 주제로 한 수필이다.
너무 짜게 담궈져 푸대접 받다 여러 해 묵어버린 김치, 그런데 고등어와 만나자 진가를 발휘한다. 열 입곱 신부와 열아홉 신랑으로 만나 칠십년을 해로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처럼 어우러지며 하나가 된 깊은 맛이다. 여덟 자식을 낳아 키우며 “어머니가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곰삭은 묵은 김치라면 아버지는 살아 펄펄 뛰는 고등어였다. 하지만 살아 펄떡거리는 고등어와 숨죽은 묵은 김치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칠십여 년이란 세월이 냄비 속의 김치와 고등어가 서로를 품듯 어머니와 아버지의 궁합을 맞추었나 보다. 오랜 세월에 익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곰삭은 정은 묵은 김치와 고등어가 어우러진 맛이 아닐까.”
그렇게 삶이란 익고 스며들고 곰삭아 어우러지는 것이리라.
<풍선놀이>는 일종의 사회수필로 교훈성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자칫 강해질 수 있는 교훈성을 여운 있는 마무리로 아슬아슬하게 누그러뜨리며 의미화 낸다. “성적은 인륜을 짓밟고 우뚝 서서 거드름을 피운다.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린 채 그 밑에 엎드려 슬슬 눈치를 살핀다. 부모의 풍선놀이에 그리고 이 사회의 풍선놀이에 아이들의 풍선도 점점 더 커져만 간다.”
5분 사이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에게 성적이 좋은 아이가 형이 된다는 엄마의 선포는 5분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작은아이의 마음에 경쟁의 불을 붙인다. 이를 보는 교사인 작가는 자신의 어린 날 형편에 견주며 교사의 양심과 본분을 상기한다. 목소리 높인 사회고발성은 아니라도 어쩌면 작가가 교사로서 늘상 마음에 품고 있던 꼭 하고 싶었던 말일 수 있다. 풍선놀이는 누구의 놀이일까, 아니면 시합일까. 긴 여운으로 생각을 끌고 가고 있다.
<잡초도 친구가 된다>도 교훈성이 있는 수필이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란 지극히 타의적이다. 곡식과 잡초의 구분 또한 지극히 주관적이다. 요즘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잡초가 건강 약초로 바뀌거나 뽑아버리던 것이 재배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작가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잡초가 있어줌으로 해서 콩밭의 콩이 큰 바람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잡초 덕에 콩이 무사했던 것이다. 어우름, 삶이란 그렇다. 세상사가 다 그렇다.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친구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수필가의 눈은 바로 곡식만이 아닌 잡초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상생 속에서 옳고 그름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잡초도 친구가 된다’던 할머니의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지혜의 말씀이다.
<자매>는 네 자매 이야기다. 그 넷 중 셋째인 작가는 자신의 성격을 ‘덜 조여진 나사처럼 헐렁’하고, ‘무슨 일에나 한두 박자 느린데다 대충대충 넘어가’고, ‘야무진 구석’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둘째 언니가 미끄러져 팔목 뼈가 부러진다. 그런 사건 속에서 서로서로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따스한 마음들이 글 속에 스며난다. 그중 작자인 내 입을 막아야만 일이 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언니의 다짐 전화에서 작자의 성격은 더욱 두드러진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네 자매의 성격인데도 자매라는 혈연적 분모로 하여 독특한 조화를 이루는 네 자매의 모습에서 각양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오늘의 축소화된 모습을 본다.
3.
백금태는 이상의 다섯 작품에서 보듯이 응시의 초점을 안다. 말하자면 그가 쏘아야 할 표적의 크기를 안다. 다만 너무 표적만을 의식하다보니 그 긴장도가 활을 흔들고 있다. 마음을 차분히 하여 내가 활을 들고 있는 사실조차도 의식 못하게 과녁을 바라보다 시위를 놓는 것이 활쏘기이듯 수필에도 이런 자연스런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게 수필(隨筆), 곧 붓 가는대로의 글쓰기이다.
구성은 착실하고 확실하게 하되 문자화해 나가는 것은 손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있는 생각-생각의 집짓기가 끝난-이어야 한다. 농익은 생각이 일필휘지로 펼쳐지듯 거침없이 쓰여진다. 그래야 읽을 맛이 난다. 상당히 좋은 수필들임에도 왠지 2%의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조금 덜 익은, 덜 발효된 느낌이 드는 아쉬움 그러나 그 2%의 아쉬움은 바로 더 큰 기대와 가능성이다.
백금태의 수필들에선 대상을 객관화 시키면서 의도한대로 이야기를 주도해 내는 힘이 보인다. 흔들 줄도 알고 담을 줄도 안다. 전환도 알고 포용하거나 동행하는 것도 안다. 조금만 더 가는 길을 가다보면 곧 방향성도 확보하고 더욱 힘차게 길을 갈 것으로 기대된다.
