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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4년 을해(1395, 홍무 28) 7월 30일(신유)
제언을 쌓고 산불을 방지하자는 전 낭장 정분의 진언을 사사에서 아뢰다
사사(使司)에서 전 낭장이던 정분(鄭苯)의 진언(陳言)으로써 아뢰었다. 그 대략의 내용은 이러하다.
“농사를 장려하는 중요한 일은 제언(堤堰)을 쌓는 데에 있습니다. 수령들이 모두 권농하는 직책을 갖고 있으면서 여기에 힘쓰지 않으오나, 제언이란 가뭄과 장마를 방비하는 것이오니, 도관찰사에게 명을 내리시어 주(州)·부(府)·군(郡)·현(縣)으로 하여금 그 고을의 한량(閑良) 품관 중 청렴하고 일 잘 보는 사람을 골라서 권농관(勸農官)으로 정하게 하고, 〈농한기인〉 가을과 겨울 사이에 제언을 수축해서 눈 녹은 물을 모아 두게 하되, 단단하고 치밀하게 하는 데 힘써서 새는 일이 없게 하소서. 또 수구(水口)에는 돌로 도랑을 만들어 그 위를 쌓게 하고, 뚝과 같도록 도랑 안쪽에는 나무통을 세우고 나무통 안쪽에는 셋이나 다섯 구멍을 만들어서 물의 높고 낮은 데를 따라서 통하거나 막히게 하며, 도랑 바깥으로는 나무통을 두되 두 끝을 비워 두고, 그 밑으로는 좌우로 물을 내려서 끌어가도록 하고, 따로 제언의 한 쪽에 몇 자나 낮게 쌓되 수통의 웃구멍보다 약간 높게 돌을 깔아서 장마에 물이 〈뚝을〉 넘치는 것을 방비하소서. 지키는 자 몇 호(戶)를 두고 권농관이 그 구멍을 막을 때에 감독했다가 봄이 되어 논을 갈려고 할 때, 토지 임자들이 권농관에게 말해서 차례대로 구멍을 열어서 물을 나누되, 관개(灌漑)하는 데 절용해서 허비가 없게 하며, 권농관의 잘하고 못하는 것과 수령들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도관찰사가 친히 점검해서 포폄(褒貶)을 알리게 하여 파직하고 승직하는 데에 참고가 되게 하며, 또 산림이 무성한 뒤에 땅 기운이 윤택해서 가물어도 한재가 덜하며, 상수리를 주워서 흉년을 방비할 것입니다. 무뢰한 무리들이 전렵하는 것만 탐을 내어 산에다가 불을 놓으니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마땅히 수령으로 하여금 친히 산림을 점검하고 부근에 살고 있는 백성들로 나누어 맡아 보게 하여, 만일에 불을 놓는 자가 있으면 즉시 와서 알리어 중한 죄로 벌하게 하고, 그것을 알리지 않는 자는 그 불놓은 사람과 연좌(緣坐)하게 하며, 다만 목마장은 칩충(蟄蟲)이 깨어나기 전에 불에 태우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태종 1년( 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7월 27일 갑인
유사(攸司)에 명하여 연해 주군(沿海州郡)의 밭을 양전(量田)하게 하였다. 상호군(上護軍) 심귀령(沈龜齡)·여량 감무(礪良監務) 정분(鄭苯) 등이 진언(陳言)하기를, “연해 주군(沿海州郡)이 경인년 이후부터 전지가 황폐하였었는데, 근년 이래로 왜구(倭寇)가 잠잠하고 인물(人物)이 모여들어 전야(田野)가 개간되었으니, 마땅히 측량하여 공부(貢賦)를 정하기를 《육전(六典)》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이 하소서.”하여, 그대로 따랐다.
세종 2년 경자(1420, 영락 18) 12월 13일(정미)
승문원 교리 정분을 의금부에 가두다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 정분(鄭苯)을 의금부에 가두었으니, 그가 이조 좌랑이 되었을 때에 광효전(廣孝殿) 집사(執事)를 보내지 않은 때문이었다.
세종 2년 경자(1420, 영락 18) 12월 15일(기유)
정분을 석방하고 맹사성·민교를 직소에 나오도록 명하다
정분을 석방하고, 이조 판서 맹사성·참의(參議) 민교(閔校) 등에게 직소(職所)에 나오라 명하였다. 사성 등이 정분이 옥에 갇힘으로 인하여 자기도 책임이 있는 혐의를 가지고 출사하지 아니하므로, 이와 같은 명이 내려졌다.
세종 4년 임인(1422, 영락 20) 1월 10일(무진)
정분을 우헌납으로 삼다
정분(鄭苯)으로 우헌납(右獻納)을 삼았다.
세종6년 갑진 ( 1424년 , 영락 22 ) 3월13일(기축)
살꽂이[箭串]에 있는 밭을 찬성사(贊成事) 유관(柳觀)에게 2결, 참찬(參贊) 안순(安純)·탁신(卓愼)·판서(判書) 신상(申商)·권진(權軫)·오승(吳陞)· 참판 서선(徐選)· 목진공(睦進恭)·신개(申槪)·내금위 절제사(內禁衛節制使) 현귀명(玄貴命)·사금 절제사(司禁節制使) 성억(成抑)·변이(邊頤)에게 각각 1결 50부, 내금위 첨절제사(內禁衛僉節制使) 홍인(洪珚)·이난(李蘭)에게 각각 1결, 사복 윤(司僕尹) 서진(徐晉)·소윤(少尹) 조혜(趙惠)·박배(朴培)·주부(注簿) 김의지(金義之)·직장(直長) 조유례(趙由禮)·조순생(趙順生)·병조 정랑(兵曹正郞) 정분(鄭苯)·호조 좌랑(戶曹佐郞) 조연(趙璉)·행 사직(行司直) 박용만(朴龍萬)에게 각각 50부를 내려 주었다.
세종 10년 무신(1428, 선덕 3) 6월 9일(경인)
함길도 경차관 정분이 수재 상황을 아뢰다
함길도 경차관(咸吉道敬差官) 정분(鄭苯)이 복명하므로, 임금이 인견하고 수재 상황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떠내려 간 가옥이 전부 6백 6호, 익사(溺死)·압사(壓死)한 자가 1백 69명, 모래에 뒤덮힌 전답이 8천 6백 12결(結)입니다. 단천군(端川郡)에는 한 동리가 죄다 유실(流失)하였는데 40여 인이 한 그루의 큰 나무에 기어 올라갔다가 물에 나무 뿌리가 뽑혀지는 바람에 모두 물속에 빠져 죽었습니다. 또 수호(數戶)가 유실된 곳이 있는데 남자들은 헤엄쳐 나왔으나, 여자들 4,5명은 지붕위에 올라가 바다의 어귀까지 떠내려 가다가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옷으로 머리를 감싸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감사가 숨기고 보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경성(鏡城) 관아(官衙)의 문 앞에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하루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공기는 찌는 듯이 뜨겁더니, 베필[布匹] 같은 한 물건이 공중에서 길게 쭉 뻗치어 내려왔습니다. 바로 불타는 벚나무 껍질이었습니다. 버드나무가 그 열기(熱氣)에 부딪혀 죽었다고 합니다. 함흥에서부터 갑산(甲山)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산 위의 초목이 다 타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하늘 불[天火]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종 10년 무신(1428, 선덕 3) 5월 19일(경오)
사인 정분을 함길도에 보내어 수재 상황을 살피게 하다
사인(舍人) 정분(鄭苯)을 함길도에 보내어 각 고을의 수재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세종 12년 경술(1430, 선덕 5) 9월 2일(경자)
정분 등이 성보 기지의 시찰을 위해 최윤덕을 충청도에 파견함의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듣지 않다
집의(執義) 정분(鄭笨) 등이 상소하기를,
“나라를 보전하는 도(道)는 의당 안위(安危)를 생각함에 있고, 백성를 부리는 도(道)는 반드시 풍흉(豐凶)을 살핌에 있사온데, 이는 만대(萬代)를 통하여 언제나 변함 없는 법칙입니다. 전하께옵서 연변(沿邊)의 성곽(城郭)이 갖추어지지 않음을 깊이 우려 하시와, 일찍이 최윤덕(崔閏德)에게 명하사 경상도로 가서 감사(監司)·절제사(節制使)와 같이 대소 주군(州郡)을 순행하게 하여, 옛 것을 수축할 곳과 새로 창설할 곳을 심찰하고 이미 모두 그 기지를 정하게 하신 바 있사온데, 이제 또 윤덕 등에게 명하사 건축하는 공사를 가서 보게 하시니, 이는 평안한 가운데서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으시는 지극하옵신 생각이십니다. 그러하오나 신 등이 생각하건대, 전라도는 무신년에 양전(量田)하였고, 경상도와 충청도는 기유년에 양전하였으니, 백성들의 노고와 소요, 그리고 양곡의 소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금년에도 사신의 지대(支待)에 따르는 번거로운 수요의 급박한 색출과, 명나라에 바칠 물건의 판비(辦備) 등의 일과, 농작물의 손실을 답험하는 경차관(敬差官)의 출동 등으로 역로(驛路)의 소요한 양상들이 전에 비해 훨씬 많았으며, 또 풍수(風水)의 재해로 인해 미곡이 지극히 귀한 상태에 있사온즉 그 생활의 어려움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1품의 재상(宰相)이 따르는 무리들을 인솔하고 외방으로 나가면, 이에 동원되는 수 많은 역마(驛馬)와, 영접과 공궤에 수반되는 분주스런 각가지 폐단 등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연사가 풍등(豐登)한 땅을 택하여 이미 정해 놓은 기지에 그대로 지휘해 건축한다면, 감사나 절제사도 능히 주관해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거듭 대신을 번거롭게 보낼 필요가 있습니까. 더욱이 충청도 같은 곳은 지난 해에 농사가 잘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오히려 먹기도 어려운 형편이오니, 내년 가을을 거둔 후에 다시 가서 살펴보도록 명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옵서 이 일을 정침(停寢)하시와 백성들의 바라는 바를 위안하소서.”
