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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여름
기획 1 수필세계 사랑방
수필처럼, 음악처럼
유혜자 선생님
대담 : 이숙희(본지 발행인, 수필가)
사진 : 박월수(사진 작가, 수필가)
여름호 사랑방에 유혜자 선생님을 모시기로 하였다. 선생님은 본지 2호부터 23호까지 음악수필 연재를 하셨다. 선생님을 직접 뵈었던 것은 제8회 수필의 날 행사 때다. 수필세계가 주관하는 행사다 보니 이런 저런 업무에 쫓겨 선생님께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었다. 표현은 언제나 마음보다 못해 돌아서면 아쉬움만 가득히 남는다. 선생님의 인품이 겸손하시고 후배들에게는 더없이 자상하시다는 소문을 익히 들은 터라 그동안 뵙지 못한 아쉬움이 더 컸었는지도 모르겠다.
차창으로 투영된 햇살을 받고 있는 홍 선생님과 박 작가의 상기된 표정은 비단 유월의 뜨거운 햇살 탓만은 아닐 것이다. 맞은편에 앉아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면 행간마다 묻어나는 삶의 깊이와 음악에 대한 열정이 오롯이 담겨 있어 한 장을 넘기면 얼른 또 다음 장을 넘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방송인과 수필가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오신 선생님을 향해 가는 KTX는 더디기만 했다.
서울의 햇살은 따가웠다. 지하철을 타고 당산역에 내렸다. 까만 상의에 청바지를 입어 세련됨이 돋보이는 권남희 한국수필 편집주간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권 수필가의 뒤를 좇아 두 굽이 돌아가니 한국수필 사무실이 있었다. 마당에는 한 그루의 감나무가 정겹게 서 있고, 계단을 오르니 일반 주택을 실용성 있게 개조한 사무실이 있었다. 주택을 개조하여 사무실로 사용하는 그 탄력 있는 감각에 고정관념에만 사로잡혀 있는 우리가 왠지 뒤처져 있는 것 같았다.
블루에다 바이올렛이 살짝 가미된 고운 색깔의 재킷을 입은 유혜자 선생님이 환한 모습으로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런 저런 안부를 주고받은 후 자리에 앉자 홍 선생님은 요즘 문학 외에 관심을 갖고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여쭈었다. 선생님은 그런 거 없다며 체력이 떨어져 이제는 해외여행도 잘 다니지 못한다고 하셨다. 칠순을 넘기셨는데도 주름이 하나 없이 굉장히 고우시다며 누가 봐도 일흔으로 안 볼 거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감사합니다. 그 거짓말 참말이에요? 해서 한바탕 웃었다.
―선생님께선 방송국에서 인생을 거의 다 보낸 셈이신데 방송국에서 정년 하셨지요?
―그럼요. 정년 했어요. 스물일곱에 들어가서 우리 나이로 쉰아홉에 나왔죠. 그 당시에는 남녀 차별도 심했고 방송 여건도 나빠서 여자들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어요. 그 시절에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은 다 알죠. 지금은 세월이 좋아져서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대견해요.
수필과의 인연
―젊을 때부터 방송인으로 활동하셨는데 수필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되셨습니까?
―9․28 서울 수복 후에 빨치산이 내려오고 어수선하니까 아버지는 그까짓 학교에 몇 달 안 다니면 어떠냐며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족 전체를 외가로 피란을 보냈어요. 그때 외삼촌의 방에는 이차돈의 사, 삼봉이네 집,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 문학적 자산이 되는 책들이 많았어요. 중학교 때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글을 읽었어요. 그 작가의 단편소설은 수필적이고 고향처럼 정겨움이 담겨져 있어요. 수필에 대한 개념도 모를 때라 막연하게 나도 그런 글을 한번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죠.
고등학교 때 자칭 이광수보다 높은 고광수라고 하시던 국어 선생님이 계셨어요. 글을 쓰시는 분은 아니었지만 저를 문학과 가까워지도록 많이 일깨워 주셨어요. 김소월의 진달래꽃, 좁은 문, 죄와 벌.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등 제법 괜찮은 책들을 구입하여 학급에서 서로 돌려 가면서 읽게 했어요. 덕분에 교내 문예 콩쿠르 시 부문에서 기러기라는 작품으로 최우수 없는 우수작으로 당선이 되기도 했었어요.
