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보험료가 1,000 만원?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이 조그만 감기만 걸려도 동네 병원으로 데리고 갔었습니다.
여기에 온 지 약 2달 후에 아이가 감기에 걸려 콧물을 흘리고 있어서 동네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의사 표정이 뭐 이런 하찮은 것 가지고 병원까지 오느냐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감기 정도는 한국에서 준비해 온 감기약을 한 숟가락 먹이는 선에서 끝냅니다. 여기 감기에 한국 약을 먹이면 잘 듣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아이는 감기를 떨쳐버리고 건강해집니다. 오늘은 벨기에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의료보험료 산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도착해서 약 1달 반 만에 ID 카드 (외국인 주민등록증)를 발급 받자 마자 보험회사에 가서 의료보험에 가입했습니다. 벨기에 국민들은 월급에서 자동으로 어느 곳으로 의료보험료가 나가지만, 저 같은 외국인은 개인적으로 보험회사를 찾아서 보험에 가입해야 합니다. 여기도 보험료는 소득에 따라 다르며, 외국인으로서 벨기에 내에서 Work Permit (노동허가서)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은 소속기관에서 발급한 소득증명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학생의 경우는 소득이 없기 때문에 보험료가 거의 무료에 가깝다고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노동허가서를 가지고 imec에서 일을 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의료보험료가 학생들보다 높은 게 당연한 데, 처음에 책정된 2001년 의료보험료는 외국에서 온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무료에 가까운 10 만원 정도 (1년 분) 였습니다. 그 이유는 IMEC 에서 발급한 연봉 “0” 프랑 짜리 소득증명서를 제출 했고, 저는 벨기에 내에서 소득도 한 푼 없고, 벨기에 정부에 내는 세금도 한 푼 없는 사실상 거지나 다름없는 “무소득자”로 분류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벨기에 국민들 입장에서 저 같이 벨기에로 출장 나온 외국인 (한 두 명이 아니겠지요?) 들을 보고 있으면 엄청 열 받겠지요. 행색이 거지는 아니고, 어딘가에서 소득이 있어서 굶어 죽지 않고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벨기에 내의 소득이 없다고 자기들이 낸 혈세를 파 먹고 있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이런 불합리한 경우를 해결하기 위해 2001년 가을에 벨기에 법률이 개정되었다고 보험회사에서 통보가 왔습니다. 개정된 주요 내용은, 벨기에 "외부" 의 소득도 보험료 산정을 위한 소득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며, 2001년 1월부터 소급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 회사 월급 명세서를 제출해야 하며, 만약 제출하지 않으면 법으로 정해진 외국인 최고 요율 (연간 약 1,000 만원)을 적용하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하이닉스 연구소 지원팀에 영문 월급증명서를 요청했습니다.
우리 회사 월급 명세서를 제출한 후 설마 최고 요율은 적용 받지 않겠지 하면서 은근히 기다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종적으로 날아 온 청구서에는 최고 요율이 적용되어 그 동안 내지 않은 2001년 한해 분 의료 보험료 1,000 만원을 한꺼번에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녀석들이 농담하나 싶어서 보험회사에 당장 쳐들어(?) 갔습니다. 월급 명세서를 제출했고, 내 연봉은 한국 직장인 중에서도 많은 편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 최고 요율이 적용되느냐고 따졌더니 답변이 가관이었습니다.
첫째, 세금을 제한 후 실제로 수령하는 우리 회사 연봉은 벨기에 일반 직장인들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벨기에 직장인들은 50~70% 를 각종 세금/연금으로 추징 당하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 둘째, 벨기에 내에 있는 다른 “외국인”들에 비하면 한국의 연봉은 상대적으로 “엄청” 높은 액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미국보다 연봉이 훨씬 낮다고 따졌더니, 그 다음 설명이 저를 KO 시키고 말았습니다.
EU 국가들끼리는 당연히 보험이 상호 통하고, 북미(미국, 캐나다)나 일본 사람들은 자국의 의료보험증이 유럽에서도 통하기 때문에 벨기에에서 보험을 따로 가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료보험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외국인” 이라는 정의는 우리나라, 중국, 동구권 국가, 아프리카 국가, 중남미 국가 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연봉을 이런 나라들과 비교하니까 최고 요율이 적용되는 게 당연하겠지요.
한 푼이라도 보험료를 덜 내려고 월급 명세서를 보내 달라고 안 그래도 바쁜 지원팀 담당자를 더 바쁘게 만들었는데, 아무런 소득도 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진작에 아프리카 사람들과 연봉을 비교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차라리 월급 명세서를 제출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저 같은 경우와 같이 한국의 직장에 적을 두고 여기에서는 소득 한 푼 없는 모든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 "최고 요율"의 의료보험료를 내게 되었습니다.
2002.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