하고, 좌사간 변계손(卞季孫) 등은 상소하기를,
“연변의 성보(城堡)를 대신에게 명하시와 기지를 시찰하고 쌓는 것을 감독하게 하시니, 이는 실로 나라의 급무(急務)입니다. 그러하오나 신 등의 생각에는 성보를 구축하는 것이 비록 큰일이기는 하오나, 이미 그 지방에 감사와 절제사가 있사온즉 따로 대신을 파견하여 이를 감독할 필요가 없을 줄 아오며, 기지를 보아 선택하는 것이 비록 중한 일이오나, 대신 한 사람을 보내어 그 도의 감사·절제사와 더불어 함께 의논해도 될 수 있을 것을, 하필이면 사(使)·부사(副使)와 종사관(從事官)을 갖추어서 역로(驛路)를 번거롭게 하고, 여러 고을을 소요스럽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 각 고을의 성을 일시에 다 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금년 봄에 최윤덕(崔閏德)·박곤(朴坤) 등이 보고 택정한 땅이 한두 곳이 아니오니 우선 그 도의 감사로 하여금 금년에 성 하나를 쌓게 하시고, 아직 땅을 심찰하지 못한 곳은 뒷날에 다시 보내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추수가 한창인 이 때에 인민의 노고와 소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온데, 1년에 두 번이나 대신을 보낸다면 각 고을에 어찌 그 폐해가 없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옵서는 윤덕 등을 보내지 마시와 민폐를 제거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성보는 실로 국가의 중대한 일이니 늦출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금년에 일이 번다(煩多)하여 백성들이 곤란하다 하나, 가령 명년에도 다시 금년 같이 된다면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세종 12년 경술(1430, 선덕 5) 10월 10일(정축)
이승직·정분 등을 의금부에 가두다
명을 내리어 전 대사헌(大司憲) 이승직(李繩直), 집의(執義) 정분(鄭笨), 장령(掌令) 장수(張脩)·최문손(崔文孫), 지평(持平) 김자갱(金子鏗), 좌대언(左代言) 남지(南智) 등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이는 사간원(司諫院)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숙선 옹주(淑善翁主) 안씨(安氏)가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과 집터를 가지고 다투다가 고소장을 사헌부에 제출했더니, 사헌부에는 일반 부녀자들의 소송 문제로 생각하고 처리하여, 한성부(漢城府)로 이첩(移牒)할 적에 모두 고소인[狀氏]이라고 적어 보냈다. 한성부에서 계(啓)를 올리려 할 때에, 남지가 비로소 고소인[狀氏]이란 말이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계(啓)하려 하였다가, 도중에서 정분을 만나서 그 말을 누설하고, 사헌부에서는 공문을 도로 한성부에서 회수하여 그 어귀는 지워버리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또 한성부로 하여금 계목(啓目)을 대언사(代言司)에서 도로 받아다가 이를 지워버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세종 12년 경술(1430, 선덕 5) 10월 18일(을묘)
정분 최문손 등을 석방케 하다
명을 내리어 정분(鄭苯)·최문손(崔文孫)·장수(張脩) 등을 석방하였다
세종 12년 경술(1430, 선덕 5) 10월 24일(을축)
정분과 신포시 등이 양녕 대군 이제를 서울로 부르심의 잘못됨에 대해 아뢰었으나 듣지 않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집의(執義) 정분(鄭笨)과 좌사간(左司諫) 신포시(申包翅) 등이 아뢰기를,
“양녕 대군 이제(李禔)의 광망(狂妄)함은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 태종의 명철(明哲)하심과 엄위(嚴威)로써 그렇게 간곡하게 타이르셔도 끝내 그 기질을 고치지 못하시고,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시와 이천(利川)으로 내쫓아 살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앞으로는 서울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곧 태종께서 종사(宗社)의 만세(萬世)를 위하여 생각하신 것이온데, 요사이 불러 보심은 성헌(成憲)에 아주 어긋나는 것입니다. 제(禔)가 만약 그 친애(親愛)하심을 믿고 내가 비록 광망(狂妄)하지마는 주상께서는 반드시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일조(一朝)에 부도죄(不道罪)를 범한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이러므로 신들은 간(諫)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들어 주지 않는 것은 경들도 또한 자세히 들었을 터인데 다시 무슨 말을 하느냐.”
하였다.
세종 12년 경술(1430, 선덕 5) 11월 6일(계묘)
사간원에서 남지와 정분의 처벌을 건의했으나 보류케 하다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임금의 명령을 출납(出納)하는 책임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며, 패거리를 꾸미는 징조는 막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난번 사헌부에서 숙선 옹주(淑善翁主)의 장고(狀告)를 받아서 한성부(漢城府)에 문서를 넘길 때에, 그저 ‘장씨(狀氏)’라고만 하였으니, 그것은 퍽 공손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대언 남지(南智)는 사헌부에서 공손치 못한 죄를 보고도 곧 아뢰어 상달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집의(執義)인 정분(鄭笨)과 몰래 서로 말해 주어 비밀히 고치게 하여 주었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임금의 명령을 출납(出納)하는 측근의 신하가 개인끼리 서로 편을 들어 주는 이런 버릇이 커져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라옵건대, 명령을 유사(攸司)에 내리시와 그 죄상을 밝히어 규명하여 패거리를 만드는 징조를 막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상소의 내용이 너무 지나치니 보류하여 두라.”
하였다.
세종 12년 경술(1430, 선덕 5) 11월 9일(병오)
정분 장수 최문손 등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다
전 집의 정분(鄭笨)·장령 장수(張脩)·최문손(崔文孫)·지평 박이창(朴以昌)·김자갱(金子鏗) 등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으니, 성개(成槪)의 노비 사건을 오래도록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종 12년 경술(1430, 선덕 5) 11월 16일(계축)
정이오가 아들 정분을 경기로 옮겨와 자신을 간호케 해줄 것을 상언하다
판부사로 치사(致仕)한 정이오(鄭以吾)가 말씀을 올리기를,
“신은 지금 늙고 병들어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사오나, 다만 외아들인 분(苯)이 죄를 짓고 지방에 추방되어 있으므로 다시 약으로 구호할 자가 없사오니, 인자하신 마음으로 경기(京畿)에 옮겨 놓게 하시와 약을 계속하여 쓰게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하니, 양주(楊州)에 옮겨 놓도록 명하였다
세종 15년 계축(1433, 선덕 8) 1월 18일(임신)
좌부대언 정분에게 사역원의 상좌 제도를 이조에서 의논해 추천할 것을 이르다
경연에 나아가서 좌부대언 정분(鄭苯)에게 이르기를,
“이문(吏文)과 중국어[漢語]는 국가의 소중한 바이다. 전자에 통사(通事)들에게 중국에서 매매하기를 허락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매우 많기 때문에, 비록 한 해에 두 번씩 갈지라도 모두 사피(辭避)하지 아니하였는데, 지금은 무역하는 것을 엄금하여, 매양 북경에 갈 때를 당하면 감찰이 규찰(糾察)하고, 또 근일에는 태평관(太平館)에서 금물(禁物)을 매매하면 아울러 통사가 실정을 안다는 이유로 죄를 주니, 이로 인하여 사역원(司譯院) 생도들이 모두 배우기를 게을리하였는데, 김시우(金時遇)가 사역원 제조(提調)가 되자 엄하게 규찰하여 생도들로 하여금 학업에 부지런하게 하더니, 시우가 이미 죽었고, 원민생(元閔生)이 병이 있어서 능히 규찰하지 못하니 내 심히 염려된다. 이문(吏文)을 습독(習讀)하는 일은 이긍(李兢)이 그 일을 전장(專掌)하였으나, 사역원에는 상좌 제조(常坐提調)가 없으니, 이조에서 의논해 추천하게 하라.”
하였다.
세종 15년 계축(1433, 선덕 8) 8월 10일(경인)
임금이 정분에게 군사 사열의 정지 여부를 의논하도록 말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대언 정분(鄭苯)에게 일러 말하기를,
“판부사 변계량은 오활한 선비이지만 매양 나에게 말하기를, ‘지방의 별패군(別牌軍)은 풍흉을 막론하고 매년 번을 세워야만 연습에 소질이 있게 되고 행장의 준비도 미리 될 것이니, 만약 흉년이라 하여 번들게 하지 않는다면 만대의 장구한 계획이 아닙니다.’ 하므로, 내가 듣고 가상하게 여기어 지금까지 잊지 않노라. 내가 크게 군사 사열을 하기 위하여 이미 각 지방 별패군의 번드는 것을 정지시켰다가 가을을 기다려 징집하려 하였는데, 금년에는 각 지방에 혹은 수재로 혹은 한재로 곡식들이 잘 되지 못하였기에, 내가 깊이 딱하게 여겨 군사 사열을 정지하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내가 또 생각하니 군사 사열은 큰 일이라 폐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항상 훈련을 해 두어야만 군사들이 고루 익숙해지고 기구와 기계가 엄밀히 정비되어 뜻밖의 사변에 대비할 수 있으므로, 별패를 징집하여 대사열을 하고 즉시 놓아 돌려보내는 것이 폐해가 없을 듯도 싶어서, 내가 두 가지로 생각하면서 가부를 알지 못하겠으니 그것을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을 모아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세종 15년 계축(1433, 선덕 8) 윤 8월 14일(갑자)
좌부대언 정분을 시켜 사신에게 문안하니, 사신이 털옷을 지어 줄 것을 말하다
좌부대언 정분(鄭苯)을 시키어 사신에게 문안하고, 인하여 야인의 명단을 전하니, 사신이 분에게 말하기를,
“요새 일기가 한랭한데, 데리고 온 두목들이 모두 홑옷이니 어찌하겠소. 털옷을 지어 주기 바라오.”
