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소막 성당과 선종완 신부님 유물관
별수아골 수도원을 찾아가는 도중 용수막 성당을 지나가게 되었다.
뜻밖의 행운이었다. 용소막 성당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는데 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언젠가 먼 발치로 지나친적이 있었다.
용소막성당의 역사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 강원도 남부 산간지대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교우 최도철이
몇몇 신자들과 함께 교우촌을 형성한 후, 원주본당의 공소로 지정되어 초가 10칸의 경당(經堂)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원주 본당의 드브레(Deverd) 신부가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신부와 협의하여 주교의 허락을 거쳐
원주 본당의 공소였던 용소막을 본당으로 승격 분할하게 되었다.
1904년 포아요(Gaston Poyud, 表) 신부가 초대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신자 2,000명의 큰 본당으로 발전하게 되고,
1910 년 후임인 기요(Joseph uillot, 吉) 신부가 부임하면서 새 성당 계획을 세우게 된다.
고딕 양식을 변형시킨 소규모 벽돌조 성당의 전형적 형태인 성당은 1986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강원도에서 풍수원, 원주에 이어 세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다.
그러나 본당 건물은 수리 중이어서 주변 경관과 선종완신부님 유물관에서 수녀님의 선종완 신부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들어내는 열변의 강의를(?) 들었다.
용소막 성당의 전경,
풍수원 성당의 축소판을 보는듯한 아주 닮은 조그만 성당이었다.
십자가의 길에 오르는 곳에 위치한 성모님 상
성당 바로 옆에 선종완 신부님의 유물관이 보인다.
성당의 나이를 말하는듯 세월의 흔적을 보이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멀리 보이는 산세가 아름답다.
나무가 워낙 커서 어떻게 찍어도 나무 밑이다.
성당 아래 보이는 주차장에 선교회원들이 서성이고 있다.
역시 멀리 산자락이 보인다.
사제관으로 오르는 길 왼쪽엔 성당 위치를 알리는 푯말,
오른쪽은 성당 미사시간 안내와 행사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성당의 옆면이다
선종완 신부님의 유물관으로 수녀님의 안내을 받으며 들어서고 있다.
유물관 앞에 성모영보 수도원 설립자 선종완 사제의 동상이 작게 서있다.
선종완 신부가 세례를 받은 용소막성당 옆 ‘사제 선 라우렌시오 유물관’ 앞에 서 있는 선종완 신부의 동상.
수녀님의 열심한 강의를 숙연한 자세로 경청하고 있다.
선종완 신부는 1915년 강원도 신림면 용암리에서 아버지 선치태(라파엘)와 어머니 정치영(카타리나) 사이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신앙에 열심했던 부모의 영향으로 3일 후 용소막성당에서 라우렌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선 신부의 생가는 성당에서 고작 50여 미터도 안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선신부의 아버지는 부유한 지방 유지였다. 그러나 그를 엄하게 키웠다 한다
신부님은 일생을 철저히 ‘말씀’ 을 따라 산 사제이며 어학 재능이 뛰어나 독학으로 희랍어 등을 습득하였다. 신자·신학생 영성 교육 위해 성경 번역을 시작하셨다
이후 선 신부는 독자적으로 성경 번역에 뛰어든다. 당시 한국교회는 한글 신약성경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1910년 4복음서가 번역되었고 1941년에 서간편이 번역되었으나 구약성경은 아직 번역할 꿈조차 못 꾸고 있었다.
선 신부는 혼자 힘으로 구약성경 번역이라는 엄청난 일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당시 화폐가치로 연 100만 원에 달하는 번역·발간 비용을 마련할 방법이 요원했다.
그래서 선 신부는 당시 붐을 이루던 메추라기를 사육한다.선 신부는 새를 좋아했다. 카
나리아 등 새들을 수십 쌍을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메추라기 사육 붐이 일었다.
당시 달걀 한줄 값이 110환이었지만 메추라기알은 170환이었다. 막 부화기에서 나온
새끼 한 쌍이 2000~3000환이었고, 알을 낳을 수 있는 암컷은 1만 환에 가까웠다.
메추라기의 도움(?)으로 1958년 6월 30일 우리말 ‘창세기’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의해 발간된다.
하느님께서 최초로 우리말로 창세기를 말씀하신 것이다. 선 신부의 뼈를 깎는 노력과 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서품식에서는 단연 선 신부의 다재다능함이 화제가 됐다. 실제로 선 신부는 신학교 시절부터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한때는 성 음악에 깊이 매료되기도 했다. 하지만 짧은 손가락 때문에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해 음악을 포기해야 했다.는 일화가 있다.
현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인 최승룡 신부는 신학생 시절(1967년) 스승이신 선종완 신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신부님의 손가락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성경분야는 아직도 암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겨우 한 옥타브 밖에 못 짚으시는 그 손가락이 한국 천주교회에 얼마나 큰 다행인지.”
