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학사의 이랑과 고랑·2]
백석의 미발굴 시 「병아리 싸움」변증
박 태 일
1. 『再建타임스』
『再建타임스』라 이름 붙인 신문이 있다. 주간으로 나왔고, 2쪽으로 된 작은 것이다. 몇 차
례를 빼고는 가로 26, 세로 39 센티미터 남짓 되는 크기를 지켰다. 예사 신문 크기의 반이
되는 이른바 타블로이드판형이다. 창간호는 1951년 9월 26일 수요일, '부산시 충무동 2가 17
번지'에서 나왔다. 언제 그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근현대 신문에 관한 죽보기를 가장 잘 엮어
둔 것으로 여겨지는 자료나 연구서에서도 이름이 없다. 쉬 볼 수 있는 신문은 아니었던 셈
이다. 그런데 그 점은 신문의 됨됨이로 말미암은 바 크다. 경인전쟁 전중기부터 '대한상이군
인회'에서 낸 전문신문이었던 까닭이다.
경인전쟁은 갖가지 새로운 사회 문제의 진원지였다. 정치적·경제적 파행은 두고라도, 밀항
과 입영기피, 양곡 배급과 매매춘, 피난민 처우 문제에서부터 가치관 변동으로 말미암은 나
날살이의 혼란은 여느 시기와는 다른 독특한 사회 문제를 예고하고 있었다. 상이군인 문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해당되는 사람의 개인·가족에만 걸리지 않고, 어쩌면 국가 후
방 전략의 주요 현안 가운데 하나일 수 있었다.
민간의 부상자나 이산가족·전사자에 견주어 비록 그 수에서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
서 상이군인이 지닌 사회적 의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나라 위한 싸움이라는 참전 명분
과 다쳐 전역한 뒤 후방에서 그들이 겪었을 멸시나 사회·국가적 홀대 사이의 불균형은 시
간이 지날수록 더했을 것이다. 공식적·제도적인 '상이군경을 위한 원호사업'은 무엇보다 긴
급한 일이었다. '사단법인 대한군경원호회'와 '사단법인 대한상이군인회'는 그러한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단체였다. 그리고 『再建타임스』는 '대한상이군인회'의 기관지로 나오게 된
것이다.
『再建타임스』는 펴낸이를 '대한상이군인회 회장', 엮은이를 '대한상이군인회 교도부', 찍
은이를 강태수로 시작했다. 첫호 창간사에 펴내게 된 입장이 잘 나타난다. "삼만상이군인의
장중한 의사를 대변하는 기관지 재건타임스가 오늘로써 고고의 소리 높여 자기 탄생을 선언
한다"로 시작하는 창간사는 이어서, "불구대천의 원수 공산제국주의자들을 이 강산 이 강토
에서 모라내기 위하여 조국의 부름을 받고 제일선에 출진하였다가 불행히도 적의 흉탄으로
부상당한 나머지 명예제대된 전상장병의 수는" "금년말에는 5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면서, 사회적·국가적 대우에 대한 섭섭함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간난하고 만신창이의 잔해만 남은 상이군인의 처지"에는 아랑곳없이 그들의 "생계와 재기"
의 길을 마련해 줄 "군사원호법이 발효한지 벌써 일년여가 되건만" 별반 사정이 달라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대한상이군인회'가 만들어져, 계속되는 치료와 생계 유지, 재활과 같
은 사회복지에 대한 제도적 전망을 갖추고자 했다. 상이용사들의 집단혼인식이나 가족들의
바자회와 같은 행사도 잇따랐다. 그러나 그 뒤에서 보여준 사회적 냉대나 상이군인의 일탈
행동은 여전히 주요한 사회 불안 요인이었다. 공식 기록에서조차 "회원 심리동향"을 아래와
같이 "총괄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경북 대구시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재신체검사로 인하여 회원심향은 심히 동요하여 음주 폭
행자가 일일증가하여 부산을 주로 한 경남에서는 생활난으로 인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안고 금전수집에만 맹종타가 헌병대 및 경찰서 등 각사법기관에 체포당하는 자 다유하며,
상당한 사회여론을 일으키고 있음. 타지방에 비하여 차지방는 상이군인의 가장 많은 수를
함유하고 있음이 원인인지 경찰충돌, 민간충돌은 간단이 없으며, 회원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이유없이 자진충돌 투쟁하려는 경향이 보임과 동시 사회의 냉대로 인하여 회원 심리동향은
심히 악화상태로 경주하고 있음.
계급장도 없이 군복을 입은 채 후방을 떠돌아 다니고 있는 상이군인은 민간인에게 두려운
대상이며, 평안을 해치는 장애자로 여겨질 뿐이다. 민간의 방어심리와 상이군인들의 공격심
리가 서로 악순환을 거듭하며 곳곳에서 맞부딪쳤을 것이다. 상이용사 문제는 반공포로나 국
민방위군과는 달리 어느새 꾸준하고도 직접적인 나날살이의 문제로 들어앉았던 셈이다. 게
다가 그들을 이용해서 부를 쌓고자 했던 정상배나 모리배의 잔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
헐벗고 굶주린 불구군인의 떼는 기수를 증가"하고 있는 한 쪽으로 "그들을 이용하여 사리사
복을" 채우는 "국가적 역적행위" 또한 빈번했음을 창간사는 힘주어 고발하고 있다.
