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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양의 문. 그 곳에는 베데스다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면 제일 먼저 그 못에 들어가는 이는 병이 낫는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베데스다 연못가로 몰려왔습니다.
그렇게 몰려온 이들 중에는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 곳에 38년 있었다는 것, 그가 두 살 때 그 곳에 왔다해도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겼을 것입니다만 최소한 10대 이후에 그 곳에 오지 않았을까 유추해보면 이미 환갑의 나이를 넘겼을 수도 있겠지요.
물론 그의 나이가 중요한것은 아닙니다.
38년이라는 세월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단지 육체적인 병을 고침에 초점이 있는 것인가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맨 처음 그가 베데스다 연못에 왔을 때는 병을 고치기 위한 열망이 무척이나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 년, 이 년 이렇게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는 조금식 지쳐갑니다. 그 곳에 온 사람들치고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베데스다 못이 움직일 때 남을 먼저 배려하여 넣어준다든지 하는 것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일 년, 이년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병자는 어떻게 생활을 했을까요?
구걸하는 생활이었겠지요. 병을 고치기 위해 왔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병을 고치겠다는 생각보다는 구걸하여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 지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자그마치 그 세월이 38년이 되었습니다.
38년, 그 곳에서는 아마도 최고참이었겠지요.
가장 좋은 자리에서 고참대우를 받으며 살았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제 38년 된 병자는 이제 그 곳에서 환자로 구걸하며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졌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것을 '고정관념'이라고 표현해 봅니다.
38년 동안 옳다고 생각하던 것,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바꾸기가 쉽습니까?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합리화를 하고,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죠. 결국 자신의 일은 모두 로맨스가 되고 남의 일은 불륜이되는 이상한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38년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치유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38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고정관념이 예수님을 만난 후 깨어져 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기적이 아닐지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동안(몇 년이 되었든)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모든 삶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걸어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 그것이 회개의 의미가 아닌지요?
오늘날의 기독교가 자꾸만 흐리멍텅해지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야기를 육체적인 치유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있습니다. 남이야 어찌되든 말든 나만 고침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고침받지 못하는 이들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들을 진리인냥 고집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경우 기독교의 이름으로 모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예수님의이름으로 선포되어도 그것은 반기독교요, 적그리스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는 이들은 적그리스도, 하면 무슨 666이나, 바코드나, 영에이지음악,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일들을 합니다. 교묘하게 자기를 속이는 일에 익숙해 진 것이지요.
오늘 주일예배를 드리다가 목사님의 설교말씀 중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베데스다연못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일어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육체적인 치유보다 더 어려운 것은 우리 속에 내재되어있는 고정관념 같은 것, 자기 고집 같은 것들이 아닌지요.
예수님을 만난 병자는 자기가 왜 그 곳에 왔는지 다시금 자각을 합니다.
38년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얻었을지도 모를 기득권(고참대우, 구걸하기 좋은 자리 등등)을 다 포기하고 본래 그 곳에 온 목적을 상기합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병고침을 원하고, 고침을 받습니다.
자리를 들고 일어선다는 것, 38년 동안 누웠던 자리를 들고 일어선다는 것, 그래서 기적입니다.
기적의 사람들, 38년 아니 그 이상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을 예수님을 만나 다 포기하는 것, 내려놓는 것이 회심이요, 새 사람을 입는 것이 아닌지요.
생각해 보십시다.
저는 이제 40중반입니다만 고정관념, 내 고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내가 고집하는 것이 정말 신앙인의 줏대가 되는 것인지 늘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내 생각을 치장하는 위선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진정 주님 보시기에도 옳은 것인가?
이 질문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이건 내 생각이었어'라는 깨우침이 있을 때 그것을 깨드려버리는 용기, 그것이 내 삶에 주님의 기적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38년 된 병자처럼, 화석화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주님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깨뜨리게 하옵소서.
쉬운 일이 아니기에 주님의 손길, 주님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주여, 함께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첫댓글 아멘.
내게 있으나 내가 알지 못하는 화석화된 고정관념을 찾아내야겠네요..
위의 설교는 이번주 주일예배 중에 '박영주 목사님께서 전하신 말씀' 중 스쳐지나가듯 하신 말씀에 감동을 받고 작성한 설교문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