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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고난회 영성의 이해
1. 영성이란?
영성은 이론적이고,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살아있는 삶이다.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앞서 영성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일반적으로 영성이라고 말을 할 때, 그 안에는 일정한 형태의 생활양식이 들어있으며, 이 양식에 따라서 영성은 영성생활, 신심생활, 초자연적 생활, 내적 생활 등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인간행위를 유발하는 그 어떤 태도나 정신으로서, 구체화된 종교적 또는 윤리적인 가치를 총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영성이란 개념은 그리스도교뿐만이 아닌 다른 종교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신적 또는 초월적인 것들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으며, 영성생활은 각자의 종교적인 확신에 따라 그에 맞는 어떤 생활양식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생활의 다양성 만큼 영성에 대한 개념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성은 어느 누구도 ‘영성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시대와 환경에 따라, 각 개개인의 하느님께 대한 체험의 상이함과 각 신앙인의 삶의 환경과 방법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실천적인 생활이 있게 되므로 영성에서 실천적인 면인 체험은 별개의 것으로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 실천적인 체험으로 인하여 영성은 하나의 구체화된 생활양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처럼 구체화된 생활양식으로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게 됩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하여 영성생활은 발전하였고 이 과정을 설명하고자 노력한 결과 영성생활을 설명하는 신학적 토대인 영성신학이 형성되어졌습니다.
신앙은 인간적인 동기에서 시작되나 점차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걷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외적 내적 양상의 구체적인 생활표현을 영성신학에서는 영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영성이 경험적 실천적 요소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성은 결코 체험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험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체험의 구조와 그 역동성, 그리고 영성 생활과 관련하여 이것이 갖는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상태들을 밝혀내고자 진력하며, 적어도 이와 유사한 상황들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이론적인 진술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때까지 성찰을 계속합니다. 이 같은 성찰은 각 개인의 체험과 실천의 의미에 대한 개인의 통찰들에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개인적인 특정한 상황들에서 올바르고 분별 있는 결정들을 내리는 데는 의지의 올곧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정화되지 않고 제어되지 않은 그 자신의 신체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열망들이 보편적이고 올바른 판단들을 채색하여 오도하게 합니다.
따라서 영성은 분별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분별을 위해서는 의지의 올곧음에서 나오는 파악과 판단이 필요하듯이, 영성 또한 올바른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지의 올곧음과 질서지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는 자신의 추구들에 대한 철저한 파악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추구들은 결코 완전히 정화되지 않습니다.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생활의 정화는 영성 생활에 있어서 결코 끝이 없는 과제입니다. 체험에 있어서 아직 다 파악되지 않은 요소는 언제나 실천적인 지성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우리의 판단을 일그러뜨립니다. 결론적으로 영성으로 표현되는 실천적인 학문은 단순히 지성적인 시도인 것만이 아니라 인격 주체인 한 개인의 노력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개인의 영적 통찰은 인격 주체로서의 나의 개인적인 의지가 올바르게 방향 지어져 있을 때만이 비로소 신뢰할 만한 가치를 띨 수 있습니다. 이런 가치 있는 것들이 모여서 성찰과 비교와 판단을 거쳐 하나의 이론적 근거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체험과 비교와 관찰과 성찰과 같은 일련의 시도를 통하여, 그리고 여러 세기를 통하여 서서히 영성에 관한 실천적인 이론이 직조되었으며 하나의 학문으로 정착되어 나간 것입니다. 그 결과 영성은 이론적이고, 경험적이고, 실천적이라는 특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2. 영성의 초대
영성은 눈을 뜸, 즉 주의 깊음과 세심함에로의 초대이다.
다음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 곁으로 돌아오셨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너무나 지쳐서 눈을 뜨고 있을 수 없기에”(마태 26:43)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지쳐서 눈을 뜨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TV를 보면서 잠을 자며, 휴식과 긴장의 이완을 위해서 잠을 필요로 하며, 생활의 고리를 따라 잠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잠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샤워를 하고 일터로 나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자 사람들 속으로 달려갑니다. 우리는 교통신호등을 봅니다. 초록색이라면 우리는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가고, 붉은 색이라면 우리는 멈춰서 기다립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의식하지 않은 체 행하고 있습니다.”
영성은 눈을 뜸에 관한 것입니다. 완전히 눈을 뜬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놀라운 것입니다. 영성은 주의 깊음에 대한 것입니다. 매번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주의 깊은 사람들이 있음은 굉장한 일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사람은 세상 속의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귀를 가진 사람은 들을 수 있고, 눈을 가진 사람은 볼 수가 있고, 잠을 자는 사람을 깨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한 기쁜 소식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눈을 뜸은 문제의 뿌리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무엇인가에 대한 영성의 질문입니다. 영성은 올바른 의문에 관심을 가지고 묻기 위해 존재하는 감각입니다. 영성은 지성적인 단순한 내용을 넘어서는 성질을 요구합니다. 훌륭한 영성가는 사람들에게 가까운 사람, 창조적인 생각을 하고 듣는 사람, 어려운 일을 수용하는 사람, 실수를 함으로서 생기는 부담을 받아들이는 사람, 자기 자신을 쇄신하는 사람, 생활의 고리를 지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단순히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감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성은 삶에 대한 것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삶은 거대한 학교입니다. 생활의 열려진 공간이란 학급 안에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학급입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 배우셨던 학급이기도 합니다.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라고 저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깨우셨고,(마태 5:40-43) 라자로를 일으키셨습니다.(요한 11:39-4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잠을 자지 말라고 요청하셨으며,(마태 26:41, 4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면서,(마르코 14:35) 기도 하여라(루가 22:46) 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주의를 기울임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5:1-3) 예수님은 우리가 공중의 새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백합으로부터 배워서(마태 6:26-28) 주의를 기울임에 부족함이 없기를 강하게 원하셨습니다.