이런 것들이 나중에 동국대 국문과에 편입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등단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때 여원이라는 잡지에 여원 신인상이라는 등단 제도가 있어서 작품을 내었어요. 최종 심사에서 흠잡을 것 없으나 현대문학에 기여하는 바가 부족하다는 평으로 떨어졌죠. 그리고 얼마 후에 방송국에 입사하게 되었어요.
방송이란 게 한 번 나가고 나면 기록으로 남지 않는 허무한 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일기 형식으로 쓴 글을 문장으로 만들어 1972년도에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란 책을 내었는데 수필이라는 긴장감도 없어요. 그 당시 박연구 선생님이 수필문학 편집을 맡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내 작품 서너 편을 읽어 보시고는 추천을 받으려면 2~3년은 걸릴 텐데 그래도 가능성은 있으니까 연구해 보자고 하시더니 전무후무하게 신인 가작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등단을 하게 했어요. 신인 가작이라는 제도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는 사라졌어요. 수필문학에 일이 년 또는 삼사 년 걸려 추천 완료 받은 분들에게 미안하니까 나는 추천 완료라는 말은 안 해요. 그러고 나서 박연구 선생님께 책을 보내 드렸더니 73년도에 한국수필에 글을 한 편 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쓴 것이 종소리인데 선생님이 보시더니 지난번 책에 있던 작품들보다 이 작품이 제일 낫네.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종소리를 첫 작품으로 삼고 있어요.
―박연구 선생님은 그때도 수필에 여러 가지로 공헌을 많이 하셨네요.
―그렇죠. 수필문학의 산파 역할을 하셨고, 한국수필도 맨 처음에는 박연구 선생님이 만드셨어요. 그 한국수필 이전에 대학교수들이 모여서 현대수필이라는 아주 얄팍한 잡지를 낸 일이 있는데 그 잡지를 주관하시다가 또 한국수필을 맡아서 하시게 된 거죠. 그분이 일을 많이 하셨고 특히 이정림, 오창익, 정상옥, 윤모촌 선생님 같은 신인을 많이 배출시켰어요.
이런 수필과의 인연으로 해서 2008년에는 정목일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4인 수필집을 냈어요. 70년대에 30대의 나이로 등단해서 지금까지 활동하는 사람, 그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 네 사람이라고요. 지금 2집도 준비하고 있으니 곧 나올 거예요.
―4인 수필집에 참여하신 분들은 누구신가요?
―변해명, 유혜자, 이정림, 정목일인데 수필집 제목이 시간의 대장장이였어요. 이정림 선생은 76년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을 했지만 74년도부터 한국수필에 이미 글을 발표했어요.
박연구 선생님과는 인연이 많지요. 이정림 씨도 그분과 친척만큼 가까웠어요. 1976년쯤 그분이 관여한 범주사의 한국수필전집 20권짜리에 이정림 씨하고 저하고 들어갔어요. 수필 6편이 수록되었는데 저는 글을 오래 써 왔다는 것 때문에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점심을 예약해 둔 시간이 되었다는 권 수필가의 안내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통밥과 두부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이름이 알려진 탓인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이지만 보글보글 끓는 찌개에 수저를 함께 담근다는 것은 친근함을 표현하는 가장 구체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친히 찬그릇을 살피시며 보살펴 주시는 선생님의 넉넉한 품이 꼭 종갓집의 맏종부 같았다.
점심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앞서 걸으시는 선생님의 걸음걸이가 반듯하다. 한국수필 사무실에는 몇몇 작가님들이 원고 교정을 보느라 분주해 보였다. 그 바쁜 와중에도 차와 과일을 내오셨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족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홍 선생님은 어렸을 때 공부를 하기 위해 혼자 서울로 오신 것인지, 가족이 다 함께 이사하셨는지를 물으며 대담을 이어 갔다.
―1967년도에 방송국엘 들어갔는데 그다음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제가 장녀이다 보니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가족이 다 이사를 했죠.
―그럼, 강경이 선생님의 고향입니까?
―예, 태어난 곳은 강경이고,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강경여중을 다니고, 2학년 때는 공주여중에 다니고, 3학년 마지막 학기는 대전여중, 그래서 중학교를 3군데나 다녔어요.