하므로, 분이 대답하기를,
“내가 장차 위에 아뢰오리다마는, 칙서에 하신 말씀이 있으니 어찌하오리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그러면 갔다가 돌아와서 도로 드리리다.”
하였다.
세종 15년 계축(1433, 선덕 8) 윤 8월 20일(경오)
정분에게 명하여 사신을 문안하니, 사신이 여행 기물들을 청하다
좌부대언 정분(鄭苯)에게 명하여 사신에게 문안하니, 사신이 강을 건너가서 풀밭에서 쓸 쟁반·남비 따위의 여행 기물들을 청하므로, 분이 대답하기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관반사에게 말씀하시오.”
하였다.
세종 16년 갑인(1434, 선덕 9) 8월 7일(신해)
민심언·박곤·정분·신인손·이견기·조수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민심언(閔審言)을 돈지돈녕부사 전라도 도관찰사로 삼고, 박곤(朴坤)을 한성부 윤, 정분(鄭苯)을 좌승지, 신인손(辛引孫)을 우승지, 이견기(李堅基)를 동부승지, 조수량(趙遂良)을 사헌부 집의(執義), 조항(曹沆)을 전농시 윤, 김영(金寧)을 사헌부 장령, 이축(李蓄)을 전농 소윤, 조비형(曹備衡)을 경상도 도절제사, 조종생을 전주 부윤, 고약해(高若海)를 판황주목사, 최해산을 제주 안주사로 각각 삼았다. 해산은 전에 파저강 정벌에서 군기를 그르쳐서 파직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제주 안무사가 되니, 제주는 바다를 건너는 떨어진 지역이므로, 사람들이 가기를 원치 하니하였다. 항(沆)과 축(蓄)은 안숭선의 인아(姻婭)인데, 여러 번 숭선의 추천을 힘입어 여기에 이른 것이다. 도승지의 임무는 명령의 출납을 모두 맡고, 겸하여 전선(銓選)을 맡았으므로, 일시의 권총(權寵)이 더할 수 없었다. 좌승지 이하가 그 세력에 휩쓸려서 부주(敷奏)와 복역(覆逆)을 모두 의논해 물은 뒤에 출납하고 시행하였다. 숭선은 사람됨이 모질고 팩하며 급하고 빨라서, 쉽세 노하고 쉽게 기뻐하여, 동료들이 혹 그 뜻을 어기면 문득 욕하므로, 동료들이 모두 원망하고 미워하였다. 제수할 때를 당하여 겸 이조 판서 좌의정 맹사성은 착하고 부드러워서 결단성이 없고, 판서 신개는 따라서
“예예”
하기만 하므로, 대개 전선(銓選)이 모두 그 〈안숭선〉 손에서 나왔다. 인아(姻婭)들과 평시에 좋아하는 사람 및 자제들을 그가 추천하는 데 맡겼다
세종 16년 갑인(1434, 선덕 9) 8월 9일(계축)
좌승지 정분이 아버지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시약하게 하다
좌승지 정분이 아버지 병으로써 사직을 원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시약(侍藥)하게 하였다
세종 18년 병진(1436, 정통 1) 9월 27일(기미)
충청 감사 정인지의 상사에 부물을 내리고 정분을 충청 감사로 삼다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충청도 감사 정인지(鄭麟趾)가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당하니, 도승지 신인손(辛引孫)이 아뢰기를,
“전 승지 정분(鄭笨)이 감사의 임무에 적합합니다, 지금 흉년을 구제해야 할 시기를 당하여 반드시 장건(壯健)한 사람이라야만 능히 돌아다니면서 진제(賑濟)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정분을 충청도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인지(麟趾)가 한 도(道)를 통찰(統察)하는 임무에 있는 중에 이제 아버지 상사(喪事)를 당했으니, 부의(賻儀)를 하는 것은 예사(例事)이어니와,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자 하니 어떻겠는가. 그 부물(賻物)은 얼마나 하면 되겠는가.”
하니, 인손이 대답하기를,
“그 아버지는 그 직위가 현감(縣監)이오니, 관직이 낮은 사람의 죽음에는 으레 조문을 하지 않는 법이온데, 이제 만약 특별한 예(例)로 조문을 하신다면, 이로부터 예(例)가 되어 마침내 법이 될 것입니다. 다만 인지는 본시 선비의 살림이므로 생활이 반드시 가난할 것이오니, 부물(賻物)을 많이 내리심이 옳겠습니다.”
하니, 쌀·콩 합계 10석을 내리고 조문(弔問)은 정지하게 하였다
세종 18년 병진(1436, 정통 1) 11월 20일(신해)
충청도 감사 정분(鄭苯)이 고아된 아이와 이사한 자의 수를 보고하다
충청도 감사 정분이 아뢰기를,
“전에 내린 전지에, ‘지금 듣건대, 도내에는 흉년이 들어서 여러 군의 백성들이 그 전택과 재산을 버리고 유리(流離)하여, 먹을 것을 구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가서, 혹은 늙고 파리한 어버이를 내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으며, 어린아이를 내버리고 구휼하지도 않는다 하니, 참말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이를 매우 민망하게 여기니, 도내에 자세히 방문하여 과연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을 버리고 이사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며, 늙은이와 어린애를 버린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결코 숨기거나 빠뜨리지 말고 수효를 기록하여 보고하고, 또 소재한 곳에서 마음을 다하여 진휼하여 모두 편안히 모여 살게 하여서, 사는 곳을 잃지 말게 하여 나의 인애로써 구휼하는 인정에 부응하게 하라.’ 하셨는데, 이를 삼가 받잡고 즉시 방문하게 했더니, 그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는 4명이고, 이사한 사람은 1천 67명이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호조에 명하여 유기(遺棄)된 아이들은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상시 진휼을 더하게 하고, 이사한 사람은 그 머물러 사는 곳에서 뒤따라 곧 공문을 보내어 장부에 기록했다가, 내년 봄에는 각기 본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어 양식과 종자를 주어서 실업하지 않게 하였다
세종 20년 무오(1438, 정통 3) 6월 29일(신사)
조말생·오승·김맹성·홍여방·정분·안숭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말생(趙末生)으로 판중추원사를, 오승(吳陞)으로 지중추원사를, 김맹성(金孟誠)으로 판한성부사를, 홍여방(洪汝方)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정분(鄭苯)으로 이조참판을, 안숭선(安崇善)으로 예조 참판을, 유계문(柳季聞)으로 공조 참판을, 정갑손(鄭甲孫)으로 전라도 도관찰사를, 유수강(柳守剛)으로 충청도 관찰사를 삼았다
세종 21년 기미(1439, 정통 4) 3월 28일(병자)
평안도 도관찰사 정분이 토관의 이름과 등급을 고치도록 아뢰다
평안도 도관찰사 정분(鄭笨)이 아뢰기를,
“평양 토관의 종5품인 군기서 장(軍器署長)·전빈서 장(典賓署長)·장작국 장(將作局長)·정설국 장(正設局長), 정6품인 도부사 승(都府司丞), 종6품인 전빈서 승(典賓署丞)·정설국 승·도진서 승(都津署丞), 정7품인 도부사 주부, 종7품인 군기서 주부·전빈서 주부·정설국 판관·장작국 주부·전례국 판관(典禮局判官)·영작원 판관(營作院判官)·도진서 주부·장선서 영(掌膳署令), 종8품인 장선서 승·대영서 승·사옥서 영(司獄署令)에 그 6품을 승(丞)이라 칭하고, 7품을 주부·판관·서영(署令)이라 칭하고, 8품에도 서승·서영이라 칭하오니, 관직과 품계가 뒤섞여 거의 등급이 없고, 또 서장·국장은 통례에 위반되는 것이 있사오니, 군기·전빈 서장을 고쳐서 영(令)이라 칭하고, 정설·장작 국장을 고쳐서 사(使)라 칭하고, 도부사 승·전빈·정설·도진서 승을 고쳐서 주부라 칭하고, 도부사·군기서·전빈서·장작국·도진서 주부, 정설국·전례국·명작원 판과, 대명·장선서 영을 고쳐서 승이라 칭하고, 대영서·장선서 승을 고쳐서 부승이라 하고, 사옥서의 영(令)과 승(丞)을 고쳐서 승과 부승으로 하게 하옵소서. 또 장루서(掌漏署)의 설호정(挈壺正)은 중국의 관제(官制)이오니, 고쳐서 장루서 승이라 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매, 이조로 내리니, 이조에서 의정부에 보고하기를,
“두 지방 토관의 낭관(郞官) 계급과 사(司)의 이름은 이미 조관(朝官)과 달리하며 내외를 구별하게 하였는데, 사(使)·부사(副使)·승(丞)·부승(副丞)·주부(注簿)·영(令)·판관(判官)·직장(直長)·녹사(錄事)·부녹사(副錄事)·조교(助敎)라는 이름은 조관과 혼동되어 구별이 없으니 진실로 불가합니다. 양도 토관의 등급을 고치되 관직 이름도 아울러 고치게 하소서.”