그런 속에서 "누만전상장병들의 참된 대변자로서" "그들의 애절한 심지와 단성을 정부와 국
민대중에게 솔직 대담히 그리고 단적으로 호소 전달하며 공수형이 아닌 진집하고도 성실한
온정의 손을 정부와 국민의 손으로부터 드리워주는데 공명중정한 입장에서 미력하나마 교량
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발간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남은 팔 남은 다리로 재건하자
우리조국", "반신이 한데 뭉쳐 국난을 극복하자"라는 창간호 앞머리 표어에서 그러한 뜻이
잘 드러난다.
창간 첫호에서 『再建타임스』는 여러 사람이 글을 올려 의욕을 갖고 출발했다. 그러나 큰
신문사에 견주어 어려운 사정이 많았을 성싶다. "국방부 공보처를 비롯한" 사회 각계의 협
조가 있었다고 하나, 제대로 된 국가적 지원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주간신문임에도 불구하
고 1호가 9월 26일에 나온 뒤, 2호가 10월 8일에, 3호가 10월 16일에 나온다. 나온날이 들쭉
날쭉하다. 한정된 돈과 일손으로 때맞추어 신문을 내는 일이 어려웠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면을 다채롭게 마련하려 애쓴 모습은 곳곳에서 엿보인다. 일반 보도기사
에서부터 시작하여, 문화·오락·교양 기사문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비록 상이용사가 주축이
되어 펴낸, 그들을 위한 전문신문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지면 가꾸기를 꾀했다. 꽁트·만화
도 자주 실었다. 시 또한 빠트리지 않았다. 기성문인뿐 아니라, 상이군인, 학생의 작품까지
실었다. 수필에다 소인극 대본, 교양강좌, 격언이나 표어를 마련해 읽는 즐거움을 드높이고
자 했다. 일반 신문에 못잖은 기획력을 보여준 셈이다.
이 신문은 여러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앞으로 논의될 거리가 많은 매체다. 그런데 글쓴
이가 장황하게 『再建타임스』를 든 것은 다름 아니라, '白石'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시가
한 편 실린 까닭이다. 이 작품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슴』의 시인 백석의 것이라면,
매우 뜻 있는 일이다. 백석은 광복을 앞뒤로 한 시기 동안 중국의 동북삼성을 거쳐, 북한에
서 보낸 뒤, 남한을 선택해 월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시 한 편이
남한에서, 그것도 어느덧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서로 피비린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적진' 후
방 매체에 실린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이 일이 『再建타임스』의 성격이나, 앞 뒤 사정으로
보아 그럴 법하다는 데 흥미가 더한다. 이제 새롭게 백석의 시 한 편을 복권시키며, 그 일의
변증을 위해 바삐 생각을 묶는다.
2. 「병아리 싸움」의 짜임새
백석의 작품 「병아리 싸움」은 『再建타임스』 1952년 8월 11일자, 43호의 2쪽에 실렸다.
이 무렵은 정부통령 선거 유세로 바쁠 때였다. 같은 날 1쪽에는 그런 사정을 말해주듯이 대
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범석 후보의 홍보문이 실렸다. 마찬가지로 대통령 조봉암, 부통령 정
기원 후보의 것도 2쪽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먼저 작품을 그대로 옮긴다.
성난 독수리마냥
두놈이 마주서 노린다
아직 날개쭉지도 자라지않고
젓비린내나는 두놈이
눈알맹이는 팽팽돌고
독사처럼 독오른 주둥이는
금시 간알픈 심장을 쪼아박아
들짱이 날것만같다
푸드득- 날샌 조약과함께
물고 뜯고 재치고
한놈은 기어코
또 한놈의 면두를 물고 늘어졌다
면두에서 피가 흐르고
가슴은 팔닥거려
밑에 깔린 놈이나
위에 덥친 놈이나 쥐죽은듯하다
이윽고 어미닭이 나타났다
두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이
스르르 싸움을 헤치고
어미등에 품에 기여든다
다섯 도막으로 된 작품이다. 그리고 낱 도막은 모두 넉 줄로 이루어져 있어, 시줄은 스물에
이른다. 지면에는 갈래를 '시'라고 적어 올렸다. 그러나 오히려 동시에 가깝다. 병아리 두 마
리가 서로 싸움질을 하다 어미닭이 오자 그 일을 멈추고, "어미등에 품에 기여"드는 한 마
당 풍경을 그렸다. 첫 도막이 싸움질에 들기 앞서 두 마리가 서로를 고누는 그림, 둘째 도막
은 그 긴장이 막바지에 이른 그림, 셋째 도막이 서로 싸움질에 들어 물고 뜯는 그림, 넷째
도막은 둘이 싸움질에 지쳐 떨어진 그림, 다섯째 도막은 "어미닭이 나타"나자 언제 그랬느
냐는 듯이 제 어미에게 안겨드는 그림이다.
한낮 고요한 마당, 짧은 시각 안에 일어날 법한 예사로운 풍경을 건져낸 시인의 눈길이 꼼
꼼하다. 될 수 있는 대로 감정 노출은 줄이고 관찰자적 눈길을 지키려 했다. "성난 독수리마
냥" 마주 서 있다거나 "독사처럼 독"이 올랐다는 비유에서 거기서 벗어난 듯한 감정 개입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 굳어진 표현인 까닭에 굳이 특별한 표현 가치를 얻
기 위해 끌어댄 수사장치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밑그림을 끌어가는 숨길이 예사롭지 않다. 가장 동적이고 거친 그림인 셋째 도막을
중심으로 삼아, 첫째에서 둘째 도막으로 나아가면서 긴장을 드높였다가, 넷째 도막과 다섯째
도막으로 건너서면서 긴장을 해소해 나가는 숨길을 보여준다. 잘 짜여진 다섯 칸 짜리 만화
한 편을 보는 듯하다. 시공간 영역이 길지 않은 한 그림을 그려보여 주되, 그 안쪽에 단단한
짜임새를 마련한 셈이다. 느낌을 알맞게 누르면서, 스무 줄 다섯 도막으로 끌어간 바, 두 마
리 병아리 사이에 있었던 영문 모를 싸움질과 어미닭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르게 되
는, 긴장과 싸움질 그리고 해소라는 정황이 결코 단순하지 않은 생각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이름으로 올려진 대로 백석 시인의 것인가? 그 답에 이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해결할 문제가 있다. 생각을 따라가면서, 이 작품이 아주 특별한 경위로 발표된 백
석의 작품이라는 변증에 이르고자 한다.
