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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화 생활자전거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별에못을박다
빠르고 편하게 달리고 싶은 욕구가 가져온 놀라운 발전
로드 바이크의 세계
자전거는 보행을 도우면서 보다 편안하고 안전한 탈것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18세기 말, 미쇼가 내놓은 벨로시페드는 페달로 바퀴를 돌리는 첫 모델로 현대적인 자전거의 출발점이다. 19세기 후반 자전거의 보급과 함께 보다 빠르게 달리고 싶은 욕구로 레이스가 시작되었고,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크고 작은 레이스가 열렸다. 로드 바이크는 이렇게 발전해온 자전거 역사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적자다. 200년 이상을 진화해온 가장 빠르고 편한 로드 바이크의 진면목을 시리즈로 살펴본다
스피드, 질주, 열정….
다이아몬드형 프레임에 27인치의 큰 휠과 얇은 바퀴, 드롭형 핸들바 등을 달고 빠른 속도로 포장도로 위를 달리는 로드 바이크(Road Bike)는 자전거의 역사와 문화, 기술 등을 이끌고 있는 자전거 분야의 최고봉이다. 국내에서는 흔히 사이클(cycle)로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로드 바이크.
자전거는 지난 200년 넘게 끊임없이 진보해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이런 자전거의 발달을 가져오게 된 계기는 바로 보다 편하고 빠르게 다양한 환경에서 타고 싶은 인간의 욕구 때문이었다. 그 중 로드 바이크의 경우 가장 빨리 달리고 싶은 이들의 욕망으로 시작된 레이스와 함께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이번 호에는 로드 바이크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자전거의 역사와 함께 로드 바이크가 오늘날 최고의 인기를 끌 수 있게 해준 자전거 레이스의 130년 역사를 뒤돌아본다.
자전거의 역사
보다 편하고 안전한 탈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
인류의 생활에 바퀴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부터였지만 자전거와 같이 보행을 돕는 탈것이 나타난 것은 18세기 말이다. 1790년 프랑스의 귀족 콩뜨 드 시브락이 만든 셀레리페르(Celerifere, ‘빨리 달릴 수 있는 기계’란 의미)는 같은 크기인 두 개의 나무 바퀴를 나무로 연결하고 간단한 안장을 얹은 엉성한 탈것이었다.
1817년 독일에서 카를 폰 드리이스는 앞바퀴를 움직여서 원하는 방향으로 달릴 수 있는 목제 두 바퀴 자전거를 만들어 다음에 파리에서 드라이지네(Draisine)라는 이름으로 공개했다.
드라이지네는 영국으로 건너가 개량되어 호비호스(Hobby horse), 댄디호스(Dandy horse)라는 이름을 얻고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 모델들은 모두 발로 땅을 차서 움직이는 것으로 능숙한 이들이 겨우 10km 정도의 속도만 낼 수 있었을 뿐 실용성과 오락성 부분에서는 기대에 못 미쳐 대중적으로 보급되지는 못했다.
자전거는 1939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대장간을 하던 커크패트릭 맥밀런의 고안으로 큰 진전을 보게 된다. 그는 좌우 2개의 페달을 밟아서 연결봉과 크랭크를 통해 뒷바퀴를 돌리는 자전거를 만들어냈다. 증기기관차의 피스톤을 움직이면 컨로드와 크랭크를 통해 바퀴가 구르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드디어 사람이 땅에서 발을 뗀 채로 굴러가는 자전거가 태어난 것이다.
벨로시페드, 현대적인 자전거의 출발점
오늘처럼 페달로 바퀴를 돌리는 자전거는 1861년 파리에서 대장간일을 하면서 마차도 만들던 페이르 미쇼와 그의 아들이 내놓았다. 앞바퀴에 페달을 단 미쇼의 나무 자전거 벨로시페드(Velociped)는 현대적인 자전거의 출발점이 되었고, 당시 달리기 쉬운 탈것으로서 크게 환영받았다. 또한 1861년 2대, 62년 142대에 이어 65년에는 400대가 팔려 대량생산한 첫 번째 자전거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간 벨로시페드는 나무바퀴 둘레에 철판이 씌어졌지만 노면의 진동과 충격이 라이더에게 너무 심하게 전달되어 본쉐이커(Bone shaker)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바퀴에 통고무를 쓰면서 승차감이 좋아진 것은 물론 속도도 빨라졌다. 1860년대 후반에는 이 모델을 이용한 첫 레이스가 열렸고, 첫 번째 자전거 쇼도 파리에서 열려 앞선 기술들이 소개되었다.
