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시다 기타로의‘장소적 논리’
이찬수 목사 / 비교종교학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성불(成佛)에 있으며, 불교철학의 요체 역시 그 성불을 어떻게 논리화하느냐에 있다. 성불이란 선의 종지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표현 되듯이 견성(見性)하는 것, 풀어 말해 “내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임[性]을 꿰뚫어 보는 것[見]”이다. 자신의 마음이라는 대상을 자신의 마음이라는 주체가 꿰뚫어 봄으로써, 인간과 부처의 원천적 동일성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 ‘봄’이 중요하다. 제대로 보아야 한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그 대상을 주체와 분열된 외계의 한 사물로 남겨 놓지 않고, 주체에 ‘즉’(卽)하여 보는 것이다. 주체와 대상간의 거리를 없앰으로써, 그 대상을 내 ‘안에서’ 보는 것이다. 그것이 그 대상을 대상으로 제대로 ‘보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타파하고 순수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순수하게 제대로 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논의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복잡한 양상을 띤다. 오랜 무명의 습기로 인해 성불을 위한 수행을 시작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무엇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와 관련된 논의들은 다른 차원에서 사람들을 더욱 골치 아프게 만든다. 오랫동안 불교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두고 씨름해왔거니와, 내가 보건대는 쿄토학파 철학자들도 결국은 이 문제를 밝혀보려는 데 학문의 핵심을 두고 있다. 어떤 대상을 제대로 봄으로써 주 · 객 이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논리, 위의 표현대로 “경성의 논리”를 찾는 것이 불교철학의 일관된 관심사이자, 쿄토학파(京都學派)의 창시자이자 서양적 의미의 일본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 역시 이것을 철학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1. 순수경험 - 유일실재
니시다는 선(禪)에 입각하되, 호교적인 차원에서가 아닌, 서양의 선적 정신을 꿰뚫으면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을 하고자 한다. 서양적인 언어를 빌어서 견성(見性)의 그 ‘봄’을 철저히 철학화하려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다’는 것은 일단 ‘경험’의 문제다.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니시다는 ‘순수경험’의 차원에서 이 경험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한다. 니시다의 철학은 이 ‘순수경험’ 이론을 시작으로 ‘장소적 논리’에서 정점에 이르고, 역사적 세계에 대한 전적인 긍정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는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을 이렇게 말한다. “순수경험을 유일한 실재로 삼아 모든 것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순수경험이란 “조금도 사려와 분별을 섞지 않은 참된 경험 그대로의 상태”, 주객미분의 경험이며, 주관적 선입견을 버리고 사실 그대로[性] 아는 것[見]을 말한다. 마치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저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하거나 소리란 악기의 울림이 공기의 진동을 통해 전해져 오는 것이라고 하는 따위의 반성적 사유 이전에 아름다운 음악에 심취되어 음악과 내가 하나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 때 음악은 단순한 감각(청각)의 대상이 아니다. 나의 감각적 체험과 하나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의 ‘견’(見)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았다”[照見五蘇皆空]고 할 때의 그 “보았다”[見]가 철학적 사변이나 논리의 결과가 아닌, 직관, 일체 사유 이전의 직접 체험인 것과도 같다. 니시다는 일체 반성적 사유 이전의 경험이 생겨날 때가 이른바 참된 실재가 현전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참된 실전의 현존으로서의 경험 그 차체에는 지 · 정 · 의(知 · 情 · 意)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주관과 객관의 대립도 없다. 주관이 곧 객관이고 객관이 곧 주관이다. 니시다에 의하면 주 · 객이 하나되어 있는 이 사태야말로 유일한 참된 실재이다.
이 참된 실재는 분명히 인간의 경험이다. 그리고 경험은 그 경험을 경험으로 받아들인 인간 안에서, 특히 인간의 의식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참된 실재가 현전하는 곳이 의식 ‘밖’이 아니고 의식 ‘안’이라는 말이다. 사태의 본질을 대상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철저하게 주관 안에서 주관과 하나 된 대상으로 파악하려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듯이, 니시다 역시 순수경험 이론을 통해 경험 대상을 경험 주체 ‘안에서’ 그 주체와 하나 된 대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나 된 경험이 순수경험이고, 바꾸어보면, 순수경험 역시 ‘안에서’, 의식 ‘으로서’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순수 경험은 의식 현상이다. 그는 말한다. “의식 현상이 유일한 실재이다.”
그가 말하려는 의식 현상을 철저하게 실천적이고 능동적인 것이다. 밖에서 들어온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 현상을 일으키는 주체는 의식 외부에 있지 않다. 의식이 순수 경험이자 ‘유일한’ 실재이려면, 의식이 주체와 대상으로 분열되지 않고, 의식 자체가 스스로를 의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 그루의 나무를 관찰할 때, 나와 분리된 나무를 대상적으로 분석하는 태도가 아닌, “관찰자 자신이 바로 그 나무가 되어서 그것이 내면적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자신이 느끼는 것”과 같다. 나무 ‘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굳이 인식이라는 표현을 쓰자면, 나무‘를’ 체험하는 ‘행위적’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능동적인 의식이며, 풀어 말하면, ‘의식된 의식’이 아닌 ‘의식하는 의식’이다.
