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경비원에서 일약 NBA스타 변신
그는 마치 망아지처럼 코트를 종횡무진 누빈다.
한마디로 저돌적이다.
그의 볼에 대한 집념은 그 누구도 따를수가 없다.
경기 중에 루스볼을 쫓아가는 그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이라면
그의 볼에 대한 사랑(?)을 쉽게 느낄수 있다.
그는 코트 밖으로 빠져나가는 볼을 향해 과감하게 몸을 던진다.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다.
그의 플레이는 늘 상대팀과 마찰을 일으켰고 꼭 한 건 이상의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다. 현재 불스에서
같이 플레이를 하고있는 피펜의 뺨 밑에는
그가 피스톤즈 시절 할퀸 상처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
"평범이란 내 사전에 없다"라는 문장을
가슴에 꼭꼭 새기며 숱한 화제를 뿌려대고 있는
코트의 이단아 로드맨.
그의 이런 유별남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그가 NBA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이력은
그의 기행만큼이나 독특한 것이었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로드맨은 여느 흑인들과는 달리 한 번도 깡패생활을 보낸 적이 없다.
고등학교 농구팀에서 쫓겨나 무엇도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던 시절에도
그 흔한 불량서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학농구 여자대표를 지낸 두 누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농구팀에서 쫓겨난 그는 이후
당시 그는 댈러스 공항의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매일 8시간씩 3교대로 근무해야 하는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기념품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적발되어 쫓겨 나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신장이 175cm에 불과했다.
다른 학생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작은 키에 속했다.
그런데 졸업한지 1년만에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키가 22cm나 자랐던 것이다.
키가 갑자기 자란 것은 늘 불운이 따랐던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3년동안 로드맨은 28cm나 성장해
203cm, 95kg의 신체 조건을 갖게 된다.
이후 그의 재능을 인정한 한 대학팀이 그를
농구 선수로 받아주었지만 2학년 때 낙제를 하는 바람에
다시 농구를 그만둬야했다.
농구를 그만두게 만든 그 사건은
로드맨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으며
그 충격으로 그의 성격은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소위 난봉꾼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22세의 로드맨은
그저 좀도둑에 지나지 않았다.
그이 치기어린 행동에 화가난 어머니도 그를 집에서 내쫓고 말았다.
얼마후 로드맨은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의 감독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를 스카우트한 것이다.
거기에서 로드맨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리바운드와 득점부문에서 NCAA의 수위를 차지했다.
그 와중에서도 로드맨은 백인소녀들하고만 데이트를 즐겼다.
어쨌든 그는 감독에게서 그의 분노를 잠재우고
그의 재능을 실현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오클라호마대학에서 로드맨은 새로이 태어난 것이다.
덕분에 그는 서던 오클라호마주립대학의 장학생이 될수 있었다.
이 일은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됐던 그의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때 마음 속으로 굳게 맹세를 한다.
"스스로 납득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로드맨에게 주어진 선택은 농구 밖에는 없었다.
스타트가 늦었던 만큼 그는 미친듯이 농구에 몰입했다.
특히 리바운드는 온전히 그의 영역이었다.
그는"한 번 높이 뛰어오르기 보다 여러번 자주 뛰어 오른다"는
리바운드의 비결을 이때 터득했다. 그는 대학 시절에 리바운드 1번,득점왕 2번
올아메리카팀에 3년연속 선출되는 활약을 보이며 NBA 드래프트에 당당히 나섰다.
그러나 1차로 선발되기를 기대했던 그는 2차로 밀려났고
결국 전체 27위로 피스톤즈에 입단하게 된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이 수모를 갚아주리라 다짐한다.
▶"나는 결코 미치광이가 아니다"
피스톤즈의 그러한 분위기는
로드맨의 성격에 어울리는 것이다.
결국 로드맨은 2회의 NBA우승, 나이많은 선수들과 현명하고
지도력있는 감독, 돈과 명예 등 그가 추구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피스톤즈의 일원이 된 이후 나는 많은 것을 깨우쳤습니다.
피스톤즈의 선수들은 한 마디로 진짜 사나이들이었습니다."
로드맨의 말처럼 피스톤즈는 로드맨과
완벽한 궁합을 보여주었다.
로드맨은 그의 개성에 어울리는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신부는 모델 출신.그가 문신에 열중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로드맨은 팀 동료인 아드리안 댄틀리와 함께
문신을 새기기 시작했던 것.그러자 덩달아 그의 친구인
존 샐리도 문신을 새겼다. 결혼후 그는 아내와 딸뜰을 위해
브룸필드 힐즈에 큰 집을 세웠다.
하지만 공을 들인 보람도 없이 그의 결혼생활은 파탄에 이르고 말았으며
그는 무척 상심했다.
하지만 나쁜일은 겹쳐서 온다고 하듯이 얼마 후
그가 가장 신뢰하는 감독있었던 척 데일리 감독이 팀을 떠나고 말았다.
로드맨의 분노는 극에 도달했다.
"마치 신이 나를 버린 것 같았습니다. 데일리감독은 오늘의 피스톤즈를
땀흘려 세운분입니다. 갑자기 신이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떠나 보내는듯 했습니다.
나는 매우 낙심했었습니다."
그 분노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가 게임 중 곧잘 표출하는 분노는
연결고리가 끊어진 애정의 소용돌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누구나가 다 데니스 로드맨이라는 선수는 알고 있지만
진정한 로드맨의 실체는 아무도 모른다.
그 속에 감춰진 상처의 흔적은 문신과는 달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로드맨을 이해하지 못한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마치 악의 표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TV를 시청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거죠.그렇습니다
나는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악의 표상이라고까지 생각지는 않습니다.
나는 화를 낸 것뿐이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항의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해도 그냥 '그러려니'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나처럼 별난 행동을 하면 눈살을 찌푸립니다.
특히나 내가 문신을 하고 몸에 구멍을 뚫고 하는 일들도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미친 짓으로 여겨질 뿐이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누가 진정으로 모범이 된다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좋은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
로드맨의 말도 일리가 있다. 적어도 찰스 바클리의 분노는
NBA에서 수용될 수 있다고 보여지니까 말이다.
심지어 바클리의 거친 이미지는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로드맨에게는 매우 비판적이다.
지난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로드맨의 새로운 팀
산안토니오 스퍼스는 유타 재즈와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게임이 중반쯤 되었을때 로드맨은 골 밑으로 레이업해 들어오는
존 스톡튼을 향해 무릎을 내질렀다.
심한 부상을 입은 스톡튼은 들것에 실려나가고
로드맨은 퇴장명령과 함께 1만달러의 벌금을 내야 했다.