하므로,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토관의 관직 이름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다시 고칠 것이 없사오나, 단지 설호정이라는 것은 중국의 관제와 같은 것이니, 마땅히 장루서 승이라 고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23년 신유(1441, 정통 6) 7월 20일(갑인)
평안도 도관찰사 정분이 전을 올려 사례하다
평안도 도관찰사 정분(鄭苯)이 전(箋)을 올려 가정 대부(嘉靖大夫)에 승진된 것을 사례하였다
세종 23년 신유(1441, 정통 6) 8월 18일(임오)
평안도 도관찰사 정분의 청에 따라 관새의 요해처에 판정을 설치하다
평안도 도관찰사 정분(鄭苯)이 청하기를,
“관새(關塞)의 요해처(要害處)에 판정(板釘)을 설치하여 적(賊)을 방어하게 하되, 그 제도는 길고 큰 널빤지에 구멍을 뚫고, 두 구멍의 상거(相距)가 2, 3촌에 지나지 아니하게 하며, 굳고 단단한 나무를 길이 한 척쯤 되게 하여 불에 구워 뾰족하게 하고, 널빤지 아래로부터 역(逆)으로 나오게 하여 뽑지 못하게 하기를, 약 넓이가 10보(步) 가량 되게 하여 땅속에 묻으면, 못[釘]이 지상(地上)으로 4, 5촌이나 나오게 되어, 적(賊)의 마병(馬兵)이나 보병(步兵)이 쉽사리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우선 시험하라고 명하였다
세종 23년 신유(1441, 정통 6) 10월 16일(기묘)
사헌부와 사간원이 정분과 이징옥·박근과 정이한에게 죄주기를 청하다
사헌부 지평 박추(朴崷), 사간원 우정언 이계선(李繼善) 등이 아뢰기를,
“성을 쌓는 것은 백성을 보호하는 만세의 장구한 계책이오나, 이제 조명간 구자(趙明干口子)에 경작할 만한 땅은 모두 성밖에 있으니, 백성들이 곤란하여 원망함은 반드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지경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모두 그 폐단을 말했고, 조야(朝野)에서도 서로 떠들기를, ‘장성(長城)을 쉽게 이룩하지 못한다.’고 하오니, 신 등은 당초에 살펴서 정하게 할 때에 황보인이 어찌 그 마음과 힘을 쓰지 아니하였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소견이 반드시 다 적중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이제 허물어진 성을 보온즉, 황보인이 비록 감독해 쌓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그 조처(措處)를 다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다른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고 정하면 반드시 좋은 계책을 얻을 것이오나, 만약 이같이 아니하오면 반드시 후회가 이를 것이옵니다. 대저 오늘날의 일의 크고 작음이 없이 반드시 여러 신하에게 물어서 행하옵거늘, 하물며 이같은 큰일이오리까. 또 감사 정분과 도절제사 이징옥은 몸에 중한 부탁을 맡아서 한 지방을 전제(專制)하면서, 종사관(從事官)들이 인력을 헛되게 쓰는 것을 앉아 보고도 일찍이 죄를 규탄하여 들어내지 아니하고, 또 계달하지 아니하였으며, 정분은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기를, ‘이제 쌓은 성은 주먹을 휘둘러도 깨뜨릴 수 있다.’고 하였으니, 그가 알고 말하지 아니한 것을 가히 알 것입니다. 청하건대, 모두 파출(罷黜)시키옵소서. 정이한의 쌓은 성은 허물어진 곳이 비록 박근의 쌓은 것과 같이 많지는 아니하오나, 이는 벽단(碧團) 땅에 돌이 많기 때문이옵니다. 공사를 겨우 마치자 비가 내리매, 문득 무너져서 죄명(罪名)이 이미 드러났사오니, 청하건대, 모두 죄를 주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국가를 위하여 큰일을 염려하는 뜻은 가상하다 하겠으나, 성을 쌓는 일은 나의 독단으로 한 것이 아니고 대신들과 더불어 같이 의논한 것이었다. 이제 황보인의 소견을 잘못이라고 하여 또 다른 사람을 보낸다면, 그 사람의 소견은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정분의 말은 뜬소문에 가깝다. 내가 듣기에는 참으로 정분의 말한 바가 아니라고 한다. 만약 의금부에 내리면, 반드시 너희들이 전하여 들은 곳을 캐물을 것이나, 나는 너희들을 위해 염려하여 너희들의 청을 좇을 수 없다. 이징옥은 당초 대간의 청으로 인하여 정해 보냈는데, 이제 만약 파출(罷黜)한다면 그 임무를 대신할 만한 자도 어렵거늘, 하필 사령(赦令) 전의 작은 죄를 가지고 논하겠느냐. 너희들의 말은 깊이 생각한 것이 아니다. 정이한은 비록 죄가 있다고 하나, 도성(都城)을 쌓을 때에 삼정승이 감독을 하였어도 무너진 곳이 있었는데, 어찌 사(赦)하기 전의 일을 가지고 죄를 줄 수 있겠느냐.”
하매, 추(崷) 등이 다시 아뢰기를,
“분(苯)과 징옥(澄玉)은 이미 도주(道主)가 되었사온즉, 애초에 알지 못하였을 이치가 없을 터이온데, 성이 반이나 허물어졌는데도 즉시 계달하지 아니하였고, 이한이 쌓은 성은 무너진 곳이 비록 적을지라도 백성의 힘을 헛되게 쓴 것은 일반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할 것이나, 큰일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감히 긴요하지 아니한 말을 올리니 역시 옳지 못하다. 나의 뜻이 이와 같으니 너희들은 알지어다.”
하였다.
세종 24년 임술(1442, 정통 7) 3월 18일(기묘)
온정에 거둥할 때의 진상을 금하였는데 이를 어긴 정분에게 전지하다
평안도 관찰사 정분(鄭苯)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온정(溫井)에 거둥할 때의 진상(進上)은 일체 금단(禁斷)하도록 앞서 전교하였는데, 경은 전교를 어기고 물건을 올렸으며, 승정원(承政院)은 성명(成命)을 지키지 아니하고 감히 계달(啓達)하였으므로, 선전관(宣傳官)인 환자(宦者) 김충(金忠)을 의금부에 내려서 명을 어긴 죄를 징계하고 장차 올린 물건을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다만 먼 길에 도로 싣고 가는 폐단이 있을까 하여 우선 받아 놓게 하였다. 대저 신하 된 도리는 한가지로 임금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인데, 경은 지금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물건을 올리니 내가 심히 옳지 못하게 여긴다. 이제부터는 삼가 다시는 올리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이런 뜻으로 각도 관찰사에게도 전지하라 하고, 승정원에 이르기를,
“초차(草次)에서는 예를 다 갖출 수 없으니, 그 중에 제거해도 될 일은 너희들이 좌참찬 황보인(皇甫仁)·예조 판서 김종서(金宗瑞)·병조 참판 신인손(辛引孫)과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황보인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여러가지 일의 기틀[機]을 통촉하고 모든 일을 간편하게 하시니, 다시 더 제거할 일이 없습니다.”
고 하였다.
세종 24년 임술(1442, 정통 7) 6월 14일(계묘)
평안도 관찰사 정분에게 도절제사와 더불어 의논하고 시행하기를 전지하다
평안도 관찰사 정분(鄭苯)에게 전지하기를,
“일찍이 환자(宦者) 엄자치(嚴自治)의 말을 들었는데, 경이 자치(自治)에게 말하기를, ‘박근(朴根)의 성(城)을 쌓은 것은 흙과 돌이 서로 섞어져서 견고하지 못하므로 오래 안 가서 무너질 것이며, 또 도절제사가 본디 거주하는 사람의 숙전(熟田)을 거두어 다른 곳에서 들어와 거주하는 사람에게 주게 되니, 이로 인하여 본디 거주하는 사람과 들어와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숙전은 모두 적게 되고, 새로 개간한 전지(田地)도 또한 모두 척박하여 양쪽이 모두 실농하여 생계가 매우 간고(艱苦)한데, 도절제사의 군관(軍官)이 대단히 많으니 마땅히 각 곳에 나누어 가서 방어(防禦)에 조력해야 될 것인데도, 이에 그 군사를 거느리고 한 고을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니 접대하는 비용이 적지 않으므로, 각 고을이 피폐한 것이 오로지 이 때문이다.’ 하며, 지금 정연(鄭淵)의 말을 듣건대, 경이 여러 번 정연에게 말하기를, ‘연변(沿邊) 각 고을 성터에 요해(要害)를 쌓을 만한 곳이 많이 있지마는, 그러나, 위임을 맡아 온 대신이 이미 일찍이 살펴서 정했으니, 내가 감히 마음대로 고칠 수가 없소.