3. 백석과 「병아리 싸움」
「병아리 싸움」이 백석 작품이라는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터무니는 오로지 시인의 이름으
로 지면에 올려진 '백석'이라는 데에 있다. 명확한 외적 증거인 셈이다. 그러나 이 시가 발
표된 때가 1951년 한창 겨레 상잔의 포화소리 요란한 경인전쟁 전중기였고, 그 곳 또한 백
석과는 인연이 먼 후방 남녘 항구 부산이다. 실린 자리도 문학 영역이나 백석과는 걸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대한상이군인회' 기관지『再建타임스』라는 엉뚱한 곳이다. 이 무렵 백
석은 그 상이군인들이 밤낮없이 성한 몸으로 전투를 하곤 했을 전선 북쪽 적진, 이른바 북
조선인민공화국이나 중국 쪽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 작품에 이름이 올려진 '백석'이 『사슴』을 낸 시인 백석인가 아닌가는
중대한 의문으로 떠오른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터무니가 되는 '백석'이라는 이름이 『사슴』
의 백석이 아니라, 우연히 또는 멋스러운 가명이나 필명을 찾다 '백석'을 고른 다른 시인이
나 투고자의 이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 편집자가 사실을 밝히는 주석을 지면에 남겨두
었더라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광복 뒤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살아왔고, 그 무
렵 적진 북쪽에 머물고 있을 시인의 작품이 전중기 전선 남쪽에서 발표되게 된 까닭을 말해
주는 어떠한 부차텍스트나 군더더기 말도 읽을 수 없다. 그 무렵 신문 편집에 관계했던 이
들이 살아 있다면, 사실 여부를 물을 수 있겠으나, 이 또한 벌써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이제 결정적인 터무니로 믿을 수밖에 없을 '백석'이라는 이름이 『사슴』의 백석이 아니라,
우연히 또는 멋스러운 가명이나 필명을 찾다 '백석'을 고른 다른 시인이나 투고자의 것이며,
「병아리 싸움」은 그 사람의 작품일 뿐이라고 말해도 대들 거리가 달리 없을 지경이다. 가
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외적 증거를 믿기 힘든 사정이니, 백석과 그의 작품 확정 문제는
다시 원점에 놓였다. 마침내 작품 자체나 주변 정황과 같은, 간접적인 내적 증거에만 기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작품 안쪽과 작품 바깥쪽으로 나누어 그것을 살피겠다.
1)작품 안쪽 증거
작품 자체로부터 암시 받는 내적 증거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점은 시어 선택에 있다. 「병
아리 싸움」에서는 다른 시인들과 유다른 백석 특유의 자장을 지닌 낱말을 몇 살필 수 있
다. 그 처음은 셋째 도막에 보이는 '조약'이라는 말이다. 도약(跳躍)은 흔히 '조약'으로 잘못
읽히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라, 의도된 말소리 뒤틀기로 말미암은 바다. '도
약'에 견주어 '조약'은 얼마나 작고 귀여운 말인가. "푸드득- 날센 도약과 함께"와 "푸드득-
날센 조약과 함께"는 그 맛에서 크게 다르다. 큰 장닭이라면 몰라도, 작은 병아리가 쌈박질
하기 위해 날아 솟구치는 모습에 '도약'이라는 말은 걸맞지 않게 큰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 점들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이가, 병아리를 다룬 이 시의 동시적 바탕을 살리기 위해 일
부러 '도약'을 '조약'으로, 흔히 아이들이 틀리게 읽기 쉬운 말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미 「旌門村」에서 어린 시절의 그러한 말장난 버릇을 백석은 넌지시 보여준 바 있다.
주홍칠이날은旌門이하나 마을어구에있었다.
「孝子盧迪之之旌門」- 몬지가 겹겹이앉은 木刻의額에
나는 열살이넘도록 갈지字둘을웃었다
- 「旌門村」 가운데서.
또래 아이들과 '정문' 앞을 지나다니면서 "열살이넘도록" 그 글자를 보고 웃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 '갈지字' 둘이 내놓고 발음하기 힘들었을 '보지' '자지'의 끝말처럼 여겨진 까닭
일 것이다. 이런 경험은 '도약'과 '조약'의 읽기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시어에 관한 한
거침없었던, 경험의 구체성을 살리기 위한 백석다운 낱말 선택이다.
두 번째는 둘째 도막에서 보이는 "들짱이 날것만같다"라는 말이다. 평안도 지역말이다. 본디
'들짱이 나다'는 '바닥 나다', '다 소비 되다', '다 없어지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두 마리 병
아리가 "독오른 주둥이"로 "간알픈 심장"을 서로 '쪼아박아' 장차 이루어질 일이다. 그러니
문맥으로 보아 시줄 "들짱이 날것만같다"는 '곧 다 죽게 될 것만 같다'는 뜻이겠다.