"척 데일리감독의 방침은 절대로 상대선수에게 쉬운 골밑슛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심한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스톡튼의 슛을 블로킹하려고만 했습니다.
절대로 일부러 무릎을 내지르지는 않았습니다.
스톡튼은 신장이 186cm에 불과하고 나는 무릎이
그의 몸에 부딪히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생각에 만약 그가 2m가 넘는 선수였다면
그렇게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사람들은 내가 백인선수들에 대해서만 그런 심한 플레이를 한다고
욕하지만 그것은 인종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피스톤즈에서도 그는 단연 리바운드 마왕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피스톤즈에서 플레이했던 7년동안 그는 리바운드왕을 2번 차지했고,
2년 연속 NBA우승을 경험한다.
피스톤즈가 2년 연속 우승할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리바운드 능력 덕분이었다.
당시 로드맨의 동료였던 레인비어는 로드맨에 대해
"배구 선수보다 더 끈질기게 점프하는 선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아이재이아 토마스는 그를 '리바운드의 천재'라고 극찬했다.
▶NBA 최고의 리바운드 대마왕
로드맨의 피스톤즈 시절은 93년, 막을 내리고
94시즌부터 스퍼스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2번이나 우승을 차지하는 등
화려한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드맨은 피스톤즈에서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스퍼스로의 이적을 마음 속으로 환영하고 있었다.
스퍼스 팀 역시 리그 최고의 리바운더인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로드맨은 스퍼스에서 플레이했던 첫해에도 계속해서
리바운드왕(1게임 평균 17.3) 자리를 차지한다.
3년 연속 리바운드 왕좌에 오른 것이다. 한편
로빈슨도 득점왕(1게임 평균 29.8점)에 올라 스퍼스의
황금 콤비 둘이 나란히 각 부문 왕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운다.
94년은 로드맨의 독특한 캐릭터가 더욱 두드러졌던 시즌이다.
그는 이해에 가장 컬러풀한 머리색깔을 보여주었다.
스퍼스는 그가 금발 머리로 염색했을때 가장 크게 성공했다.
무려 35승 14패.
빨간머리였을때는 3승 3패,주황색은 9승 2패, 파란색은 3승 2패였다.
그리고 '데몰리션맨' 스타일의 머리가 가장 실패해 3승 4패를 기록했다.
어찌되었건 로드맨은 리바운드와 수비 부문에서 지대한 공헌을해
스퍼스는 정규 리그에서 55승 27패라는 두드러진 성적을 거둘수 있었다.
로드맨은 스퍼스에 입단해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잘 적응을 해나가는것 같았다.
그러나, 95시즌이 개막된 후 한동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팀과의 불화와 트레이드설이 난무했었다.
그는 결국 19게임을 결장하고 난뒤 마침내 두달만에 코트로 복귀했다.
그리고 불스와의 복귀 첫게임에서 44분동안 12득점, 2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어 2월에는 로케츠와의 대전에서 리그 최고 기록인 30 리바운드를 잡아낸다.
그 다음날 선즈와의 경기에서는 24리바운드.
이후 스퍼스는 로드맨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2월 11승 2패, 3월 14승 2패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로드맨은 그가 코트에 없었던 동안
무톰보에게 내주었던 리바운드 1순위를 다시 탈환한다.
그러나 로드맨은 평범한 선수로서의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운명이었을까?
그는 그해 3월20일 오토바이 충돌로 어깨뼈가 빠지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때문에 14게임 동안 벤취 신세를 져야했다.
다행히 그는 코트 복귀 이후 꾸준히 리바운드를 잡아내
그해에도 리바운드왕을 차지할수 있었다.
그가 1게임 평균 16.8리바운드를 잡아낸데 반해
2위인 무톰보는 겨우 12.5를 기록했을 뿐이었다.
로드맨과 로빈슨이 활약했던 스퍼스는 95시즌
62승 20패라는 리그 최고의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로드맨은 플레이오프 2라운드 레이커스 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전부터 불화를 일으킨 봅 힐이
그를 코트에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컨퍼런스 파이널 로케츠와의 경기에서도
그가 플레이할 시간은 조금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로드맨은 플레이오프 매 경기마다 마루위에 앉아 농구화를 벗어놓고,
봅 힐 코치에 대해 무언의 항의를 했다.
그러나 선수가 코치를 이길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로드맨은 플레이오프 시즌 동안
8.9득점, 14.8리바운드라는 비교적 저조한 기록을 세운다.
하지만 현재 마이애미 히트에서 뛰고있는 과거의 동료
존 샐리는 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팬들은 어느 정도 거친 플레이를 보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상대선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아닌
모든 것을 이용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로드맨의 플레이는 농구의 본질과 일맥 상통한다고 봅니다."
로드맨도 서서히 은퇴가 가까워오고 있지만 그의 플레이방식을
고치려고 하지는 않는것 같다. 여전히 코트에서 난동을 부리고
연습에 불참하고 벌금을 치른다. 스퍼스의 새 감독 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로드맨이 우리 팀에 소속감을 가져 주기를 바랍니다.
그는 실력있는 선수이고 팀은 그를 필요로 합니다.
나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오늘도 문신을 온몸에다 새기고 다니며 나이트클럽을 출입하고
연습에 불참하고, 코트에서 난동을 부리는 로드맨.
그러나 그는 소속팀을 두 번이나 우승으로 이끈 능력있는 선수임에 틀림없다.
▶불스 입단후 빨간색으로 머리 염색
로드맨의 올 시즌 트레이드는
어느정도 예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때 불스가은밀히
입단을 제의해 왔고 그는 주저없이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로드맨의 불스 입단은 올 시즌 최대의 트레이드로
꼽힐 만큼 화제가 되었다.
NBA 최고의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과 데니스 로드맨.
아무리 공통점을 찾으려해도 이 둘을 묶을수 있는 고리는 별로 없었다.
피펜과도 마찬가지였다. 또 그의 유별난 행동들이
명문 불스의 이미지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불스로 옮긴 로드맨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는 올 해 불스의 트레이닝 캠프에 한번도 늦지 않았다.
전에 없이 그는 훈련에도 성실히 참가하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그는 불스에서 경기하면서 머리 색깔도
불스의 유니폼과 같은 빨간색으로 바꾸었다.
이제 자신은 불스를 위해 플레이 한다는 충성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는 시즌 프리게임 캐버리어스와의 대전에서
23분간 출장해 10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불스 유니폼을 입고, 빠른 몸놀림과 볼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보여준 그는 탁월한 리바운드력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로드맨은 NBA 입단 이후 한번도 10번을 떼본적이 없지만
불스에서는 91번으로 바꾸었다.
55번 이상의 백넘버를 달려면 NBA 본부로부터 허락을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91번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9더하기 1이 10이기 때문에 91번을 택했다고 단순하게 말한다.