또 도절제사가 위력이 은덕보다 능가(凌駕)하여 백성의 고통을 근심하지 아니하고, 요사이는 쇠갑옷을 만들고자 하여 민호(民戶)의 쇠를 징수하니, 이 같은 백성의 고통은 근심과 탄식을 셀 수 없는 것이 많소,’ 하니, 정연이 묻기를, ‘어찌 계달(啓達)하지 않습니까.’ 하매, 경이 대답하기를, ‘감사(監司)와 장수가 서로 사이가 화합(和合)하지 못하다는 평판이 있을까 염려하여 계달(啓達)하지 못하였소.’라 하였다니, 내가 생각하건대,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계달하고 일에 당하면 진술하는 것은 신자(臣子)의 직책인데, 하물며 이미 중선(重選)을 받아 한 지방을 마음대로 처리하니, 진실로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진달(陳達)하여 숨김이 없는 것이 진실로 그 임무이다. 또 장수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무릇 그 이해(利害) 문제는 뒤따라 즉시 같이 의논하여, 미치지 못한 점을 번갈아 정제(整濟)하여 그 폐해를 구제할 것이며, 만약 같지 아니함이 있으면 공개해 상세히 계문(啓聞)하여 기필코 폐해가 없도록 해야 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마음을 같이 하여 서로 보좌한다는 것이다. 만약 마음속으로는 그르게 여기면서도 말하지 않다가, 일이 능히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 이를 화합하다고 이르겠는가. 또 서로 화합하지 못하다는 평판을 염려하여 계달하지 않는다면 한갓 자신(自身)만 보전하는 계책이 될 뿐이고, 또한 정직한 뜻이 아니니 진실로 마땅히 추핵(推劾)하여 그 나머지 사람을 경계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경(卿)이 이미 정연(鄭淵)과 엄자치(嚴自治)에게 이를 말하였다면, 어찌 나에게 들리지 않게 하였겠는가. 나에게 전해 들리게 하여 그 폐해를 의논하고자 한 것이므로 그 경의 마음을 헤아려 잠정적으로 핵문(劾問)하지 않겠으니, 경은 이 뜻을 알아서 지금부터는 도내(道內)의 모든 일으키고 폐지시킬 문제는 모두 도절제사와 더불어 헤아려 생각하여 시행하고, 만약 서로 합하지 않으면 때에 따라 즉시 계문하여 민간의 폐해를 발생하지 않게 하여서, 한 지방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뜻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세종 24년 임술(1442, 정통 7) 7월 6일(갑자)
창성의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계획을 마련하라고 정분에게 명하다
또 정분(鄭苯)에게 전지하기를,
“근년에 그 곳 변군(邊郡)의 백성들이 생계(生計)가 곤란하고 괴로워서 안심하고 살지 못하는 것을, 경(卿)은 일찍이 계달(啓達)하고 조처하지 아니하여 그들로 하여금 유리하여 떠너갈 마음이 생기게 하였으니, 이것은 경이 처리를 늦추어서 내가 늦게 들은 탓이다. 그 소문을 들은 이래로 진실로 가엾게 여겨 밤낮으로 근심하는 생각을 잊을 수가 없다.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心懷)를 본받아 널리 덕음(德音)을 선포하여 경내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지극한 뜻을 알게 하고, 또 경은 수령들과 함께 그들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할 계획을 마련하여 계달(啓達)하라. 만약 현재 끼니를 굶고 있는 사람이나 돌아와서 실업(失業)한 자가 있거든, 관(官)에서 옷과 식량을 주고 간곡히 위무하여 안정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 24년 임술(1442, 정통 7) 7월 6일(갑자)
정분에게 명하여 성승이 상기를 핑계로 무예를 게을리하지 못하게 하다
또 정분(鄭苯)에게 전지하기를,
“지금 들으니, 창성 도호부사(昌城都護府使) 성승(成勝)은 어머니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았다고 하여 항상 활쏘기를 익히지 않는다고 한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만약 무예(武藝)를 익히지 않는다면 군대를 훈련하고 병사들을 격려하는 뜻에 위배(違背)되며, 또 고기를 먹지 않으면 기력(氣力)이 쇠약하여질 것이니, 마땅히 상시로 무예를 익히게 하고 또 고기를 먹게 할 것이다.”
하였다.
세종 24년 임술(1442, 정통 7) 10월 16일(계묘)
정분에게 1월안에 몇 번 양식을 가져가도록 할 것인지 정하여 아뢰도록 하다
평안도 관찰사 정분(鄭苯)에게 전교하기를,
“적로(賊虜)가 갑자기 쳐들어옴이 일정한 시기가 없으니, 거민(居民)이 입보(入保)하는 시기를 엄(嚴)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입보할 때에 농사지은 곡식[禾穀]을 능히 다 운반하지 못하고, 거개 모두가 농막(農幕)에 간수하여 놓고 때때로 왕래하며 가져다 먹으면서 삼동(三冬)을 지나게 되고, 또 소와 말을 먹이는 꼴도 또한 반드시 운반해 오게 되니, 그 양식을 가져가는 절차를 기일을 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1월 안에 몇 번이나 양식을 가져가는 것이 실로 알맞겠는가. 경(卿)이 연변(沿邊)의 각 고을에 널리 방문(訪問)하여 도절제사(都節制使)와 더불어 함께 의논해서, 그 도로(道路)의 원근(遠近)을 참작하여 그 양식을 가져가는 날짜의 차례를 정하여 아뢰라.”
하였다.
세종 25년 계해(1443, 정통 8) 4월 20일(을사)
원창명·정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원창명(元昌命)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정분(鄭苯)을 공조 참판으로, 정충경(鄭忠敬)을 중추원 부사로, 양후(楊厚)를 첨지중추원사 겸 지병조사(僉知中樞院事兼知兵曹事)로, 조극관을 평안도 도관찰사로, 조항(曹沆)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세종 25년 계해(1443, 정통 8) 8월 8일(경인)
북경에 주문사 공조 참판 정분을 보내어 강관토의 대질 심문을 청하고 왜구의 침략행위에 대해 알리다
주문사(奏聞使) 공조 참판(工曹參判) 정분(鄭苯)을 보내어 북경에 갔다. 그 주본(奏本)에 말하기를,
“공경히 배신(陪臣) 이주 판관(義州判官) 홍유강(洪有江)이, 요동 천호(遼東千戶) 혁연(赫連)이 받들고 온 칙유(勅諭)를 전해 받아 가지고 온 것을 받잡고, 신이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본국은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으므로 변민(邊民)이 소금을 굽고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 등의 일로 인하여 배를 타고 바다에 내려갔다가 바람에 불려서 간 향방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자주 있사오나, 신이 이제 조사해서 납주관(臘州官)·막련(莫連)·공목판관(公木判官)·강관토(江官土)·문아니제(門阿尼弟) 등의 자양(字樣)을 보니, 본국의 관호(官號)와 인명(人名)과 음운(音韻)이 같지 아니하므로 쉽게 조사하지 못하겠사와, 배신(陪臣) 공조 참판(工曹參判) 정분(鄭苯)을 시켜 경사(京師)에 가서 주달하게 하였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옵서는 배신 정분으로 하여금 강관토(江官土) 등과 면대해서 심문하도록 허락하옵소서. 삼가 아뢰나이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배신(陪臣) 평양부(平壤府)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유신(兪信)이 전해 받아 가지고 온 바, 요동(遼東) 동녕위 지휘(東寧衛指揮) 왕승(王昇)이 받들고 온 칙유(勅諭)를 공경히 받자오니, 성상(聖上)께옵서 소국(小國)을 연민(憐憫)하게 여기시어 왜적(倭賊)을 막으라고 유시(諭示)하옵시니, 신이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왜산(倭山)이라는 것은 대마도(對馬島)·일기도(一岐島)·화가도(花加島) 등지로 바다와 산이 험하고 막혔사온데, 종류(種類)가 매우 번성하여 천만(千萬)으로 무리를 지어서 오로지 도둑질로 생업을 삼고 있습니다. 소국이 삼면으로 바다와 연접하였으므로 항상 그 해를 입었습니다. 신라(新羅)나 백제(百濟)는 자식을 볼모로 하여 화친을 청하기에 이르렀삽고, 고려(高麗)의 말년에는 왜구(倭寇)가 더욱 성(盛)해서 군읍(郡邑)을 무찌르고 불놓으며, 인구(人口)를 죽이고 포로해 가오며, 재물을 약탈하여 닭·개까지 남기지 아니하여, 연해(沿海) 수천 리의 땅에 인가(人家)에서 나는 연기가 끊어졌사옵고, 그 땅을 버려서 도적의 소굴이 되게 하여 침략이 왕경(王京)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므로, 황송하옵게도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옵서 소국(小國)의 환난을 살펴 아옵시고 홍무(洪武) 2년 10월에 글[書]을 주셨사온데, 그 가운데에 ‘근자 사신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바닷가를 지나는데 바다에서 50리 혹은 3, 40리 거리가 되어야 백성이 바야흐로 편히 살 수 있다.」고 하므로, 짐(朕)이 그 연고를 물으니, 왜놈의 소요(騷擾)로 인해서라고 말한다.’ 하였삽고, 홍무 6년 10월에는 왜적(倭賊)의 작란(作亂)으로 인해서 왜적을 잡는 선척(船隻)에 소용되는 화약(火藥)을 청하였삽고, 홍무 7년 5월에는 화포(火砲)와 화통(火筒)을 만드는 데 소용되는 물자를 하사하였사온데, 신의 조(祖)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이 명령을 받고 개국(開國)한 이래로 왜적이 흉잔(凶殘)한 짓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와, 연해지의 백성들이 다시 생업(生業)을 유지하게 되었사오나, 틈을 타서 노략질하고 도둑질하는 자가 그래도 근절되지 않았사옵고, 혹은 어염(魚鹽) 등이 물건을 가지고 변경(邊境)에 이르러 옷과 양식을 무역하옵는데, 만일 거절하오면 변방 근심이 더욱 심할까하와, 부득이 그 오는 곳을 정해 주고 문인(文引)을 대조한 뒤에야 무역하는 것을 허락하였사오나, 그래도 혹은 와서 노략질하고 도둑질하오며, 혹은 문인(文引)이 없이 정해 준 곳이 아닌 데에 오기도 하여, 변장(邊將)에게 죽고 잡히는 자가 역시 많사옵니다.