셋째와 넷째 도막에서 거듭 씌어진 '면두'라는 말도 눈여겨볼 일이다. 이 말 또한 '들짱이
나다'와 마찬가지로 닭의 볏, 벼슬을 뜻하는 평안도 지역말인 까닭이다. 평안도 정주 사람인
백석의 글에서는 초기 「닭에 채인 이야기」에서 이미 '면드레'로 한 차례 씌어진 바 있다.
'맨드레', '면두라미'와 같이 지역민에게 조금씩 달리 씌어지기도 하는 이 말은 '面頭'라는
한잣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석의 글말고는 찾기 힘든 용례를 보여준다. 다만 백
석이 처음 이 말을 썼을 때인 1935년대와는 달리 '면두'라며 평안도 사람이 아니더라도 문
맥을 빌어 알 수 있을 본디 말을 썼다. 따라서 이 시는 적어도 1935년대와 거리를 둔 뒷날
에 씌어진 작품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앞에서 살핀 바, 시 「병아리 싸움」은 '조약'과 같은 재치, 감각이 뛰어난 한잣말 부려쓰기
나 '면두', '들짱이 나다'와 같은 평안도 토박이말 부려쓰는 버릇에서 백석 특유의 말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게다가 통사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세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꼭히 백
석의 특유한 말솜씨라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첫 도막에 보이는 도치와 마지막 도막에 나
오는 "어미등에 품에"에 같은 자연스런 되풀이는 글쓴이의 언어감각이 결코 녹녹치 않음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다섯 도막 모두를 서술형으로 끌어가면서도 시의 숨길에 불균형이나
어색함을 자아내지 않고 순조롭게 말길을 틔운 일도 시인의 세련된 언어 제어력을 엿보게
한다.
게다가 이 작품의 글감 또한 토속적인 병아리 싸움질에서 따 왔다. 무엇보다 그러한 '동시'
적 정황의 작품을 '시'라는 갈래로 일군 일은 백석이 다른 시인에 견주어 유별난 점이다. 여
느 작품이었다면, '동시'라는 갈래로 발표 되었을 법한 작품이다. 성인시와 동시 사이의 경
계가 묽은 시인은 많지 않다. 어릴적 체험이나 동시적 상상력은 백석 시의 중요한 특성 가
운데 하나가 아닌가. 아예 경인전쟁 뒤에는 북한 문단에서 백석이 살아남기 위해 번역뿐 아
니라 아동문학 평론과 동시 창작에 힘껏 골몰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글감 처리나 '시'라
는 갈래 규정을 눈여겨볼 때, 「병아리 싸움」이 백석의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낱말 표기도 이 시가 발표되었을 1951년 무렵 남한의 주류적인 것과 다르다. 둘째
도막의 '간알픈'이라는 시어는 자연스레 '가냘픈'이 되어야 했을 터이다. 띄어쓰기 또한 좀
더 정돈되었어야 했다. 이 작품에 씌어지고 있는 표기법은 남과 북에서 아직까지 국가 단위
의 표기체계가 자리잡히기 앞선, 혼란기적 상황이 반영된 이어붙이기 방식인 셈이다. 같은
시기에 실린 다른 시의 낱말들과는 나뉘는 옛투가 물씬 배어 있는 모습이다. 적어도 「병아
리 싸움」이 발표된 시점과 작품 창작 시점 사이에 거리가 있음을 암시 받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병아리 싸움」은 경인전쟁 이전, 남북 분단이 굳어진 1948년보다 앞서 씌어진
것일 확률이 높다. 이미 1945년 광복 초기에 조만식의 통역비서를 하기도 했으나, 그의 몰락
과 함께 이내 북한사회에서 문학·문단 활동의 자리가 좁혀들었을 백석의 작품을 서울에 남
아 있었던 그의 벗 허준이 몇 차례 남쪽 발표로 이끈 적이 있었다. 「병아리 싸움」 또한
비슷한 경로를 밟았을 경우라 짐작된다. 광복기 어느 시점에 발표하기 위하여, 또는 그밖의
다른 사정으로 백석의 작품이 가까운이에게 주어졌고, 그것이 발표 기회를 갖고 있지 못하
다가, 피란기 그 지인에 의해 남쪽 부산에서 발표된 것이다.
앞에서 살핀 대로 「병아리 싸움」은 여러 가지를 양보하더라도, 최소한 평안도 지역말을
잘 아는, 예사롭지 않은 시력을 지닌 시인이 쓴, 경인전쟁 앞 시기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됨됨이로 볼 때, 그러한 조건을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작품 발표 때 구
체적이고도 명료하게 적혀 있는 바와 같이 『사슴』의 시인 백석이 분명하다. 창작 연대도
광복기거나, 적어도 광복을 앞뒤로 삼은 짧은 시기로 좁혀들게 되는 셈이다. 이 점은 작품
바깥쪽의 내적 증거들을 살피면 더욱 수긍되는 바다.
2)작품 바깥쪽 증거
첫째, 작품 바깥쪽으로 본 내적 증거로 가장 분명한 점은 백석이 이미 기성 문단에 널리 알
려져 있는 유명한 시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함부로 그의 이름을 빌리거나, 그와 같은
가명을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뜻 아니게 필명이나 가명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가 이미
문단에 얼굴을 낸 시인이었다면 백석이라는 이름은 피했을 것이다. 만약 백석의 존재를 몰
랐을 습작기 일반인이나 학생 작품이었다면, 그것을 실을 때 『再建타임스』의 '시' 자리에
올렸을 리가 없다. 『再建타임스』 지면 배치의 버릇에 따라 활자 크기를 줄여 실었거나, '
학생시'라는 이름을 표제에 밝혔을 것이다. 그런데 「병아리 싸움」은 양명문, 장수철과 같
은 기성시인들의 작품이 실린 자리에 꼭 같은 꼴의 지면 배치를 받고 있다. 기성시인 백석
의 작품이라는 뚜렷한 증거다.