또한 불스에서 은퇴한 슈퍼스타 봅 러브의
백넘버(불스의 영구 결번)라는 것에도 의미를 두고 있다.
불스를 은퇴할 곳으로 삼고, 마지막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 것일까?
로드맨은 센터가 없는 불스의 빈 공간을 메우며
시즌 초 불스가 5연승을 거두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1월8일, 랩토스와의 경기에서
장딴지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 약 한 달간
코트에 나서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이 게임에서 불스로 온 이후 최고의 성적인
11득점, 13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조던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데니스는 호레이스(그랜트)만큼 불스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격에 있어서 위협적이라기 보다는 수비에 있어서
강력한 리바운더이다. 데니스는 승리를 원하고 있고
우리도 그를 절실히 필요로하고 있다."
그리고 로드맨이 디트로이트의 '배드 보이'로 악명을 날리던 시절
로드맨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은 후 지금까지도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스카티 피펜도 조던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로드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코트에서 그런 감정은 나의 플레이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피펜은 말한다. 로드맨은 자신과 조던 그리고 피펜과의 관계에 대해
보다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게임에 있어서 조던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내가
조던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피펜과 조던이 친하다고 해서
서로 결혼을 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단지 승리를 위해 불스에 온 것이다."
정규 시즌 종반 심판을 머리로 들이받아 6게임에 출전할수 없었다.
그가 다시 코트에 섰을때 동료들은 심판들의 눈초리가
전같지 않게 매섭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불스의 선수들은
훨씬 더 심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별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애꿎은 로드맨이 제물이 되었다고 불평했다.
그의 명성이 바클리보다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근거였다.
"심판에게 무언가를 얘기하려 해도 그들은 언제나 함께 덤벼든다"
피펜은 이렇게 얘기했다.
"그는 몹시 어려운 상황에 몰려있다" 조던은 그의 동료이자
말썽꾸러기인 로드맨에게 NBA는 항상 공동의 적인
선수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얘기했다.
"리그는 그를 시험하려 한다. 아니 심판이 그를 시험하려 하고 있다"
조던이 설명했다. "그는 이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는 다른쪽 뺨을 내밀어야 한다. 바로 지금 그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가 결코 커미셔너인 데이비드 스턴이나
심판들과 싸워 이길수 없다는 사실을" 만약 로드맨이 다시
비슷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의 동료들에게 조차도 외면당할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로드맨이 아무리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드맨이 출전하지 못했을때 마침 피펜도 부상중이어서 벤치를 지키고 있었다.
불스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만약 '벌레'라는 별명을 가진 로드맨이
불스의 정규 시즌 70승 달성과 파이널 우승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스스로를 자제해야만 한다.
"우리는 챔피언쉽을 따내기 위해 각 포지션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조던은 계속 얘기했다.
"만약 그가 우리의 목표에 동참할수 없다면, 혹은 다시
그의 주의가 산만해져 버린다면.... 그동안 우리는 그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팀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로드맨은 심판이 그를 제물로 삼은 것은 리그에서 일상적인 일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그는 자신이 표적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전의 거친 플레이들을 계속했다. 많은 상대 선수들은
그를 농구계의 악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드맨은 조금도
경멸이나 박해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피펜은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그가 제대로 된 자신의 위치에서 충분한 능력을 지닌
전문 선수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그는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불스가 트레이닝 캠프를 열기 직전<로드맨을 트레이드 했을때
조던과 피펜, 두 슈퍼스타는 갑자기 심각해질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건 지난 두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로드맨의 기행은
샌안토니오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번 시즌 로드맨은
리바운드 부문에서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의 철철 넘치는 힘은
불스가 챔피언쉽을 향해 달려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비록 그는 23개의 테크니컬 파울을 범했지만
심판 테드 번하드트와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불스의 플레이오프 기간동안 로드맨의 행동에 대해
조던이 얼마나 심하게 걱정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팀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로드맨이라는 인간을 믿어야 한다"
조던은 계속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그는 정규 시즌에서 72승이라는 신화를 이룩했다.
"우리는 그가 규칙에 잘 따르고 팀이 성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할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로드맨은
-물론 예전 일이지만- 머리 색깔을 바꾸고, 온 몸에 문신을 새기고,
지저분한 입담과 플레이보이지에 선정적인 포즈를 취하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형이다.
출전금지 기간이 끝난뒤 연습을 하기 위해 불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의 새로운 머리 색깔-밝은 빨강색-을 자랑했다.
"나는 로드맨의 머리가 금발일때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필 잭슨 코치는 농담처럼 얘기했다.
"나는 악동이었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얌전한 선수가 될 것이다"
로드맨은 스스로 희생한다는 듯이 얘기했다.
심판과의 관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은 시작부터가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나는 내 방식대로
계속 플레이해 갈 것이다" 불스는 그의 출전 금지 기간동안
5승 1패를 기록했다. 또한 앞서 그가 부상을 당해
출전하지 못한 12게임에서 10승 2패의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정규 시즌 게임일 뿐이다. 어떤 어리석은 기행이
불스에게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올런지 알 수 없다.
"로드맨은 그의 리바운드와 열정적인 수비를 무척이나
하고 싶어했다" 조던은 이렇게 설명했다.
"불스는 로드맨으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의 상황을 매우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없이도 승리할수 있다"
로드맨은 출전 금지가 풀린 이후 정상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히트와의 경기에서 13리바운드,8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경기에 졌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머리로 받는다던가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는 1쿼터에서 플레이한지 9초만에 첫번째 파울을 선고받았다.
그는 팔을 길게 뻗어 항의하는 제스추어를 만들었지만
심판에게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나를 시험했다고 생각한다" 로드맨이 얘기했다.
"나는 (NBA 부사장) 로드 쏜과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기랄, 이번에는 보내버릴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나는 그렇게 순순히
리그 밖으로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 로드맨은 계속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우리가 당장에라도 리그에 탄원서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엔 특별히 그렇다. 나는 내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곳에서 좋은 시간들을 보냈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를 환영해주는 동료들이 있어서 나는 기뻤다.
그들은 내가 이곳에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필 잭슨 감독에 의해 스타팅 라인 업에서 제외됐다.
그는 아무런 불만도 표시하지 않았다. 잭슨 감독은 그에게
스타팅 멤버가 되고 싶냐고 물었지만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했다."
로드맨의 나이 이제 36세. 머지않은 은퇴를 생각하며
그가 마지막으로 꿈꾸는것은 NBA 우승이다.
그는 이미 피스톤즈에서 2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다.
그동안 로드맨은 NBA에서 좌충우돌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차지해왔다.