영락(永樂) 15년 10월에 배신(陪臣) 원민생(元閔生)이 경사(京師)에 갔을 때에, 본월(本月) 27일 봉천문(奉天門) 안에서 선유(宣諭)하여 말씀하기를, ‘네가 요새 일본 사람의 무례(無禮)하게 하는 일을 아느냐.’ 하여 민생이 대답해 아뢰기를, ‘신은 일본국의 일은 아지 못하옵니다. 다만 작은 섬의 왜적이 하는 짓은 조금 아옵는데, 그 도적들이 제 스스로 문인(文引)을 만들어 가지고 조선(朝鮮)의 해변가에 이르러, 사람이 있는 곳이면 곧 장사하러 왔다고 말하고 미량(米糧) 등의 물건을 바꾸고, 사람 적은 곳이면 곧 도적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좋은 사람은 골라서 잡아다가 부려먹습니다.’ 하였더니, 한림원(翰林院) 금의위(錦衣衛) 관원이 말하기를, ‘그 왜적이 조선 지방에도 가서 우리의 이곳과 마찬가지로 소요(騷擾)를 피운다.’ 하였삽고, 또 대국의 군사나 백성이 왜적에게 포로되었다가 장삿배를 따라서 소국의 해안에 도착한 자는 혹은 빼앗고 혹은 사서, 그 장삿배를 따라온 연유를 갖추어서 요동(遼東)으로 돌려보낸 것이 한 번만이 아니오며, 그 왜놈들이 소국과 통상(通商)한 것도 세월이 이미 오래이오니, 조정에서 이미 일찍이 아셨으리라 여겨지옵니다. 긴급한 소식 같은 것은 만약 왜적이 곧장 먼 바다로 가면 신이 알 길이 없사옵지만, 만약 소국의 지경으로 가까이 가서 신이 알게 되면 어찌 감히 아뢰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영락 17년에 왜적이 소국의 충청도 지방을 지나서 요동으로 향하였으므로, 신이 배신(陪臣) 방구달(房九達)을 시켜서 요동(遼東)에 고(告)하였삽고, 그 뒤로도 붙들려 간 대국의 군사나 백성으로 해서 소식을 얻어들으면 밤낮을 분간하지 아니하고 여러 차례 요동에 치보(馳報)하였사온데, 이제 공경히 치유를 받드오매, 곧 변장(邊將)을 시켜 장삿배를 만나 소식을 탐문한 바 있거든 곧 와서 고하게 하라 하셨는데, 신이 비록 허실(虛實)을 상세하게 알지 못하여도 곧 마땅히 급히 통보하여 더욱 더 힘써서 마지 않겠습니다. 신은 생각하오니, 소국이 북쪽으로는 야인(野人)들과 인접하였삽고, 남쪽으로는 도왜(島倭)와 이웃하였사온데, 두 도적이 흉악하고 완만(頑慢)하여서 번갈아 가며 변경을 침략하여 인물(人物)을 노략질하는 것이 다를 것이 없사오나, 이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것은 혹시라도 제 스스로 고쳐서 백성의 근심이 없어질까 함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왜놈은 배에 익숙하여서 가고오는 것이 빠르므로 도둑질하는 피해가 더욱 심하옵고, 또 그 굴혈(窟穴)이 험조(險阻)하고 바람과 파도가 사나와서 쉽게 소멸하지 못하옵니다. 감히 사유를 진술하오니 갑절이나 황공하옵니다. 복망하옵건대, 성명(聖明)은 살피소서.”
하고, 인하여 황세저포(黃細苧布)·백세저포(白細苧布) 각각 15필, 흑세저포(黑細麻布) 30필, 황화석(黃花席)·만화석(滿花席)·잡채화석(雜彩花席) 각각 10장, 인삼(人蔘) 1백 근을 드리고, 황태후의 예물(禮物)로는 홍세저포(紅細苧布) 10필, 흑세마포(黑細麻布) 20필, 만화석(滿花席)·잡채화석(雜彩花席) 각각 10장이요, 중궁(中宮)의 예물도 같았다.
세종 25년 계해(1443, 정통 8) 11월 15일(병인)
주문사 공조 참판 정분이 가지고 온 칙서에서 표류한 사람이 본국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돌려보내다
주문사(奏聞使) 공조 참판 정분(鄭苯)이 칙서(勅書)를 싸 가지고 북경으로 부터 돌아오니, 왕세자(王世子)가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맞이하였다. 그 칙서에 이르기를,
“왕의 아룀을 얻으니, 명령에 의하여 ‘변장으로 하여금 순수(巡守)를 엄하고 부지런히 하게 하여 왜구(倭寇)의 성식(聲息)이 있게 되면 곧 비보(飛報)하겠다.’ 하였으니, 왕의 충성을 갖추 보겠다. 아룀에 의하여 배신(陪臣) 정분(鄭苯)으로 하여금 바다에 표류하여 바람을 만난 사람 조곽실리(趙郭失里) 등 6명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지금 왕의 나라 사람인 것이 인증(認證)되었다. 조괴실이(趙怪失伊)는 즉 조곽실리(趙郭失里)이고, 강권토(康權土)는 즉 강관토(江官土)이고, 문제만(文弟萬)은 즉 문첩마니(門帖麻尼)이고, 김초송(金草松)은 즉 김새송의(金賽松義)이며, 오준모지(吳俊毛知)는 즉 오진막제(吳眞莫弟)이고, 김어눌지(金於訥只)는 즉 김아나길(金阿那吉)이므로, 모두 짐꾼과 식량을 주어 분(苯)에게 부치어 데리고 돌아가게 하였는데, 왜구를 방어하는 것은 반드시 그 방도가 있을 것이니, 왕이 마땅히 살펴 처리하여 장구한 것을 도모하여 반드시 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을 알아서 감히 방사(放肆)하지 못하게 하면 거의 변방 근심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조괴실이(趙怪失伊) 등에게 유의(襦衣)와 모관(毛冠)을 내려 주고 그 고향인 제주(濟州)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세종 25년 계해(1443, 정통 8) 11월 17일(무진)
주문사 정분에게 의정부에서 잔치를 내려 주다
주문사(奏聞使) 정분(鄭苯)에게 의정부에서 잔치를 내려 주었다
세종 26년 갑자(1444, 정통 9) 윤 7월 14일(신묘)
하연·정분·윤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하연(河演)으로 의정부 좌찬성 겸 판호조사(議政府左贊成兼判戶曹事)를 임명하고, 정분(鄭笨)으로 호조 판서, 윤형(尹炯)으로 예조 참판, 황치신(黃致身)으로 형조 참판, 안지(安止)로 공조 참판, 권맹손(權孟孫)과 마변자(馬邊者)를 모두 동지중추원사로, 이사검(李思儉)으로 경창부 윤(慶昌府尹), 유수강(柳守剛)으로 한성부 윤, 조석강(趙石崗)으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임명하였다
세종 27년 을축(1445, 정통 10) 9월 2일(임신)
세자가 정분을 인견하고 본궁 장리에 대해 의논하다
세자가 연희궁에서 조회하였다. 정분(鄭苯)을 인견하여 임금의 뜻으로 말하기를,
“여러 도(道)의 본궁 장리가 모두 5백여 곳인데, 지금 매 곳에 밑천 2천 석을 두어 이식(利息)이 5천 석에 이르면 늘어난 5천 석을 30분으로 하여 29분은 의창을 보충하고, 1분은 본궁에 들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니, 정분이 말하기를,
“군현(郡縣)에 따라 땅의 좁은 것이 있고, 백성의 많고 적은 것이 있으니, 으레 2천 석을 두는 것은 불가하고, 또 장리(長利)가 백성에게 이익이 있는 것이 심히 큽니다. 신이 일찍이 충청도 감사가 되었을 때에, 청주(淸州) 초수(椒水) 등처의 거민들이 오로지 본궁 장리에 힘입어 살았으니, 청컨대, 땅의 넓고 좁은 것을 나누어서 혹은 1, 2천 석, 혹은 3, 4천 석을 알맞게 배치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내서(內書)를 가지고 전지하기를,
“나의 뜻은 이 글에 다하였다. 지금 큰 법을 세우겠으니, 반드시 대간(臺諫)과 집현전(集賢殿)에 보이고 행하라.”
하니, 분(苯)이 아뢰기를,
“만일 대간에게 보이면 반드시 불가하다 할 것이니, 우선 한 두 대신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행하소서.”
하매, 세자가 정분의 말로 들어가 아뢰는데, 도로 내서를 싸가지고 나와서 분에게 이르기를,
“경이 이 글로 정부에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세종 28년 병인(1446, 정통 11) 5월 23일(경인)
홍해·정분·황치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해(洪海)로 숭덕 대부(崇德大夫)를, 정분(鄭苯)으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황치신(黃致身)으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홍약(洪約)·이진(李秦)으로 아울러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안지(安止)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윤상(尹詳)으로 예문 제학(藝文提學) 겸 성균 사성(成均司成)을, 변효문(卞孝文)으로 경창부 윤(慶昌府尹)을 삼았다
세종 28년 병인(1446, 정통 11) 8월 30일(을축)
황희·하연·김종서·정분과 함께 의논하면서 사관에게 피해가라고 하였다
영의정 황희·우의정 하연·우찬성 김종서·우참찬 정분을 불러 비밀리 일을 의논하는데, 중사(中使)가 말하기를,
“사관(史官)은 피해 가시요.”