둘째, 시를 올린 시인과 편집진의 됨됨이에서도 백석의 시라는 암시를 얻는다. 『再建타임
스』에는 학생시나 상이군인들의 시, 추천시, 편집진 가운데서 가명으로 올린 것으로 보이는
시, 그리고 이미 시단에 알려진 기성시인의 것과 같이 여러 유형의 작품이 실리고 있다. 그
런데 '시'라는 난에 실리고 있는 시는 기성시인의 것이나 사내 편집진이 가명으로 실은 것
으로 여겨지는 작품에 그친다. 적어도 언론·문필 활동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던 이의 것임
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 시를 올린 기성시인들은 유별난 됨됨이를 지녔다. 상대적으로 월남한 시인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까닭이다. 1913년 평남 평양 출신으로, 그 무렵 육군종군작가단으
로서 반공시를 많이 발표하고 있었던 양명문이 다섯 차례나 시를 싣고 있다. 같은 평양 출
신으로 피란시기 제주와 부산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1916년생 장수철이 수필 1편
을 비롯해 네 차례에 걸쳐 시를 발표하고 있어 또한 빈도가 잦다. 시를 세 차례 발표한,
1910년 함북 경성 출신 함윤수와 수필 두 차례를 비롯해 1편의 시를 발표하고 있는 김성애
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리고 같은 평양 출신으로 1918년생 박남수와 1919년생 김영삼 시
인은 1편씩을 올리고 있다. 이 신문의 문예면 담당자나 주요 편집진이 북한에서 월남한 이
나, 그들과 각별한 연관이 있는 이들일 것이라는 점을 확연하게 일깨워주는 사실이다.
『再建타임스』는 첫호에서 1951년 12월 5일 10호까지는 편집인을 '대한상이군인회 회장',
인쇄인을 사장으로서 월남한 상이용사 강태수, 곧 회의 부회장 이름을 올렸다. 부사장은 최
동희, 편집국장은 강영환이었다. 채규철은 주간겸 업무국장으로서 발령이 나 있었다. 그러다
가 1951년 12월 15일 11호부터 주간 최동희, 편집국장 채규철의 이름도 지면에 올리기 시작
했다. 여러 사람들이 대한상이군인회 안에서 『再建타임스』 발간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일의 처음부터 책임을 지고 도맡았던 이는 월남한 상이용사 강태수 사장과 이북에서 그의
스승이나 막역한 선배로 연을 맺고 있었음직한 채규철, 그 아래서 꾸준히 함께 일한 강영환
임을 알 수 있다.
강영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일곱달 남짓 편집국장과 주간이라는 주요 자리를 거
친 채규철은 시인이자 소설가였다. 1954년의 기록인 「현재 한국문학인총람」에 따르면
1913년 평북 후창군 출신이다. 평북 "강계 영실중학교를 나온 이래 시작 등을 발표하는 한
편 『再建타임스』 주간 등 역임"하였고, "저서로는 시집 『민족의 윤리』 소년동화집 『우
리동무』등이 있다." 그리고 1954년 "현재 상업에 종사중"이라 기록했으니, 채규철은 『再建
타임스』와 대한상이군인회 일을 그만 둔 뒤 문학활동으로부터 차츰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再建타임스』에 작품을 실은 여러 월남시인들은 정도 차이는 있을 것이나, 채규철과 남다
른 인연을 맺고 있었던 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출신지에서 채규철과 같은 평북, 평남 지역
이 압도적이다. 선후배 연배로 학연에서도 이저리 걸릴 만한 관계에 있다. 그들을 『再建타
임스』와 이어준 고리는 나이나 경력으로 보아 젊은 부회장이었던 월남 상이용사 강태수보
다 오히려 기성문인이었던 채규철일 가능성이 높다. 그 무렵 월남했던 지역민이나 문학예술
인들은 서로 잦은 교분을 나누고, 도민회니 피란지 임시학교를 중심으로 유별난 응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채규철과 이들 월남시인들도 『再建타임스』를 이음매로 자주 연결이 되
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월남하지는 않았지만 재북시인 백석 또한 채규철과 같은 고향 사
람이다. 백석의 작품이 다른 월남시인과 마찬가지로 『再建타임스』와 연을 맺을 개연성은
그만큼 큰 셈이다.
셋째, '백석'이 『사슴』의 시인이 아니라 다른 이일 가능성도 짚어두어야 될 일이다. 경인
전쟁 전중기에만 하더라도 작품 발표 때 호나 필명, 가명일 듯한 이름이 흔히 쓰였다. 그런
관례는 전후 문단이 재편·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사라져 버렸지만, 그 일이 흔
했던 광복 이전의 시기와는 또 다른 당대적 의미를 짚어볼 수 있다. 먼저, 필진 확보의 어려
움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이 점은 원고료 지급의 어려움과도 맞물린 것으로 보이는데, 많은
경우 한 사람의 내부 필진에 의해서 여러 차례 본명과 가명이 함께 씌어질 가능성은 늘 있
었다. 게다가 피란문단에서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했다. 별다른 재주나 직업을 갖지
못한 이들은 전업작가로서 적은 원고료나 배급쌀에 목을 매고 어려운 살림을 할 때였다.
