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차 라테란공의회를 주관한 교황 율리오 2세와 레오 10세
공의회 우위설 단죄 외에 성과 없이 끝나
제5차 라테란공의회(1512∼1517)
그리스도교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교회는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됐고, 그 결과 로마 교황청은 8세기부터 제국으로부터 일정 지역을 교황령으로 받아 다스리게 된다. 이로써 교황은 보편교회의 영적 지도자일뿐 아니라 교황령의 세속 군주라는 두 가지 위상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황들은 때론 자신의 영적 임무보다 세속적 임무에 더 몰두해 군주, 장군, 폭군 등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이에 제국의 군주들은 교황권을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교회에 도전했고, 중세기 교회는 교황과 제국 군주들간의 분쟁으로 얼룩지게 된다.
제국이 교황권 견제를 위해 내놓은 해결책은 제국과 밀착돼 있는 추기경들을 앞세워 공의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의회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고, 공의회는 교황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는 이른바 ‘공의회 우위설’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결국 1414년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린 공의회는 공의회 권위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5∼10년마다 한번씩 정기적으로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교황들은 정기적 공의회 개최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제국의 군주들이 공의회 개최를 교권 장악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1511년 피사에서 소집된 공의회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교권 독립을 위해 선임 교황과 달리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제국과 결별을 선언, 이른바 교황들의 ‘아비뇽 유배 시기’를 마감하자 프랑스와 교황청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됐다. 호시탐탐 교권 장악을 노리던 프랑스제국은 교황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가 교권 강화에 지나치게 치중함으로써 교회 내부로부터 반발이 불거져 나오자 추기경들을 앞세워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산되고 만다. 교황이 피사공의회 소집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1512년 로마 라테란 대성전에서 세계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에는 성직매매, 추기경과 주교를 비롯한 교회 고위 성직자들의 비리 등 암흑기로 비유될 정도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산적해 있었다. 하지만 교회 내부 문제 해결과 쇄신보다는 교황령 확장과 교황권 강화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교황은 공의회 우위설을 바탕으로 시도됐던 피사공의회만을 단죄하고, 교회개혁과 관련한 어떤 논의도 진척시키지 못하고 만다.
결국 교황 율리오 2세는 갑작스레 병을 얻어 공의회가 한창 중이던 1513년 사망한다. 이에 후임 교황에 선출된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공의회를 속행했다. 하지만 그도 선임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공의회가 속개되자 많은 사람들은 부패의 나락으로 치닫는 교회에 새로운 쇄신의 바람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공의회 결정을 주목했지만, 교회개혁 논의는 논의로만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공의회는 ‘오로지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 장소 이동 그리고 해산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공의회 우위설을 단죄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517년 폐막된다.
이 공의회는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교회개혁과 쇄신을 위한 마지막 기회였으나 허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공의회를 주관했던 율리오 2세와 레오 10세는 재위 기간 동안 교회쇄신보다는 막강한 교황권을 과시하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전’ 재건을 위해 대사를 반포하고, 나아가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도록 요청하는 등 교회개혁은 등한시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결국 루터의 주도하에 이뤄진 종교개혁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가 분리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