사람들은 미쇼의 자전거로 스피드를 추구하게 된다. 1871년 영국의 제임스 스탈리는 앞바퀴가 유난히 크고 뒷바퀴는 작은 빅휠(Big wheel) 또는 오디너리(Ordinary)로 불리는 자전거를 내놓았다. 굴림바퀴의 지름을 크게 하면 같은 한 바퀴 회전이라도 달리는 거리가 늘어나 스피드도 달라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타이어는 역시 통고무를 써 빠르고 승차감이 좋으며 스타일도 멋있는 자전거였다. 오디너리는 유럽 여러 나라는 물론 미국에서도 크게 환영받아서 자전거 경주를 큰 인기 스포츠로 끌어올렸다.
빅휠, 오디너리의 약점은 안장이 너무 높아 타고 내리기 힘들고, 앞바퀴가 장애물에 걸리면 탄 사람이 앞으로 곤두박질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결점을 없애면서 새로 나타난 것이 세이프티(Safety 또는 Safety bicycle)다.
1874년 영국의 해리 로슨은 같은 사이즈의 크지 않은 바퀴를 달고, 앞바퀴 페달 대신 두 바퀴 중간에 있는 페달을 밟아 체인으로 뒷바퀴를 굴리는, 요즘의 자전거와 비슷한 세이프티를 처음 내놓았다. 안장에 오르내리기 쉽고, 달리기도 수월하며 위험하지도 않은 안전한 자전거라는 뜻이다. 1885년, 오디너리를 만든 제임스 스탈리의 조카인 존 스탈리는 세이프티 프레임을 다이아몬드형에 가깝게 하는 등 구조와 메커니즘에서 요즘 자전거의 기본요소를 모두 갖춘 로버(Rover) 자전거를 선보였다.
로버 세이프티로 발전한 자전거는 1888년 영국의 존 던롭이 발명한 공기 타이어로 더 한층 편하고 잘 달리는 탈것이 되어 현대 자전거의 기틀이 되었다. 당시 1880년대와 90년대는 자전거의 황금기였고, 여성들도 다투어 자전거를 탔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데서 얻은 자유는 영국에서 여권운동이 크게 번지게 한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자전거는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면서 많은 자전거 클럽이 생기고 여러 나라에서 이름난 레이스를 비롯해 크고 작은 레이스가 열리면서 자전거 타기는 열풍처럼 번져나가 장거리 여행도 이루어졌다.
소재와 기술 또한 크게 발전했다. 알루미늄과 티타늄 등 새로운 경합금 소재를 이용하면서 프레임과 변속기, 림과 타이어 등에서 신기술이 꾸준히 개발되었고 품질도 좋아져 자전거 성능은 계속 높아져왔다.
자전거 레이스의 역사
더 빨리 달리고 싶은 욕망이 불러온 한계의 도전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고 1860년대부터 자전거는 빠른 발전을 거듭한다. 그 중 스피드를 겨루는 레이스가 이 흐름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1860년대에 나온 미쇼의 앞바퀴 페달 구동방식 자전거로 시작된 자전거 레이스는 더 빨리 달리는 튼튼한 모델을 만들려는 메이커와 레이서들의 노력으로 70년대에는 오디너리, 80년대에는 체인 드라이브를 사용하는 세이프티의 등장을 재촉했다. 통고무 타이어에 이어 1888년에 나온 공기타이어 덕에 자전거는 스피드를 더하면서 누구나 탈 수 있는 안전하고 편리한 탈것이 되었다.