볼에 대한 집요함 만큼 우승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로드맨이
우승컵을 안고 환호하는 모습을 미리 기대해도 좋을것 같다.
▶나는 리바운드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빌 러셀(평균 22.5개), 월트 체임벌린(평균 22.9개)과 함께
NBA 역대 최고 리바운더로 손꼽힌다. 수치상으로만 봐서는
로드맨(평균 12.9개)이 다른 두 명보다 못하다. 하지만
러셀과 체임벌린은 둘 다 센터였고, 지금보다
훨씬 많이 슛을 시도하고 성공률은 저조했던 기간의 선수들이었다.
즉 그들에겐 더 많은 리바운드의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점들을 감안했을 때, 204cm에 불과한 로드맨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드맨이 디트로이트에 있던 시절의 감독이었던
척 데일리는 "월트는 당시에 단지 다른 이들보다 키가 크고
힘이 강했을 뿐이다.또 러셀은 현재의 로드맨같이
수많은 장신의 센터와 파워 포워드들을 상대로
그런 성적을 올린 것이 아니다. 만약 이들이 모두 같은 조건에서
플레이했다면 누가 더 리바운드를 많이 잡아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데니스 로드맨이 이렇게 리바운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는 볼에 대한 집착력이 누구보다도 강하다.
악착같은 근성으로 볼을 잡아낸다. 로드맨은 리바운드를 위해
볼을 쫓을 때면 물불을 안 가린다. 오직 그 공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하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에게 있어 리바운드를 놓치는 일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리바운드 싸움에서 이겨 공을 잡았을 때
공에 대한 그의 태도는 돌변한다. 마치 자기 자식인양
그것을 품에 꼭 안고 절대 놓지 않으며 안전하게 팀동료에게 건네준다.
"나는 천부적 감각과 센스로 리바운드를 한다. 그것은
관중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한 행동이다.
리바운드만이 나를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로드맨이 항상 강조하는 말이다. 또 데니스가 리바운드를 함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다.
그는 강한 체력과 점프력으로 남들보다 몇 번 이상
리바운드를 위한 점프를 한다. 이것은 그가 자기보다 훨씬
큰 빅맨들을 상대로 더 많은 리바운드를 기록할 수 있는 비결이다.
상대 선수들보다 먼저 점프를 하며
공을 잡을 때까지 계속 뛰어 오른다. 그는 이러한
재빠른 점프를 1쿼터에서 4쿼터까지 시종일관 유지한다.
벌써 10년간 그래 왔다.
"그는 리바운드할 때, 결코 대강 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럿이서 튀어오른 공을 놓고 점프하며 경쟁할 때,
몇 번이든 솟구쳐 올라 결국 공을 잡아내곤 하죠." 룩 롱리의 말이다.
볼에 대한 집착과 신체 능력 외에도 그는 늘리바운드에 대해
연구한다. 그가 리바운드시 위치 선정에 뛰어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물론천부적인 감각도 이유가 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항상 탐구한다. 시카고 경기를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보며 그는 선수들의 슛팅 특성을 분석한다.
선수에 따라 슛이 안 들어갔을 경우 공이 어디로 튀는 지
연구하여 미리 좋은 위치를 선정하는 것이다.
로드맨의 분석에 대해 들어보자.
"대부분의 불발된 슛들은 그 반대편으로 멀리 날아가죠. 하지만
샤크와 같이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평탄하게 던지는 선수들의 공은
보통 슛한 위치와 같은 방향으로 빨리 튀어 나갑니다. 하지만
스티브 커와 같은 장거리 슛터들의 슛은 보통
큰 각도의 포물선을 그립니다. 이런 경우 공은 림근처에
높이 솟구치거나 반대편으로 날아갑니다."
그는 또한 조던이나 피펜같은 팀동료의 슛은
그들이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던지는지만 보고도
어디로 공이 튈 지 안다.
"대부분 마이클의 슛은 어느 위치에서 던지든지
골대 오른쪽으로 튑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지는 않죠. 그가 슛한 공이 공중에 떠 있을 때
나름대로 예측을 하고 위치를 선정합니다."
또한 로드맨은 공중에 뜬 상태로 몸의 방향을 잘 바꾼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미리 예상한 위치에 공이
안 올지라도 공을 잡아낸다.
"데니스는 똑바로만 점프하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공을 향해 뛰어 오르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불스의 게임 분석가인 조니 커가 로드맨의 비범한 능력에 대해
한 말이다. 그에게 이렇게 노력하는 자세가 없었다면
결코 리바운드왕이라는 별명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설명한 로드맨의 리바운드 비결은
표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독특한 또 하나의
숨은 비결이 있다. 그것은 트릭이다.
트릭이 없이는 결코 리바운드를 마음대로 따낼 수 없다.
공이 어디로 튈지 미리 알고 위치 선정을 해도 다 허사이다.
그는 심판 몰래 교묘한 반칙을 쓴다. 심판의 눈을 피해
그의 트릭을 사용하는 것이다. 로드맨 자신은 이러한 트릭들이
기술이라고 말하지만 어쨌든 그가 행하는
'리바운드를 위한 물밑 작업'은 한마디로 가관이다.
그가 특히 잘하는 짓은 상대방의 팔을 자기 팔과
몸 사이에 끼워 버려 아예 리바운드를 위한 점프를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정말로 자기 팔을 잘 이용합니다." 1987-88 시즌
리바운드 타이틀을 차지한바 있는 필라델피아의 센터
마이클 케이지는 로드맨을 두고 말했다.
"막 볼을 잡기 위해 뛰려 하면 그는 어김없이 팔꿈치로 툭 쳐버립니다."
로드맨은 인사이드에 있을 때, 때때로 몸을 잔뜩 움츠려
상대의 등에 기댄다. 거의 상대방 허벅지에 앉다시피 하여
코트 바닥에 주저 앉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작년 챔피언 시리즈에서 그를 마크했던 프랭크 브리코우스키는
이러한 로드맨의 행동에 흥분해 결국 퇴장을 당하곤 했다.
그는 "제가 리바운드를 하기 위해 상대들을 견제하는 방법들에는
몇 가지가 더 있죠. 누가 그 비결을 가르쳐 달라면 가르쳐 주겠지만,
전 곧 그를 죽여 버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펼치는 교묘한 몸싸움 아닌 몸싸움은 정말로
그만의 노하우인 것이다.
로드맨은 확실히 리바운드를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인물이다.
온갖 쇼맨십으로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그는 적어도
한 분야에 있어서만은 최고이다. 때로는 너무
리바운드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기가 마크할 선수를 놓쳐서
오픈 찬스를 만들어 준다고 필 잭슨은 불평하지만 말이다.