영성은 특화하여서 이루어진다. 특정한 상황에 진실해지기 위해서 영성은 지극히 세부적인 상황에 맞는 특화한 영성으로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특화한 영성은 기초적인 영성의 방식에 따라 이루어지고,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영성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며, 눈을 뜸에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눈을 뜨기를 원하십니다. 가끔 눈을 뜨지만, 일단 눈을 뜬다는 것은 여행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행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를 따른다 함은 눈이 멈, 귀가 먹음, 말을 못함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을 뜸은 어떻게 듣는지를, 어떻게 보는 지를, 어떻게 찾는지를, 어떻게 말하는지를 배운다는 것을 뜻합니다. 눈을 뜸은 서로 다른 시대, 장소, 문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잠들 때, 우리는 눈을 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눈을 뜨기를 원하십니다. "와서 보라.“(요한 1:39)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의 영성은 특정한 상황에 주의력을 갖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영성은 여러분이 있는 곳의 영성, 달리 말하면 특화한 영성을 의미합니다. 영성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영성은 도구와도 비슷합니다. 현명한 사람의 손에 있는 못과 망치는 못과 망치이지만, 잠자는 사람의 손에 있는 못과 망치는 못과 망치가 아니라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못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도구를 사용함에 있어 이지적으로 그리고 내적인 목적에 따라 사용합니다. 그러나 잠자는 사람은 눈을 감은체로 도구를 사용합니다. 이런 어설픈 사용은 자신과 남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잠을 덜 깬 사람에게 위험한 도구를 손에 쥐어져서는 안 됩니다. 영성은 온전히 깨어 눈을 뜸을 무엇보다도 첫 걸음의 시작으로 여깁니다.
3. 영성의 관심
영성은 예수님을 뒤따르는 길이다. 영성은 예수님과의 우정을 그리고 하느님과의 친교를 추구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희망의 여정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성은 우리가 공부와 묵상을 함으로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영성가는 창조주의 포도밭에서 열매를 맺으리라는 희망으로, 지성적인 진실로서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희망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영성가는 성령의 인도에 대한 신뢰로 충만합니다. 영성가는 하느님과 공동체를 신뢰하지 우리들 자신의 지성적인 자아신뢰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크나큰 희망보다 적습니다.” 이것은 세상 속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신비와 더불어 일하는 영성가들에게 있어 특별한 진리입니다.
궁극적으로 영성가는 사람들을 하느님 가까이로 이끌고자 합니다. 영성은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가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흔히 속삭임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흔히 감춰져 있습니다. 영성은 세심함, 주의 깊음, 깨어있음의 태도를 요구합니다. 영성은 영적인 행위로 단순히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며 세상 안에 계신 하느님 현존의 빛으로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 입니다.
영성은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다른 다양성을 만들기에 우리 삶에 주목하는 것이다.
영성은 우리,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과의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영성은 우정의 표현 입니다. 영성은 하느님이신 분의 빛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영성은 하느님 창조의 빛 속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우리와 함께 하는 하느님 생명의 빛 속에서 하느님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영성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영성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혹은 거대하고 죽은 물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영성가는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탐험하는 모험가가 아닙니다.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과학적인 탐사는 없습니다만, 신학적인 조사는 있으며 우리 인간 상황을 다룹니다. 영성은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이지 푸줏간 주인이 고기 조각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 하는 식으로 대상을 측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은 멀리 떨어진 대상에 주목하는 것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우리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영성은 궁극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삶에 주목하며, 마치 우리의 삶이 재료인 듯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영성의 질문은 삼위일체를 어떻게 진술하느냐에 있지 않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느냐에 있으며,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있느냐에 있지 않고 우리 삶 가운데서 하느님의 친구들의 존재를 어떻게 볼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영성의 궁극적인 질문은 생활의 질문이자 삶과 죽음의 질문입니다.(신명 30:19)
4. 영성의 발전