수필은 처음엔 쉽게 쓰여지는 글이지만 쓰면 쓸수록 어려워지는 글이요, 알면 알수록 힘들게 느껴지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열심히 그리고 낮아지고 겸손해 져서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된다는 문학이다.
1년에도 기백명의 수필가가 이러저러 관문을 통하여 등단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관문의 허술함 뿐 아니라 통과시켜 놓은 다음에는 모른 체 하기가 다반사다. 그렇기에 수필인구는 늘어나는데도 좋은 작품은 늘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도 《수필세계》의 등단은 가히 축복이다.
백금태의 수필들을 읽으며 더욱 기대를 갖는 것은 대상에 애정을 두는 그의 눈길이다. 차갑지도 따갑지도 그렇다고 아주 따스하지도 않은 객관화의 눈으로 보려는 그의 구도적 눈길이 마음에 든다. 이는 다양한 수필들을 구사해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요 바람이기도 하다.
등단작이 대표작이 되는 것은 축복은 아니다. 그래서 등단작보다 좋은 작품을 생산해 내라는 촉구와 격려가 필요하다. 그 촉구와 축하를 져버리고 등단작보다 못한 작품들만을 생산해 낸다면 우수한 등단작 한 편의 기쁨은 창작의 길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부단한 노력만이 스스로를 아름답게 만들어낸다. 수필문단에 한 식구를 들이는 아름다운 일에 참여한 기쁨 속에 큰 박수와 축하를 보낸다.《수필세계》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더 큰 기대를 새 수필작가에게 부담으로 안겨주고 싶다.
수필세계 응모작
시선(視線) 외4편
백금태
잔치국수가 식탁에 놓여 있다. 넓적한 대접에는 돌돌 만 국수위에 채 썬 오이, 무친 부추, 계란 지단으로 꾸며진 고명이 소담스럽게 올려져 있다. 숭숭 썬 대파와 고춧가루, 통깨, 고소한 참기름이 버무러진 양념장이 잔치국수의 입맛을 한층 더 돋운다. 해물이 드문드문 섞인 파전, 청방배추 겉절이를 곁들인 두부접시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며칠 전의 초라한 밥상과는 다른 진수성찬이다.
그런 음식상을 앞에 둔 우리를 부러운 듯 사람들이 바라본다. 다이어트를 밥 먹듯 하는 이 시대에 요량없이 먹어대는 무지한 인간으로 치부하는 듯한 측은한 눈초리도 보인다. 그런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미소를 흘리며 거들먹거리듯 어깨를 으쓱인다.
지난 일요일 남편과 집 가까이에 있는 산에 갔다. 근처의 주민들이 즐겨 이용하는 야트막한 산이다. 초입에는 여러 가지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어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여러 개가 묶여진 큼직한 훌라후프를 바람개비 돌리듯 날렵하게 돌려대는 아주머니, 울퉁불퉁한 근육을 만드느라 땀 흘리는 젊은 아저씨, 불룩 나온 배를 집어넣느라 용쓰는 중년 아저씨. 건강에 대한 염원이 푸른 숲을 가득 메운다.
사람이 붐비는 곳에는 어김없이 찻집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그곳에도 찻집이 있다. 숲과 어우러진 그곳은 비록 컨테이너일망정 도심의 화려한 카페가 부럽지 않다. 그곳에는 갖가지 차 맛도 일품이지만 흘러간 트롯트곡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찻물을 끓이는 연세 지긋한 여 사장님의 인정 맛이 더 그윽하다. 가끔 산에 오를 때면 님도 보고 뽕도 딸 겸 지폐 한두 장을 주머니에 꼬겨 넣은 채 집을 나선다. 차값은 종류를 불문하고 한 잔에 오백 원이다. 혹시 옆 사람에게 선심이라도 베풀고 싶으면 한두 잔 더 주문한다. 산에 가면 면이 없는 사람도 금방 친구가 된다. 푸근하게 감싸 안는 산의 후덕함이 사람들의 가슴을 저절로 열리게 하나 보다.
그날은 큰맘 먹고 천 원짜리 지폐 석 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남편과 내가 먹고도 네 사람에게 차를 대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누가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양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빴다.
차를 마시는 시간은 언제나 산을 한바퀴 둘러 내려온 후다. 등산 후에 마시는 차 맛은 힘든 일을 끝낸 후 만끽하는 휴식처럼 달큰하다.
그날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듯 가지 않던 등성이를 넘어 숲길을 걸었다. 새로운 것은 신선함을 주나 보다. 같은 산, 같은 나무이건만 새롭게 다가왔다. 산의 끝자락쯤에 이르렀을 때, 나무로 지붕을 잇고 비닐로 몸을 둘러 싼 천막집이 눈에 들어 왔다. 나일론 끈으로 손잡이를 단 문에는 음식 이름을 적은 종이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촌두부 4000원, 도토리묵 5000원, 잔치국수 2500원, 돼지 껍데기 6000원’ 잔치국수가 눈에 확 들어왔다. 목도 컬컬하던 차라 잔치국수의 시원한 국물 맛이 시장기를 재촉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집을 나서며 주머니에 넣었던 지폐만이 만져졌다. 손이 아래 위 주머니를 들락날락거렸지만 동전 하나도 더 찾지 못했다.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니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그도 빈털터리였다.