강경에서 살다 유성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때 유성에는 학교가 많지 않아 고모님 댁이 있는 공주여중으로 전학을 갔어요. 고모님 댁이라 해도 객지잖아요. 지금이야 대전시에 흡수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30~40리쯤 되는 거리였어요. 그때 마침 유성에서 대전까지 다니는 버스가 생겨서 다시 전학을 하여 대전여중에서 졸업을 했지요. 제 성격이 A형이고 외향적이지 못해서 발표력도 없는데다 전학을 자주 다니다 보니 낯설음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글 쓰는 소재가 된 것 같아요. 재능도 없고 형편이 좋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평탄하고 유복했으면 더 거만했을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해요. 호호호.
그때 그 큰 도시에 여학교가 1개뿐이었어요.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요. 대전여중에서는 한밭여고를 만들었고, 대전여고에서는 한밭여중을 만들었어요. 얼핏 생각하면 대전여중과 대전여고가 합쳐야 되는데 어긋나게 만들어서 헛갈렸거든요. 대전여고가 상당히 멀어서 대전여중과 같이 있는 가까운 한밭여고를 갔지요. 지금은 두 여고는 없어지고 충남고등학교가 되어 버렸더라고요.
강경이라는 데가 지금은 피폐되었지만 한때는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산업 도시였습니다. 인근에 있는 부여라는 곳이 아버지의 고향인데 강경으로 이사를 했죠. 그때가 구한말인데 강경에 고모님들이 살았어요. 집이 좀 먹고살 만하니깐 활빈당이라는 도적 떼들이 막 뒤지고 다녔대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딸들을 데리고 강경으로 피난을 나오셨다가 주저앉으신 거래요.
그 시절에 자전거점이라고 하면 대전에 하나 있을 정도였어요. 아버지께서는 생업으로 자전거점을 하면서 소방대장을 겸하셨어요. 당시 시골에서는 소방대장을 경찰서장 다음으로 고관 대접을 했어요. 그래서 6․25 직전까지는 우리 가족은 관사에서 살았어요. 그 관사가 6․25 때 불타 버리자 아버지도 소방대장을 그만두고 유성으로 이사를 했지요. 그래서 전학을 다니게 되었고요. 형제는 남동생 셋하고 여동생이 하나 있어요. 우리 가족은 모두 교회를 다니고 있고 나도 모태 신앙이죠. 이 모태 신앙이라는 것이 질기기만 하지 열렬하지가 못해요. 주일만 겨우 지키면서 큰 죄, 작은 죄는 죄다 짓고 살아요. 호호호.
일반 수필과 음악수필
―내 약력을 보고 사람들은 음악 PD만 했냐고 묻더라고요. 사실 솔직히 얘기해서 음악 프로그램은 6개월정도 밖에 안 했어요. 음악은 어릴 때부터 굉장히 좋아했던 것이에요. 그 첫 번째 음악수필 음악의 숲에서라는 책을 내면서 출판사에서 약력에 음악 PD로 오래 활동했다고 써야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호호호.
제일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주부 휴게실이라고, 지금의 여성시대인데 내가 그만둔 후 후배들이 더 잘하더라고요. 그리고 아침 7시 20분에 하는 홈런 출발도 했었죠. 그 외에 다른 것은 별로 빛이 안 나고 돈도 안 생기는 프로들이었어요.
내가 수필을 쓸 때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경제 성장을 부추길 때라 사회가 갑자기 변했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인정머리가 없어지고 잇속만 챙기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나라의 미덕이나 좋은 점이 많은데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쓸 때 우리 것을 소재로 많이 잡았어요. 놋그릇이나 항아리 같은 옛것을 소재로 사물수필을 많이 썼지요. 그래서 현대수필문학상을 받았을 때 상패에 한국의 정통적인 미의식을 잘 살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더라고요. 그런데 쓰다 보니 너무 회고적이어서 안 되겠다 싶었죠. 현대 문명과 사람들의 의식. 또 잊혀져 가거나 스쳐 가는 것. 남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재발견하는 보람을 썼지만 별로 신통치 않았어요.