‘의식된 의식’은 의식 주체와 분리되고 대상화된 의식이다. 내가 내 밖에 있는 나무를 의식한다고 할 때처럼, ‘나’ 라는 의식 주체에 의해 수동적으로 대상화된 의식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대상화된 의식은 의식 주체와 분리되어 있으며, 의식 주체라고 여겨지는 것마저도 그렇게 여기는 주체와 분리되어 여전히 대상성을 면치 못한다. 그러한 의식은 여전히 의식 자체와 떨어져 있고 주 · 객이 분리되어 있는 까닭에 사태에 대한 진정한 파악이 되지 못한다. 분열된 의식의 단편일 뿐이다.
니시다에 의하면 ‘의식된 의식’이 아닌, ‘의식하는 의식’ 이야말로 참 실재다. ‘의식된 의식’이 수동적 의식이라면, ‘의식하는 의식’은 능동적 의식이다. ‘의식하는 의식’은 대상화된 의식도 아니고, 단순한 주관적 관념도 아닌, 주체의 의식 ‘안에서’ 바로 그 의식으로 현전한 참된 실재이다. 의식 안에서 실재가 현전한다는 것은 의식 현상 자체가 바로 참된 실재의 현전이 된다는 말이다. 이 곳에서는 의식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다. 주 · 객이 일치하는 하나의 사건이 있을 뿐이다. 그는 말한다. “자기의 의식 상태를 바로 경험할 때 그것은 아직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는, 지식과 그 대상의 전적인 합일이다.” 이러한 합일로서의 사건이 주체의 입장에서 표현하자면 자각이다. 자각은 철저하게 능동적인 것이다. 그 어떤 대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신을 자기 속에서 보는 것”이고, 스스로 아는 것[自知]이다. 이것이 자각이며, 구원이고 해탈이다.
2. 장소적 논리 - 판단의 문제와 절대무
어떤 사물을 바로 그 사물로 보고, 어떤 경험을 참으로 그러한 경험이게 하는 것은 의식하는 의식, 순수경험, 즉 능동적 자각에서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의식하는 의식 혹은 순수경험은 그 자체로 유일한 실재이다. 의식하는 의식 혹은 순수경험이 유일실재와 주객도식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의식하는 의식, 순수경험이 유일실재 바로 그것이기 위해서는 유일실재가 의식 '안'에서 의식 '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거나 거꾸로 의식 혹은 경험이 실재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물론 실재와 의식이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바로 그 의식으로 성립하는 바로 그것이 순수경험이자 유일실재라는 말이다. 그것은 외부적인 힘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능동적인 것이다. 그래서 '의식하는' 의식이라 하는 것이다. 실재 혹은 의식이 서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드러내는 '장소'가 되는 셈이다.
니시다는 이 '장소'(Topos) 개념을 이용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 나간다. '장소'는 니시다 이래로 쿄토학파에서 핵심으로 사용하는 공간적 은유이다.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가 「금강경」에서 힌트를 얻어 창안한 "즉비"(卽非)의 논리에서의 "즉"도 모순되는 양 극단의 통일을 이루어주는 점[点] 또는 곳[所]이라는 공간적 이미지를 지닌다. 나시다에 의하면, 장소는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그러한 사물이나 사건으로 현성하게 해주는 곳이다. "의식 바로 그 안에서 의식을 안으로부터 초월하면서 대상화되지 않은 의식을 성립시켜주는 동시에 의식된 대상의 존재도 성립시켜주는 근거이다. 이 장소 안에서 주 · 객은 일치한다. 니시다는 이러한 입장이 단순한 주관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철저하게 논리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휘포케이메논’(hypokeimenon, 基底, 基體) 개념을 빌려오면서 “장소적 논리”로 다듬어 나간다.