그가 비록 말썽도 일으키고 여러 가지 추태를 벌이긴 하지만
그는 시카고에 있어서 절대 필요한 존재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는 정말 그답게 한가지 황당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의 최대 목표는 한 게임에서 50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환상적인 목표를 달성하면
당장 농구 코트에서 유니폼을 모두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채 뛰어다닐 것이라고 했다. 그를 믿고 기대해 보자.
그는 이 목표를 달성하고 자신의 음모를 실현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로드맨은 왜 문신을 즐기는가?
로드맨이 즐기는 것은 문신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승용차인 검은색 훼라리를 타고
나이트클럽으로 향하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다.
시끄러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시속180km에
가까운 속력으로 한밤의 도로를 질주한다.
나이트클럽에서 로드맨은 술을 마시며
늦은 밤까지 춤을 추다가 새벽이 되면 클럽을 나서는 것이다.
귀와 코 등 몸의 여러곳에 구멍을 뚫고
액세서리를 하고 다닌다. 웃통을 벗어 제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배꼽을 중심으로 그려진
해모양의 문신이고 배꼽에도 구멍을 뚫어
강철장식을 매달고 있다.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코트밖에서의 로드맨은 꽤 점잖은 편이다.
다소 무뚝뚝하고 약간 화난 듯한 표정을 짓고 다닌다.
사람들은 온몸에 문신을 하고 다니고
코트에서는 데몰리션맨이라 불리는 이 사나이가
거칠것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로드맨도 가끔씩은 크게 낙심하기도 하는
평범한 성격의 사람일 뿐이다.
▶텍사스에 소재한 쿡카운티 2년제 대학에 진학했다가
사우스이스턴 오클라호마 대학으로 편입한다.
로드맨은 대학 첫 게임에서 24득점과 19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
그의 발전 가능성을 암시하였다.
대학 3년 내내 NAIA올아메리칸 선수로 선정되며
83-84시즌부터 85-86시즌까지 3년 동안 평균 25.7득점에
리바운드 15.7개로 리바운드 챔피언 2번에 야투율도 0.637을 기록했다.
리바운드 부문에서 3학년 때 게임평균 15.9개,
4학년 때 17.8개로 1위를 차지했다.
로드맨은 장신의 대학선수보다는 덜 알려졌으므로
1986 NBA드래프트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의해
2라운드에서 (전체 중 27번째) 지명된다.
▶1986-87 시즌
프로첫해는 그의 재능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피스톤스 선수로서 게임당 평균 15분을 뛰면서
6.5득점, 4.3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시즌 총 1155분을 뛰었으며 이것은 그의 생애 2000분 이하로
뛰어본 시즌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신인으로서 NBA결승에서 뛰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는 듯 하였으나 동부 조결승에서 피스톤스가
보스턴 셀틱스에 7게임을 치르며 패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1987-88 시즌
프로 2년 생으로서는 좋은 기록을 남겼으나 이것은
3년 후에 리바운드 왕이 되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882게임에 출전하여 평균득점 11.6점, 8.7개의 리바운드, 그리고
야투 성공률 0.561을 기록하였다. 시즌을 29게임 남겼을 때
척 데일리 코치는 에이드리안 덴폴리 대신 로드맨을 주전으로 기용하여
팀이 20승 4패의 좋은 기록을 세웠다.
로드맨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던 게임은 1월 24일
포틀랜드 트레일브레이저스와의 경기에서 30득점,18개의 리바운드를 잡았다.
로드맨은 플레이오프 23게임에 출전하여 피스톤스가
레이커스에 결승에서 패할 때까지 평균 득점 7.1에 리바운드 5.9개를 잡았다.
▶1988-89 시즌
로드맨은 팀 내 식스맨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게임당 25.9분을 뛰며 9득점에 9.4개의 리바운드를 잡았다.
그는 또한 야투 성공률에서 리그 최고의 0.595의 높은 성공률을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우직하고 육탄적인 플레이가
피스톤스의 우승에 큰 기여를 하였다.
로드맨은 비 주전 선수로서 유일하게 공격 리바운드를 한 시즌에
300개 이상 잡은 선수이며 이해에 처음으로
NBA올 수비 1팀에 선정되었으며 최우수 수비 선수상과
6번째 선수상에서는 아깝게도 2위에 그쳤다.
그는 수비 전용 선수이지만 가끔 공격에도 참여하여 많은 득점을 기록하곤 했다.
2월 18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경기에서 32득점에
21개의 리바운드를 잡는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었다.
로드맨의 활약은 플레이오프에서 더욱 두드러져
평균득점 5.8점에 10개의 리바운드를 잡아 피스톤스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결승에서 1게임도 내주지 않고
4게임 연속 이겨 챔피언에 이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89-90 시즌
로드맨은 시즌 후반기 43게임서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으며,
이 기간 동안 피스톤스는 39승 4패의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피스톤스는 결국 2년 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로드맨은 그의 수비력과 리바운드의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올스타팀에 선정되었으며 또한 최우수 수비 선수로 뽑히는 영광을 얻었다.
평균 8.8득점, 리바운드 9.7개, 야투성공률 0.581 그리고
자유투 성공률 0.654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 로드맨은 전 게임인 19게임에 출전하여
평균득점 6.6점에 리바운드 8.5개를 기록하였다.
▶1990-91 시즌
포워드로서도 약간 작은 체격인 로드맨은 그해에
평균 리바운드 12.5개를 잡으며 그의 재능을 살짝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수비에서도 전천후 선수로서 상대방이
가드든 센터든 그에게만 걸리면 맥을 못 추었다.
시즌 마감 후 연속 2번째로 최우수 수비 선수 상을 받았다.
로드맨은 공격 리바운드 361개로 이 부문 1위를 차지했으며
전체 리바운드에서는 미래의 팀 동료인
데이비드 로빈슨의 13개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로드맨은 공격에는 가급적 자제하였으나 평균 8.2점에
1월 2일 덴버 너기츠와의 경기에서는 생애 최고인 34득점을 하였다.
피스톤스의 3년 연속 챔피언 꿈은 동부조 결승에서
시카고 불스에 4게임만에 패하므로서 끝이 나고 말았다.
▶1991-92시즌
이 시즌에서 로드맨은 리바운드에 재능이 있는 선수에서
리바운드 천재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키가 203cm에 불과하지만 평균 18.7개를 잡으며
20년만에 가장 좋은 기록을 세웠다.
이보다 더 좋은 기록을 세운 마지막 선수로는 월트 챔벌린으로서
71-72시즌에서 평균 19.2개를 잡았다.
로드맨은 그해 생애 두 번째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프로 6년째 되는 이 포워드는 시즌 전 게임인 82게임에 출전하며
79게임서 팀 내 가장 많은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20개 이상을 기록한 게임이 39게임이며 3월 4일
대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경기에서는 생애 최고기록인 34개를 잡았다.
