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카밀라(Camilla)
“카밀라! 어디 있니?”
“네, 언니. 나 여깃어요.”
“너, 혹시 조가비 그림 새겨진 핑크빛 머플러 못봤니?”
“그건, 아까 언니가 자전거에서 내릴 때 언뜻 보니까 핸들에 묶여있던데….”
“아참…, 내 정신 좀 봐.”
내 이름은 카밀라야. 자기 물건도 제대로 챙길 줄 모르는 저 푼수는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이 댁의 유일한 외동딸 이리나Lrina이고…. 하긴 식구라곤 엄마와 이리나, 그리고 나, 이렇게 셋밖엔 없어. 내가 이 댁에 처음 왔을 때에도 이미 아빠란 존재는 없었거든. 듣기로는 이리나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더군.
카밀라란 이름은 태어난 지 6개월밖엔 안 된 어린 나를 분양 받아 놓고, 엄마랑 언니가 서로 머릴 맞대고 지어 준 이름이라지. 그러니까 그리스신화에선가 로마신화에선가에 나오는 여장부 이름이라 하더군.
그렇다고 내가 여장부 소릴 들을만큼 우락부락하게 생겼다거나 체격이 유달리 큰 것은 아니야. 아니지, 오히려 정반대로 자그마하고 가냘픈 편에 속할 거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글쎄…,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 내 생김새만 놓고 볼 땐 사람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침팬지에 가깝겠지? 나도 나를 낳아 준 부모, 그리고 조상을 생각하면 침팬지라 인정하고 싶지만…, 솔직히 난 나 자신을 침팬지로 인정하긴 싫어. 침팬지는 인간처럼 말을 못 할뿐더러 생각의 영역도 굉장히 편협하거든.
게다가 침팬지는 온몸이 검은 털로 빽빽하게 뒤덮여 있고 얼굴이며 체형이며 인간의 옛 조상이라할 네안데르탈인과 아주 흡사하잖아. 마치 진화가 덜 된 야만스러운 종족처럼 말이야.
그리고 발은 발가락이 발달되어 물건을 마음대로 쥘 수 있어 인간에 비해 더 진화한 듯 보이지만, 반대로 손은 인간의 손에 비해 훨씬 정교하지가 못하거든.
내 겉모습이 언뜻 보기엔 침팬지와 흡사해 보이겠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더라고. 왜냐고? 온몸이 검은 털로 덮여있는 침팬지와는 달리 난 머리카락이 짙은 갈색일뿐더러 몸에도 조금은 짙고 길긴하지만 인간처럼 솜털로 덮여있거든. 게다가 피부색도 인간처럼 살색이고 말이야.
사람들 가운데에도 더러 침팬지처럼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도 있잖아. 온몸이 시커먼 털로 덮여있고, 또 눈썹뼈도 툭 튀어나온 그런 사람들 말이야.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내가 오히려 더 인간처럼 보인다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인간처럼 지능이 높아. 그래서 인간의 말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인간의 글도 익힐 수가 있었어. 웬만큼 어려운 책도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며, 내 생각을 컴퓨터에서 워드로 입력할 수도 있고, 또 인터넷검색도 능숙하게 할 줄 안다고. 근데 내 말투만큼은 아무리 연습을 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말이 좀 서투른 아이와 같이 어색하기만 해. 그건 아마 내 구강의 구조가 여느 인간과는 좀 차이가 있어서 그럴 거야.
내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보면, 내 아이큐는 아마 보통사람들의 평균치라 할 수 있는 110은 될 것이라 봐. 조금 높게 책정했나? 인간 가운데도 머리 나쁜 사람들이 더러 있잖아. 글도 잘 못읽고, 또 더하기 빼기 따위의 단순계산도 잘 못하는…. 그런 사람들보단 분명 내 지능이 더 높을 것이란 건 확실해. 그렇다면, 내가 인간보다 더 못한 하등동물이란 근거는 전혀 없잖아.
따라서 내가 나란 존재에 대해 내린 정의는, 내가 비록 인간은 아닐지라도 분명 침팬지도 아니라는 것이야. 그렇다면 새로운 종? 글쎄….
어쨌든 나는 정말 특이한 존재임이 분명해. 그럼에도 매스컴을 유난히 타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내가 원치 않아서야. 세상엔 하도 나쁜 인간들이 많아서 나같이 특별한 침팬지가 있다고 소문이라도 나 봐. 아마 쥐도새도 모르게 납치되어 돈벌이에 악용되기 십상일 거야.
사실 몇 번인가 내 모습이 지역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었기에 생김새만으로도 좀 특이하다하여 나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어. 그럴 때면 나는 영락 없는 침팬지처럼 행동했지. 생김새만 특별할 뿐, 그 외의 것은 보통 침팬지나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말이야.
어쨌든 나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고, 또 엄마나 언니처럼 그런 내 심정을 이해하고 나를 지켜주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거야.
내 나이는 여섯 살이야. 살아온 햇수로 나이를 친다면 유치원에 다닐 어린아이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내 신체의 생리적인 상태로 보아 사춘기를 지나 이미 초경도 치렀고 적어도 청소년기로 들어선 것 같아. 그러니까 인간의 나이로 따진다면 열네 살은 족히 되었을 거야.