『再建타임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급한 경우, 될 수 있는 대로 내부 필진으로
지면 처리를 하면서 원고료를 아끼거나 거꾸로 그 수입에 의존해야 할 일이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북쪽 출신 문인의 생계난은 남쪽에 터를 둔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는 없었겠다. '백
석'이라는 이름이 『사슴』의 시인 백석과는 무관한 이가 발표를 위해 내세운 가명일 가능
성도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놓치지 않으면서 지면을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시나 산문을 발표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소속이 분명한 학생시나 일반 투고시를 제외하
고 아무런 표지가 없는 작품의 필자 가운데서 백석과 유사한 이름을 갖고 있는 이를 찾아보
면 여럿이 나타난다. '美石'이라는 이가 두 차례 시를 내놓고 있다. 습작기 수준에다 한자
투성이로 된 거친 시여서 「병아리 싸움」과 작품 격차가 너무 난다. '石村'이라는 이가 '촌
극' 「역사」를 싣고, '白雄'이라는 이도 한 차례 나온다. 「6.25 예술대회를 보고」라 이름
붙인 시평이다. 정도가 심한 한잣말투로 이 또한 「병아리 싸움」의 섬세한 언어감각에서
벗어난다. '功石'도 시 한 편을 남기고 있다.
그대와 나
처음 만난 사이
어느새 십년전친구인양
이렇게 마주서 웃는군요
무엇이 좋으냐구요
글세 그것이 인생인 것을
- 처음 만난 사람 가운데서.
소박한 인생시다. 전문 습작과정을 겪지 않은 이의 작품이다. 이 또한 「병아리 싸움」에서
보이는 문재에서 한창 떨어진다. 이런 점에서 「友情」이라는 시를 싣고 있는 '石淵' 또한
마찬가지다. "五十을 다못살어도 / 두사이에 심은 정은 / 한百年 살꺼나"로 시작하는 이 작
품의 품은 낮다. 앞선 '공석'에도 못 미친다. '俊石'이라는 이 또한 한 차례 시를 발표하고
있다.
오색 령롱한 아침해살 타고
새乙자로 고개 치켜든 오리
자웅을 결하려 가는드시
둥둥 두둥실 떠간다
-줄임-
물속깊이 목을 담거
두나래 활개치며
임진난 거북선마냥
둥둥 두둥실 떠간다
가벼운 실바람
물결은 잔잔이 이는데
호랑나비 물오리등에
둥둥 두둥실 떠간다
- 舊稿中-
- 「물오리」 가운데서.
『再建타임스』에 실린 시 가운데서 그나마 백석의 「병아리 싸움」과 가장 가까이 밀어다
놓을 수 있는 작품이다. 글감에서 그렇고, 동시적 감각을 보여주면서도 동시라 하지 않고 그
냥 '시'로 발표하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준석' 또한 '백석'과 마찬가지로 본명 같
지는 않다. 『再建타임스』 다른 자리에서는 이 이름을 볼 수 없다. '백석' 또한 마찬가지다.
낱말도 예스러운 데가 있다. '령룡한'이라 적어 첫소리 ?을 둁으로 막지 않았고, 소리이어붙
이는 표기를 따랐다. 그러나 이 작품이 백석의 「병아리 싸움」과 다른 점은 확연하다.
「물오리」는 앞선 작품에 견주어 품이 마냥 낮다. "임진난 거북선마냥" '물오리'가 "둥둥
두둥실 떠간다"는 표현은 한참 못 미치는 쪽이다. 시어 선택이 예스럽다고 하나, 「병아리
싸움」에서 본 '면두'니, '들짱이 나다'와 같은 평안도 특유의 토박이말 선택과는 달리 소박
한 예스러움일 뿐이다. 두 작품은 동시적 발상법이나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는 점말
고는 연관이 없는 셈이다. 처음부터 작품 층위가 크게 달라, 「병아리 싸움」에 견주어 시의
공력이 한 수 아래인 이의 작품이 「물오리」다. 게다가 백석이라면 '충무공'을 손수 끌어다
놓고 찬탄하는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석과 '준석'은 사뭇 다른 이였을 뿐 아니라,
'준석'이라는 이름을 올린 이가 자신의 작품에다 '백석'이라는 이름까지 끌어다 놓았을 가
능성은 엷다.
오히려 나로서는 이 '준석'이란 사람이 백석의 작품을 찾아 올린, 백석과 교분이 남달리 깊
었던 이가 아닌가 짐작된다. 그럴 경우 떠오르게 되는 이는 둘이다. 백석과 같은 해인 1912
년생 김성애와 그 한 해 뒤인 1913년생 채규철이다. 김성애는 함남 정평 출신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중국에서 자라 배우고 머물면서 교사와 언론인으로서 활동했다. 광복기 남쪽으로 내
려와 『서북신문』 문화부장을 거쳤고, 시인이자 소설가로 활동한 사람이다. 김성애 와 백석
이 만날 수 있었을 기회는 광복을 앞뒤로 한 짧은 시기 - 그녀가 중국 동북삼성에 머물고
있었던 1940년대부터 평양으로 들어섰을 광복 초기까지 - 였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동년
배인 백석을 만났을 수도 있었고, 백석이 자신의 작품을 김성애에게 건넸을 수도 있다. 이
경우라면 「병아리 싸움」의 창작 시기는 경인전쟁기보다 훨씬 아래로 내려서게 된다.
