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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내 친구, 원숭이 똥꼬
[미래공상과학소설] 서기 2087년
표지디자인 1차시안입니다.
2009년 7월25일 출판기념회(부산아시아뷔페)를 갖을 예정이며,
그 전으로 표지디자인이 다시 바뀔 수 있습니다.
◆ 쪽수 : 각 400쪽
◆ 규격 : 155m(가로) ×232.5mm(세로)
◆ 제본 : 고급양장제본(표지:하드카바/제목:특수입체박)
◆ 가공 : 표지면 유광라미네이팅
◆ 가격 : 각권 부당 15,000원(우편발송비 포함)
◆ 주문 : 이메일만 접수- sahachan@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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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내 친구, 원숭이 똥꼬
서문
얍삽한 세상이다.
참으로 얍삽한 세상이다.
인간의 탈을 쓴 것은 하나도 믿을게 못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잘났어도 가진 게 없다면 까닭모를 괄시를 받게 마련이요, 아무리 못났어도 가진 게 많다면 괜히 대접받고 우러러 뵈는 세상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가짜가 오히려 더 진짜처럼 행세하며 더 설쳐대는 바람에 진짜가 머쓱해지고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설이랍시고 몇 편 써서는 국내 여러 신춘문예나 문학공모 따위에 응모하기도 했었다. 상금도 타고 작품도 인정받으려고 말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예외 없이 번번이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부턴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군데 출품을 했었다. 물론 저희 심사위원들끼리 상금의 수혜자나 당선자를 미리 내정해놓은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라는 걸 알고부터였다.
결과는 어떠한가. 단지 낙방했으니 다음 기회를 엿보자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명색이 글을 쓴다는 사람으로서 주위에 알 사람은 다 아는데 번번이 낙방이라니…. 문학 계통의 그 흔하디흔한 상을 단 한 차례도 못 탔다는 것은 곧 작가로서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과 같다. 따라서 나란 인간은 입으로만 작가입네 했지 작가는커녕 글 쓸 자격도 없는 인간임으로 매도되는 듯싶었다. 주위에서의 비웃음은 물론 아무도 내 글을 읽으려하지 않기 때문에 글쓰기를 아예 포기하려까지 했었다.
글이란 것도 남이 알아주고 읽어줌으로서 그로인해 흥이 나야 쓰는 것이고 가끔은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고무(鼓舞)되어야 쓸 맘이 생기는 것이다. 남이 알아주지도 않고 읽어주지도 않는 글을 저 홀로 제 흥에 겨워 쓴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니란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요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그 일에 집착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쓰는 과정의 노역 또한 어떤 중노동보다 더 고되면 고됐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내 글 솜씨가 워낙 미숙하고 또 허접하여 그러려니 생각했으며 당연하다 여겼다. 그런데 당선작이랍시고 이후 발표된 작품들을 찾아 몇 번씩 읽어보니 문장의 현란함이나 소재의 다양성에 있어 나무랄 수는 없겠으나 말도 되도 않는 허황한 줄거리에 소설로서의 심도는 형편없이 떨어져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으로서의 깊이가 전혀 없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란 것이다. 정말 작가로서 대성할만한 그릇을 지닌 작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대충 글쓰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여 상을 안겨준 꼴이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간 수백 수천 명을 헤아리고도 남을 그 많은 수상 작가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대개의 소설은(아마 전기물이나 역사물도 거의 예외가 아닐 것이다.) 작가가 꾸며낸 얘기들로 구성되어있어 이를 허구란 의미의 픽션(Fiction)이라 한다. 그렇듯 소설이 아무리 작가의 머릿속에서 꾸며낸 허구라 할지라도 그 속엔 세상 살아가는 이치가 담겨있어야 하고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얘기를 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글이란 글 쓰는 사람이 알고 있는 것만큼만 표현되는 것이다. 잘 알면 잘 아는 것만큼만 표현되는 것이고 잘 모르면 잘 모르는 것만큼만 표현되는 것이 글이다. 따라서 소설의 깊이는 글을 쓴 이의 경험과 지식의 축적만큼만 우러나오는 것이다. 글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낱말의 현란함보다 글 속에 담겨있는 깊은 속맛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거 왜 있잖은가, 고향 맛을 표현한 CF에서 유명 탤런트 김혜자가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라고 감탄사를 발했던 그 유명한 광고 카피처럼 말이다. 고향 맛이란 게 세련되고도 휘황찬란한 포장에서 우러난다고 볼 사람은 없잖은가.