“국수 한 그릇에 오백 원어치만 더 얹어 달라면 안 될까?” 그 말에 동의 하듯 남편은 눈만 껌벅인다.
“남자인 당신이 말하면 주인아주머니가 더 잘 들어 줄 텐데.”
은근히 남편을 부추겼다. 하지만 나의 제안에 남편이 남 보기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숫기 없는 남편을 믿었던 내가 잘못이었다. 숫기 없기로는 남편과 별 반 다를 바 없는 내가 나섰다.
문을 열었다. 좁은 천막 안에는 꾀죄죄한 땟물이 흐르는 식탁 서너 개에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가 다닥다닥 놓여 있었다. 식탁에 올망졸망 앉아 있는 사람들이 꼭 어미돼지의 젖꼭지에 매달려 젖을 빠는 새끼들의 형상이었다. 그래도 빈자리가 몇 개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남편에게 눈짓으로 빈자리를 가리키고는 주인아주머니 앞으로 갔다. “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무엇을 드시겠냐며 육십이 넘어 보이는 그녀가 파전을 굽던 손을 멈추며 함박웃음을 보냈다. 그 웃음에 용기를 얻은 나는 “국수 한 그릇에…… ”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둘이서 한 그릇요? 오백 원어치 더 얹어서요?
주인의 입가에 번지는 묘한 웃음,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예” 대답소리가 방황한다. 천막 안의 뭇시선들이 한 곳으로 몰린다.
“거기 앉으시소.” 주인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천막 안은 평정을 되찾는다. 자리에 앉아도 가시방석이다. ‘그깟 국수 반 그릇 먹을라고.’ 때늦은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랴. 국수 한 그릇에 젓가락 두 모를 걸쳐 놓고 둘이서 멋쩍은 웃음을 나눈다. 옆 식탁에는 한 무리의 손님들이 파전, 두부, 돼지 껍데기에 동동주까지 푸짐하게 얹어 놓고 왁자지껄하다. 우리 둘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한 여자가 자기 식탁에 있는 음식을 접시에 주섬주섬 담아 우리 앞에 놓는다. 뷔페식당의 음식처럼 한 접시에 이것저것 담긴 음식이 뒤죽박죽된 내 마음 같았다. 나는 그 사람들의 베풂이 싫었다. 그들의 눈길이 왠지 불쌍한 시선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나는 그날의 불쌍한 시선을 갚아주고 싶었다. 주인아주머니의 곱잖았던 시선에도 쇄기를 박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메뉴 판에 있는 데로 다 시켰다. 파전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두부가 나오고, 돼지 껍데기가 나왔다. 주인아주머니가 마지막으로 국수 그릇을 내려놓으며 한마디 하신다.
“지난번에 두 분이 국수 한 그릇에 젓가락 두 모 걸쳐 놓고 이마 맞대고 드시는 모습이 너무나 다정해 보였심더. 얼마 전에 하늘나라에 간 영감이 갑자기 떠올라 눈시울이 시큼거려서 애 먹었심더. 늙은 기 주책이지예.”
아뿔싸. 아주머니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굴절되어 있었다. 함박웃음을 짓던 얼굴이 카멜레온처럼 바뀌는 걸 보며 오해를 했던 것이다. 음식을 나눠주던 옆 식탁의 시선도 내가 느꼈던 시선이 아니었으리라. 밴댕이 속 같은 나의 좁은 가슴을 드러내 보인 것만 같다.
그날 옆 식탁에서 했던 것처럼 나도 접시에 파전과 두부무침, 돼지껍데기를 담았다. 그리고 옆에서 국수를 먹고 있는 중년 부부에게 가져갔다. 그들은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며 반갑게 받는다.
내가 지금껏 받았던 시선들, 보냈던 시선들을 되짚어 본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굴절 되었던 내 시선을 푸른 숲에 훌훌 턴다.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다.
김치와 고등어
시큼한 김치 한 쪽을 썩둑썩둑 썰어 냄비 바닥에 깔았다. 양파와 파도 길쭉길쭉하게 잘라 옆에 곁들였다. 그 위에 금방 어물전에서 사 온 살아 펄펄 뛸 것 같은 고등어를 손질하여 얹고 고춧가루를 듬뿍 뿌렸다. 고등어가 잠길 듯 말 듯 물을 잘박하게 붓고 가스 불을 댕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 집안이 김치의 시큼한 맛과 고등어의 구수한 냄새에 푹 빠졌다. 몇 년이나 냉장고 밑바닥에 묵혀 있던 김치와 고등어가 서로를 품으며 깊은 맛을 뿜어낸다.