파리와 런던에서 벨로시페드와 본쉐이커 등 미쇼의 자전거가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자 몇 해 뒤 레이스가 벌어졌다. 세계 최초의 자전거 레이스는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1868년 5월 31일, 파리 서쪽 교외에 있는 생클로 공원에서 열린 경기가 유일한 문서 기록이 있어 가장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1200m를 달리는 이 레이스에는 벨로시페드 10대가 출전했다. 미쇼와 가까운 영국인 제임스 무어가 미쇼의 자전거를 타고 우승했으며, 기록은 3분50초로 시속 약 10km의 속도였다.
레이스가 많은 관객을 모으면서 큰 인기를 끌자 프랑스의 스포츠 신문과 자전거 신문들이 다투어 레이스를 열었다. 이런 유행은 영국으로도 옮겨와 1869년 파리와 런던에는 자전거 레이스용 트랙이 하나씩 만들어졌다.
자전거 경기는 곧 장거리 로드 레이스로 발전했다. 1869년 11월 9일, 파리-루앙 123km 레이스가 기획되어 300여명이 출전신청을 했다. 미쇼자전거회사가 우승상금 1000프랑을 내건 세계 최초의 내구 레이스는 경기 당일 비가 내렸지만 출발점인 개선문 앞에는 100여대가 모였다. 벨로시페드 외에 세 바퀴 모델인 트라이시클, 네바퀴차도 몇 대 나왔고 여성도 4명이나 출전했다.
비에 젖은 비포장 자갈길을 달린 경기에서 제임스 무어는 123km를 10시간40분에 완주해 평균 시속 11km가 넘는 기록을 세우며 또 다시 우승했다. 그는 미쇼가 아닌 다른 벨로시페드로 출전했으며, 유일하게 통고무 타이어를 썼다. 완주한 자전거는 모두 30대였으며 그 중에는 여성도 한 명 있었다.
이 무렵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자전거클럽들이 생겨났고, 각 클럽에서는 저마다 레이스를 기획했다. 그러나 1870년 7월 프랑스가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하고 여기서 패전하자 자전거 만들기와 레이스 개최 등의 중심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1871년 영국에서 제임스 스탈리가 오디너리라는 새 자전거를 내놓고 1885년 그의 조카 존 스탈리가 체인으로 뒷바퀴를 굴리는 안전한 자전거 세이프티를 내놓아 영국의 우위는 더욱 굳어졌다.
자전거의 보급으로 레이스 열기도 높아져
1870년대 후반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에 오디너리가 보급되면서 수많은 애호가 클럽이 생기며 레이스 열기가 더욱 높아졌다. 가볍고 튼튼한 오디너리로 스피드가 좋아져서 제임스 무어는 1873년 1시간에 23.3km를 달렸고, 이 기록은 차례로 높아졌다. 레이스는 1마일, 5마일, 25마일, 50마일 등의 종목이 있었고 1시간, 24시간 등으로도 구분되었다. 나라마다 챔피언을 뽑고 유럽과 미국의 챔피언들이 겨루는 세계챔피언 레이스도 벌어졌다. 이와 함께 국경까지 넘는 인터시티(intercity) 레이스도 많은 관객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레이스의 기획·진행을 위한 각국의 자전거 관련 단체들이 생겨 국제사이클연맹(UCI)에 이르는 길도 닦았다. 영국에서는 로드 레이스에 따르는 국민들의 항의로 1890년 로드 레이스를 법으로 금지해서 그 뒤 자전거 레이스의 주도권은 유럽대륙과 미국으로 다시 넘어갔다.
오디너리와 뒤이어 나온 세이프티의 앞선 성능과 공기타이어의 등장으로 장거리 로드 레이스들이 성공했으나 가장 자주 벌어져 많은 관객을 모으면서 떠들썩하게 진행된 것은 실내 레이스였다.