로드맨은 또한 평균득점 9.8점으로 생애 2번째로 좋은 시즌을 맞이했다.
시즌이 끝난 후 IBM사로부터 팀에 가장 공헌을 많이한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NBA 3진 팀과 NBA올수비 1진 팀에 뽑혔다.
▶1992-93 시즌
로드맨의 리바운드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은 다음과 같은 결과로 볼 수 있다.
92-93시즌에 20게임에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132개를 잡아내면서 리바운드왕을 차지했다.
평균 18.3개는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는 놀라운 기록이며
이로서 2년 연속 이 부문에서 독주했다.
로드맨은 466게임에 연속 출장하는 기록을 가지고
시즌을 시작했으나 부상과 개인적인 문제로 이기록은
470게임에서 끝이 나고 만다.
로드맨은 피스톤스의 전 코치인 척 데일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나 척 데일리가 팀을 떠난 후
로드맨은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괴팍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팀에서 트레이드 되기에 이르렀다.
로드맨은 일단 코트에 서기만 하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뛰었다.
로드맨은 게임당 평균 38.9분을 뛰었다.
28게임에서 리바운드 20이상을 잡았으며
NBA올수비 1진 팀에 설정되었다.
▶1993-94 시즌
93년 10월 1일,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는
션 엘리엇과 데이비드 우드를 데려오기 위해
로드맨과 아이새야 모리스를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방출한다.
로드맨은 디트로이트 팀에서 생활에 매우
불만족스러웠으며
새로운 팀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를 바라던 참이었다.
이것은 또한 스퍼스가 리그 최고 리바운드 선수를
영입함과 동시에 웬만한 센터들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데이비드 로빈슨에게 좀 더 득점할 기회를 주는
아주 좋은 기회인 것이다.
로드맨은 3년 연속 리바운드 왕(17.3)이 되었다.
로드맨의 가치는 샌안토니오가 공격리바운드부문
리그 최하위에서 0.356으로 1위로 부상한 것과
로빈슨이 게임당 평균득점 29.8점으로
득점 왕이 된 것으로 따져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떻든 로드맨과 로빈슨은 팀 동료로서 득점왕과
리바운드왕을 동시에 차지하는 NBA사상 최초 기록을 세웠다.
괴팍한 성격을 가진 로드맨은 시즌 내낸 다양한 머리 염색으로
치장했다. 그의 머리색깔과 스퍼스의 팀 성적 관계는 다음과 같다.
금발일 때 35승 14패, 빨강일 때 3승 5패, 보라색일 때 9승 2패,
파란색일 때 3승 2패 그리고 파괴자의 모습일 때 3승 4패였다.
여하튼간에 로드맨은 다른 어떤 선수보다 리바운드만큼은
월등히 잘했다. 평균 리바운드는 차점선수인 샤킬 오닐보다 4개나 많았다.
로드맨은 게임이 27게임에서 리바운드를 20개 이상 기록했으며
1월 22일 대 댈러스 매버릭스와의 경기에서
팀 최고 기록인 32개를 얻으며 그 해 NBA 최다 기록을 세웠다.
공격에는 별로 가담하지 않는 로드맨은
게임 평균 4.7점에 야투 성공률 0.534를 기록했다.
로드맨의 등장은 스퍼스를 막강한 수비 팀으로 변신시켰다.
스퍼스는 게임당 평균 94.8점만 내주어 뉴욕 닉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후 로드맨은 NBA선정 수비 2진팀에 뽑혔다.
로드맨의 활약으로 시즌을 55승 27패로 마감한 스퍼스는
플레이오프에서 공격진의 부진으로 고전했다.
1라운드에서 유타 째즈에 겨우 평균득점 88점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1994-95시즌
많은 사건이 있던 해이다.
시즌이 개막되었을 때 로드맨은 샌안토니오 코트에 서지 못했다.
시즌 시작 3게임에 대해 징계를 받은 상태이며 11월 11일 휴가를 냈으며
12월 7일 또 한번 징계를 받았다.
19게임을 결장한 후 12월 10일 드디어 돌아왔다.
1월 24일 시즌 처음으로 주전으로 뛴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
44분을 뛰며 리바운드 23개에 12득점을 기록했다.
2월 21일 휴스턴 로케츠와의 경기에서 NBA시즌 최고인 30리바운드를 잡아냈다.
그 다음날 피닉스 선스와의 경기에서 24개를 더 보탰다.
로드맨의 활약에 힘입어 2월에 11승 2패, 3월에 14승 2패를 기록했다.
그는 기록으로 인정되는 게임 수를 채우자마자
덴버 너기츠의 디켐베 무톰보를 제치고 1위로 올랐다.
3월은 오토바이 사고로 인한 어깨 골절로 인하여 별 활동을 못하였다.
3월 20일 부상자 명단에 올라 14게임에 결장했다.
4월에 팀에 복귀하여 시즌 공인 기록으로 인정되는
800개 이상을 간신히 넘긴 823개를 기록했다.
게임당 12.5개를 기록한 무톰보를 여유 있게 제치고
16.8개로 1위를 차지했다. 네 번째 연속 리바운드상을 받았다
또한 7.1득점, 2개의 어시스트 0.5571의 야투성공률을 기록했다.
스퍼스는 로드맨의 리바운드와 최우수 선수로 뽑힌 데이비드 로빈슨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시즌 기록을 62승 20패로 마무리했다.
1라운드에서 덴버를 간단히 물리치고 2라운드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6 차전까지 가며 물리쳤으나
조 결승서 휴스톤 로케츠에 패하고 말았다.
플레이오프에서 로드맨은 계속 관중의 관심을 끌었다.
로드맨은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 그를 출전시키지 않은
수석코치 밥 힐에대한 분풀이로 신발을 벗어 던진 채 바닥에 앉았다.
로드맨은 플레이오프에서 8.9득점, 14.8개의 리바운드
그리고 0.542의 야투성공률을 기록했다.
▶1995-96시즌 : 95년 10월 2일 스퍼스에의해
시카고 불스의 월 퍼류와 맞바꾸게 된다.
불스가 로드맨을 영입하기로 한 모험은
로드맨이 게임당 평균 14.9개를 잡으며 리바운드 왕 상을
연속 5번 받으므로서 큰 성공을 거둔다.
모세스 멀른(81-85)만이 유일하게
연속 5번 이상을 받았으며
월트 챔벌린(10) 하고 멀른만이 6회 이상을 수상했다.
또한 챔벌린만이 유일하게 리바운드 상을
세 팀에서 활약할 당시 받았다.
로드맨은 디트로이트와 샌안토니오에서 두 번씩 받았다.