그 김치는 부산에 사는 언니가 삼 년 전에 담가 준 것이었다. 직장 다니는 동생이 안쓰러운 지 툭하면 김치 상자가 택배로 배달되곤 한다. 그 해는 동생에 대한 언니의 사랑이 더 깊었는지 아니면 바닷가에 사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멸치젓, 새우젓, 갈치젓 등 갖가지 젓갈을 듬뿍 넣은 김치는 소금과 진배없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된장 단지에 박아 놓았던 무장아찌 맛이었다. 김치줄기 한 가닥이면 밥 한 공기는 거뜬히 먹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 김치는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오는 횟수가 점점 줄어드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턴가 아예 자취를 감추고 김치 냉장고 속에 틀어박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냉장고 안의 김치통들이 씻고 닦고 몇 번을 할 동안에도 그것은 애물단지처럼 냉장고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버리려고 뚜껑을 열면 언니의 얼굴이 어른거렸고, 벌건 양념을 묻힌 언니의 손이 김치를 뒤척이고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다시 뚜껑을 닫아 냉장고 밑바닥에 밀쳐놓았다. 그것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내몰릴 운명을 몇 번이고 맞으면서도 숨죽인 채 그렇게 곰삭아 가고 있었다.
냄비에는 고등어의 비릿한 냄새를 품으며 묵은 김치가 뭉근하게 익어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열일곱 신부와 열아홉 신랑이 만나 칠십 년 가까이 푹 절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이 익어가고 있는 것 같다.
절에서 아버지 49재를 지내고 돌아 온 날이었다. 몇 달간의 병원생활에 책장에 꽂혀진 책이, 책상 위에 놓여진 아버지의 지필묵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주인 잃은 표를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병원에서의 아버지는 아기 같았다. 서슬 퍼랬던 위엄은 어디가고 여리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다.
생전의 아버지는 무척 엄했다. 아버지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원리원칙에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밖에서나, 집에서나, 아이 나, 어른이나 간에 예외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는 ‘백장군, 백호랑이’ 란 별명이 따라 다녔다. 아내인 어머니마저도 아버지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다. 어머니가 벌벌 떠니 아버지께서 별다른 꾸중도, 매 드는 일도 거의 없었지만 자식들도 덩달아 벌벌 떨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듯 여럿 자식들은 쉴 새 없이 일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바람막이를 하느라 휘청거렸다. 세찬 바람이 몰아칠 땐 어머니마저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서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언젠가 오빠는 사소한 다툼으로 친구의 코뼈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다. 오빠에게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뒤주에서 쌀을 퍼냈다. 아버지 몰래 물어 줄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뒤주에서 쌀을 퍼내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식 수만큼이나 잦았다.
자식들의 허물을 껴안은 채 숨죽여 사는 어머니의 고충을 아버지는 알았으리라. 자식들의 숨구멍이 바로 어머니였을 테니까. 그렇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단 한 번의 속내도 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자존심이었고 가장의 위엄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바깥출입이 잦았다. 냉장고 밑바닥에서 숨죽이며 곰삭아 가는 묵은 김치 같은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넓은 바다를 유영하는 고등어처럼 자유로운 삶을 사셨다. 어머니는 모든 걸 삭인 채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자처하며 사셨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종종 아버지의 험담을 풀어내곤 하셨다. 그것이 어머니의 꽉 막힌 가슴을 뚫는 유일한 돌파구였으리라. 그렇게 사시는 어머니가 무척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우리는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도타운 정도 없는 줄 알았다. 그냥 자식 때문에 살아가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숨죽여 사시던 어머니에게 자유가 도래했다고 믿었다.
49재를 끝낸 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영정을 만지며 말씀하셨다.
“영감이 나를 지독히도 숨 막히게 하더니……” 어머니의 얼굴엔 후련함이 감도는 듯 했다.
그날 저녁, 자식들은 어머니의 자유에 힘을 실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 생전에 어머니가 뱉어 내시던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를 위하는 양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험담을 겨우 몇 마디 풀었을까. 방에 계시던 어머니가 바람을 일으키며 마루로 달려 나오는 찰나 내 등에는 번갯불과 천둥이 내리쳤다. 어머니가 내 등을 사정없이 후려 친 것이었다. 팔순을 넘긴 노인의 손맛이 아니었다.
“못난 놈들. 자식들이 애비를 욕하다니. 그것도 죽고 없는 애비를……”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방으로 들어가신 후 문을 걸어 잠갔다. 아버지의 완고함에 안쓰럽기만 했던 어머니, 팔십 평생을 아버지의 그늘에서 소금에 절여진 배추마냥 풀죽어 살아 오셨던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어머니에게는 훨훨 날아갈 듯 자유롭고 후련할 것이라 여겼던 자식들의 좁은 소견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묵은 김치 같은 시큼한 정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요즘은 하나 아니면 둘, 그것도 모자라 아예 무자식으로 살아가는 부부들도 있다. 하나, 둘도 아닌 여덟 자식을 낳고 키우며 쌓인 미운 정, 고운 정의 두께가 자식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두터웠나보다. 어머니가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곰삭은 묵은 김치라면 아버지는 살아 펄펄 뛰는 고등어였다. 하지만 살아 펄떡거리는 고등어와 숨죽은 묵은 김치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칠십여 년이란 세월이 냄비 속의 김치와 고등어가 서로를 품듯 어머니와 아버지의 궁합을 맞추었나 보다. 오랜 세월에 익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곰삭은 정은 묵은 김치와 고등어가 어우러진 맛이 아닐까.
