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2005-9
아들의 머리 염색
둘째 아들놈이 대학 입학 후 첫 학기를 보내고 여름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의 일입니다.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 온 아들이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저는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들의 머리 모양이 이게 웬일입니까?
대학 입학하고 나서부터 자르지 않고 계속 길러온 머리였습니다. 당연히 뒷머리도 상당히 길었지요. 제가 "엄마 머리핀 빌려줄까? 아니면 헤어밴드를 빌려줄까?" 하며 놀리던 머리였습니다. 그 머리를 글쎄...... 파마와 염색을 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 길던 앞머리를 전부 위로 올려붙여 컬을 만들고 뒤의 머리도 전부 컬을 만들어 올려 세운 모양이 꼭 달리는 말머리 같다고나 할까요? 게다가 빨간 색으로 염색을 했습니다.
평소에 보던 아들 같지 않고 너무 생소해 보였습니다. 넋을 잃고 멍하니 한참을 보다가 마구 웃음이 나왔습니다. 너무 이상해요. 망친 안정환 머리모양 같기도 하고, 아빠는 망친 박주영 머리모양 같다나요? 미용사 누나는 에릭 머리를 해주겠다고 했답니다. 우리 식구는 모두 웃느라 그 날 잠을 못 잘 정도였습니다. 아들은 웃는 식구들에게 그만 좀 하라며 신경질을 냈습니다. 본인이 워낙 속상해하는지라 내심 못마땅했던 저는, 그 상태에서 짧게 자르기만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애써 위로해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나가버렸고, 또 얼마나 밤늦게 들어 왔는지, 도통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아침 밥을 먹으러 나온 둘째 놈을 보고 또 놀랐습니다. 그 빨간 말머리 같던 모양의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시 다 피는 파마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이번엔 또 갈색 나는 염색을 한 겁니다. 머리 모양은 훨씬 나아졌지만 또 염색이라니.... 왜 이렇게 외모에 신경을 쓰는 걸까.
저는 실망감이 들었습니다. 사내아이가 이틀 상간에 파마를 두 번씩이나 하고 그 것도 모자라 염색까지 색깔별로 해대는 품새가 영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머릿결이 나빠진다는 것을 핑계로 염색을 두 번이나 하냐며 잔소리를 해댔죠.
곧이어 일어난 큰아들이 작은 놈을 보더니 어제보단 훨씬 스타일이 좋아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해야겠다는 거예요. 그 때 제 마음 속의 느낌이 삶은 달걀 세 개를 물도 없이 연거푸 먹은 것처럼 아주 불편해졌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할아버지 생신 지나고 나서나 해!" 하고 소리쳤습니다. 갑작스런 저의 큰 소리에 아들 두 놈이 제 눈치를 살폈습니다.
사실 요즘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고 하지만, 내 아이들이든 남의 아이들이든 간에 젊은 아이들이 너무 외모에 신경을 쓰는 세태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 가끔 강남이나 명동 같은 시내에 나가면 온통 연예인들이 쫙 깔린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예전엔 연예인과 일반인의 옷이 확연히 달랐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어요. 게다가 머리 모양과 색깔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서 민속 마을에 살지 않는 한 세상을 거스르며 살라고 할 수도 없는 일, 머리 색깔이 샛노랗거나 새빨갛지만 않다면 (연두, 분홍, 보라도 있을 라네) 솔직히 그렇게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 젊어서 한 때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불편한 것인지..... 나도 잘 모르는 내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별로 깊이 들어가지 않았어도 제게 제일 먼저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시아버지의 잔소리였어요. 지난 2월에도 둘째 놈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갈색 염색을 했습니다. 그 때 부산에서 올라오신 시아버지께서 아이들에게 염색하지 말라고 하시는 소릴 들었거든요. 아이들한테는 그래도 비교적 부드럽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부산에 돌아가셔서 제게 세 번씩이나 전화를 하셨습니다. 내용인 즉, 아이들에게 염색하지 말라고 타이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앞가림 잘하는 놈이라 하더라도 머리 꼴이 그 모양이면 나쁜 아이들이 꼬여서 어울리게 된다는 겁니다. 앞길이 창창한 놈이 공부하는데 열중해야지,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면서 공부가 되겠느냐며 걱정하셨습니다. 그 뿐인가요? 나라가 망조가 들다보니 이상한 것이 다 유행이다. 일본 사람들은 절대 그런 짓 안 한다. (일제 시제 때 얘기하시면서) 등등 한소리 또 하고 또한 소리 또 하고 안한 소리 골라 하시면서 거듭 거듭 강조 하셨거든요. 저도 이제 나이 50이 다 되어 가는데 누군가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그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하지 마라, 등의 강요나 요구하는 말, 특히 비난에 가까운 말을 듣고 참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아들놈들에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솔직히 니들 머리 염색하고 파마하는 거 별로 맘엔 안 들어. 하지만 아주 보기 싫지만 않다면 말리진 않겠다. 다만 조건이 있어. 할아버지께 잔소리 듣는 것은 엄마가 정말 힘들거든? 지난번에도 정말 혼났어. 잔소리만 안 듣게 해준다면 엄마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염색하고 파마하려면, 여름엔 할아버지 생신이 있어 친척들이 다 모이니까 생신 지나서 하고, 가을엔 추석에 큰댁에 가서 다 만나니까 추석 지나고 나서 해. 알았지?"
저는 할아버지를 빙자해서 어느 정도 제 욕구를 만족시킨 거죠. ‘나는 그래도 이해를 잘 하는 엄마인데 할아버지는 꽉 막혔으니까 할아버지만 피해라.’ 이 소리는 사실 할아버지만 나쁜 사람 만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만일 제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시아버님의 잔소리쯤 문제삼지 않을 수 있거든요.
조금 만 더 제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니 제 안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들들에게 외치고 싶은 저의 목소리였어요. “얘들아! 나는 니들이 염색하고 파마하는 거 정말 싫어! 제발! 어떻게 생겼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신경 쓰며 살 수 없겠니?” 거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라고나 할까. 온 세상 사람이 다 해도 제 아들들만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도 안정환의 헤어스타일을 보면 파마 잘 나왔다, 멋있다,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두 번째 한 아들의 헤어스타일은 솔직히 말하자면 꽤 괜찮아요. 그런데 왜 싫을까? 예쁘기만 한데 말이에요. 이제 대학교 1학년인데 이때 해보지 않으면 언제 해보나요? 머리론 이해가 되는데 왜 그렇게 싫을까?
다시 좀 더 제 맘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사실은 저도 걱정이 되는 거예요. 할아버지랑 똑 같은 마음인 거지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걱정 많은 잔소리가 더 싫은 겁니다.
제 걱정 때문에 "아들들아, 제발 엄마 걱정 좀 시키지 말아라" 하고 말하지만, 아들들은 말합니다. "엄마, 제발 걱정 좀 하지 마세요."
어떻게 하면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걱정이 엄마의 본분인줄 알았어요. 하지만 지나친 걱정은 아이들의 독립심을 저해할 뿐이죠.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고, 막무가내로 못하게 해봤자 반감만 살 따름이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계신가 봅니다, 울타리 되어주시려고요. 아이고...... 비로소 이 자리를 빌려 아버님께 전해 올립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