음악수필은 퇴직을 몇 년 앞두고 소설가 유현종 씨가 저보고 음악에 대해서 좀 써 보라고 하더군요. 이때는 직장에서 내 일을 좀 해도 되겠다 싶어 음악을 듣고 쓰기 시작했죠. 어쩌면 소재의 확충을 위한 작업의 하나로 쓴 거였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결혼을 안 했잖아요. 수필은 자기가 겪은 일들을 써야 긴밀한 얘기가 나오는데 한정된 좁은 행동반경이나 사고 속에서 잘못 쓰면 신변잡사가 되니까 소재 확충을 위해 테마 에세이 쪽으로 가자 싶어 음악수필을 쓰기 시작한 거죠.
처음에 원고지 15매 정도로 음악수필을 몇 편을 써 월간 에세이에 보냈는데 원종성 주간이 원고지 10매 정도로 줄여 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 양반이 까다롭고 엄격하시거든요. 그렇게 월간 에세이에 26개월 동안 연재를 하고, 1998년 퇴직 기념으로 음악의 숲에서라는 책을 냈던 것이 첫 음악수필집이에요.
―저는 선생님의 작품이 사색적이고 깊이가 있어서 음악수필 때문에 일반 수필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특히 동전구멍으로 내다본 세상은 콩트적이고 소설적이라 상당히 재미있었어요. 30년 전에 쓴 수필이라도 지금의 수필 흐름과 딱 맞더라고요. 교과서에 수록 될 만큼 주제화가 잘되어 있던데, 선생님의 작품 중 특별히 아끼시는 작품을 꼽으라면요?
―종소리는 첫 작품이나 마찬가지이고, 병풍 앞에서는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에 피천득 선생님이 너무 좋다며 칭찬을 많이 하셨어요. 아끼는 작품은 아니지만 동전 구멍으로 내다본 세상과 바가지는 향토적이고 한국적인 특색이 있는 작품이란 평을 많이 들어요. 그리고 임진강 가의 반보기는 남북이 갈려 있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쓴 글인데 좀 길어요. 살리에리의 친구는 음악가의 얘기인데 주변에서는 서정적인 수필보다 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홍 선생님이 아이처럼 환한 표정으로 또 다른 작품은요? 하고 재촉하니 선생님께서 후문이라고 하셨다. 홍 선생님이 맞장구를 치며 그 작품은 착상이 무척 신선하고 상징성이 잘되어 있는 작품 같다 고 했다. 홍 선생님이 음악수필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일반 수필이 손해 보는 것 같다고 하자, 음악수필을 쓰면서 일반 수필이 멈춘 것 같다며 겸손해하셨다.
문단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분들이 누구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병남, 변해명 씨라고 대답하셨다.
―지금은 현대수필문학상으로 바뀌었는데 저희가 받을 때는 수필문학 신인상이었어요. 이 상은 10년 이상 활동한 사람 중에 잘 쓰는 사람을 선별해서 줬어요. 그때 저랑 같이 신인상을 받았던 사람이 이병남, 변해명 선생님이었어요. 다들 3총사라고 했는데 7~8년 전부터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자주 못 만나요. 몸 거리가 마음의 거리란 말이 맞나 봐요.
―앞으로도 음악을 소재로 한 테마 수필을 계속 쓰실 생각이신지요? 또 달리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하시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신지요?
―노병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가야 하는데. 호호호. 할 수만 있다면 그건 희망 사항이에요. 제가 깊이 있게 여러 분야의 학문을 하지 않아서 전문적 테마 수필을 쓰기도 어려워요. 옛날 김상옥 선생의 백자 이 제 같은 글은 대단히 좋은 글이잖아요. 그것까지는 못 가더라도 문화재 등의 소재를 바탕으로 하는 글로 접근해 보고 싶어요.
수필 문단의 문제점 지적과 후배 문인들에게 하는 당부
유 선생님의 대담 내내 밝으면서도 무게 있는 목소리로 솔직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다. 그때, 대구서 왔으니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바쁜 틈을 내어 최원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약간 그을린 듯 건강미가 넘치는 얼굴에는 서둘러 온 탓인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선생님의 검은 셔츠가 산뜻하게 잘 어울렸다. 방해가 되지 않느냐고 하는 최 선생님의 말에 유 선생님이 그저 이런 저런 잡담만 하고 있었다고 하셔서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세 분 선생님은 자릴 잡고 앉으시며 요즘 수필 문단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요즘 참 우스운 것은요. 다른 문예지서 추천을 받고 활동을 많이 했는데도 자기 문예지로 재추천을 받으라고 권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네 가족으로 묶어 두기 위해서죠. 그리고 더 문제는요. 선후배 질서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행사장에 가 보면 수필창작반에서 이제 막 글을 배우는 사람들의 비위를 얼마나 잘 맞추어 놓았는지 선배 대우는 못 해 줄망정 안하무인이더라고요. 그런 것쯤이야 개인적으로 참으면 그뿐이지만, 앞으로 걱정이 커요. 제가 여러 가지 여건이 안돼 시작도 안 했지만 수필 강좌를 안 하기를 정말 잘했다 싶어요.