선 신부는 사제 수품 1개월 후 일본으로 유학, 중앙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한국교회 해외 유학생으로 로마로 유학,
울바노 대학과 로마 성서대학, 예루살렘 성서연구원 등에서 성서와 고고학 등을 수학했다.
선 신부의 로마행에는 당시 신학생이던 황민성, 유영도, 백남익, 박양운 등이 함께했다.
1952년 한국으로 돌아온 선 신부는 그해 가톨릭대 교수로 임명됐으며, 1955년 구약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증언들이 있다. 동료 교수였던 오기선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나 단순했기 때문에 그가 보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그것이 좋거나 그르거나 도무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일생을 성서 안에서 살았다.
모든 생각과 말, 행실, 모든 것을 성서에 준한 철저하게 성서에 미친 사람이었다.”
선 신부의 생가는 성당에서 고작 50여 미터도 안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생가터는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한다.
너무나 작고 예쁜 유물관의 창문
“자기 희생이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경청과 겸손의 사제였다. 선종완 신부는 사람을 만나면 늘 먼저 머리 숙여 인사하고 “네, 그렇군요” “네,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성모상 앞을 지날 때도, 신학생을 만나도, 심지어 마을 어린아이를 만날 때도 늘 먼저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런 그가 큰 사건 하나를 저지른다. ‘거룩한 말씀의 삶’을 영성으로 하는 성모영보 수녀회를 설립한 것이다.
1960년 3월 25일의 일이다. 올해 50주년 맞는 이 수녀회는 1963년 1월 10일 교황청 인가를 받았고, 1969년 8월 22일 수원교구 소속
첫 방인 수녀회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성경번역을 위해 책상 제작도 직접하셨다고 한다. 책을 많이 놓을 수 있게 고안한 것이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책상이다.
그렇게 가난 속에서 참 행복을 만끽하던 중, 선 신부는 역사에 남을 ‘큰 일’에 참여하게 된다.
1968년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으로 성경을 번역하게 됐는데, 이때 선 신부는 가톨릭 측 유일한 구약성경 번역자로 참여한다.
개신교 측 번역가는 문익환 목사와 박노순씨였다. 고난의 길이었다.
특히 아랍어는 선 신부밖에 몰라서 다른 위원보다 더 많은 분량을 번역해야 했다.
어두운 등잔불 아래서 밤새 작업하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시력이 크게 나빠졌다. 당시 함께 번역작업에 참여한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신명기 번역 독회 때의 일이었다. 선 신부님은 만족한 표정으로 ‘이제 하느님은 한국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군’하시는 것이었다.
좋은 성서 번역 외에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 선 신부님의 입에서 말고 그 누구의 입에서 이런 기막힌 말이 나올 수 있으랴,
이 말에 담겨 있는 그의 허심탄회하고 담담한 심정에 나는 겸손히 머리를 숙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성경 번역과 수녀원 기반 마련을 위해 하루 24시간을 쪼개서 바쁘게 보내던 중 선 신부의 건강에 이상이 발견됐다.
간암이었다. 병원에서는 과로가 원인이라고 했다. 7개월 후…. 치료가 중단됐다. 가망이 없었다. 임종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선 신부는 무서운 고통을 진통 주사 한번 맞지 않고 인내로 이겨냈다. 당시 간호하던 이들은 선 신부가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거나
짜증내는 모습을 한번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1976년 7월 13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는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집전되었다.
선 신부가 세상을 떠난지 9개월 후, 공동번역 구약성서가 발행됐다.
* 선 신부의 유해는 과천 성모영보수녀원 뒷산에 안장돼 있으며, 관련 유품 등은 원주교구 용소막성당 유물관에 전시돼 있다.
출처:가톨릭 신문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중에서]
“자기 희생이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유물관의 창문이 넘 소박하고 예뻐서..
유물관 앞의 주목나무를 십자가 모양으로 전지를 했다.라일락꽃과 나란히...
유물관에서 바라 본 성당의 자태
성당이 참으로 작지만 아름답죠?
성당 안내판
기념관 뒷편에 드루의 집이라고 있다.
무슨 집인가 궁금하여 돌아가 봤다.
신림역입니다.
다 왔네요.
여기서 내린 후 역에서 수도원의 수사님들이 데리러 오신다 해서 기다립니다.
신부님과 수사님께서 승용차 한 데와 트럭을 가지고 오셨네요.
가는 길에 용소막 성당이 있다하여 들려 갑니다. 아주 오래된 유명한 성당이지요.
아주 작은 신림역입니다.
시골의 조용하고 깨끗한 아름다운 역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는 참으로 깨끗합니다.
수도원에서 차가 올 때까지 옹기종기 모여 기다립니다.
신작로까지 쭉 뻗은 길에 가로수가 넘 시원하고 정갈하게 아취를 만들고 있습니다.
손님들을 품에 안으려...
벚나무에 꽃은 벌써 다 지고
잎파리가 여름을 향해 뻗고 있습니다.
벚나무에 더부살이 하는 넝쿨풀, 색이 넘 곱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