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194D0E164A39C47B61)
우리가 흔히 '일본의 美'라고 할 때 떠오르는 거의 대부분의 심미적 가치는 무로마치시대(1336~1573년) 때 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가끔 역사에서 보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한 욕망이 강할수록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문화를 낳기도 한다. 정벌을 위한 전쟁과 정적을 처단하기 위한 살인을 일삼던 사무라이들이 정권을 잡다 보니 역설적으로 이 시대에 일본을 대표하는 미적 가치들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무로마치문화를 두고 "우주의 본질과 닮은 듯이 보이고 싶어 온갖 노력을 다하는 허구"라 표현하기도 한다.
13세기 초 중국으로 부터 건너온 다례(茶禮)가 형식과 깨달음을 중요시 하는 다도(茶道)로 규정된것 또한 무로마치시대에 이루어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차를 마시는 행위와 더불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차를 마시는 공간 즉 차실(茶の間)이다. 차실은 매우 좁고 간결한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낮은 천정에 다다미 2~4장(2~3평) 정도의 크기였으며 도코노마(床の間)라 불리는 공간을 만들어 족자와 꽃병 하나를 두는 것이 장식의 전부였다. 입구 또한 낮고 좁게 만들어 반드시 무릎을 굽히고 몸을 웅크려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불교의 禪정신이 결합된 고도의 형식미와 조형미의 발원이라 하기도 하지만 혹자는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일종의 중립적 공간을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견해도 있다. 쌈질을 일삼던 사무라이들이지만 가끔은 밀약과 타협도 필요했을 것이다. 막상 만나기는 했지만 상대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그러니 중재자로서 스님 한명 앉히고 우두머리급 들만 속닥하니 모일 공간 정도면 된다. 혹시 이야기가 잘 안풀리더라도 칼질은 못하도록 천정은 낮추고 성질급한 쫄따구 들이 갑자기 뛰어 들어 오지 못하도록 입구 역시 낮고 좁게 만든다. ... 뭐 대충 이런 해석이다.
오늘날 일본은 과거에 만들어진 차실(茶の間) 가운데 세곳을 국보로 지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사진에 보이는 '다이안(待庵)'이다. 다다미 두장이 깔린 작은 공간에 족자 하나가 덩그러니 걸린 도코노마(床の間)를 배치하고 찻물을 끓이는 아궁이가 전부인 간결한 구조로 되어있다. 뭐 출발은 이렇게 소박했지만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인물은 '황금다실'이라는 엽기적인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24E7194A39C48965)
전남 강진에 가면 다산 정약용선생께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선생은 이 곳에서 10년의 유배생활을 보내는 동안,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제유표 등 500여권의 저서를 집필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하셨다고 한다. 유배라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그가 이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선비로서의 자세와 본분을 잃지 않은 의연함과 그 과정에서 결코 '풍류'를 잃지 않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초당에는 '다산4경'이라고 정약용선생의 손길이 직접 닿은 4가지 유적이 있다. 헌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중 세가지가 茶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찻물을 얻기위해 파 놓은 약천(藥泉)과 찻물을 끓이던 부뚜막인 다조(茶竈) 그리고 차 한잔을 마시며 바라보던 연못인 연지(蓮池)가 그것이다.
가끔 차를 즐길 뿐 차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장황하게 일본의 차실(茶の間)과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얻급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이곳이 한국과 일본의 茶문화를 비교할 수 있는 상직적 공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실이 구도와 깨달음의 공간이라면 다산초당은 안식과 풍류의 공간이다. 다도가 맞느니 다례가 맞느니 하는 전문적인 영역의 문제는 잘 모르겠지만 다산초당을 가보면 생활의 여유를 찾기위한 방편으로 차를 즐겼던 우리 선조들의 방식이 훨씬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불교니 유교니 주자학이니 성리학이니 익히고 깨쳐야할 진리가 산적해 있던 우리로서는 차 한잔 마시는 것에 까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학문의 공간과 놀이의 공간이 절묘하게 배치되어 있는 다산초당을 보면 풍류를 아는 조상들의 감성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다만 한가지 아쉬움 것은. 차를 통해 道를 구하던 조상의 후손들은 생활속에서 차를 즐기는 반면, 생활 속에서 차를 즐기며 禮를 배웠던 조상의 후손들은 거꾸로 차를 떠받드는 괴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34DE184A39C49550)
지난 5월초 후쿠오카를 방문했을 때, 구시다신사(櫛田神社)에서 때마침 햇차(新茶) 시음회가 열렸다. 물론 공짜다. 나그네는 이런 공짜 기회는 무조껀 활용하고 봐야된다. 특히 먹는 것은 이유불문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484C164A39C4A086)
시음회에서 나온 차는 우리네 녹차와 비슷하고 5월 초순에 출시되는 전차(煎茶, 센차)다. 흔히들 일본 그러면 가루차인 말차(抹茶)를 생각하는데 사실은 이 전차가 전체 유통량의 85%를 차지한다. 햇차 답게 선명한 빛깔과 풋풋한 풀내음이 인상적이다. 자연의 힘과 사람의 노력이 함께 만들어낸 이런 차를 두고 내것이 좋네 네것이 좋네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국에서 왔다는 녀석이 '오이시~ 오이시~'하며 차를 홀짝 거리는게 대견스러웠던지 이것저것 자꾸 우려 준다. 시음에 정신이 팔려 "사진 따위 필요 없어!"하는 바람에 부득불 찍힌 사진을 낼 수 밖에 없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4BB3164A39C4AB3B)
구시다신사에서 일하고 있는 신관들에게 사진 한번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같이 안찍으면 죽어도 찍지 말라길래 어쩔 수 없이 같이 섰다.