하였다. 사관(史官) 정신석(鄭臣碩)이 중사(中使)를 통하여 아뢰기를,
“신(臣)은 직책이 사실 기록함을 맡았으니 듣지 않을 수 없사온데, 만약 다른 사람에게 준례(準例)하여 신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피하라고 말한다면 피하는 것도 또한 마땅하다.”
고 하였다.
세종 29년 정묘(1447, 정통 12) 2월 1일(계사)
하연·김종서·정분·정갑손을 불러 행대를 보내는 것에 관해 의논하였다
우의정 하연·우찬성 김종서·좌참찬 정분·우참찬 정갑손을 불러서 세자에게 명하여 전지하기를,
“관할 구역의 백성이 고소(告訴)함을 금한 것은 허조(許稠)가 태종(太宗) 때에 건의하여 시행하여 지금까지 준용(遵用)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폐단이 발생한 까닭으로 행대(行臺)를 나누어 보내어 백성에게 고통되는 것을 묻게 하였는데, 허조도 말하기를, ‘만약 임금님께서 관원을 보내어 특별히 이를 물으신다면 백성들에게 상세히 알리고 숨김이 없도록 하심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근일에 경 등이 행대를 보내기를 청하고, 집현전에서도 이를 말하니 어찌 들은 바가 없이 그렇겠는가. 나도 또한 들은 바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무지한 백성이 소장(訴狀)을 올렸는데 혹시 잘못 따라서 이를 죄준다면, 이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서 도로 죄를 주는 것이다.”
하니, 하연이 아뢰기를,
“만약에 거짓 고발하는 사람을 죄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무함하는 말을 만들어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게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니, 증거 없는 사람은 사실을 조사하여 마땅히 이를 죄주어야 될 것입니다.”
하고, 김종서는 아뢰기를,
“행대는 진실로 마땅히 보내야 될 것입니다. 또 수령들이 고적(考績)의 제1등으로써 경관(京官)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후에 탐오하여 법에 어긋난 일이 발각되니 감사(監司)까지 아울러 처벌하여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시키는 법을 엄하게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을 만든 것은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용서하지 못하게 한 것이지만, 그 수령들의 죄로써 감사에게까지 소급 논죄하여 일일이 이를 처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 마땅히 그 결말을 다시 생각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하연 등이 아뢰기를,
“이른바 죄란 것은 영구히 서용(敍用) 안 되는 것이 아니니 적당히 과죄하여 이들을 경계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또 말하기를,
“수령들을 열 번 고적하여 열 번 상등이 된 사람은 관계(官階)를 뛰어넘어 권장해 주는 것이 옳겠지마는, 그러나 전최(殿最)가 능히 한결같이 바른데서 나올 수가 있겠는가. 또 열 번 상등이 된 것은 많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하연 등이 아뢰기를,
“열 번 고적하게 되면 반드시 다섯 감사를 지나쳐야 되니, 만약 특이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능히 모두 상등의 고적에 있겠습니까.”
하고, 도승지 황수신(黃守身)이 아뢰기를,
“예전에 여러 도(道)의 감사는 전최를 매우 가벼이 여겼는데, 사헌부에서 이를 살펴 논박한 뒤로부터 전최가 조금 무거워졌으니, 지금 이 법을 만든다면 열 번 상등이 되는 사람은 적어질 것입니다.”
하고, 정갑손은 아뢰기를,
“신이 감사로 재임했는데, 수령들로 상등의 고적(考績)을 차지할 만한 사람은 1, 2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에 인재(人才)가 본디부터 적어서 감사도 오히려 정선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수령이겠습니까. 거의 다 평평(平平)한 사람들이니 이를 폄출하면 대신하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게 되며, 혹은 도리어 미치지 못하기도 하여 한갓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단이 있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전최에 있어서 혹은 상등으로 하고 혹은 중등으로 하여 관직을 갈아내지 않게 할 뿐입니다. 경관(京官)의 요좌(僚佐)는 1, 2명이 아니므로 서로 가(可)타 부(否)타 할 수 있지마는, 감사는 한 몸으로써 한 방면을 자기 생각대로 처리하게 되니, 백성의 기쁨과 근심이 이에 매였으매 더욱 선임(選任)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재간이 당상관이 되어 거개 사무에 익숙한 사람이 많은데도 재상(宰相)의 관질(官秩)이 높다고 해서 보내지 않고 있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비록 육조의 판서라도 또한 감사가 되도록 허가하소서.”
하고, 정분은 아뢰기를,
“직책의 높고 낮은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의 현명하고 현명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육조의 판서는 그 직책이 매우 중요하였다. 중국의 육부 상서(六部尙書)도 그 임무에 오래 있게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 임기(任期)가 3, 4년에 지나지 않으며 재상의 수효도 많지 않으니 체대(遞代)해서 이를 하게 하고, 만약 감사가 그 적임자가 없으면 혹은 안렴사(按廉使)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하연 등이 모두 아뢰기를,
“한 방면에는 모름지기 중신(重臣)을 임용해야 될 것인데, 안렴사는 직위가 낮으니 보낼 수가 없습니다.”
하고, 김종서는 아뢰기를,
“그 노쇠한 대신(大臣)을 임용하여 이익이 없는 것보다는 어찌 현인을 선택하여 안렴사로 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황수신(黃守身)도 또한 안렴사의 관질이 낮은 것으로써 말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관질(官秩)이 낮은 사람이라도 특별히 의물(儀物)을 내려서 보낸다면 어찌 위엄이 무겁지 않겠는가. 일산[蓋]을 펼쳐 들고 월(鉞)을 가지고 가도록 함이 어떻겠는가.”
하니, 하연 등이 아뢰기를,
“만약 안렴사를 보낸다면 감사(監司)의 예(例)에 의거하여 교서(敎書)를 내리고 대성(臺省)에 차함(借銜)하여 이졸(吏卒)을 거느리고 가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수령들의 30년의 정적(政績)을 상고하게 함은 나는 일찍이 공론(公論)에서 나왔다고 여기는데, 혹은 청탁을 해서 이를 얻는 사람이 있으니 또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세종 29년 정묘(1447, 정통 12) 4월 6일(정유)
정분과 이활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분(鄭苯)으로써 의정부 좌참찬 겸 판호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戶曹事)를 삼고, 이활(李活)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삼았다
세종 29년 (1447년) 5월 1일
우의정 하연(河演)·좌찬성 황보인(皇甫仁)·우찬성 김종서(金宗瑞)·좌참찬(左參贊) 정분이 아뢰기를, “신들은 생각하옵건대, 평안도의 안주 읍성(安州邑城)은 본디 절제사 영(節制使營)으로서 실로 우리 나라 요충(要衝)의 땅이옵니다. 옛사람의 말에, ‘수(隋)나라 군사 백만 명이 물에 빠져서 고기밥이 되었다.’는 것은 곧 안주(安州)의 살수(薩水)를 이른 것이옵니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29년(1447 정묘/명 정통(正統) 12년) 8월 30일(기축)
숭례문(崇禮門)을 새로 짓는데 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 등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분(苯)이 오로지 토목(土木)의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아서, 영선(營繕)하는 일이 연해 계속되고 미리미리 임금의 뜻에 맞도록 하니, 재물과 인력이 동나게 되었다.
세종 30년 무진(1448, 정통 13) 8월 4일(정사)
정분에게 불당설치를 추위전에 끝내기 위해 선군을 역사시키라고 이르다
임금이 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에게 말하기를,
“경이 부득이하여 불당을 영조하는 일을 맡았는데, 지금 천기가 추워지는 것 같으니 빨리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경기(京畿)의 선군(船軍) 4천 명을 역사시키려고 하나, 그 수가 너무 많으므로, 이달에 1천 명을 역사시키고 내달에 1천 명을 역사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정분(鄭苯)이 대답하기를,
“절터가 조금 높고 궁성이 낮으므로, 마땅히 쌓아서 높이게 되어 공사가 작지 않으나, 불당 짓는 것이 13간 밖에 안되어 10월 보름 전에는 완성할 수 있으므로, 선군을 역사시킬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세종 30년( 1448 무진 / 명 정통(正統) 13년) 12월 5일 정사
불당(佛堂)이 이룩되니 경찬회를 베풀고 5일 만에 파하였다.
불당의 제도가 사치와 화려함이 지극하여 금과 구슬이 눈을 부시게 하고 단청이 햇볕에 빛나며 붉은 비단으로 재봉(裁縫)하여 기둥에 입혀서 주의(柱衣)라고 이름 하여 더럽혀짐을 방지하고 향나무를 새겨 산(山)을 만들고 금부처 세 구(軀)를 그 가운데 안치하였으니 그 금부처는 안평 대군(安平大君)이 일찍이 성녕 대군(誠寧大君) 집에서 감독해 만든 것이다.
근장(近仗)으로 하여금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가(大駕)를 호위하는 의식과 같이 대내(大內)에 메고 들어가게 하여 친히 관람하신 뒤에 불당에 안치하였다.
그 바깥담을 쌓을 때에 자꾸 얼어서 담의 안팎에 숯불을 피워서 따뜻하게 하니, 잠시 만에 담이 말랐다.