오래 전부터의 전통에 따라 보통 ‘영성 생활’은 어떤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영성 생활을 할 때, 그는 ‘조명 - 정화 - 일치’라는 단계를 거치면서 자신의 ‘영성 생활’을 완성해 나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조명’은 글자 그대로 ‘빛을 받는 것’입니다. 곧, 영성 생활의 초입은 하느님의 빛,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정화’는 ‘자신의 때를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빛,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다 보면 자신에게 속해 있는 많은 것들을 벗어버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벗어버림이 바로 ‘정화’입니다. 이 ‘정화’는 자신 스스로가 하는 것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도 있습니다. ‘일치’는 모든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영성가들이 저희 가톨릭 안에서 생활하였고 생활해 오고 있습니다. 그 많은 영성가들의 삶이 각기 다 독특하지만, 광범위한 영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바라볼 때, 모든 영성 생활은 위에서 이야기 한 ‘조명 - 정화 - 일치’의 단계를 거쳐간다고 신학자들은 정의합니다. 혹자는 이 단계를 구태의연한 표현을 피해서 마치 산을 등정하는 것(가르멜의 산길, 칠층산), 어둔 밤길을 걸어가는 것(어둔 밤), 어떤 성에서 가장 깊숙이 숨겨져 있는 비밀스러운 방으로 들어가는 것(완덕의 길)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어떻든 저희 각 개인의 영성은 하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완성점은 각 개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일치점을 갖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영성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대하여 보통 조명-정화-일치라는 세 가지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본래 이 세 단계는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에서 시작되었으나, 이 개념이 그리스도교에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영성의 성장 단계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애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창세기의 7일간의 창조설화를 통해서도 이와 같은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 1 일
창세기의 제 1 일의 과정은 창세기 1:1-5까지의 내용에서 나타납니다. 이 내용에서 몇 가지 용어에 주목할 수 있는데, 땅물하느님의 기운빛입니다. 땅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물이 그 위를 덮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운이 그 위를 떠돌고 있었고 ‘빛이 생기라’ 하니 빛이 생겼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우리 각자가 영성적 삶의 과정에서 처음으로 겪게 되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영적인 삶을 살고자 열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 길로 이끌어 갈 바탕이 아직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마음 안에 무엇인가 아련한 느낌을 느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느낌은 자신과 세상의 혼돈으로 가려져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 느낌이 표면에 떠오르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주어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일을 행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는 이 말에 의해 문득 자신의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되고 마음 안에서 떠도는 느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곧,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첫걸음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영혼의 성’ 가운데 제1궁방에서 이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것, 우리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실이야말로, 크나큰 불행이요 부끄럼이 아닐 수 없습니다.”(영혼의 성, 1궁방, 2항) 계속해서, “자기를 안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 다른 궁방으로 옮아서 날아 가기에 앞서, 자아 인식의 자리인 이 궁방으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우선 제일 급하고 가장 급한 일이니, 이것이 바로 제 길인 까닭입니다.”(영혼의 성, 제1궁방, 제1장 9항)
자아 인식이 왜 중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각 개인이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가지 체험들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 어딘가에 왜곡된 것과 부정적인 것이 고착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왜곡된 것이 바로 잡혀지지 않는 한, 이미 앞에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그것은 우리의 삶과 생각과 태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하여 인식함으로서 자신 안에 왜곡된 것과 부정적인 것이 없는지, 비록 당장에는 바로 잡을 수는 없을지라도 어떤 것이 왜곡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 그에 대처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행동과 생각 양태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 이냐시오에 의한 영신수련 또한 맨 처음의 과정을 자아 인식에 두고 있습니다.
제 2 일
제 2 일의 내용이 나타나는 창세기 1:6-8에서 주목하게 되는 용어는 ‘갈라져라’입니다. 일단 자아 인식을 통하여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된 개인이 행하게 되는 첫 번째의 행동이 ‘가름’입니다. 즉, 자신 안의 왜곡된 것과 부정적인 것 등을 그 외의 다른 것들과 갈라 놓고 없애버리려고 노력합니다.
여기서 생겨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왜곡됨과 부정적인 것을 다른 것과 ‘갈라’ 놓고 없애려고 노력하는데서 생기는 죄의식과 이로 인한 싸움에서 생기는 평화의 파괴입니다. 영혼의 성 제2궁방에서는 “우리가 우리 집에 있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제 집에서도 편안할 수 없는 몸이, 남의 집에서 편안하기를 어떻게 바라겠습니까? 싫든 좋든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가장 친한 벗들과 집안 식구, 즉 말하자면 영혼의 모든 기능이, 마치 우리가 저지른 잘못들이 그것들에게 도전을 한 것처럼, 우리한테 싸움을 거는 듯하니 말입니다.”(영혼의 성, 제2궁방, 9항)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위의 이 같은 상황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늠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상들과(이것들 대부분은 우리들의 경향부모들의 환경적 영향그리고 사회적인 요소들에 토대를 두고 있는 성장과정에서 창조된 것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맞지 않을 때 생깁니다. 불행히도 내면화되어 받아들여진 이런 이상들은 종종 잘못되어 있거나 적어도 과장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이 이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할 때 왜곡되게 되고 부정적인 죄의식은 더욱 커져만 가게 됩니다.