2005년 7월경 월간 노벨문학을 창간하면서 국내 각종 문학공모전의 심사조건이 작품의 질보다는 뭔가 다른 요소가 작용되었음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나름 조사를 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이란 자가 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가 아니면 문단(文壇)과 상당히 연관관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당선자들의 면면도 대학교 문예창작과 출신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모종의 거래가 이뤄지지 않았겠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하자. 대학교 문창과 교수로부터 배운 수제자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막상 문창과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서면 취업이 그리 마땅찮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아니면 중등학교 교사자리가 기껏이다. 대학교 그 많은 학과들 중에 인기 없는 학과가 문창과라면 글 재능이 좋아서 일부러 그 과를 택했을 수도 있겠지만 성적 미달로 그 과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학생들도 적잖을 것이다. 따라서 심사위원을 맡은 교수의 입장에선 글을 써서 출세하려면 문학상 수상경력이라도 있어야 하겠기에 대기를 기다리는 숱한 제자들 가운데 선별할 수도 있겠거니 했다. 심사위원 입장에서도 이왕이면 알고지내는 이들이나 제자 가운데서 당선작을 뽑아주는 게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마저 공짜가 없어보였다. 심사위원과 피수상자들 사이에 상금은 포기하고 상장만 가져간다는 식의 거래가 관행처럼 성행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피수상자들 가운데 수상에 욕심이 생겨 상금을 양보하는 것에 더해 오히려 몇 백만 원 웃돈 줄 테니 수상경력만 쌓게 해달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 수상경력만 몇 백만 원 또는 몇 천만 원에 사겠다면 말이 되잖겠는가.
두해 전이던가 언론에서 예술인들로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영예인 국전(國展)의 대상작이 3천만 원이니 5천만 원이니 가격흥정으로 정해졌더란 보도가 있었고 그로인해 대한민국 국민들은 쇼크 상태까지 갔었다. 물론 국전 폐지론까지 거세게 일었다.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나서서 보증하는 가장 권위 있는 상마저 그럴진대 그보다 수준이 낮은 나머지 상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리고 부산시에서 주는 사진대상마저도 상금 5백만 원을 포기함은 물론 오히려 웃돈 3백만 원을 더 얹어주고 받았더란 얘기도 전해 들었다. 돈 주고 상을 샀다는 얘기는 그것 외에도 시중에 넘치고 넘쳤다. 국민훈장이며 대통령상까지 돈으로 사고파는 세상이 아니던가.
뭐 이렇듯 돈으로 상을 사고파는 행위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 유치원 애들 미술이든 음악이든 재롱잔치란 허울의 경연장에 가면 그때부터 돈의 액수에 따라 상의 품격이 달라진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고 보면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머리에 쇠똥조차 벗겨지지 않은 자식들에게 상은 돈을 주고 사야한다는 인식부터 새겨주려는 것 같다.
대학교 문예창작과란 곳이 오로지 글이란 것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를 양성하기위한 목적으로 생겨난 학과이니 당연히 글 솜씨가 뛰어난 사람들이 수 십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야 할 만한 학과라면 얘기가 달라지겠다. 그럴 경우 그 학과 학생 누구나 예외 없이 글쓰기에 일가견이 있고 탁월한 재능을 갖췄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게 재능이 많은 작가지망생을 당선시켜줌으로써 그들이 이후에 좋은 작가로서 우뚝 선다면 그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 생각할 수 있으나 실상은 문예공모 따위에 당선되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펴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반대로 그런 기회마저 박탈당한 능력 있는 작가들은 글쓰기를 포기한다면 그렇게 별 재능 없는 제자들을 뽑아 길을 열어주겠다는 발상으로 말미암아 이중으로 문학의 길을 가로막는 패악이요 저해요소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정작 글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그런 연줄마저 없다는 이유로 당선의 길이 막혀있으니 그런 사정을 알 까닭이 없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소를 금치 못한다. 즉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다. 문예공모니 무슨 문학상이니 하는 것을 단 한 차례도 받지 못했다면 그게 실력이 없다는 증명이 아니고 뭐겠는가 라는 비아냥거림을 당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글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상금 몇 백만 원 또는 몇 천만 원짜리 무슨무슨 문학상에 당선되었었다는 이력이 향후 글을 씀에 있어 작가로서의 입지에 더 큰 영향을 미치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 상조차 타보지 못한 작가의 글이란 으레 미심쩍고 신빙성이 떨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당선 되지도 못한 작가가 어떻게 이 땅에서 글을 씁네, 작가랍네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니 결국 자포자기로 글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잖겠는가.
