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천주교 최초 순교자 윤지충
윤지충(尹持忠)1759∼1791(영조35∼정조15) 해남윤씨22세 자:우용(禹用) 교명:바오로.
공재공(윤두서) 9명의 아들중 다섯째 아들 덕렬(德烈)의 손자( 공재공의 증손자)
정약용(茶山)의 외종사촌 형(3살 위)이며 권상연(權尙然)의 내종사촌 형이다.
윤지충은 양반가문에 태어나서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면서 1783년(정조7)에 25세로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서울에 와서 명례동(明禮洞)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머물면서 정약용(茶山)과 함께 천주교(天主敎)를 믿고 영세를 받았다.
1789년(정조13)에 청나라 뻬이징에 가서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고 돌아 왔으며
그 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므로 시골집에 피해 있으면서 신앙을 지키던 중
1791년(정조15)에 어머니 권(權)씨가 별세하여 장사를 지낼 때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의 의식에 따라 혼백의 위패를 만들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것이 관가에 알려져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 의해 조정에 고발당하고 이로
인하여 11월 23일 전주형장(全州刑場)에서 불효(不孝) 불충(不忠) 악덕(惡德)의
죄명으로 처형당하였다.
이 사건을 역사상 진산사건(珍山事件) 또는 신해사옥(辛亥邪獄)이라 한다.
윤지충은 우리나나 천주교사상 최초 순교자가 되었으니 김대건신부(1822∼1846
교명="앙드레")보다 무려 55년 앞선 순교자이다.
註 신해사옥(辛亥邪獄)
1791년(정조15)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 일명 진산사건(珍山事件)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일반 민중사이에 신봉되어 왔으나 해서(海西) 관동
(關東)지방에 국한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791년(정조15)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사촌 동생인
권상연(權尙然)이 윤지충의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제례(祭禮)를
지냈다는 소문이 조정에 들어오자 윤지충 권상연 등이 호남출신이라는 데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공,맹(孔, 孟)의 유교, 유학을 숭봉해야할 사림(士林)에 속한 사람으로서 정치와 제도의
위상을 손상시켰다는 것을 큰 문제로 삼았다.
더욱이 그 신도들의 대부분이 당시 집권파 서인(西人)계통에 속하였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을 시켜 두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하고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케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을 씌워서
사형에 처하게 되니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래 최초의 순교자를 내었다.
그러나 정조(正祖)는 사건을 이 정도로 끝내고 관대한 정책을 써서 천주교의 교주(敎主)
로 지목 받은 권일신(權日身) 같은 인물을 귀양보내는데 그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 확대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정은 이 일을 둘러싸고 남인계통이면서 당시의 상신(相臣)인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서파(信西派=서교의 신봉을 묵인)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洪義浩),
홍낙안(洪樂安) 등의 소위 공서파(攻西派=서교:천주교를 공격)가 대립하여 다음 신유사옥
(辛酉邪獄)으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받을 때까지 10여년간의 암투가 계속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윤지충 선조가 다산 정약용 선생과 친척관계임으로 해남 윤씨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더 정확히 알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