제 3 일
창세기의 삼일 째 과정에서 주목할 요소는 마른땅이 드러나고 물이 한 곳으로 모인 내용입니다.(창세 1:9-10) 이틀째에 있었던 ‘가름’이 더욱 확실해져서 이제는 완전하게 땅과 물을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자신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틀째부터 시작된 개인의 ‘가름’에 대한 노력으로 우리는 완전하게 자신 안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구분할 수 있게 된 것같이 보입니다. ‘가름’을 위한 투쟁은 일단락 지울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자신의 자아 안에 감추어진 것을 이제는 다 알게 된 것처럼 느끼며 문제점을 의지에 의해서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거와는 달리 마음 안에 평화를 느낍니다. 한편으로 이 단계는 ‘가름’의 싸움에 지쳐서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문제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그 문제는 더 심각한 것이 되지, 결코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서 그 문제에 집착하기보다는 일단 벗어나서 잠시 잊어버리고 자유스러워지고자 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여기서야 몸 편할 날이 없고, 편한대야 별것이 아니지만, 허나 건강을 돌보다가는 스스로 속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몸 걱정을 하면 할수록 그만치 건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영혼의 성, 제3궁방, 2장 8항) 라고 말합니다. 내면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제 4 일
사일 째 되는 날, 땅에서는 온갖 식물들이 자라합니다.(창 1:11-13) 여기서 우리 각자는 문제를 알고 다스릴 수 있게 되었든 혹은 잊어버리고 자유스러워지게 되었든 간에 그는 자신의 부정적인 것을 보지 않고, 어느 정도 그 문제를 껴안을 수 있게 되어 일종의 타협을 하고 긍정적인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결과, 자신의 긍정적인 것에서 많은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영적 생활에서 많이 진보한 것처럼 생각하고 즐거워합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삶에 어떤 지표를 세우고 그것을 따라 가게 됩니다.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 밤과 낮을 갈라놓고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창 1:14) 그리고 이 표를 따라 행하는 것에서 기쁨과 만족과 평화와 행복을 느낍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은 표의 형식 속에 빠집니다. 그러나 자신은 계기가 있기 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대 데레사는 이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궁방들에는 독한 짐승들이 들어오기는 아주 드문 일로서, 설사 들어온대도, 해를 끼치기는커녕 도리어 영혼은 소득을 보게 됩니다.....악마가 하느님이 주시는 영혼의 맛 속에 끼어들어 속임수를 쓰고....언제나 자기도취의 황홀경에 빠지게 하므로 영혼에 덕 되는 것이 없게 만들어 놉니다.”(영혼의 성, 제4궁방, 1장 3항)
제 5 일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이 움직이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다스리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 거기서부터 자유로와졌다고 생각한 것, 없애려고 애를 썼던 여러 가지 문제들입니다. 이것들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내면 안에서 많은 새끼들을 치고 있다가 드디어는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 다녀라.”(창 1:20)
그러나 지나간 시간 동안에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힘이 생김과 더불어서 새로운 자각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혼돈의 깊은 심연 안에 깊이 빠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거기서부터 새로운 것을 깨닫습니다. 즉,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에 악이 있을 수 있고, 악에 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을 형성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불가분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칼과 같은 자신의 나쁜 점은 보다 좀더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며, 자신의 모든 것이 축복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것들에게 복”(창 1:22)을 내려주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제 6 일
자신 안의 모든 것이 이젠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되어 각기 열매를 맺고 번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자신 안에 통합시킨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창 1:26)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겐 문제가 되거나 혼란의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며, 그것 모두는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일부분임을 진정으로 알게 되어 어느 때이든지 그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게 됩니다.
제 7 일
하느님께서 이렛 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신 것처럼(창 2:2), 이제 영성적 삶에서 통합화한 우리 각자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쉽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 안에 있는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반석과 같아 하느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서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병행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흐름은 ‘하느님의 흐름’이고, 다른 흐름은 ‘인간의 흐름’입니다. 이 두 가지 흐름을 바라보면, 앞의 모든 이야기들이 성서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흐름을 가장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출애굽’과 ‘4복음서’입니다. 출애굽에서 나타나는 사건의 흐름은 4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예수님 행적의 흐름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교로서 저희는 ‘영성 생활’의 단계를 좀더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살펴봅시다.
모세의 탄생 예수의 탄생
이스라엘 어린이들의 죽음 베들레헴 주변 어린이들의 죽음
사명의 인식 사명의 인식
(에집트 관리를 죽임) (예루살렘 성전의 대화)
미디안 광야에서의 삶 나자렛에서의 삶
홍해를 건넘 요르단 강의 세례
광야에서의 40년 광야에서의 40일
하느님께서 장막 가운데 하늘나라가 너희에게 다가왔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심 당신의 말씀과 기적
모세의 죽음 예수의 죽음
가나안 입성 부활
5.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생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의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생애를 살펴봅시다. 창립자의 생애를 살펴보는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영성’이란 삶에서 시작하고 삶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고난회의 ‘영성’을 알고자 하려면, 먼저 창립자의 생애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세세히 살펴 볼 수는 없고 간단한 바이오그라피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694년 1월 3일몰락한 귀족인 부친 루카 다네이와 모친 안나 마리아 마사리 사이에서 태어난 16형제 가운데 둘째로 이태리의 오바다에서 출생.
1694년 1월 6일바오로 프란치스코로 영세를 받음.
1701 - 1709년주로 크레몰리노에서 거주.
1709 - 1714년제노아, 오바다, 캄포 리구레에서 거주.
1715년 2월 20일한 본당신부의 강론을 듣고 회심.