그렇다면 나랑 한 방에서 지내는 언니는 이제 겨우 열네 살밖엔 안됐으니까 언니라 부르기엔 좀 뭣하지만, 뭐 어때? 세상에 나온 순서로 치면 언니라 불러도 상관 없잖아?
“까밀라, 이 언니 대신에 방학숙제 좀 해줄래?”
“언니 숙제는 당연히 언니가 해야지, 왜 걸핏하면 나더러 대신 해달라고 그래?”
“이번 한 번만 좀 봐주라. 대신 내가 매일매일 네가 즐기는 코코넛 그래놀라 만들어 줄께.”
“알았어. 숙제가 뭔데?”
“최근 1세기동안 멸종된 생명체의 종류와 원인에 관한 조사야. 너는 동물에 관한 관심과 지식이 풍부하니까 얼마든지 잘해낼 수 있을 거야. 너만 믿을께.”
아까도 말했지만, 난 발음이 좀 서툴러. 그렇지만 어떤 특정 단어들은 제법 분명하게 발음할 수가 있어.
‘엄마, 사랑해요’라든가, ‘언니, 나 배고파’라는 말은 보통아이들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발음할 수가 있어. 그리고 실제로 언니하고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어. 그것도 단 둘이 있을 때만 말이지.
인간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며 으스대지만, 난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연장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게끔 손이 발달해있고, 또 머리가 좋아서 생각의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시킬 수 있기에 가능하리라 여겨졌어.
그렇게 사람들이 일궈낸 지식과 기술들이 축적되고, 또 세대를 쭉 이어내려오면서 급진적으로 문명이란게 발전할 수가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나같이 지능이 뛰어난 침팬지들 또한 세대를 이어가면서 나름의 지식과 기술을 승계해 나간다면, 우리 침팬지 또한 진화를 거듭하여 인간처럼 만물의 영장이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
진화란 것은 특정 환경에 적응되도록 할아버지세대에서 아버지세대로, 다시 아들세대에서 손자세대로 그렇게 대를 이어가면서 조금씩 생체를 변화시켜 나가는 거야. 한 세대에서 갑자기 큰 변화가 나타나면 그것을 돌연변이라고 하거든, 나처럼 말이야.
생체적 진화와 마찬가지로 지식과 기술도 세대를 이어가면서 조금씩 수정도 되고 보완도 되면서 점차적으로 보다 훌륭하게 진보하는 거야.
오늘날 인간들의 진화과정도 그렇고, 지식과 기술, 문명도 그런 식으로 발달되어온 거지. 따라서 우리 침팬지들도 필요에 의해 세대를 이어가며 지능을 발달시키고, 또 지식과 기술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인간처럼 문명을 꽃 피우며 만물의 영장이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
불과 1만 년 전만 해도 인간이 우리 침팬지보다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었어. 아니지, 오히려 우리 침팬지만 못했지.
우리 침팬지는 온몸에 뒤덮인 털로 거친 자연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할 수 있었고, 나무도 잽싸게 잘 오를 수 있을뿐더러 달리는 속도도 인간보다 무지하게 빨랐어. 그리고 힘도 월등하게 더 세었고…. 그러니 당시 자연계에선 우리가 인간보다 더 우위를 차지했던 거야.
내 생각인데, 인간이 지금처럼 무리지어 생활하고 또 만물의 영장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계에서의 열등한 조건을 만회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때문인 것 같아.
“살려주세요.”
“쉿! 조용히 해!”
얼마전, 나는 한밤중에 수상한 사람들에 의해 납치를 당했어. 기절했다가 눈을 떠보니, 온갖 디지털계기가 깜빡거리는 실험기계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밝고 넓은 실내가 눈에 들어왔어. 그리고 일여덟 명으로 보이는 흰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몸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끔 온몸이 결박되어 있었어. 그러니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듯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드는 거야.
‘엄마와 언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절망적인 상황이라 엄마와 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거든.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귀가 쏠렸어.
“어떻게 침팬지에서 인간과 거의 유사한 신체구조와 지능을 지닌 돌연변이가 생겨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세기의 미스터리이자 더 나아가 다른 종으로 인해 인류의 생존이 위협 받을 수 있는 재앙의 첫 단초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한편, 저희들끼린 근심에 그득 찬 표정으로 얘기를 주고받더라고.
“즉, 인간의 글을 읽을 수 있고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인간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시 말씀 드려 침팬지도 인간처럼 문명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하지요.”
“그렇다면… 먼저, 이 침팬지의 뇌를 해부하여 그 원인부터 추적해봅시다.”
“뇌뿐만 아니라 다른 장기들도 해부해서 어떻게 급작스런 진화가 이뤄졌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뭐라고 고함을 지르려해도 어디까지나 생각뿐이야.
“우선, 전신마취제부터 실험체에 주입하도록 해요.”
“오케이! 스탠바이입니다.”
“그러면, 먼저 전기톱으로 두개골 절개부터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위이이이이이잉…’
마취효과 때문인지, 온몸이 나른하고 정신마저 혼미해지네.
‘이러면 안되는데…. 아… 정말 이러면 안되는데…’
‘이리나, 나 좀 살려줘. 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제발 살려줘. 죽기 싫다니까…. 언니… 제발… 살… 려… 줘… 아… 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