풍선놀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연분홍 나팔꽃이 수줍은 듯 살포시 꽃잎을 접는 아침나절이다. 아이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아이는 책상 사이를 운동장인양 우르르 몰려다니는 아이들을 개의치 않은 채 앉아 있다. 놀기에는 쌍수(雙手)를 들고 벌떡대던 아이였었는데 엉덩이를 의자에 진득하게 붙여있는 품이 왠지 낯설다.
“좀 쉬다 하렴.”
“안돼요. 우리 엄마가 이번 시험 잘 치는 사람이 형 된다고 했거든요.”
아이는 얼른 책으로 다시 눈길을 돌린다.
아이는 다른 반에 쌍둥이 형을 두고 있다. 한 솥에서 물들여진 천 마저도 색깔이 똑 같지 않을 수도 있다 하건만 일란성인 두 아이는 반듯한 이목구비도, 홀쭉한 키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조차도 빵틀에서 갓 구워낸 붕어빵처럼 흡사하다. 쌍둥이는 둘 다 알토란같이 옹골차고 똘망똘망하다. 엄마의 자궁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한 형제답게 우애도 무척 깊다. 아침 햇살을 오 분 먼저 본 형이지만 아우는 깍듯이 형이라고 부른다. 형도 마찬가지다. 등교할 때면 헤어지는 게 아쉬운 듯 아우가 교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자기 교실로 발걸음을 떼는 형이었다. 오후에는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수업을 마친 아이가 복도에서 기다리는 것은 불문율이 되어 있는 듯 하다. 학기 초에 만난 쌍둥이 어머니는 아우가 형보다 성적 면에서 뒤진다며 걱정을 늘어놓았다. 내가 보기엔 아우도 다른 아이들과 겨뤄 손색이 없는 아인데 어머니의 욕심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시험 잘 치는 사람이 형이 된다.’ 이 말이 써늘한 냉기를 뿜으며 온몸을 휘감는다. 팔뚝에 닭살 같은 소름이 돋으며 으스스 한기가 인다.
아우는 평소에 형이 부러웠나 보다. 아니면 오 분이라는 시간이 억울했는지도 모른다. 휴식시간이면 남보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던 아이가 꿈적도 않은 채 앉아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형의 자리가 눈앞에 펼쳐졌으니 어떻게든 쟁취하고 싶으리라. 아우는 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형이 되고 싶은 아우의 욕망에 어머니는 기름을 붓고 불을 댕겼으리라. 아이는 시험에 승부를 걸었다. 하지만 아이는 단지 가족의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할 수 있는 형이 되고 싶은 욕망뿐이었을 것이다. 형과의 사이에 무슨 손익을 따졌겠는가. 어머니의 욕망이 아우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골목길에서 본 일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아이 서넛이 풍선을 불고 있었다. 가장 크게 분 사람이 승리하는 풍선놀이였다. 싸움터라도 나가는 듯 아이들의 비장한 눈빛이 흥미로워 나도 가던 길을 멈추고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이들은 숨이 찬 줄도, 입이 아픈 줄도 모른 채 풍선을 불었다.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풍선을 보며 아이들은 신이 났다. 과욕은 머리를 쳐들고 점점 더 그들을 독려했다. 그들의 볼은 개구리 울음보처럼 불룩거리며 거푸거푸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생사(生絲)로 발을 살핏하게 짠 얇은 사(紗) 같은 풍선의 몸피는 비칠 듯 말 듯 아늘아늘해진다. 그래도 아이들의 풀무질은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과욕에 견디다 못한 풍선은 뻥뻥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난 채 하늘로 흩어진다. 아쉬움과 후회의 눈망울들은 희망을 잃은 채 허공을 주시할 뿐이었다.
책상에 진득이 앉아 있는 아이가 풍선놀이를 준비하는 듯 진지하다. 형 된다는 말이 아우에게 큰 무게로 다가왔나 보다. 나도 아이처럼 오빠가 부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맏오빠의 말은 바로 법이었다. 사십 여년의 세월에도 내 가슴 속에 각인 된 오빠의 위엄은 사그라질 줄 모른다. 지금도 오빠 앞에 서면 헛기침이 나고 말을 더듬거린다. 오빠의 몸에 맞춰 산 옷이 막내에게 갈 때쯤이면 소매가 나달나달해졌다. 끝동 물린 색동저고리처럼 다른 천으로 끝단을 장식해야만 입을 수 있었다. 별난 간식거리라도 장만하는 날이면 어머니는 먼저 오빠 것부터 챙겨 안방 벽의 다락 속에 깊숙이 숨겨 놓곤 하셨다.