1715년 터어키가 그리스에 승리를 거두고 베네찌아 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하자 교황은 그리스도교 왕국을 구할 젊은이들을 모집. 창립자는 베네찌아 군에 자원입대하였으나 여러 달 후, 하느님의 뜻은 이 길이 아님을 깨닫고 군인의 길을 포기.
1719년 4월 23일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가티나라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음.
1720년 5 - 6월소명에 대한 일련의 계시를 받음.(은수자)
1720년 11월 21일수도복을 입고 카스텔라죠 성 찰스 성당에서 40일간의 영적 피정을 시작함.(1720. 11. 23. - 1721. 1. 1.) 이 기간 중에 영적일기와 미래 수도회를 위한 규칙을 작성.
1721년 1월 25일주교는 창립자에게 카스텔라죠 교외의 성 스테파노 경당을 그의 은수처로 정해주고, 사도적 활동을 허락하였으나 동료를 모으는 것은 허락하지 않음.
1721년 4월 18일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장소를 찾기 위하여 주교로부터 안전통행권을 받고 거주지를 떠나 바랄로로 순례.
순례를 끝내고 카스텔라죠로 돌아와 로마로 갈 기회를 기다림.(수도회 설립인가를 받기 위함)
1721년 9월로마로 여행. 교황을 알현하려 바티칸으로 갔으나 경비원에 의해 쫓겨남.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성 루카가 그린 그림으로 알려진 복되신 동정 성모화 앞에서 ‘고난의 신심’에 대하여 서원을 발함.
1721년 11월 28일창립자의 동생 요한이 고난의 수도복을 입음.
1722년 2월 22일카스텔라죠를 떠나 몬테 아르젠따리오로 감.
1722년 11월 21일몬테 아르젠따리오에서 영적 혼인의 결합을 체험. 자신의 소명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가지고 불타오르게 됨.
1725년크레스첸지 주교의 주선으로 나비첼라에서 베네딕도 13세 교황을 알현. 교황은 동료를 모으는 것에 대한 바오로의 청원을 구두로 허락.
1726년 9월크레스첸지 주교와 코라디니 추기경이 로마의 성 갈리가노 병원에 보금자리를 제공하자 창립자와 요한은 로마에서 체류. 추기경의 제안으로 신학공부를 시작.
1727년 7월베네딕도 13세로부터 서품을 받음.
1728년로마를 떠나 몬테 아르젠따리오로 옴. 지원자들을 모으기 시작함.
1730년초기의 5명 지원자가 모두 떠남. 창립자의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인 순회 설교가 시작됨.(첫 순회 설교기간은 크리스마스때부터 다음 해의 재의 수요일까지. 두 번째는 부활절에 시작하여 성 요한 사도축일까지. 세 번째는 9월 15일부터 대림절까지.)
1737년 9월 14일몬테 아르젠따리오에 첫 번째 수도원을 축성.(성모자헌수도원)
1738년 1월 22일두 형제는 소아나 교구에서 시간과 공간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권한을 받음.(설교, 전대사 등)
1739년크레첸찌 추기경의 소개로 후에 클레멘스 13세 교황이 는 레조니끄 추기경과 인연을 맺음.
1741년 5월 15일베네딕도 14세 제약된 회칙을 승인. “예수 고난회는 교회에서 제일 먼저 설립 되었어야 할 수도회이건만 이제야 설립되게 되었다.” “이 수도회의 유일한 목적은 순회설교로, 특별히 덜 건전한 지역과 문화적으로 미개한 지역이나 섬들 등 다른 선교회들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서 설교한다.” 수도회 조직이 승인된 것은 아님.
1744년 3월 6일베트랄라에 수도원을 설립.(성 안젤로 수도원)
1744년 3월 8일소리아노에 수도원을 설립.(성 유티키우스 수도원)
1744년 말보다 완전한 회칙의 승인을 위해 로마로 감. 장엄서원을 발할 권한을 얻고 수도회를 면속 수도회의 반열에 올리기 위한 것. 이에 대해 로마는 단순 서원과 종신 서원만을 인정함.
1746년 3월 31일베네딕도 14세는 회칙을 승인하였으나 수도 단체의 승인은 보류.
1747년 4월 10일몬테 아르젠따리오에서 새 회칙에 따른 총장을 선출하기 위해 총회를 염. 비로소 수도회의 조직이 형성됨.
1748년 1월 14일체카노에 네 번째 수도원을 설립.
1748년 3월 27일투스카니아에 다섯 번째 수도원을 설립.
1748년 6월12개의 프란치스코 수도회들이 연합하여 체카노와 설립 예정에 있던 지역의 수도원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프란치스코회의 독점권)
1750년 4월 7일소송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승소하였으나 프란치스코회의 허가나 인가 없이 수도원을 건립할 수 있는 일반적인 허가 문제는 다루어지지 않음.
1751년 4월 2일팔바테라에 수도원을 설립.
1752년 2월 6일테라치나에 수도원을 설립.
1755년 11월 23일팔리아노에 수도원을 설립.
1758년 3월 19일몬테 카보에 수도원을 설립.
1758년 7월 6일레조니끄 추기경이 클레멘스 13세 교황으로 선임.
1759년창립자는 은퇴를 결심.
