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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폭풍 전야
제1장 유신과 저항
11. 노동운동
'사람답게 살자' 임투…민주화투쟁 전개
박정권, 노동 3권운동 「반체제」몰아
광주 JOC.「도산」활동속 호전파업
박상원.박관현등 「들불야학」노동자 현실참여 일깨워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스스로 불을 당긴 스물두살의 청년노동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근로기준법 준수하라」고 외치다 쓰러진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산화해 간다.
청계천 다락방 구석의 한 이름없는 재단사 전태일의 죽음은 이땅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만천하에 폭로함과 동시에 한국 노동운동사의 새 지평을 열게된다.
그리하여 70년대가 저무는 79년 9월, 소위 「YH노동자들의 사건」이 발생하고 여기에서 광주출신 노동자 김경숙양이 숨을 거두고, 이어서 「10.26 사건」이 터진다.
사실상 노동3권을 전면 부정하고 노동운동 일체를 반체제운동으로 규정, 노사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파시즘적 개입을 강화하고 나선 유신정권 아래의 노동자들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른바 「산업전사」라는 미명아래 최저생계비의 40∼50%에도 못미치는 기아임금에 주당 50시간이상의 세계최장노동시간. 갖가지 산업재해에 죽음으로 직결되는 직업병까지….
일방통행식 산업화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돼온 광주.전남지역 노동자들의 현실은 더욱 비참한상황. 전남민주 청년운동협의회가 78년께 광주 광천공단 63개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광주공단실태조사」보고서를 보자.
이곳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기본급)은 3만5천73원. 3백 50∼4백원이던 백반 한그릇값에 비춰볼때 하루세끼 밥값에도 못미치는 이 임금은 전국평균 7만4천1백21원(노총)의 47.2%, 정부가 책정한 5인가족기준 최저생계비 19만6백87원의 18.5%에 불과하다.
근무시간도 섬유업종의 경우 하루평균 10시간30분∼12시간까지가 대부분으로 전국평균수준에 비해 극히 열악한 수준이다. 더구나 지역 경제의 특성상 여성노동자 혹은 불안정고용층이 노동자의 대다수를 구성했고 업체들도 종업원 1백인이하의 영세사업장이 대부분.
이시기 광주.전남지역의 노동운동은 가톨릭노노동청년회(JOC)를 중심으로 재야인사와 종교인, 서울지역 특히 청계피복노조출신 노동운동가와 대학생들의 외부지원을 받으며 여성노동자 중심의 사업장에서 노조민주화운동으로 전개된다.
이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 JOC여성노동자모임.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JOC활동은 70년대 들어 광주지역 노동자들의 유일한 공개기구로 현장노동자 중심의 활동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정향자(당시 전남제사노조위원장.현 가톨릭노동상담소 간사), 김성애(호남전기 부녀부장.현 서울우정기업), 강덕순(JOC 전임상근간사 현 부산거주), 이정희(호남전기노조위원장)등이 이시기 JOC노동자모임의 주요 멤버들.
이들은 초기 활동목표를 현장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소집단 학습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민주노조의 결성기반을 다지는 것으로 잡고 열성적인 활동에 돌입한다.
7∼8명 내외로 소그룹을 결성, 5개정도의 팀이 가동된다. 소그룹 활동을 통해 외곽에서 현장노동운동을 주동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노동자」라는 말 자체가 용공.빨갱이로 몰리던 폭압의 시기에도 불구. 소수 선진적 여성노동운동가들의 희생과 피나는 노력에 힘입어 피라미드형태의 소그룹 조직은 각 사업장으로 급속히 확산된다.
73∼78년 사이에 호남전기 매일유업 화천기공 아세아자동차 등을 비롯 전남제사 일신.전남방직 등 이지역 섬유업계 산별노조가맹 17개 단위 노조중 12개업체에 현장소그룹 조직이 결성돼 지역노동운동을 주도해간다.
여기에 서울.인천지역 활동가들과의 연결, 종교계.재야인사.학생운동권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사회운동과의 연계 등이 더해가면서 가속도가 붙는다.
전남대출신으로 서울 평화시장연합노조산하 「노동교실」에서 활동하다 77년부터 정향자.김성애.정희구(매일 유업 노조위원장)등과 함께 광주에서 소그룹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이양현(현 정우환경대표)의 증언.
「초기에는 중흥동 호남전기 뒤쪽에 마련한 단칸방과 노동자들의 자취방 등지를 전전하며 이뤄졌으나 조직의 확산과 함께 북동성당, 사례지오수도원, 중앙교회홀몬수도원, YWCA소심당 등지에서 40∼60명씩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월 2∼3회씩 기본교육을 실시할 정도로 발전했다.」
한편 강신석(현 광주무진교회).최연석목사(현 여수중부교회)등이 참여한 도시산업선교회도 지원활동을 벌이고 79년부터는 광주YWCA에서도 이윤정사회부간사(현 광주시의회의원) 등을 중심으로 버스안내원과 소규모사업장의 취업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상설 노동자교육이 이뤄진다.