이십 리나 떨어진 읍내의 학교에 다녔던 오빠는 언제나 해거름이 꼬리를 감춘 지 한참만에야 사립문을 들어섰다. 그날도 어머니는 가장 크고 알이 촘촘히 박힌 찐 옥수수 두 개를 다락에 숨겼다. 드문드문 박힌 알갱이에다 그것마저도 한 개 밖에 차지하지 못한 나와 바로 위 오빠는 어머니께서 밭일을 나가신 틈을 타 그것을 꺼내어 하나씩 나눠 먹었다. 옥수수 알갱이를 씹으며 끄트머리의 설움도 잘근잘근 씹었다. 톡톡 터지는 알갱이의 고소한 향내가 맏이에 대한 부러움이 되어 식도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다.
맏오빠가 돌아오고 어머니의 손이 바쁘게 다락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사립문 밖에서 두 손을 번쩍 든 채 휘영청 둥근 달이 머리 위로 내려앉을 쯤에야 겨우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맏이는 아버지 대신이다.’ 언제나 되뇌시던 어머니의 말씀을 어긴 댓가를 톡톡히 치룬 날이었다. 어머니는 지반을 다지고 초석을 놓으며 맏이가 앉을 자리를 튼실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이었다. 나는 오빠를 부러워하며 끄트머리로 낳아 준 어머니를 원망했었다. 나의 철없던 시절처럼 아우도 형의 자리가 무척 부러웠었나보다. 성적에 눈이 어두워진 어머니의 욕망이 아이를 풍선놀이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리라.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풍선놀이를 강요하지 않았던가. 학교 끝나기가 바쁘게 그들을 학원으로 내몰았다. 오로지 공부가 우선이었던 아이들은 성적의 노예가 되어 허덕였으리라. 정리정돈이 되지 않은 방, 옆을 둘러 볼 줄 모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내 자신을 되짚어본다.
우리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 볼 여유조차 없는 요즘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배운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인성이고, 도덕이고, 예의는 성적의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성적은 인륜을 짓밟고 우뚝 서서 거드름을 피운다.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린 채 그 밑에 엎드려 슬슬 눈치를 살핀다. 부모의 풍선놀이에 그리고 이 사회의 풍선놀이에 아이들의 풍선도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쌍둥이 아우는 형이 되기 위해 어머니의 풍선놀이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나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쌍둥이에게 경쟁심을 유발하고 싶었던 어머니. 성적이 인륜위에 군림한 것이리라. 아이도 어머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놀이를 하고 있다. 아이가 불어 넣은 공기가, 어머니가 보태준 바람이 자꾸자꾸 풍선 속으로 들어간다.
잡초도 친구가 된다
호미를 들고 집을 나섰다. 채마밭으로 가는 길이다. 서너 평이나 될까 말까한 좁은 밭뙈기지만 심어놓은 가짓수는 채소가게를 옮겨 놓은 것 같다. 속이 꽉 찬 배추에다 잎이 흐드러지게 핀 상추, 올망졸망 매달린 고추, 가지, 토마토도 보인다. 싹들이 이제 겨우 한 뼘이나 자랐을까마는 벌써 푸성귀로 가득 찬 식탁이 눈앞에 어른거려 입맛을 다시게 한다.
지난주는 비가 오락가락 했다. 물기를 머금은 산야는 푸르름이 더욱 짙게 물들었다. 고만고만하게 자리 잡은 채마밭들이 푸른빛으로 가득하다. 주인의 문패를 대신하듯 밭 가장자리마다 둘러 처진 줄이 햇살에 반짝인다. 하지만 우리 밭은 줄도 문패도 필요 없다. 채소와 잡초들이 유난히 절친해 보이는 곳만 찾으면 된다. 우리 밭에는 바람조차 비껴간다. 바람도 빽빽이 들어선 채소와 잡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일주일 만에 들린 채마밭은 훌쩍 큰 새싹들과 새싹보다 더 자란 잡초들이 같이 어우러져 무성한 풀밭을 이루고 있다. 토마토와 키대기를 하는 명아주와 쇠비름, 패랭이와 부추가 땅따먹기를 하고 있다.
나는 잡초를 뽑는다. 잡초는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쉴 새 없이 끌려 나온다. 그제야 가지 싹도 고추 싹도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밭고랑에 나동그라진 채 시들시들 말라가는 잡초가 문전박대로 쫓겨난 걸인의 축 처진 어깨 마냥 애처롭다. 여린 싹 위로 잔잔한 바람이 인다. 엷은 바람결에도 파들거리는 싹들이 친구 잃은 외톨이 같다.
오래 된 일이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콩밭에 자주 갔었다. 김을 맨 콩밭은 돌아서면 어느 새 잡초가 진을 쳤다. 하지만 우리 콩밭과 맞붙은 당숙모네 콩밭은 갓 씻은 얼굴처럼 말끔했다. 그 밭에는 언제, 어느 때에 가든지 잡초 한 포기 구경할 수 없었다.