1760년클레멘스 13세는 창립자의 장엄서원 청원에 대한 심의를 위해 추기경 위원회를 만듬. 형제들의 반대로 창립자의 청원은 기각됨.
1765년 8월 30일창립자의 동생이자 첫 번째 동료인 요한 신부 선종.
1769년 5월 19일간가넬리 추기경이 클레멘스 14세 교황으로 선임.
1769년 5월 25일창립자는 교황을 알현하면서 수도회의 승인을 청원. 단순 서원을 하되 교황 면속 수도회의 특권을 갖도록 승인해 주기를 요청.
1769년 11월수도회는 교서로 승인되었으나 회칙은 훈령으로 승인되어 장엄서원 없이도 면속 수도회와 같은 특권과 서품에 대한 자율성을 갖게 됨.
1770년 9월 3일예수 고난회 수녀들을 위한 회칙이 교황칙서로 승인.
1775년 9월 15일개정된 회칙이 교황교서로 승인.
1775년 10월 18일창립자 선종.
창립자 영성의 비밀은 본질적으로 창립자의 단식과 철야기도, 고행과 참회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통의 온전한 수용과 하느님의 뜻에의 일치에 있습니다. 창립자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열어 보인 길은 “포기의 길”이었습니다. 만년에 창립자는 자주 이런 말을 반복했습니다. “내 안에서, 그리고 내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뻐하십시오.” 50이 넘으면서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짐을 기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승복하심을 명확히 한 것은 겟세마니 동산에서입니다. 크리스챤이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승복함은 예수님처럼 고통을 받아들임을 통해서입니다. 창립자의 생애는 이를 향하여 걸어간 길이며, 자신을 포기하여 하느님의 뜻에 승복해가는 길이었습니다.
6.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의 영성
영성은 시대의 표징을 따릅니다. 그리고 시대의 표징은 각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창립자의 영성이 모든 시대에 똑같은 모습으로 적용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곧, 시대의 표징에 따라 재해석되어 적용되는 것입니다. 저희 수도회 역시 창립자의 영성을 재해석을 하고 적용시켜 왔습니다. 현재 저희 수도회의 영성은 1984년 개정된 회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에게 수도회의 영성을 설명드림에 있어 그 생각과 해석은 제 자신의 것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함께 생활할 동료들을 모으셨다. 초창기에는 그들을 <예수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복음적인 다른 권고들을 지키고, 기도에 항구하며 또한 십자가의 말씀을 끊임없이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이 복음적 청빈에 기초를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이 동료들이 <사도들처럼> 생활하며, 기도와 참회 그리고 고독의 정신을 길러서 하느님과 더욱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그분의 사랑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셨다. 자기 당대의 악을 예리하게 파악하시고, 가장 효과적인 구제수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임을 역설하시면서, 그분은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기묘한 사업>을 지칠 줄 모르게 선포하셨다.(회헌 1항)
1). 가난
가난은 고난회의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 영성의 중심을 이룹니다. 그렇지만 가난이 오로지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것만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도 당신 영성의 중심으로 삼으셨고, 사실 거의 모든 성인들에게 있어 그들 자신 만의 영성을 전개하는데 있어 가난은 가장 밑바탕이 되는 뿌리입니다.
이러한 가난이 나타내는 함축적인 의미는 모든 창조된 것으로부터 이탈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과 그 삶으로 인해 생겨나는 불편함을 참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함축적인 의미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단순히 생활을 검소하게 살거나, 가난한 경제 상황을 견디어 내거나, 물건 사용의 절약을 하거나, 작은 소유에 만족하거나, 현세 사물에 가치를 두지 않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거나 하는 의미만으로 받아들이면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런 의미 만으로의 가난은 굳이 고난회 혹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난은 보편적으로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생활 안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회의 가난은 어떤 모습일까요? 1747년 문서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문서는 “수도회는 사도들의 생활로부터 그 영감을 얻는다. 그들의 생활은 사도들의 생활과 비슷하다. 더 나아가 사도들의 생활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난회 가난의 모습은 사도적 가난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적 가난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의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사도적 가난의 모습은 앞에서 이야기 한 이탈의 정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깊이 있게 살펴보면 몇 가지 내용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길을 떠날 때’ 라는 말의 의미는 의미 그대로 ‘길을 떠남’ 이나,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가진 조건에 국한하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더불어 이 말씀 안에는 ‘지팡이, 여행 보따리, 빵, 돈, 여벌의 옷’ 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상의 ‘지팡이, 여행 보따리, 빵, 돈, 여벌의 옷’은 인간 세상의 보편적인 어떤 것들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하신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는 피조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을 의미합니다.