그러나 경인전쟁기 김성애는 『再建타임스』의 편집에 끼여들 입장에 있지 않았다. 광복과
북한 체제 개편 과정에서 어려운 일을 겪은 뒤 월남하여, 다시 서울에서 지닌 것을 모두 잃
은 채 인천길로 화급하게 탈출해 내려온 이가 그녀다. 남쪽 생활 자체가 매우 곤궁하고 어
려운 처지였을 김성애 시인이 백석의 작품을 온전히 갈무리해두고 있다 내어놓았을 가능성
은 없다. 게다가 '준석'이라는 이름은 여자가 자신에게 붙이기는 어려운 이름이다.
『再建타임스』에 백석의 작품을 올렸을 가능성이 있는 다른 한 사람은 채규철이다. 그가
『再建타임스』의 실질적인 출판 기획을 오래도록 도맡았을 뿐 아니라, 작가였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밝혔다. 그야말로 기성 문인들의 작품을 올리는 '시'란에 '준석'이라는, 남쪽
문단에서는 아주 낯선 이름으로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기성' 작가였다. 백석과는 한 살 아래
로 같은 평북 출신이어서 남다른 친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준석'이란 바로 채규철이 사내
필진이나 비슷한 자격으로 올린 가명일 가능성이 짙은 셈이다.
'준석'은 작품 「물오리」를 '구고중'에서 꺼집어냈다고 적었다. 생각을 더 키워보면 옛 글
뭉치에서 작품을 고르다 절친했던 백석의 것을 찾게 되어 그것을 먼저 올리고, 다시 자신의
것도 지면에 올렸으리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준석'이라 이름 붙인 일이 예사롭지 않고, 백
석의 '병아리'와 '준석'의 '오리'가 소박하게 연결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채규철은 '준석'을
비롯해 『再建타임스』에 유달리 잦은 바, '石'을 돌림자로 삼은 이름의 사내 필자거나, 그
일에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끼친 이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백석과 가까운 관계에 있
었을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분이 더 깊어질 수 있었다면 그 시기는 광복 초기 북한에서 김일성주의와
는 다른 민족 우파 활동, 곧 조만식과 백석이 길을 같이 할 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일이 여기까지 이른다면 이 작품의 의의는 예사롭지 않다. 채규철이 남쪽 문단에서 쉬 잊혀
져간 일과도 연관이 있을 법한 까닭이다. 그는 남쪽 문단과 그리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피란문단에서도 다른 문학활동은 찾을 수 없다.
게다가 같은 월남문인이며 대표적인 극우 인사 오영진이 내고 있었던 『주간문학예술』에
장수철, 박남수와 같은 이들이 작품을 실은 데 견주어 채규철은 끝내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1954년 현재 그는 상업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최규철이 남한 문단에
편입되지 못한 것은 그의 노선이나, 문학 감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갖게 한다.
그는 서북청년단과 같은 골수 반공주의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남쪽에 내려와 상이군인회
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하게 될 만한, 북한에서 남다른 문화자본과 기반을 쌓았던 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병아리 싸움」이 남쪽 매체에 실린 일은 월남문인이자 편집자였던 채규철이 비록
적으로 맞서 북에 남아 있을지언정, 결코 계급주의자는 아님이 분명한 백석 시인에 대한 곡
진한 마음이 담긴 표현일 수 있다. 일찍부터 간수하고 있었던 백석 시를 자칫 용공 시비를
자초할 지도 모를 후방 매체에 거리낌없이 올린 까닭이다.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
다. 광복 초기 북쪽에서 간행된 매체에 실린, 교분이 깊었던 백석의 작품을 발견하고 채규철
이 그것을 간수해두었다가, 『再建타임스』가 실을 만한 마땅한 작품을 얻지 못하자 재수록
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작고문인의 작품이나, 이미 발표된 작품이 재발표되는 일은
『再建타임스』에서 여러 차례 있었다. 편집의 필요에 따라 작품 대필뿐 아니라, 허락없이
잘 알려진 남의 작품을 옮겨오는 일은 그 무렵 언론계에서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었던 셈이
다.
4. 「병아리 싸움」의 뜻
백석의 시 「병아리 싸움」은 매우 이례적인 길로 세상에 알려진 작품이다. 시인과 경인전
쟁 이전부터 여러 연이 깊었을 작가 채규철이 일찍부터 간수하고 있었던 그 작품을 자신이
편집을 맡은 대한상이용사회 기관지 『再建타임스』에 실었다. 이 글은 그 사실을 뚜렷히
하기 위해 몇 가지 점에서 그 터무니를 작품 안밖으로 나누어 찾아본 것이다. 그리고 이 일
이 지닌 뜻은 아래와 같다.
첫째, 백석의 작품에 대해 갖게 된 세간이나 학문공동체의 관심은 그 연조가 길지 않다. 빈
자리가 많을 터이다. 그 가운데서 백석의 작품 발굴 또한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될 일거리
다. 그런 까닭에 이번 「병아리 싸움」의 발굴은 백석 시 한 편을 우리 근대문학사의 자산
가운데 하나로 더하는 즐거움을 준다.
둘째, 「병아리 싸움」은 시로 발표되고 있으나 동시에 가깝다. 그리고 이 작품은 채규철이
백석과 남다른 교분을 자주 나누었을 시기, 곧 을유광복을 앞뒤로 하는 짧은 시기에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석이 동시 창작이나 아동문학 평론에 관심을 보인 시기는 흔히
알려지고 있는 바와 같이 경인전쟁이 끝난 뒤, 그가 새로 북한문단에 편입되기 시작한 1950
년대 중반 무렵부터가 아니라, 적어도 훨씬 앞선 광복 초기까지 내려선다. 백석의 작풍에는
초기 『사슴』 무렵부터 동시적 상상력이 깃들 자리가 넓었다. 이 작품을 빌어 후기 아동문
학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으로 나아가는 자연스런 징검다리를 한 곳 확인할 수 있었던 셈이
다.