또한 게임당 평균 32.6분을 뛰면서 득점 5.5점,
어시스트 2.5개를 기여했다.
그러나 주된 임무는 리바운드와 수비이다.
그가 뛴 64게임 중 59게임에서 팀 내서
최다 리바운드를 하였고 20이상 리바운드도 11번 있었다.
시즌 최고 기록은 2월 21일 미네소타와의 경기에서 24개를 얻었다.
로드맨은 올수비팀 1진에 생애 7번째로 선정되었으며
1월 16일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10득점, 리바운드 21개, 어시스트 10개를 기록해
처음으로 트리플더블을 기록한다.
11월에 왼쪽 종아리 부상으로 인해 12게임에 결장했으며
3월 16일 뉴저지전에서 퇴장, 3월 18일부터 30일까지 6게임을 뛰지 못했다.
불스는 72승 10패로 NBA역사상 최고승률을 거둔다.
로드맨은 플레이오프전 15게임을 치러 게임당
평균 리바운드 13.7개, 득점 7.5점을 기록했다.
엘빈 헤이스가 한 게임서 세운 공격 리바운드 11개인 NBA기록을
시애틀과의 2차전, 6차전에서 두 번이나 세웠다.
BAD AS I WANNA BE...
숱한 기행과 난폭한 플레이로 코트의 악동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데니스 로드맨이 NBA의 숨은 비밀들을 폭로했다.
미국에서 간행된 그의 자서전 'BAD AS I WANNA BE'에는
NBA에서 만났던 선수들과 감독들에 대한 느낌, 그리고
주변의 여성 편력까지 소상하게 적혀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었다.
1993년 4월의 어느밤, 나는 픽업 트럭 안에서 장총을 만지작거리며
죽어야 하는가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피스톤즈에서 선수로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미 두차례나 NBA 우승을 차지했고
2년 연속 리바운드왕에 등극하려는 시점이었다.
또한 2번이나 올스타로 선출됐고 수비왕에도 2번이나 올랐다.
나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디트로이트에서 무척이나 별종으로 취급됐다.
코트에서도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그런 플레이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팬들은 이런 내 플레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나는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커다란 저택, 페라리 자동차 그리고 명성까지도.
내 성공 스토리는 TV에 특집으로 방영되기까지 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 변변치 못한 교육, 집없이 떠돌며
전과 기록까지 있는 내 이야기는 충분히 얘기거리가 되었다.
나는 이날 밤 당시의 내 생각과 느낌들을 편지에 적었다.
그리고 친구인 쉘든 스틸의 집 앞에 이를 남겨두고 왔다.
편지가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할 수가 없다.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내가 무척이나 힘들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서는 아니었다.
나는 어떤 누구의 기준에 맞추어서 살아오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느낀다면 시간의 구애를 전혀 받지 않았다.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다.
만약 내가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면 전혀 시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시계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시간은 내게 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나는 수면을 취하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피스톤즈에서 7번째 시즌을 맞는 그 해에
내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
팀 성적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시즌 디비전에서 6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실패했다.
3년 전에 NBA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 말이다.
우리의 위대했던 팀은 분열이 되었고 산산히 조각나 버렸다.
내 인생도 팀과 함께 조각나 버린 것 같았다.
코트에서 연습할 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습장은 마치 무덤과 같았다.
모든 고통과 슬픔이 한꺼번에 내게 밀려드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용기마저 잃어버린 상태였다.
나는 내 인생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했고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에 대해 고민했다.연습을 마치고
운동장을 나오면서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이 싫어졌다.
그리고 트럭에 총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갑자기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되며, 내가 NBA 선수라는 사실에
염증을 느꼈다. 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인간형이 되기 싫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전혀 딴사람으로서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다가 내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유리창 너머로 두 명의 경찰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했다.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정상이었고 지금도 정상이다.
▶NBA는 내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렇게 큰 무대는 내게 처음이었다. 다소 위축돼 있는 자신을 느꼈다.
나는 어느 정도 돈이 있었고 적당히 즐기는 생활을 했지만
마음만은 항상 코트를 향해 있었다. 일단 코트로 돌아오면 나는
바깥에서 있었던 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플레이에만 몰두했다.
내게 남아있는 일이라고는 게임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루키 시즌에 그다지 플레이를 많이 하지 못했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열정들을 참아내야 했다.
그것은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82게임중 77게임에 출전했다.
그러나 평균 출전 시간을 따져보면 15분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내가 출전하지 못했던 5게임은 거의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일단 코트에 서면 거칠어졌다.
나는 즉시 컨디션을 되찾아 내 모든 실력이 발휘되기를 바랐고
내가 필요한 선수임을 입증하려고 했다.
나는 정말로 플레이 하기를 원했다.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은 내게 지옥이었다.
척 데일리 감독은 내 성격을 잘 이해했다.
그는 항상 '조금 있으면 플레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열심히 하는 스타일의 선수를 좋아했다.
슈퍼스타 흉내를 내면서 마지못해 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스타일의 선수를 경멸했다.그는 항상 내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피스톤즈는 내가 플레이를 배우는데 있어서 이상적인 팀이었다.
루키시절, 릭 마호른 선수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걸 어떻게 해야하는지 보여주겠어"
이러한 선수들은 바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팀에 필요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나는 레임비어나 마호른처럼 강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보다 훨씬 빨랐고 리그의 어떤 누구도 수비할 수 있었다.
나는 NBA 역사상 그 유래가 없는 별종에 속하는 선수였다.
루키 시즌 이후 나는 리그에 내 스스로 어떤 근거(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2년동안 벤치 끝에 앉아
단지 남의 플레이를 구경하고만 있는 선수들을 보아왔다.
그들은 리그가 끝날 때까지 전혀 플레이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내게 현재 있는 능력 외에 무언가 나를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추어야 한다고.
그럴수 없다면 나는 언제든 코트 밖으로 떠밀려 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리그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쉽지 않은 방법을 택했다.
그것은 바로 수비와 리바운드였다.
이 두가지는 선수들이 하기를 꺼려하는 부문이었다.
모두들 득점을 많이 하기를 바랐지만 나는 아니었다.
선수들이 나를 못믿어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득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나는 매일 아드리안 댄트리와 연습했다.
그리고 그를 비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댄트리는 공격 담당이고 나는 수비수였다.
우리는 마루 위를 수없이 돌아다니며 연습했다.
내가 그의 공격을 완전히 차단시키기도 하고
그가 공격에 성공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그가 득점하는 것보다 내가 그의 공격을 차단하는 횟수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나는 NBA의 다른 선수들과는 다르다
여기 가장 주된 이유가 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선수들은 그들이 평가받는대로 행동하려고 할 것이다.