당숙모는 집안 살림살이도 마찬가지였다. 구석구석이 윤기가 반지르르 흘렀다. 그 시절엔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밥을 지었다. 누구 집 할 것 없이 연기에 그을린 부엌은 시커멓고 지저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숙모네 부엌은 언제나 들기름으로 윤을 낸 장판처럼 반질거렸다. 마당 어디에도 지푸라기 하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곳에 갈 때면 발걸음과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먼지 한 점 떨어질까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동네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 집 대문 앞은 늘 인적이 드물었다.
소농인 당숙모님은 밭 하나에 매달려 잡초 씨도 말릴 만큼 정성을 쏟을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그럴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바깥출입이 잦았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많은 농사일을 도맡아 하느라 늘 바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동걸음을 쳤지만 어머니 앞에는 늘 농사일이 산적해 있었다. 어머니는 잡초를 대강 뽑은 후 거름을 듬뿍 넣어 주었다. 알뜰살뜰 보살펴 주지 못한데 대한 보상이었을까. 인심 후하게 준 거름은 곡식도 먹고 잡초도 얻어먹으며 친구처럼 더불어 살아갔으리라.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어느 여름, 길가의 가로수도 과수원의 사과나무도 뿌리 채 뽑혀 맥없이 나둥그러졌다. 잡초 한 포기 없이 외롭게 서 있던 당숙모네 콩은 밭고랑에 찰싹 달라붙어 일어날 줄 몰랐다. 대패로 민 듯 평평한 콩밭은 운동장이 되었고, 허리가 꺾인 콩은 더 이상 생명을 이어가지 못하고 한해 농사를 접어야 했다.
“잡초 덕에 콩이 무사했나보다. 잡초도 친구가 되는구나.” 콩밭인지 잡초밭인지 분간이 안 된다며 늘 못마땅해 하셨던 할머니는 비스듬히 쓰러진 콩과 잡초를 함께 일으켜 세우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콩과 잡초가 촘촘히 서 있었던 우리 밭은 서로 버팀목이 되어 그 와중에도 피해를 훨씬 줄일 수 있었다.
언젠가 애완동물 가게의 통속에 웅크리고 있는 고슴도치를 본적이 있다. 그것은 나지막한 인기척에도 온 몸의 가시를 곧추 세웠다. 밤송이처럼 가시로 온몸을 에워 산 채 누구의 근접도 용납하지 않을 태세였다. 콩과 잡초가 서로 비비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과는 달리 고슴도치는 누구와의 어울림도 거부했다.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 세상이 아닌가. 나는 고슴도치처럼 살지 않았나 돌아본다. 남과의 어울림도, 남을 위한 배려에도 인색한 채 안으로만 웅크리면서 내 자신을 꽁꽁 닫고 살지 않았던가.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하며 조그마한 손해도 용납하지 않으려 안달하지 않았던가. 살다 보면 전혀 도움을 받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한테서 우연한 기회에 도움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도움을 꼭 주리라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을 받을 때도 더러 있다. 콩밭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하찮은 잡초조차도 콩과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세찬 비바람에 견뎌내지 않았던가. 내가 바로 고슴도치가 아닌가 싶다.
나는 한 움큼 쥐었던 잡초를 슬며시 놓는다. 잡초를 놓는 것이 아니라 나의 닫힌 마음을 흙 위에 내려놓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잡초들이 바람에 살랑댄다. ‘잡초도 친구가 된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잡초 위로 흩어진다.
자매(姉妹)
우리 자매는 넷이다. 나는 네 자매 중 셋째다. ‘셋째 딸은 선도 보지 않고 데려 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부모님을 원망한다.
자매들 중 가장 아담한 체형을 가졌지만 동생들을 보듬는 가슴은 바다만큼 넓은 큰언니. 그녀는 형부가 첫눈에 반한 미인형 얼굴을 자랑한다. 언니의 처녀적 사진을 볼 때면 부모님께서 첫 작품에 무척이나 심혈을 기울였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둘째 언니는 키가 훤칠한 팔등신이다. 남들과 겨뤄 빠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내 키도 언니 옆에 서면 열세로 돌아선다. 거기다 둘째 언니는 머리가 좋은지 자식들이 하나같이 공부를 잘 했었다. 단단한 직장을 얻은 자식들이 용돈을 두둑이 챙겨 준다며 콧대를 한껏 세우고 다니는 언니다.
넷째는 나를 더 주눅 들게 만든다. 동생과 나는 누가 언닌지 분간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동생은 음식 솜씨도, 살림 재주도 자매들 중 으뜸이다.
“언니야, 고추장 가져가라.” “언니야, 김치 담갔다.”
기분 나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언니야, 청소 좀 하고 살아라.”
사사건건 간섭이다.