그렇다면 그런 문예공모나 문학상 제도는 우리나라 문학의 질을 높인다거나 문학인을 양성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그르치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그런 제도들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나라 문학을 망치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금 1천만 원이니 5천만 원이니 하는 문예공모뿐만이 아니다. 하다못해 상금 1백만 원짜리 마저 심사위원들에 의해 그런 못된 장난으로 휘둘린다면 차라리 그런 문학관련 공모는 진작 사라져야 이 땅에 제대로 된 작가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유능한 작가를 육성한다는 취지와는 상반되게 그런 문학상이 있음으로 해서 정작 글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의 출현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내 친구, 원숭이 똥꼬’란 장편소설집을 발간하기로 맘을 먹고 편집을 하면서 명 평론가나 문학계의 대가들로부터 서문이나 서평이란 걸 받으려 생각했다. 문학계통에 있어 직책의 높기로 따진다면 문인협회장이나 소설가협회장의 서문도 좋겠고 아니면 저명한 문학평론가나 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의 서평도 좋겠다. 아니면 문화관광부장관이나 국회의원 아님 명문대학교 총장 급의 서평도 좋겠다. 왜냐하면 문학지 발행인으로서 언론사 발행인으로서 전문 작가로서의 신분 등을 감안하면 내 입장에서는 그런 분들의 서평 받는 게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수고로움에 대해 5십만 원이든 1백만 원이든 촌지 몇 푼은 쥐어줘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들 서문이 들어가면 광채야 더 나겠고 소설을 읽는데 있어 그만큼 좋은 선입감이 작용도 하겠지만 소설 본질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일 터, 그래서 이런 글로 서문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문학계의 풍토가 이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히 까발리면서 말이다.
끝으로 연세대학교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마광수 교수께서 내 글의 몇 군데 고칠 데를 지적해주셨다. 이 글을 통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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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공상과학소설]
서기 2087년
서문
이 소설을 완성하고 나서 한동안 출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꽤 망설였다. 왜냐하면 몇몇 사람들에게 읽히도록 했더니 조금 읽어보고는 골이 아파 더 이상 못 읽겠다는 것이다.
소설 본문에 등장하는 얄궂은 신종용어들을 그를 설명하는 註와 일일이 대조해가며 읽기에도 번거롭지만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숱한 용어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기에는 지극히 난해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소설 본문에 등장하는 각종 수치나 신종용어가 괜한 부담으로 다가와 건너뛰자니 다음에 전개될 내용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있을 것 같고 익히자니 골만 아프고 그런 갈등 끝에 더 이상 읽기를 포기하려 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원래 인터넷사이트 전용으로 쓰인 작품이다. 신종용어뿐만 아니라 각종 과학용어가 등장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용어풀이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경우에 따라 용어풀이가 본문 내용만큼이나 장황하기에 별도의 註로 본문내용과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인터넷사이트의 온라인 텍스트에서는 글을 읽다가 신종용어에 붙은 작은 괄호숫자를 마우스로 클릭하면 풍선글 형태로 설명을 엿볼 수 있도록 배려했기에 그나마 註를 찾아 읽는 수고로움이 덜하겠으나 종이 책자에서는 註를 본문 중간에 끼어 넣지 못하고 부득이 본문 하단에 배치하여 이를 대조해가며 읽는 번거로움이 뒤따르리라 예상했다. 사실 그런 것들이 이 소설을 읽는데 금방 싫증을 내게 될 큰 장애요소가 되리라 생각했다.
읽히지 않는 글,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적잖은 돈을 들여 책으로 출간한다한들 과연 누가 들여다보겠는가 싶어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 역시 눈에 띄는 책자를 뒤적거리다가 읽기 난해한 글을 책이라고 펴낸 것을 보면 욕설부터 내뱉는 사람이다.