휘포케이메논은 자연 존재의 근저에 있는 것[基體]이고,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 자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술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체 판단의 문법적 주어이다. 그런데 주어는 언제나 그보다 보편적인 술어에 의해 포섭될 때 비로소 주어로서 성립된다. 하나의 판단이 성립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령 형식논리학에서 “개는 포유류다”라는 판단을 내릴 때, 특수한 주어인 개는 포유류라는 보편적 술어에 포섭됨으로써만 타당성을 얻는다. 하지만 과연 포유류라는 보편적 술어가 개라는 특수한 주어를 ‘온전히’포섭할 수 있을까? 포유류란 개로서의 특수성과 구체성을 탈락시켜버린 추상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포유류에는 개만 속한 것이 아니라, 고양이 , 코끼리 심지어 고래도 있는데··· 니시다는 이런 식의 의문을 던지면서, 주어의 측면 보다는 술어의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휘포케이메논을 역으로 생각하여, 술어는 되지만 주어는 될 수 없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런 뒤 인간을 포섭하여 인간의 궁극적 주체가 되는 초월자에 그것을 적용한다. 니시다에 의하면, 초월자는 주어를 주어 되게 해주는 술어적인 것이다. 그는 이것을 “술어적 측면”이라고 부른다. 초월적 술어면은 어떤 대상을 바로 그 대상으로 성립시켜주는 근거, 장소와 같다.
여기서 장소(topos)일단 특수와 보편의 관계로 말하자면, 특수한 것을 근거짓고 감싸고 있는 보편과 같다. 이것은 “개는 포유류다”라는 판단이 ‘개’ 라는 특수와 ‘포유류’라는 보편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다. 포유류라는 보편은 개라는 특수를 감싸는 장소와 같다. 이 때 개라는 특수는 판단의 주어면이고, 포유류라는 보편은 판단의 술어면이다. 이 “개는 포유류이다”라는 명제는 그 “~이다”라는 판단이 진정으로 성립하려면 포유류라는 보편이 개라는 특수로 “스스로를 한정해야” 한다고 니시다는 본다. 이것이 니시다 사유 구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개는 개를 개로서 성립시키고 있는 포유류가 스스로를 한정하고 스스로 개로서 특수화할 때만 비로소 개일 수 있다는 입장, 즉 “개는 포유류이다”라는 판단이 참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보편이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한정하여 특수가 되는 곳에서 특수와 보편 간에는 긴장과 알력이 없다. 특수가 보편이고 보편이 특수다. 그러면서 동시에 참으로 특수이면서 참으로 보편이 되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니시다의 판단 이론에서는 그 판단에서의 술어가 자기를 한정함으로써 주어와 술어가 원칙적으로 하나 되어 있고, 또 하나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시간의 상에서 말하자면, 이곳은 영원이 순간 안에 스스로를 한정한 ‘영원한 순간’, ‘영원한 현재’이다. 그 무언가를 “안다”고 하는 것도 이런 구조를 지닌다. 앎이란 특수가 보편 속에 감싸이고 둘러싸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편이 특수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한정하는 것이다.
니시다에 의하면, 이 때 보편이 스스로를 한정하면서 일체 존재의 다양성과 차별성을 그대로 긍정할 수 있으려면, 보편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안으로부터 차별을 전개해나가야 한다. 이것은 자신을 부정하면서 자기를 외화하고 지기 자신으로 돌아온다고 하는 헤겔의 ‘이데’(Idee)와도 유사하다. 하지만 니시다에 의하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차별성과 다양성으로 현전하는 보편은 유(有)가 아니라 무(無)이어야 하며, 그것도 유에 대립하는 ‘상대적 무’가 아니라 이들을 포괄하는 “절대무”이어야 한다. 그는 바로 이런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 절대무는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공(空)의 니시다적 표현이다. 니시다의 표현에 따르면, 절대무는 모든 개체와 특수를 생생하게 자신 안에 포괄하는 “장소”이다. 역으로 장소(보편)는 절대 ‘무’인 까닭에 장소 안에 있는 것(특수)으로 스스로를 한정하면서도 그것을 해치지 않는다. 일체 사물은 이 “절대무의 장소” 위에 있다. 절대무의 장소는 자기를 한정함으로써 개체를 포섭하는 궁극적이고 “초월적 술어면”이다. 그것은 보편적 절대무(술어)이기에 구체적 특수(주어)로 자신을 한정하고도, 아니 그렇게 자신을 한정함으로써 참으로 하나의 판단이 성립되는 것이다. “개는 포유류다”라고 하는 판단에서 포유류라는 보편(술어)이 개라는 특수(주어)로 자신을 한정한다는 말이다. 그때야 비로소 “~이다”라는 판단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만물이 만물되게 해주는 것은 만물을 만물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스스로를 한정하여 내어줄 때에만 가능하다. 이 때 만물을 만물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스스로를 내어줄 수 있으려면, 앞에서 말한 대로 무(無), 그것도 절대적인 무가 아니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물은 바로 이 절대무 위에 있기에 저마다의 고유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무는 만물의 만물됨을 그 자체로 살려주는 ‘장소’라 하는 것이다. 니시다는 이렇게 ‘장소’ 개념을 이용해 만물의 생생함을 그 자체로 살리고자 한다. 만물의 생생함을 살려주는 논리를 그는 “장소적 논리”라 부르는 것이다. 판단이라는 용어를 쓰자면, 한 판단을 참으로 그러한 판단으로 성립시켜줄 수 있는 논리인 것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