단지 NBA 선수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를 곤란하게 하는 무언가를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만약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얘기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다.
리그에는 NBA의 이미지에 맞추어
얘기하고 행동하려는 선수들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있어도
혹시나 잘못돼 벌금이라도 물게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내 가슴에서, 마음에서 나오는대로 얘기한다.
NBA 선수의 이미지란 팬들에게 손을 흔들고 미소를 보내주는
다분히 상업적인 것이다. 웃긴 일이다.
그들은 모두가 듀크 대학 출신으로서 화려하게 NBA에 입단한
그랜트 힐이 되고 싶어한다. 그랜트 힐은 뛰어난 선수이다.
나는 그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선수가 되고 싶어하는 생각은 왜 안하는 거지?
하다못해 다른 스타일의 인간이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NBA맨의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때문에 계속 벌금을 물어왔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건 운동선수가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하는 우리들을 존경한다고 얘기한다.
누구나 자신이 할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싶어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완벽해지고 싶어한다.
택시 운전사들은 많은 팁을 주면 좋아하고 농구선수들은
그들이 코트에서 플레이한 것에 대한 댓가를 받고 싶어한다.
리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경쟁이다.
리바운드, 승리, 돈. 나는 비슷한 위치에 있는 선수들이
얼마나 받는지 알고 있다.
또한 그들도 내 연봉을 알고 있다.
어린애같지만 우리들은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다.
나는 1년에 2백 5십만달러(20억)를 벌어 들인다.
내 연봉에 대해 아무도 유감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돈이란 것이 코트 바깥에서는 무척 필요한 존재임을 사람들은 이해해야 한다.
내 연봉은 리그내의 파워포워드 중 세번째나 네번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데릭 콜먼은
1년에 7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다.
나는 내가 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가 나보다 나은 것은 득점 밖에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내 불평을 바보같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득점이 중요하고 득점력이 있어야만
게임에 이길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리바운드와 수비력이 뛰어나다.
이 두가지는 동료 선수들의 득점력을 훨씬 향상시킨다.
데이비드 로빈슨이 좋은 예이다.
그는 나와 플레이했던 2시즌 동안 연속해서 MVP를 차지했다.
내가 피스톤즈에서 플레이했던 시절 빌 레임비어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있었기에 그는 외곽에서 마음 놓고 슛을 쏘아댈 수 있었다.
데릭 콜먼은 경우가 다르다. 그가 코트에서 플레이를 하면서
얻는 이익을 누가 갖게 되는가? 데릭 콜먼은 그 자신이 전부 갖는다.
그것이 나와 다른 점이다.다른 선수들 크리스 더들리(600만 달러),
안소니 메이슨(400만 달러)도 마찬가지이다.
나보다 못한 선수들이 훨씬 더 많은 연봉을 받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마돈나와의 사랑은 이렇다
우리는 마이애미의 한 게이바에서 마주쳤다.
나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마돈나와 그녀의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열광적인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이 내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마돈나와의 광란에 가까운 6개월의 사랑이 시작됐다.
내가 마돈나를 처음 본 것은 1994년,
그녀가 닉스의 게임을 보기 위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왔을 때였다.
그녀는 우디 앨런, 스파이크 리, 빌리 크리스탈 등 다른 스타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녀는 당시에 존 스탁스를 좋아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때만해도 나는 전혀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1994년 올스타게임이 열리는 동안 마돈나는 TV에 출연해
'정말로 데니스로드맨을 만나고 싶다'고 얘기했다.
마돈나의 얘기를 옮기면 그렇다.
"나는 데니스 로드맨이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주관이 있는 사람이다. 진정한 인간인 그를 만나고 싶다"
나는 그 시즌 평균 18.3리바운드로
리그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올스타에 선출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녀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마돈나가 이런 발언을 한 3개월 뒤 언론은 나와 그녀의 만남을 주선했다.
나는 만약 그녀가 만나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에 응하겠다고 얘기했다.
마침내 그녀쪽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
마돈나가 '힙 합' 잡지의 요청으로 나를 인터뷰하고자 하는데
마이애미로 오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인터뷰는 1994년 6월호의 커버스토리로 내보낼 예정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무슨 실없는 일을 꾸미느냐고 생각했다.
도대체 마돈나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러나 결국 만남은 이루어졌고 내게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나는 그녀가 가수라는 사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을 나는 그녀에게 얘기했다.
그녀는 음악에 재능이 있었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마돈나는 변신을 시도했다.
'베드타임 스토리'라는 제목의 앨범이 바로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이 앨범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마돈나와 나는 곧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다.
숱한 소문과 추측을 뿌리며 우리의 연애는 계속됐다.
그러나 마침내 끝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도무지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마돈나에게 '훨씬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결코 당신같은 사람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정상적인 삶을 꾸려나가고 싶어졌다.
마치 보통 사람처럼. 그러나 마돈나와 함께 있으면 불가능했다.
나는 이별이라는 고전적인 의식을 다시 어렵게 치러내야 했다.
마돈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샌안토니오로 오겠다고 얘기했다.
그녀는 내 집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녀는 그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얘기했다.
결코 나는 마돈나의 보이프렌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불스에서 나는 행복을 느낀다.
누가 뭐라해도
나는 '데니스 로드맨'으로 살아갈 것이다.
CAREER TRANSACTIONS
Selected by the Detroit Pistons in the second round (27th pick overall) of the 1986 NBA Draft. Traded by the Pistons with Isaiah Morris to the San Antonio Spurs for Sean Elliott and David Wood on 10/1/93. Traded by the Spurs to the Chicago Bulls for Will Perdue on 10/2/95. Signed as a free agent by the L.A. Lakers on 2/23/99. Waived by the Lakers on 4/15/99. Signed as a free agent by the Dallas Mavericks on 2/3/00. Waived by the Mavericks on 3/8/00.
Season Highs / Career Highs
2001-02 HIGHS CAREER HIGHS
Points null 34 vs. Denver 1/02/91
Field Goals Made null 15 vs. Denver 1/02/91
Field Goals Attempted null 21 vs. Denver 1/02/91
Three Point Field Goals Made null 3 2 Times
Three Point Field Goals Attempted null 5 3 Times
Free Throws Made null 9 2 Times
Free Throws Attempted null 12 2 Times
Offensive Rebounds null 18 vs. Indiana 3/04/92
Defensive Rebounds null 23 vs. Dallas 1/22/94
Total Rebounds null 34 vs. Indiana 3/04/92
Assists null 10 vs. Philadelphia 1/16/96
Steals null 4 5 Times
Blocks null 5 2 Times
Minutes Played null 56 @ Utah 2/23/94
첫댓글 와 멋지당. 로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