소그룹활동을 통해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70년대중반 이후 삼양제사를 비롯한 섬유노조중심의 노조가 속속 결성된다.
또 노조가 설립돼 있더라도 당시 대부분이 노총의 지배를 받는 관제어용노조였던 각 사업장의 노조가 4∼5년새 민주노조로 변신한다.
정향자 장영숙 김석순(전남제사) 우정혜(전방) 김방열 김복자(일신방직) 손승현 김복순(한일섬유) 임미령(남해어망) 정희구(매일유업) 김혜복.전명화(삼양제사) 김동열(동신인초) 등이 각 사업장의 노조결성 및 노조민주화운동에 발벗고 나선 운동가들.
이과정에서 김성애 이정희 윤청자 등이 중심이 된 호남 전기 노조는 회사측과 공권력의 탄압에 맞서 가장 치열한 민주노조투쟁을 전개, 70년대 광주노동운동의 한 장을 차지한다.
74년께부터 3∼4년간 꾸준히 이어진 소그룹학습활동. 민주노조의 토대가 굳건히 다져지고 회사측의 임금체불.부당해고 등에 맞선 노동자들의 단결이 이어진다.
그러나 78년 8월의 경찰력 투입 등 계속된 탄압…. 성명발표.장기농성 등 조합원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통해 결국 79년 어용노조는 뒤엎어지고 민주노조(위원장 이정희)가 들어선다.
이 과정에서 김성애 등이 해고되는등 계속된 어려움 속에서도 타사업장 노동자들의 뜨거운 연대와 대학생, 재야측의 지원투쟁이 더해져 이지역 노동운동은 점차 하나가 돼간다.
현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노동운동가들의 활동외에도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기 위한 청년학생들의 야학활동과 노동현장으로 투신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1978년 7월 박기순(여.국사교육과.1980년 작고) 신영일(국사교육과.1988년 작고) 임낙평(인문대.현 광주 전남환경운동연합사무국장) 나상진(현 토지개발공사 근무) 이경옥(교육학과.현교사)등 전남대 운동권 학생들이 중심이 돼 들불야학이 창설된다.
광천천주교회 교리실 한칸을 빌려 시작된 들불야학은 곧 윤상원(5.18당시 사망), 전영호(현 광주출판사 경영), 박관현(전남대 총학생회장.1982년 작고), 김영철(5.18관련자)등이 동참하면서 김상윤(현 하심상사대표)의 녹두서점, 윤한봉(5.18 최후수배자)이 현대문화연구소 등과 함께 학생운동권 및 민주화운동세력의 주활동무대이자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또 1970년 강신석 최연석목사 이양현 등의 지원아래 김홍곤(현 사업), 김문수(현 교사), 손남승, 박용성(현 전교조활동)등이 주축이된 백제야학도 방림동 신협지하에 문을 연다.
당국의 사찰.연행 등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매기 40∼60여명씩의 노동자들을 배출한 이들 야학은 이지역 학생운동권.사회운동.노동운동권을 상호 매개하면서 80년대이후 거세게 불어닥친 「노.학연대투쟁」의 시발점이 된다.
청년학생들의 노동현장 투신도 이어진다. 1978년 6.29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으로 강제휴학당한 박기순이 그해 10월 광주 광천공단 동신강건사에 들어가고 비슷한 시기 윤상원도 한남플라스틱공장에 일용노동자로 입사하게 된다.
이들의 현장투신은 비록 별다른 성과없이 한시적인 활동으로 끝나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열풍처럼 불어닥친 소위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의 효시가 된다.
그중 윤상원 등이 주축이 된 들불야학출신(윤상원은 5.18이후 박기순과 가족들에 의해 영혼결혼식을 갖는다)운동가들은 광주항쟁기간중 「투사회보」제작, 도청사수 등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게 되며 택시기사들의 차량행사를 비롯 여성노동자들의 항쟁참여 등은 두드러진다.
이는 「전남사회 운동협의회」가 집계한 항쟁당시 구속자 부상자 사망자중 직업이 확인된 8백1명의 52%에 이르는 4백20명의 저임금 노동자 운전기사 등으로 밝혀진 점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광주항쟁기간중 노동운동권의 이같은 활동은 70년대 건설된 거의 대부분의 민주노조가 5공정권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되는 등 노동운동의 암흑기속에서도 80년대 중반이후 새로운 모습으로 회생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이 된다.
결국 5.18은 광주 전남을 포함한 한국 노동운동에 있어서 크나큰 절망인 동시에 끝없는 희망이었던 셈이다.
<고영봉 기자>
첫댓글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많은걸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