“니가 언니가?” 한 번씩 분통을 터트리지만 넷째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나는 덜 조여진 나사처럼 헐렁하다. 무슨 일에나 한두 박자 느린데다 대충대충 넘어가는 성격이다. 야무진 구석이라곤 눈 닦고 찾아 봐도 없다. 얼굴, 몸매, 살림,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는 나는 입으로 살아간다. 내가 빠지면 재미없다며 그래도 한 쌈에 끼워 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이처럼 셋째라는 허울 좋은 이름만을 주었으니 어떻게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고 베길 수 있겠는가.
네 자매는 생김새도 성격도 별로 닮지 않았다. 그래도 넷은 전기가 통하듯 잘 통한다. 서로 다르다 보니 모자라는 부분을 메워가느라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같은 극은 밀어내고 다른 극끼리는 잘 붙는 자석처럼.
가까이 있는 세 자매는 그런대로 자주 만난다. 부산에 살고 있는 둘째는 외롭다며 늘 징징거린다. 그러면서도 사십 여년의 타향살이에 거기가 고향이라도 된 듯 올라 올 기미가 영 보이지 않는다.
세 자매가 어머니를 모시고 식당에 갔다. 이빨 하나가 빠진 것처럼 둘째의 자리가 썰렁하게 다가왔다. 목소리로나마 빈자리를 채울 요량으로 전화를 걸었다.
벨이 한참이나 울렸지만 기척이 없었다. ‘오수라도 즐기고 있나?’ 전화기를 놓으려는 순간 나직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기어들어갈 듯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언니의 목소리에 내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벌렁거렸다. 직감이랄까. 그것은 잠자다 일어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언니, 어디 아파?” 내 소리에 어머니도, 두 자매도 토끼 귀를 세웠다.
“응, 응.” 둘째언니의 당부에 나는 대답만 했다. 옆에 있던 큰언니가 화들짝 놀랐다.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나 보다.
“팔이 부러졌다고? 언제?” 언니가 전화기를 잽싸게 낚아챘다. 언니는 범인을 심문하듯 둘째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뭔가 집히는 게 있는 듯한 말투였다.
네 자매는 바쁜 일상에 왕래는 그리 잦지 않지만 전화통에 불이 난다. 전화기를 들었다하면 한두 시간은 후딱 지나간다. 거기다 한 집도 그냥 지나가는 적이 별로 없다. 이집, 저 집 돌리다 보면 하루 저녁이 저물어 간다. 너나 할 것 없이 팔이 아프고 귀가 먹먹해지도록 통화를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못 말리는 자매들이다.” 보다 못한 남편들이 이구동성으로 투덜거리는 말이다.
지난 늦은 밤에 큰언니가 둘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 쯤 울리는 전화의 진원지는 거의 대부분 자매들이다. 목욕을 하고 있던 둘째는 몸을 닦을 새도 없이 물을 줄줄 흘리며 마루로 나왔다. 누굴까? 전화를 걸때면 엄청나게 급한 성격으로 바뀌는 자매들인지라 둘째의 마음이 바빴을 것이다. 몸에서 떨어진 물이 마루바닥에 흘러내렸다. 둘째는 그 위에 미끄러지며 엉겁결에 손을 짚은 것이 화근이었다. 몸무게에 눌린 팔목의 뼈가 부러진 것이다.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느냐는 큰언니의 성화에 목욕 중이었다며 얼버무렸던 둘째 언니. 아픔을 참으며 태연하게 큰언니의 전화를 받았을 언니의 모습에 가슴이 아린다. 둘째의 말을 그러려니 믿고 대수롭잖게 여겼던 큰언니는 팔을 다쳤다는 말을 듣는 순간 지난밤의 일이 심상찮게 다가왔던 것이다. 둘째는 계단에서 넘어졌다는 다른 핑계를 갖다 붙이며 큰언니를 안심시키느라 바빴다. 그래도 큰언니는 찜찜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 일은 너와 나만의 비밀이다.” 둘째언니는 전화를 걸어 다짐을 받는다. 내 입막음을 하느라 분주하다. 그 일을 큰언니가 알까봐 되레 걱정이 늘어졌다. 대신 아파주지 못해 괴로워할 언니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감추려는 둘째와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냐며 닦달하는 큰언니에게서 자매간의 끈끈함이 묻어난다.
“한 손으로 살림은 어찌할꼬.” 큰언니의 너른 가슴에 바람이 인다. 혹시 내 탓인가 전전긍긍하는 큰언니, 언니가 알까봐 노심초사하는 둘째언니, 한손으로 끙끙거릴 언니 생각에 국이며 반찬이며 쉴 새 없이 끓여대는 넷째, 위로 한답시고 말만 보태는 셋째. 모양새도 성격도 제각각인 자매들이건만 마음만은 한 몸이다.
둘째언니는 또 나에게 다짐 전화를 한다. 벌써 몇 번째 인지 모르겠다. 그 일은 둘째언니와 나만의 비밀로 영원히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백금태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2006년)
제10회 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장려상(2007년)
한국불교문학 공모전 우수상 (2005년)
경산 봉황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