근본적으로 수필이 문학이 아니라고 보는 기성 문인들이 많잖아요? 제가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을 맡았을 때 보니 수필 등단이 마치 직장 퇴직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젊은 사람들에게 수필을 쓰게 할 수 있을까 싶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줘서 글을 쓰게 할 생각을 해 봤어요. 이런 저런 일로 시작도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어요. 다행히 이번에 계간수필에서 대학생을 모집한다는군요. 그런데 대학에 가서 물어보니까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몇몇 대학교에서 교수들이 수필 이론 책을 내고 수필 강의를 했었다고 해요. 그땐 지망생들이 조금 있었는데 지금은 수필 지망생이 하나도 없대요. 수필의 밝은 길이 보이질 않아 걱정이에요.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직은 이철호 회장님 다음으로 맡으신 거지요?
―아니, 이철호 회장의 잔여 임기예요. 이철호 씨가 개인적인 일로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분과는 동국대 선후배 사이인데 회장을 맡으면서 수석부이사장을 좀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는데, 정관에 이사장의 유고 시에는 수석부이사장이 이사회와 총회에서 인준을 받아 맡게 되어 있어요. 마침 외국 여행 갈 기회가 있어 외국으로 도망가다시피 했었는데 도저히 맡지 않고는 안 되는 상황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잔여 임기를 맡게 된 거죠.
사실은 한 번쯤은 개혁 아닌 개혁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정작 고쳐야 할 것들은 아직 못 고치고 있어요. 지금은 정목일 선생님이 맡아 주셔서 너무 다행이고 고맙지 뭐예요. 그분이 뭐가 아쉬워서 힘들게 이사장 직을 맡겠어요. 60년대부터 안다는 것 때문에 좀 도와 달라고 사정을 했지요.
한국수필가협회에서 하는 일 중에 가장 큰 행사는 무엇이냐고 물으니 선생님은 시상식하고 해외 세미나와 국내 세미나라고 하시면서 올해의 해외 세미나는 10월 뉴욕에서 있을 예정이라고 하셨다. 홍 선생님은 순수문학 쪽으로 수필을 쓰면 인기가 없고 재미있게 쓰면 문학의 장르를 벗어나게 되는데 수필의 방향이 어디로 갈까 많은 생각을 한다며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70년대 김형석, 안병욱 씨의 책이 잘 팔린 이유는, 한 권의 책으로 지식과 철학을 얻고, 문학적인 재미도 있어 한 권으로 다 해결이 되었어요.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그런 수필을 많이 써야 하는데도 요즘은 안 쓰는 거죠. 피천득 선생님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동서양의 학식이라든가, 미적 감각이라든가, 예술적으로 두루 갖춰진 분이거든요. 사실 그런 분이라야 잘 쓸 수 있는 것이 수필인데, 그냥 몇 년 공부하여 기술만 습득해서 잘 쓰려고 생각하면 수필을 잘못 이해하고 들어오는 것이라 생각해요.
사실은 문단뿐만 아니라 젊은 수필가들도 문제가 있어요. 몇 년 문학 강좌에서 기술을 습득하는 기능공같이 생각하고 문학을 시작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중에는 그렇게 출발해서 좋은 글을 쓰는 사람도 있긴 하더라고요. 그러나 자기만이 쓸 수 있는 분야의 공부를 많이 하고, 수필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시도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어요. 수필가한테 수필을 많이 읽지 말라는 말 같아서 모순적인가요? 호호호.