이런 면에서 가난은 벌거벗음과도 연관되어질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내용에서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어떤 차림으로 쫓겨났는지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는 벌거벗고 있었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창세 3:21) 이 내용은 ‘옷’의 존재를 저희에게 상기시켜 주는 내용입니다. ‘옷’은 참으로 여러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옷’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면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옷’이 가지고 있는 역할은 많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역할이라면 아마도 ‘가리고 꾸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가리고 꾸미는’ ‘옷’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을 때 에덴동산, 곧 하늘나라에 머무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가난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가 21:3) 그리고 주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같이 당신의 생애 가운데 두 가지 큰 사건을 통해서 저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가난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당신의 탄생과 죽음입니다. 주님의 탄생은 달리 표현하면 ‘육화의 신비’라 이야기 합니다. ‘육화의 신비’는 필리비 2:6-7에 나타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무죄한 이의 죽음으로 무죄의 모습에서 죄인의 모습으로의 변화가 있습니다. 이 두 사건에서 주님은 존재의 내어 놓음이란 가난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가난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태오복음 19:16-26은 신뢰의 중요성을 저희에게 보여줍니다. 영원한 생명을 찾고 있던 어떤 부자는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주님께 묻습니다. 처음, 주님께서는 계명을 지킴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 대해서 그는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또 묻습니다. 이 물음에 주님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대답하시며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말합니다. 어떤 부자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생각한다면, 사람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그가 갖지 못한 한 가지는 바로 주님께 대한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로 그 부자와의 만남을 정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에 담겨진 숨은 내용을 저희는 저희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믿고 의지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2베드 1:19)
2). 고독
고독은 사전적으로는 외로움 또는 홀로 있음을 의미하며, 사회학자들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독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고독은 단순히 홀로 있음 혹은 외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장소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 수도회에서 바라보는 입장은 고독한 환경으로 창립자께서는 당신의 수도자들이 이 안에서 참으로 세상과 효과적으로 분리되고, 세상의 원칙들을 없애 버리며 참 지혜를 얻기 위한 빛을 받아들인다고 보았습니다.
세상과의 분리는 주님의 공생활 초기 모습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 더불어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목활동 이전 혹은 이후에 가급적이면 ‘외딴 곳으로’(마태 14:13) 물러가 계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물러감의 장소는 외적인 장소와 내적인 장소가 있다고 신학은 이야기 합니다. 그렇지만 외적이던 내적이던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께서 광야로 나아가심도 사실은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함입니다. 사실 악마의 유혹이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고독의 장소는 내․외적인 장소를 떠나 하느님과 만남의 장소입니다.
과거 구약시대의 경우, 이 장소는 저희가 살아가는 세상과 동 떨어져 있는 곳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야곱의 꿈이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베엘제불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 만남의 장소가 세상과 동 떨어져 있는 어떤 특별한 곳이 아님을 저희에게 가르치십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데는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내용들로 세워진 산입니다. 이 산을 넘기 위해서 모세는 40일을 시나이 산에서 지내야 했고,(탈출 24:18) 엘리야는 밤낮으로 40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나아가야 했고,(1열왕 19:8)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야 했습니다.(마르 1:13) 이 같은 시간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 곧 정화의 시간입니다. 창립자께서는 이 시간을 ‘세상과 효과적으로 분리되어 세상의 원칙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깊은 통교와 하느님의 창조물의 경이로움에 눈을 뜨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인격과 성부, 성령께 대한 잠심과 주의 집중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시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나아가 이 시간이 필요함은 ‘사도적 지향’, 곧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셨듯이 세상에 나아가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이 증거의 결정은 바로 ‘십자가의 고독’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 주위에 있던 성모님과 여인들, 유다인들이 그러했듯이 바라봄을 나타냅니다. 이 바라봄의 이전 모습은 ‘기둥에 달린 구리 뱀’(민수 21:4-9)입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기둥에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듯이 저희 역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생명을 얻습니다. 바라보지 않고 외면하면 생명을 잃습니다.(민수 21:9) 궁극적으로 바라봄은 함께 함으로 나아갑니다. 성모님처럼... 그리고 십자가 곁의 백인대장의 고백과 같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 라는 고백을 낳게끔 만듭니다.
그렇기에 고독은 정화의 삶으로서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게 만들며, 주님의 성전정화처럼 저희 자신의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루카 19:46) 만들어 가게하고 참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3). 고난의 기억
‘기억’, ‘기억하다’라는 단어는 어떤 일을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교회에서의 ‘기억’이란 단어는 특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어떤 과거지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는 일반적 의미뿐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현재에 ‘기억함’으로서 과거의 사건으로 인한 결과가 현재화 내지 구체화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창립자는 이 때문에 인류의 죄가 반복되는 원인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주님의 수난 사건을 잊어버림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하십니다. 그러므로 창립자에게 있어 하느님의 부르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기억을 되살릴 때, 인류는 죄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위한 일을 할 동료들을 모으고자 예수 고난 수도회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기억’의 잃어버림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과거와의 단절은 현재의 불안을 낳게 하고, 이 불안은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따로 따로 각각의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선상에 연속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으며, 현재가 없는 미래 또한 없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은 특별한 명절에 자신들의 과거를 잊지 않고자 세계 곳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하여 성전 서쪽 벽에서 기도를 통해 과거를 기억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여러 순간에, 특별히 자신을 인정받고 높임 받을 수 있는 순간에 자신의 과거, 곧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박해하고 다마스커스로 오다가 주님을 만나 회개하게 된 이야기를 되풀이 하며 잊지 않고자 합니다.