“이 따위 글을 누구더러 읽으라고 책으로 펴냈느냔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깨알 같은 활자를 들여다보며 글이 표현하고자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려 하지 않는다. 하물며 함축된 글의 속내를 알아내려한다든가 작가의 글 쓴 의도 따위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영화화된 유명 작품들까지도 소설책으로 읽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화된 작품을 편안하게 감상하려 하는 것이다. 영화에는 상황이 분위기까지 잘 묘사되어있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굳이 이 소설을 책자로 발간하려하는가.
이 소설은 나 딴엔 상당히 고심을 하여 완성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인터넷사이트에선 분명 인기가 없던 작품이었다. 아니,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작품이었다. 왜냐하면 인터넷사이트엔 얼마든지 재미있는 글들이 지천에 깔려있고 사람들 성향이 글의 제목부터 가볍거나 요상 야릇하지 않으면 절대로 열어보는 수고로움을 피하려는 경향이 짙다.
내가 운영하는 여러 카페 게시판엔 내가 쓴 수많은 소설들이 올라가 있다. 난 에로틱한 로맨스소설이나 선정적인 글은 쓰지 않는다. 왠지 그런 글들은 혹 사람들에겐 인기 있을지 몰라도 내겐 괜히 낯이 간지럽고 성의마저 없다 여겨지기에 쓰질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쓴 소설 가운데 제목이 ‘그녀의 엉덩이만 보면’이란 소설이 있다. 물론 내용이 선정적인 글도 아니요 일부러 눈에 띄도록 제목을 그리 붙인 것도 아니다. 그저 내용에 맞게 제목을 그리 정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엉덩이’란 단어 때문인지 다른 글에 비해 엉뚱하게도 열배 또는 백배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온라인 인터넷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프라인 즉 서점에 진열된 책들 가운데 사람들의 손길을 유난히 타는 책들이란 대개 제목이 요상 야릇하더란 것이다. 욕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요즘 사람들, 즉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사람들은 잔혹할수록 엽기적일수록 또는 야하디야할수록 흥미를 보인다는 것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소설 또한 독자를 많이 끌어들이려면 내용도 물론 좋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제목으로 승부를 걸어야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 때문인지 최근에 나오는 책자들의 제목은 두 자 또는 서너 자의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열자가 넘으며 심한 경우엔 아예 한 줄의 소설내용을 통째로 갖다 붙인 경우도 있다. 어떤 책은 독자의 눈길을 끌기위해 엉뚱한 제목을 갖다 붙여 결국 제목과 본문내용이 동떨어진 것도 있을 정도이다.
얘기가 옆길로 많이 샜지만 어쨌든 힘들게 쓰고도 인터넷에선 호응을 못 받았기에 종이책으로 펴내어 이런 책도 있노라 억지로라도 읽히고자 함이다.
부언하기를 이 소설은 머지않은 미래인 서기 2087년에 전개될 우리 인류의 생활상을 그린 미래공상과학소설이다. 흔히 미래를 다룬 공상과학소설이라 하면 지구인과 똑 닮은 눈 코 입을 가진 외계인이 지구인을 상대로 총을 난사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설마 지구인만큼 문명이 발달한 외계인이 있다한들 지구인과 충돌은 없을 것이란 게 내 생각이다. 외계인도 쌀밥 먹고 산소로 호흡하고 돋보기안경을 꼈다면 서로의 처지가 비슷하니 으르렁 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외계인이 있다한들 현재 지구상에 엄연히 공존하는 고래와 개미만큼이나 그들과 우리와는 몸집의 크기부터가 다를 것이고 먹는 것도 다를 것이요 무엇보다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부터가 다를 것이니 결코 우리와 충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외계인과의 대화를 시도하겠다는 우주과학자들의 짓거리가 우습고 외계문명이 어떨 것이라는 공상도 우습고 UFO를 봤느니 따위의 주장도 허무맹랑한 것이다.
이 소설은 다분히 흥미위주로 쓴 소설이 아니다. 현재의 과학문명의 발전 속도로 미루어 앞으로 80년 후쯤엔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생활이 우리의 체제가 이렇게 바뀔 것이라는 전제하에 상상해서 쓴 글이다. 따라서 결코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참고로 이 소설의 본문이 원체 듣도 보도 못한 신종용어들로서 난해하다보니 최소 아이큐 50 이상은 되어야함은 물론 초등학교 과학수준 이상은 습득하고 있어야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일부러 어렵게 써서 죄송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