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훈 대표가 보는 도산 안창호
도산 안창호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겨레의 스승이요 참된 애국자이다. 온 민족을 일깨우고 지도해 실력있고 모범적인 민족이 되도록 하며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해 튼튼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는 사업에 일생을 바친 민족지도자요 독립운동가였다.
도산은 정식학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다. 소년기의 서당교육 외에는 구세학당에서의 3년수학과 1차 도미후 초급영어 교육 뿐이다. 그러나 남다른 경세적 식견과 논리적 사고,탁월한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으니,아마도 타고난 자질과 자아수련,고매한 인격에 연유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인격과 삶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진실정신과 지성심의 소유자▲주인정신과 인격혁명의 구현▲위대한 경륜과 치밀한 계획의 실천▲사랑과 겸양,친화력과 감화력▲논리적 사고와 탁월한 웅변력 등을 꼽을 수있다.
도산의 정치사상과 사회사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1920년대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있던 도산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자료기록을 종합해보면,그의 정치사상은 대공주의(大公主義)라 할수있다. 도산이 제창한 대공주의는 1920년대 후반부터 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의 이념적 방향을 제시한 이론이었다.
그 배경에는 그가 경도했던 량치차오(梁啓超)의 민권자유사상에 근거한 신민사상,캉유웨이(康有爲)의 대동사상,그리고 새로운 세력으로 풍미하던 사회주의 사상과 쑨원(孫文)의 삼민주의 사상등 당시 동북아의 개혁 이데올로기들을 참작해 독립운동진영의 사상적 분열과 혼란을 막고 통합하려는 동기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국민당 연구자료에 의하면 한국독립당의 강령인 삼균(三均)주의는 도산 안창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기록돼 있으며,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성숙은 한독당이 창당될 때 도산이 삼균주의를 제창했고 후에 다시 조소앙이 이를 더 체계화했다고 증언했다. 조소앙 자신도 도산이 타계했다는 비보를 듣고 추도사를 발표하면서“도산선생께서 우리당(한국독립당)의 당강과 당의를 수립하셨다”고 말했다.
주요한은 저서‘도산 안창호’에서“대공주의란 도산이 세계 개조사상을 깊이 고찰하고 이를 소화해 도달한 이상을 담은 독창적 사상”이라고 평가했다. 침략에 대한 민족해방,정치적 민권민주주의,경제적 착취에 대한 사회혁명등을 포함하고 쑨원의 삼민주의,링컨의 삼민사상을 종합해 민족평등,정치평등,경제평등,교육평등의 네가지 평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산의 사상이나 민족운동의 지도정신,노선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있다.“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며 절대정직과 진실정신을 최고 덕목으로 강조,실천한 도덕주의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혁명적 투쟁에는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도산은 원대한 목표와 위대한 사업을 달성하려면 계획과 지속적 노력에 의한 힘의 축적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생애와 업적에 나타나듯이 도산은 청년시절부터 일생을 통해 수많은 조직운동을 주도했고 창시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비정부기구(NGO)운동가라고나 할까.그중 대표적인 조직운동으로 신민회와 흥사단 운동을 꼽을 수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이 일제에 빼앗기게 되고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됐다는 소식을 들은 도산은 미국에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대한신민회’를 조직할 준비를 한다.
자신이 취지서와 강령들을 작성하고 여러 애국동지들을 모아 합의한 결과 국내활동의 필요성을 자각한 그는 얼마간의 준비금을 모아가지고 2월 20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먼저 대한매일신보사장인 양기탁과 상의했는데,양기탁은 신민회 조직의 목적과 취지에는 찬성했지만 도산이 주장하는 비밀결사로서의 조직은 반대해 공개조직을 주장하다가 얼마뒤에야 동의하게 된다.
신민회에는 당시의 양심적인 민족지도자와 단체들이 총망라됐다. 엄격하게 선발된 최종회원수가 8백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비밀결사였던만큼 정확한 숫자는 알기가 어렵다. 신민회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도산이 발휘한 탁월한 능력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그중에도 당시 가장 선구적이며 영향력있는 애국 세력인 대한매일신보사,상동교회와 자매기관인 청년학원,이갑 이동휘 등 구 무관출신집단,민족자본 세력,미국에 있는 공립협회 세력 등 다섯집단을 하나로통합하는데 성공했다.
도산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입회한 회원은 생명과 재산을 국권회복을 위해 희생한다는 서약식을 갖도록 했다.
훗날 일본도 그 조직의 강고함과 운영의 교묘함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같이 조직된 신민회는 절망적인 시기에 민족각성과 역량결집의 원동력이 되고 견인적 역할을 했으니 훗날 3.1운동을 포함한 모든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고 발원지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도산이 흥사단을 창립하게 된 것도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민족의 영원한 부흥발전을 위해선 기초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신념때문이었다. 흥사단은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의 주도하에 8도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창립됐다.
흥사단의 4대 정신은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이다.이같은 덕목은 일찍이 율곡 이이가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무실,역행,실리(實理),실심(實心),실공(實功)’을 강조했고 중국의 량치차오가 ‘실사구시’정신을 역설했으며 다산도 ‘실학실용’의 실천을 권장했으니 도산이 창안한 덕목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이 덕목들은 도산이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됐다.
흥사단 창립당시 회원은 35명. 그러나 6년동안 회원은 1백50명으로 늘었다. 도산은 흥사단 사업을 추진하는 중에 자금을 모아 북미 실업주식회사를 설립,운영했으며 기금이 늘어나자 금융기관을 설립하려다가 미완에 그치고 만다.
도산은 상하이에 있을 때에도 정치와는 별도로 흥사단 원동지부를 만들어 인재양성과 동명학교를 설립하고 이상촌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도산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본국으로 압송돼 3년간 복역한 후에 수양동우회라는 이름으로 국내흥사단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7년 그 정체가 드러나자 다시 체포됐고,이듬해 결국 병사하고 만다. 이 사건은 1941년 고등법원 상고심에서 최종판결이 나 연루됐던 전원이 석방됐으나 그 과정에서 이광수를 비롯한 몇사람의 변절자를 내 일제하의 합법적 운동의 한계를 실증케한다.
해방후 흥사단 본부와 원동위원회는 본국으로 이전돼 근대화 시민훈련과 청년 아카데미운동에 주력하게 된다. 자유당정권과 그뒤 군사정권하에서 적잖은 제어를 받았지만 한국의 민주발전과 근대화의 지성을 깨우쳐 민중을 의식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모든 활동을 전개해온 흥사단 운동의 원천에는 도산이 있으니 그의 정신과 지도력은 오늘에도 살아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영훈·제2의 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상임위원장·흥사단 전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