최―몇 년 공부한다는 게 수필을 공부하는 능력을 갖추는 공부가 아니고, 작품 한두 편을 고쳐서 등단이라는 관문을 통한다는 거예요. 그것도 선생님의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어느 문예지에 던져 주면, 그 선생님의 이름을 보고 등단시켜 주는 거예요. 문제는 그 두 편을 만드는 과정에서라도 수필을 할 수 있는 뭔가를 갖추면 좋을 텐데 그게 안되는 거예요. 그렇게 등단을 하고 나면 수필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겁니다. 지금의 문단 현실이 그래요. 등단을 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를 전혀 안 하는 거예요.
대구는 요즘 공부를 많이 하더라고요. 부산도 그렇고요. 서울에서는 정말 공부를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리고 수필 강좌를 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수강자들에게 다른 잡지 소개를 전혀 안 하거든요. 자기가 만드는 잡지만 소개를 해요. 참 아쉬운 것은 잡지마다의 특성이 다 있는데, 그 소개를 전혀 안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수필을 쓰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문예지를 모르고 있어요.
또 하나, 늘 아쉬운 것은 수필세계가 등단 작가가 적다 보니까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좁아지는 것 같다는 거예요. 보통 다른 잡지에서는 등단을 할 때는 등단자에게 기본적으로 책을 팔고 있는 실정이거든요. 문예지를 운영하려면 재정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등단자에게 상금을 주며 등단시키는 데는 수필세계밖에 없는 것 같아요.
문제는 사람이 적으니 결집력이 없는 거지요. 수필세계가 유능한 작가를 배출하는 모범적인 잡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속에서, 이미 검증을 받은 작가들, 예를 들어 신춘문예나 전국 공모전 같은 데서 큰 상을 받은 작가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어요. 자칫하면 그 사람들에게 오만함을 심어 줄 수도 있거든요.
―아, 평론도 문제가 있어요. 오랫동안 작품을 써 와 문장력 있고 재능 있는 분들의 작품 평이나, 엊그제 등단한 사람들에게나 똑같은 무게의 평들을 쓰는 것도 문제예요. 신진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한테 긍정적인 평가로 사기를 돋워 줘서 잘 쓰게 하는 것도 중요하긴 한데, 그것을 소화 못하는 사람들은 금방 문단에 나온 사람이 자기가 제일 잘난 수필가 아무개로 폼을 재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하거든요.
좋은 글이 몇 편 나와 원로들이나 선배들이 잘 쓴다고 칭찬을 몇 번 하면 엄청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글을 오래 쓴 원로 작가 글의 평이나, 어제 등단한 작가의 평이 똑같다는 것은 사실적으로 무리입니다.
최원현 선생님은 어찌됐건 이미 검증을 받은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수필세계에서도 등단자를 일 년에 4~5명 정도 해서 자칫 잘못해서 묻혀 버릴 수 있는 신인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리고 수필 세계가 다른 잡지처럼 등단자에게 책을 구입하는 부담을 주지 않아 운영에 더 힘들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이에 유 선생님은 수필 인구가 많아지는 만큼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아 나와서 참 반가운 일이며 좋은 전통을 만들어 가는 수필세계와 같은 잡지가 있어 참 든든하다고 하셨다.
되돌아보는 의미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일행이 선생님의 첫 산문집에 실린 사진을 보며 젊었을 때 상당히 미인이셨어요. 배우 같아요. 했다. 맞아요. 꼭 윤정희와 남정임을 합성해 놓은 거 같아요. 하고 필자가 거들자 최 선생님도 와, 진짜 미인이네. 하고 합세했다. 선생님은 호호호, 나도 한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오. 하시며 소녀처럼 수줍게 웃으셨다.
―제 또래 방송인 중에 결혼 안 한 사람이 몇 명 있어요. 그 당시엔 남녀 차별도 문제였지만, 입사하면서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퇴직한다.라는 규정이 있었어요. 그런 규정이 풀린 것이 80년 이후였는데 그때는 이미 제 나이가 마흔이 넘었어요. 직장 일이 잘 안될 때는 선보는 것이 싫고, 직장 일이 잘나갈 때는 내가 왜 힘들게 결혼 생활까지 해야 하나 싶데요. 겉으로 초조해 보이지 않으니 후배들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외국에 유학 가 있어서 기다리는 줄 알았대요.