많은 실내 레이스 중 큰 인기를 누린 것은 1870년대 말 영국에서 시작된 6일 레이스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세를 탄 것이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레이스였다. 1891년 시작되어 해마다 한차례 열린 이 경기는 91년과 92년은 오디너리만 나왔으나 93년부터는 공기타이어를 쓴 세이프티들이 스피드를 겨루었다. 일요일 자정(월요일 오전 0시)에 스타트해서 토요일 밤 10시까지 꼬박 142시간 동안 계속되는 고된 6일 레이스는 98년까지 열렸고 나중에는 세계챔피언전으로 확대되어 미국과 유럽의 이름난 레이서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엿새 동안 잠깐만 눈을 붙이고 음식도 달리면서 먹는 이 죽음의 레이스는 레이서들이 기진맥진한 꼴로 달리게 되는 후반부, 특히 마지막 날이 대인기였다. 엿새 동안 2000마일(약 3200km)까지 달린 매디슨 스퀘어 가든 6일 레이스는 너무 가혹하다는 여론에 밀려 1899년부터 금지되었으나 2명이 한 팀으로 달리는 6일 레이스로 규정을 바꾸고 계속되었다.
세이프티 자전거는 1888년에 나온 공기타이어와 힘을 더해 1890년대를 자전거 전성기로 만들면서 자전거 레이스의 기틀을 잡게 했다. 미국에서는 자전거 레이스가 프로야구에 맞먹는 스포츠로 많은 관람객을 열광시켰다.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신문사와 메이커들이 자전거 레이스를 기획하고 지원하면서 프로 레이서들을 키웠다. 이 같은 열기 덕에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올림픽에 자전거 레이스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1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지고(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는 MTB도 추가), 1903년에는 프랑스 국토를 일주하는 뚜르 드 프랑스가 열려 연례행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전거 레이스
한민족의 희로애락과 함께 한 100여년의 역사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도입된 시기와 계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남아있는 자료는 없다. 대략 도입은 선교사나 개화파에 의해서 개화기, 경기는 일본인들의 영향으로 대한제국시절부터 시작되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초창기 경기는 서울의 자전거 상인들이 자전거를 보급하기 위해서 상금을 걸고 개최한 대회였다. 1906년 4월22일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서쪽 훈련원에서 열린 제1회 대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대회로 인정받고 있다.
대통령도 직접 응원했던 사이클경기
본격적인 대회로 발전된 것은 1913년 이후다. 20년대부터 우리나라와 일본 선수들이 동시에 경기에 참가했으며, 이때 우리선수들은 민족정신을 크게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특히 엄복동은 20년대에 일본선수들을 물리치고 많은 우승을 차지해 한민족의 의기를 북돋는 주역이 되었다.
22년 5월에는 전국자전거대회가 열렸고, 해방 후 46년 4월 대한자전거경기연맹이 발족되었으며, 47년에는 세계사이클연맹(UCI)에 가입해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세계대회에 참가한 것은 1948년 런던 올림픽대회다.
현재 개최되는 사이클 경기의 맥은 6.25동란 직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자전거에서 사이클이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 이 시절의 경기는 주로 신문사에서 주최했고, 대회는 3.1절, 8.15, 4.19 등을 기념하기 위해 그런 날에 열렸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울분들을 표했던 일제시대가 사이클경기의 최고 인기 절정시기였다면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에는 대통령의 스케줄에 맞춰 도로 경기가 출발하고, 행차 중에 사이클 행렬을 목격한 대통령이 차에서 내려 경기행렬에 대해 박수를 보내던 시절도 있었다. 또한 영부인의 저격사건으로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져 헌병들이 한강대교를 막고 모든 차량들의 통행을 통제하던 상황에서도 사이클경기 행렬에는 통제는커녕 바리케이드를 치우며 원활한 진행을 지원하던 70년대까지 국내 자전거 경기의 인기는 그 어떤 종목보다 최고였다
19세기 말까지 큰 발전과 많은 인기를 끌던 자전거는 자동차의 등장으로 그 위세를 잃고 답보상태에 빠졌다. 로드바이크 역시 지난 120년 동안 획기적이라 할 수 있는 진보는 하지 못 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유럽에서 열풍처럼 번진 레이스의 인기에 힘입어 프레임 제작기술은 물론 소재와 각종 부품의 발전을 이뤘다. 이탈리아의 캄파놀로와 일본의 시마노는 각종 첨단기술을 선보이며 부품업체의 선구자로 나섰다
인류는 지난 100년 동안 과학기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 특히 19세기 사람과 동물, 물과 바람의 힘을 대신하는 증기기관과 내연기관의 발명은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과학의 발전, 물질적 풍요로움까지 가져왔다. 그러나 자전거는 지난 한 세기 동안 프레임과 부품의 소재가 보다 강성이 높은 것으로 바뀌고 일부 부품의 성능과 가공기술이 좋아진 것을 제외하고 기본 구조가 거의 그대로일 정도로 그 진화가 미미했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답보상태에 빠져
19세기 말까지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면서 큰 발전과 많은 인기를 끌던 자전거가 20세기에 들어와서 그 위세를 잃어버린 이유는 바로 1886년에 등장한 휘발유 자동차 때문이다. 자동차는 힘들게 페달을 밟아야 움직이는 자전거에 비해 힘이 전혀 들지 않고 더 쉽고 빠르게 달릴 수 있어 유럽과 미국 상류층의 관심을 돌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이런 주요 소비층의 무관심은 세이프티에 던롭이 개발한 공기타이어를 사용하는 등 당시 빠르게 흐르던 발전의 물결을 한순간 멎게 만들고 말았다.