참고로 일본에는 7만9천개의 신사가 있고 8만개의 사찰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신사는 '국가신도'로 지정되어 내무성의 감독을 받으며 국비지원으로 운영되는 반면 불교는 문부성 종무과 소관으로 국가의 지원이 아닌 자체 재정으로 운영된다. 즉 신사는 국가기관이고 사찰은 종교기관인 것이다. 따라서 사찰의 주지인 주쇼쿠(住職)는 세습이 가능하지만 신사의 주지격인 신쇼쿠(神職)는 대학에서 신도를 전공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임명을 한다. 물론 사진에 보이는 이 친구들은 아르바이트 정도 되겠지만.
![](https://t1.daumcdn.net/cfile/cafe/174378174A39C4B42B)
시음회가 열리는 한편에서는 일본 다도의 정통 유파 가운데 하나인 남방류(南坊流)의 다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5087164A39C4C026)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시연회를 준비하고 있고...
![](https://t1.daumcdn.net/cfile/cafe/19469C164A39C4CB4B)
일반인들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 같아 일본의 전통 다도(茶道)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가 궁금해서 한번 경험해 보기로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437C184A39C4D53A)
1인당 3백엔을 내면 차 한잔과 화과자(和菓子, 와가시)를 먹을 수 있다길래 그 정도쯤이야... 싶어 티켓을 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7CA194A39C4E82B)
자리를 잡고 앉으니 우선 화과자의 일종인 네리키리(練り切り)가 나왔다. 앙금, 찹쌀가루, 색소를 이용해 다양한 형태를 만드는 네리키리는 화려한 일본 식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음식이다. 네리키리는 특히 계절감이 중요한데 아무래도 봄이다 보니 노란색과 연분홍색을 이용해 벚꽃의 느낌 살린것 같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4370174A39C4F621)
다도에서는 네리키리 하나 먹는 것에도 법도가 있단다. 왼손으로 과자를 받친 다음 오른손으로 대나무꼬치를 사용해 칼로 베듯이 직각으로 잘라 먹어야 한단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399A174A39C5016B)
이렇게...
![](https://t1.daumcdn.net/cfile/cafe/19449C164A39C50C47)
과자 먹는 법을 배우고 나니 찻사발에 담긴 말차(抹茶, 덴차) 한잔이 나온다. 말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색깔 하나 만큼은 정말 매력적이다. 게다가 에스프레소의 크레마 처럼 잘 만들어진 거품이 입맛을 당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오랜 시간 길들여진 흔적이 역력한 찻사발(茶碗, 다완)의 형태와 빛깔이다. 소박한 빛깔과 뭔가 부족해 보이는 듯한 형태는 그래서 더욱 사람의 마음을 머물게 한다. 특히 새것이 아니라 이처럼 세월의 때가 묻은 것일 수록 더욱!
![](https://t1.daumcdn.net/cfile/cafe/134C1C154A39C51764)
차가 나오자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남방류 정회원의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뭔 소린지 대충대충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언어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 단아한 중년여성의 매력에 정신을 뺏긴 탓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32E1194A39C5252A)
설명을 듣고 시키는 대로 차 한잔을 마시자니 이건 말그대로 시음이 아니라 도를 닦는 느낌이다. 온 몸은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어깨와 목덜미는 갑자기 결리기 시작하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47AD164A39C5305B)
어정쩡하기 짝이 없는 취생몽사군의 자세를 이 친구들은 아주 재밌다는 듯이 지켜 본다. 문화라는 것이 경험하기 나름인 것이라, 어린 친구들의 자세와 표정이 내 보다 훨씬 여유롭다. 웬지 배운집 자식들 같은 티가 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3020174A39C54355)
니 문화든 내 문화든 할 것 없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몇 모금 홀짝홀짝 맛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굳었던 몸이 가벼워 지고 차맛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4788184A39C55234)
일본의 다도는 형식에서 시작해 형식으로 끝난다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다 마신 찻사발을 건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화과자를 받쳤던 종이 한장을 처리하는 것 까지도 법도와 예가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45E6164A39C56446)
생전 처음으로 다도(茶道)라고 하는 일본 전통문화의 한 단면을 경험해 봤다. 좋다 나쁘다는 선입견을 떠나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 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것이다. 소박하고 비어있는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고도의 숙련과 계산이 깔려있는 이러한 '형식미'도 그 나름의 매력은 있어 보인다.
그래도 차는 툇마루에 걸터 앉아 바람 한점 맞으며 여유롭게 마시는 우리네 녹차가 더 매력적이다.
아~ 갑자기 하동이랑 강진이 무지하게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