종친(宗親) · 대군(大君) · 제군(諸君)들이 다투어 일재(日齋)를 베풀어 혹 뒤질까 염려하였고, 의정부 좌참찬 정분(鄭苯)과 병조 판서 민신(閔伸)이 그 역사(役事)에 제조(提調)가 되었으므로 모두 털옷[毛衣]을 하사하고 이명민(李明敏)은 역사를 감독한 일로써 품계를 뛰어올려 벼슬을 제수하였다.
정분과 민신은 처음에는 의정부와 육조(六曹)의 당상(堂上)으로써 예(例)에 따라 간(諫)하였으나 감독의 명을 받음에 미쳐서는 지극히 사치하게 하기를 힘써서 임금의 뜻을 맞추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경찬회를 베풀자 도승지 이사철(李思哲)에게 명하여 기일 전에 그곳에서 치재(致齋)하고 모든 일을 통찰(統察)하게 하며 또 각사(各司)의 장관(長官)으로 하여금 공급할 찬품(饌品)을 친히 감독하게 하니 모두 내주 옹인(內廚饔人)이 장만한 것으로 어선(御膳)과 다름이 없고 또 외승(外僧)과 사장(社長)을 불당 밖의 건천(乾川)에서 공궤하니 하룻 동안에 공궤한 사람이 7,8백 명에 내려가지 아니하고 소비한 쌀이 2천 5백 70여 석이었다.
신곡(新曲)을 지어 관현(管絃)에 올리고 악기(樂器)를 모두 새로 만들어서 공인(工人) 50명과 무동(舞童) 10명으로 미리 연습시켜서 부처에게 공양하여 음성공양(音聲供養)이라고 일렀으니, 종(鍾)·경(磬)· 범패(梵唄)·사(絲)· 죽(竹)의 소리가 대내(大內)에까지 들리었다.
정분 · 민신 · 이사철 · 박연(朴堧) · 김수온(金守溫) 등이 여러 중[僧]들과 섞이어 뛰고 돌면서 밤낮을 쉬지 아니하니 땀이 나서 몸이 젖어도 피곤한 빛이 조금도 없었다.
이명민이 한 환자(宦者)와 더불어 선언하기를 “바야흐로 정근(精勤)할 때에 문(門)에 나와 돌아보니 사리(舍利)가 빛을 내는데, 빛이 불꽃과 같고, 가운데에 흰 기운이 있어 진하게 맺혀서 떨어지는 것이 진주(眞珠)와 같았다.” 고 하니 듣는 자들이 비난하기를 “진실로 그런 것이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문밖에 있는 명민 만이 홀로 보고 당(堂) 안에 있는 여러 사람은 보지 못하였을까.” 하였다.
회(會)를 파하고는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경찬회를 그림으로 그리고 또 계문(契文)을 지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벌여 써서 축(軸)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으니 주서(注書) 성임(成任)도 참여하였다.
수양 대군이 말하기를 “너는 공자(孔子)의 도(道)와 석가(釋迦)가 누가 낫다고 이르느냐.” 하니 성임이 대답하기를, “공자의 도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읽어서 대강 그 뜻을 알거니와 석씨(釋氏)에 이르러서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보지 못하였으니 감히 알지 못합니다.” 하매 대군이 말하기를 “석씨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것은 하늘과 땅 같을 뿐만 아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비록 좌소용마(挫燒舂磨) 하고자 할지라도 베푸는 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세종 31년 기사(1449, 정통 14) 3월 26일(병오)
정분·허후·민신·이사철 등이 장의사 수보사목을 의논하여 아뢰다
촤참찬 정분(鄭苯)·예조 판서 허후(許詡)·병조 판서 민신(閔伸)·도승지 이사철(李思哲) 등이 장의사 수보사목(藏義寺修補事目)을 의논해 아뢰었다. 당초에 여러 신하들이 이 불당(佛堂)의 역사(役事)를 중지하기를 모두 간(諫)하였으나, 민신만이 홀로 간(諫)하지 아니하고 역사를 감독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사림(士林)들이 모두 비웃었다. 동렬(同列)로서 조롱하는 이가 있으니, 민신이 말하기를,
“임금의 명을 신하가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을까.”
하였다. 민신은 재능이 없으나, 오로지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친속(親屬)임으로써 궁중에 인연이 있고, 또 임금의 뜻을 잘 맞추어서 벼슬이 판서에 이르게 되었다
세종 31년 기사(1449, 정통 14) 5월 2일(신사)
정분·허후·민신 등이 수륙사를 영국사에 옮길 것을 아뢰다
정분(鄭苯)·허후(許詡)·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이사철(李思哲)이 영국사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수륙사를 영국사에 옮기는 것이 편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정부로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세종 31년 기사(1449, 정통 14) 12월 26일(임신)
정분·이견기·윤형·조혜 등 제 관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분(鄭苯)을 의정부 좌참찬 겸 판이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吏曹事)로, 이견기(李堅基)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윤형(尹炯)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조혜(趙惠)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정인지(鄭麟趾)를 공조 판서(公曹判書)로, 이선(李渲)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김효성(金孝誠)·이균실(李均實)·홍약(洪約)을 모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권맹손(權孟孫)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기건(奇虔)를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민공(閔恭)을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정이한(鄭而漢)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임효신(任孝信)·김수연(金壽延)·하결(河潔)을 모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조극관(趙克寬)을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성봉조(成奉祖)를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박중림(朴仲林)을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로, 이인손(李仁孫)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이사원(李師元)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기건은 행수(行首)에서 출신하여 중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이간(吏幹)으로 이름이 있었다. 이제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로서 들어와 호조 참판이 되었으나, 그가 전라도에서 재임 중에 매우 청렴하지 못하다고 이름이 있었고, 정이한은 양계(兩界)에서 성을 쌓은 공로로서 차례를 무시하고 서용(敍用)하게 되었다.
세종 31년( 1449 기사 / 명 정통(正統) 14년) 11월 19일 을미
영녕 대군(永寧大君)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였는데 세자는 그대로 금성 대군(錦城大君)의 집에 있게 하였다.
처음에 영녕 대군의 집을 짓게 할 새, 정분(鄭苯)과 민신(閔伸)이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이때에야 완성되었는데 고대(高大)하고 장려(壯麗)함이 참람되게도 궁금(宮禁)에 비길 만하였다.
정분은 재능이 있어서 일을 잘 처리 했고 민신은 부지런하되 조심하므로 대체로 건축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다.
대간(臺諫)에서 자주 말하기를 “정분은 정부의 관리이니, 친히 토목공사를 감독함은 옳지 못합니다.”하였으나 정분은 이를 사양하지 아니하고 손에다 지팡이를 들고 지시하며 규획(規畫)하기를 공사(工師)처럼 하였다.
그러나 이명민(李命敏)으로 종관(從官)을 삼아 도청(都廳)이라 부르니 역도(役徒)와 목석(木石)의 출납은 명민이 실지로 전제(專制)하게 되어 선공 감(繕工監)은 한갓 빈 관직[虛官]만 부둥켜안고 있을 뿐이었다.
세종 32년 경오(1450, 경태 1) 윤 1월 5일(경술)
정분을 불당에, 이사철을 흥천사에 보내 보공재를 베풀게 하다
좌참찬 정분(鄭苯)을 불당(佛堂)에, 도승지 이사철(李思哲)을 흥천사(興天寺)에 보내서 보공재(報供齋)를 베풀게 하였다
세종 32년 경오(1450, 경태 1) 2월 5일(경진)
정분·허후·민신·이사철 등에게 명하여 진관사에 가서 수륙사를 베풀게 하다
정분(鄭苯)·허후(許詡)·민신(閔伸)·이사철(李思哲)에게 명하여 진관사(眞觀寺)에 가서 수륙사(水陸社)를 베풀게 하였다. 분(苯)은 속이 트이고 사리에 밝아 재상(宰相)의 기국(器局)이 있고, 잘 큰 일을 결단(決斷)하여 임금의 위임(委任)하는 바가 되었다. 선공 제조(繕工提調)가 되어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맡아 볼 때, 모든 집을 짓는 데 힘써 크고 아름답게 하였다. 불당(佛堂)을 짓는 역사를 분(苯)이 짧은 옷을 입고 막대를 잡아 공장(工匠)을 지휘하니, 보는 사람이 그 대신(大臣)의 체모를 잃는 데 분하게 여겼다.
세종 32년 경오(1450, 경태 1) 2월 10일(을유)
좌참찬 정분을 전라도에 보내어 전안에 인을 찍어 주게 하다
좌참찬 정분을 전라도에 보내어 전안(田案)에 인(印)을 찍어 주게 하였다. 이 앞서 헌부에서 분(苯)의 가는 것을 정지할 것을 청하므로, 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더니, 영의정 하연(河演)·우참찬 정갑손(鄭甲孫)이 아뢰기를,
“전안(田案)은 큰 일이온데, 완성되지 못한 문서로 세금을 거두게 되면, 아전들이 농간을 부릴까 염려되오니, 마땅히 대신(大臣)을 보내서 도장을 찍게 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우의정 남지(南智)·좌찬성 박종우(朴從愚)는 말하기를,
“마땅히 헌부(憲府)의 청에 따라 보내지 마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인(仁) 등의 말을 따르기로 했는데, 연(演)이 다시 청하기를,
“전안에 도장 찍는 것은 잠시의 일이오니, 모름지기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에 대신을 보내서 도장 찍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 이 때, 전라도의 수십 고을은 한꺼번에 수령이 모두 갈렸고, 거기에 염초(熖焇) 만드는 것을 감독하는 별감(別監)까지 더하여, 온 도가 시끄러운데, 연(演)이 전제 도제조(田制都提調)로서 백성의 폐단을 생각지 않고 굳이 청하여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