‘기억’을 해야만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하느님이 하신 일 하나도 잊지 말라.’고 노래합니다. ‘기억’을 잃게 되면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와 같이(루카 10:38-42), ‘매정한 종’과 같이(마태 18:23-35) 같이 다른 그 무엇을 붙잡고 탓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을 할 때, 저희가 도달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과의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찬미’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43)의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억’ 하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감사와 찬미’를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실 때도(루카 17:11-21) 주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 돌아 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하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기억’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시간을 단축합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자마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아버지의 집을 향해 떠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루카 15:20)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고 계신 주님을 보고 청하여 물 위를 걸어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져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 1:30) 하고 외치는 베드로의 모습은 주님의 존재에 대한 베드로의 기억이 곧바로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께로 향하여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단단히 붙잡게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기억’은 현실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현실의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거나 벗어나는 것보다는 과거의 사건(은총)을 현재에 되살려 현실을 힘 있게 살아가 미래의 희망을 이루어 가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고난의 기억’은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4). 회개
회개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서 벗어나 살던 사람이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톨릭 교리서는 “회개는 내적․영적으로 이루어지는 전 인격적․전 존재적 행위로, ‘일상생활에서 회개는 화해의 행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정의의 실천과 타인의 권리 옹호, 형제들에게 잘못을 고백함, 형제적인 충고, 생활에 대한 반성, 양심 성찰, 영적 지도, 고통을 받아들임, 정의를 위해 박해를 견딤 등으로 실현되며,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확실한 회개의 길이다.’(교리서 1435항)” 라고 가르칩니다.
본 수도회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회헌 56항에서 59항까지의 내용을 통해 일상 안에서 만나는 일들 즉, 사도직, 공동생활의 짐, 자신과 형제들의 인간적인 약점 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기회로 받아들여 수도생활 가운데 수도자가 겪는 모든 어려움, 불편함을 예수님의 고난에 봉헌함으로써 고난 받으신 그분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위로해 드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창립자께서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일상생활 안에서 겪게 되는 모든 시련과 곤란들을 하느님의 사랑스런 손길에서부터 직접 오는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회개’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길에서 오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서 주님께서 하느님 곁으로 올라가셨듯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회개’는 ‘하느님께로 돌아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들이 당신 곁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사실, 저희가 돌아갈 수 있음은 돌아갈 장소가 있기 때문이고, 저희로 하여금 돌아오라고 외치고 계신 하느님의 외침 때문입니다. 이 외침의 첫 시작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하고 묻고 계심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당신의 곁으로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주님의 이 부르심에 두려워 숨습니다.(창세 3:10) “너 어디 있느냐?”의 외침은 신약에 이어져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3) 하고 외치는 아버지의 외침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는 에덴동산 이후로 끊임없이 인류를 당신 곁으로 부르시고자 하신 역사입니다. 하와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노아와의 약속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의 약속을 통해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때가 되자 당신 아드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회개는 잃어버린 아들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며, 자신을 잊지 않고 찾으면서 애타게 외치고 있는 아버지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는 것이며,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5). 기도
기도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이미 아주 좋은 말씀과 가르침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중요성과 내용에 대해서 아마 저보다 더 뛰어나신 분의 가르침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의 방법, 중요성, 내용 보다는 ‘기도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단 한 번도 기도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의지하고 싶은 그 누군가에게 기도를 바치지 않아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를 누구나 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듣게 되는 이야기는 자신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차이점이 있기에 이런 일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기도의 마음가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포도밭의 주인’(마태 20:1-16)의 이야기는 ‘기도의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저희가 알다시피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자 하지만 일이 없어 근심하며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한 포도밭의 주인이 이른 아침, 아침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오후 다섯 시에 자신의 포도밭에 일을 할 일꾼을 찾습니다. 과연 어느 누가 더 깊은 마음으로 일을 찾고 자신에게 일거리를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과연 어느 누가 더 깊은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거리에 감사하고 있었을까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루카 18:1-8)은 ‘기도의 마음가짐’에서 ‘끈질김’에 대한 이야기를 저희에게 말 합니다. 기도는 하늘의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린다고 해서 누구나 다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어떤 이는 두드리는 것을 멈추고 그냥 지나가고, 어떤 이는 두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려 결국 주인을 만나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기도의 마음가짐’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립자께서는 회헌 52항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일에 정신이 팔리거나 혹은 기도하려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럴 때에는 우리의 성실성과 참석 그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항구하려는 원의를 증명해줄 것이다. 기도에 항구하고 결코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우리들 각자의 긴박한 의무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필요성에 대하여 서로 대화하고, 개인기도의 의무에 대하여 일깨움으로써 서로를 도와야 한다.”
기도는 자신을 위함이 아닌 서로 돕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창립자의 영성의 시작인 “고난 기억”에 대한 내용도 사실은 “고난”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돕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게 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돕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성전정화”에(루카 19,45-48; 마태 21,12-13; 요한 2,13-22) 대한 내용을 곱씹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하시면서 너희는 이 집을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이 성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곧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하는 집에서 우리가 하는 기도는 “장사의 기도”와 “강도의 기도”가 전부입니다. “장사의 기도”, “강도의 기도”는 사람들을 서로를 돕기 위한 기도이기 보다는 자신만의 이익을 쫓는 기도입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