직장에서도 못하는 일이 있으면 남자 동료들에게 좀 도와 달라고 했으면 되었을 텐데, 실력도 없으면서 그저 자존심만 앞세워 혼자서 쩔쩔매면서 다 했어요. 하여간 힘들게 살았죠. 집에 가서도 방송 일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결혼을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혼을 안 한 거죠.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제가 예쁘고 매력이 있었으면 누구라도 데려갔겠죠.
선생님의 그 말씀에 모두 한바탕 웃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살아오면서 제일 후회되는 것은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못 해 본 것이 제일 아쉽다고 공통적으로 말씀하시던데 혹시 선생님은 그런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하고 필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웃으시며 사람들은 누구나 해 본 것에 대한 후회보다 못 해 본 것에 대한 후회가 훨씬 더 많을 거라며 선생님도 역시 조금은 후회가 된다고 하셨다.
―나이가 들어 조그만 일을 보고도 감탄하는 것을 보면 웃을지 모르지만, 아직 작은 일에도 감동을 느끼곤 하니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고 공감하고 글을 쓸 수 있다면 덧없는 세상에 저한테도 도움이 되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다 욕심이에요. 더 치열하게 공부하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은데 제가 생각한다는 것도 욕심이죠.
나는 새로운 것에 발맞추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을 이렇게 해요. 음악가 브람스는 낭만주의가 한창 번성한 시절에 살면서도 고전적인 걸 돌아보았기에 그 작품이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너무 새로운 것에 발맞추지 못하는 것에 비관만 하지 말고 좋은 쪽으로 선회하자고 생각해요. 또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은 조용하면서도 무겁지 않고, 밝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생각과 느낌들을 몇 시간 동안 풀어 놓으셨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는 것은 산고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수많은 세월 동안 무수한 고뇌와 아픔, 그리고 도무지 잠재울 수 없었던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들이 고스란히 담긴 십여 권의 수필집은 삶의 결정체나 다름없다.
젊음을 다 투신하고서도 채워지지 않는 그 공허함. 누군가의 가슴속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셨다는 선생님의 수필은, 어느 누구의 위로보다 더 큰 위로며 휴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선생님은 작품집에 사인을 하여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피와 땀이 녹아든 선생님의 작품집을 아무런 노력도 않고 덥석 받으려니 그저 두 손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것저것 챙겨 주시는 선생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그저 마음뿐이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에 묘한 설렘을 가져온다면, 헤어질 때는 어김없이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우리에겐 수필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결코 헤어짐이 그냥 헤어짐이 아닐 것이라고 위안하며 일행은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 바쁜 틈에서도 최 선생님은 역까지 함께 와 주셨다.
▨ 유혜자 연보
학력 및 경력
1940충남 논산시 강경읍 홍교동에서 출생.
1960세종대학교 국문과 2년 졸업.
1964동국대학교 국문과 4년 졸업.
1967MBC 라디오 프로듀서로 입사.
1988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석사).
1998MBC 라디오 부국장 대우로 정년퇴직.
2000방송위원회 보도 교양부문 심의위원.
2003방송위원회 연예 오락부문 심의위원.
문단 활동
1972월간 『수필문학』에 신인가작 「청개구리의 변명」으로 데뷔.
1976한국여성문학인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원.
2002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심의위원.
2007(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1990~『수필문학』 『한국수필』 『수필시대』 『펜문학』 등 편집위원.
수필집
1972『돌아오지 않는 메아리』(홍은출판사)
1977『거울 속의 손님』(동서문화원)
1982『세월의 옆모습』(범우사)
1985『어머니의 산울림』(교음사)
1992『절반은 그리움 절반은 바람』(제삼기획)
2002『자유의 금빛 날개』(선우미디어) 문예진흥원 우수도서로 선정.
음악에세이
1998『음악의 숲에서』(한울)
2004『차 한잔의 음악읽기』(선우미디어)
2007『음악의 정원』(선우미디어)
수필선집
1999『꿈꾸는 우체통』(선우미디어)
2000『종소리』(교음사)
200770년대 등단 4인(변해명․정목일․이정림) 선집 『시간의 대장장이』(선우미디어)
수상
1982제4회 현대수필문학상
1992제29회 한국문학상
1997제15회 한국수필문학상
1998제25회 한국방송대상 라디오PD상
2002제18회 한국 펜 문학상
2007제20회 동국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