이렇게 색다른 새 기술의 등장을 보지 못한 자전거는 20세기에 기어 단수의 증가와 브레이크, 변속기 등을 비롯한 부품의 개량, 새로운 소재 이용, 제작기술의 진보만을 보여 왔다. 전 세계적으로 보유대수는 계속 늘어갔지만 자전거의 이 같은 답보상태는 197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 산속에서 새로운 타입의 자전거인 마운틴바이크(MTB)가 등장해 활용범위가 혁명적으로 확대될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로드바이크 역시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난 한 세기 동안 획기적이라 할 수 있는 진보는 하지 못 했다. 자전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프레임의 경우 1884년 최초로 등장한 다이아몬드형 구조인 세이프티의 디자인을 12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그 구조가 당시나 지금이나 물리학적으로 가장 튼튼하고 안정감이 높은 이유도 있다.
당연히 그 동안 더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 앞뒤 바퀴의 크기를 다르게 만드는 등 자전거 역사에서 ‘색다른 모델’로 다뤄지는 새로운 시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도전들은 당시 관심만 끌었을 뿐 대세가 되지는 못 했고, 그 인기하락과 함께 결국 자전거는 다른 것에 비해 더 보수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다.
다이아몬드형 프레임은 19세기 말의 제작기술에 비해 조금 복잡한 디자인이었다. 당시에는 오디너리처럼 일자형 프레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차체의 디자인이 다이아몬드형으로 바뀌게 된 것은 체인과 기어 등의 구동장치 사용과 보다 안정감 높은 자전거를 만들기 위한 노력 때문이었다.
1885년에 선보인 익스프레스 세이프티(Express Safety, 영국)는 최초로 체인을 사용한 모델이다. 앞바퀴가 크고 뒷바퀴가 작은 오디너리였지만 구동축인 앞바퀴에 체인링과 스프라켓을 달아 기어비 차이를 이용해 더욱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게 만들었다.
이어서 1888년 등장한 포니 스타(Pony Star, 미국)는 오디너리를 개량해 보다 안정성 있게 만든 모델이다. 오디너리는 속도가 빠르지만 무게 중심이 높고 앞쪽에 치우쳐 있어 노면상태가 조금만 나빠도 넘어지기 쉬운 단점이 있었다. 포니 스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앞뒤 바퀴의 크기를 오디너리와 반대로 바꾸고 구동축과 안장의 위치도 뒤쪽으로 옮겼다. 이에 따라 프레임의 디자인도 바뀌었는데 현재까지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초기 형태를 이루었다.
다이아몬드형 프레임과 경쟁을 벌인 모델로는 십자형(cross) 디자인이 있다. 두 바퀴를 잇는 튜브와 이를 가로지르는 시트튜브 등으로 이루어진 프레임은 요즘 나오는 접이식 모델과 비슷한 형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제강기술이 크게 발전해 다이아몬드형 프레임이 보다 가벼우면서도 튼튼해져 크로스형은 일반 자전거에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1편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