셋째, 『再建타임스』에 「병아리 싸움」이 실리게 된 일은 채규철과 같이 백석을 익히 알
고 있었을 월남문인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이 일은 광복기 평양에서 백석이 김일성
주의 노선에 맞닿은 문학활동은 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현재로서는 우익 인사 조만
식의 통역비서였다는 풍문만 알려지고 있었다. 이 작품으로 그런 자리를 좀더 기울 수 있게
된 셈이다. 만약 백석이 '북조선문학예술총연맹'과 같은 데서 확실한 자리를 차지한 채 활동
했던 계급주의자였더라면, 그 무렵 사회 분위기로 보아 그것도 적진에서 다쳐 돌아온 상이
용사의 기관지에 작품이 실리는 이례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다. 적어도 백석의 시
와 삶에 대한 사상 검증에 확신을 가졌거나, 깊은 데까지 자신감을 지닌 이가 결정한 일이
다.
넷째, 마침내 「병아리 싸움」은 광복기, 북쪽을 선택하기도 어려웠고 남쪽을 선택하기는 더
욱 어려웠을, 백석의 깊은 속내를 짐작하게 해준다.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바, 병아리
가 둘로 나뉘어 서로 싸우다가 한 어미 품에 아무렇지도 않게 안겨 하나가 되듯이, 둘로 나
뉘어진 겨레의 삶이 그리 되었으면 하는 희원과 그리 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낙망이 그것
이다. 사람 세상이면서 날개짐승의 모습에도 못 미치는 겨레 현실에 대한 안따까움이 옹근
시다. 그런 점에서 「병아리 싸움」은 뒷날 그의 동시가 오롯이 지향하고자 했던 알레고리
적 짜임새까지 일치감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백석을 가까이 기억할 수 있었을 많은 이들은 북에서 떠밀려 내려온 뒤, 남쪽 문단에 제대
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전쟁기를 거치면서 문학사의 뒷자리로 잊혀졌다. 김광
주, 모윤숙, 조연현과 같은 이른바 문협 정통파들에 빌붙어 새삼스럽게 새 삶을 얻는 이도
있었다. 함락과 수복에 이르는 '적치 90일' 동안 서울에 남아 '문학가동맹'에 들었던 문인들
도 공산당의 '만행'을 애써 말로 외치고, 글로 뿌리며 한국사회로 다시 올라서기 위해 눈을
두리번거릴 무렵이었다. 그 무덥고 긴 8월, 남녘 항구 부산의 한 자리에서 백석은 벼슬 붉은
맨드라미 같이 고요히 익고 있었다.
백석을 베껴 읽었던 북녘 시인 윤동주를 문학사 위로 끌어올린 이는 고석규였다. 함경도 출
신 그 젊은 평론가가 차거운 청동처럼 굳어버린 심장을 안고 타향에서 쓰러지고, 시인 한무
학이 북녘 고향 가까운 인천 갯가를 떠돌다 끝내는 이 땅을 버리고 바다 건너 건너로 떠날
일을 입술 깨물며 결심하고 있었을, 그 여러 해 앞선 1951년이었다. 광복기를 앞뒤로 한 시
기 북한에 대한 학맥·인맥, 문학사회학적 정보에 마냥 눈밝고 귀밝은 이가 나와 더욱 온당
하게 이 사실을 변증해 주기 바란다.
(『시와비평』 3호, 2001년 전반기,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
다섯 도막으로 된 작품이다. 그리고 낱 도막은 모두 넉 줄로 이루어져 있어, 시줄은 스물에
이른다. 지면에는 갈래를 '시'라고 적어 올렸다. 그러나 오히려 동시에 가깝다. 병아리 두 마
리가 서로 싸움질을 하다 어미닭이 오자 그 일을 멈추고, "어미등에 품에 기여"드는 한 마
당 풍경을 그렸다. 첫 도막이 싸움질에 들기 앞서 두 마리가 서로를 고누는 그림, 둘째 도막
은 그 긴장이 막바지에 이른 그림, 셋째 도막이 서로 싸움질에 들어 물고 뜯는 그림, 넷째
도막은 둘이 싸움질에 지쳐 떨어진 그림, 다섯째 도막은 "어미닭이 나타"나자 언제 그랬느
냐는 듯이 제 어미에게 안겨드는 그림이다.
한낮 고요한 마당, 짧은 시각 안에 일어날 법한 예사로운 풍경을 건져낸 시인의 눈길이 꼼
꼼하다. 될 수 있는 대로 감정 노출은 줄이고 관찰자적 눈길을 지키려 했다. "성난 독수리마
냥" 마주 서 있다거나 "독사처럼 독"이 올랐다는 비유에서 거기서 벗어난 듯한 감정 개입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 굳어진 표현인 까닭에 굳이 특별한 표현 가치를 얻
기 위해 끌어댄 수사장치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밑그림을 끌어가는 숨길이 예사롭지 않다. 가장 동적이고 거친 그림인 셋째 도막을
중심으로 삼아, 첫째에서 둘째 도막으로 나아가면서 긴장을 드높였다가, 넷째 도막과 다섯째
도막으로 건너서면서 긴장을 해소해 나가는 숨길을 보여준다. 잘 짜여진 다섯 칸 짜리 만화
한 편을 보는 듯하다. 시공간 영역이 길지 않은 한 그림을 그려보여 주되, 그 안쪽에 단단한
짜임새를 마련한 셈이다. 느낌을 알맞게 누르면서, 스무 줄 다섯 도막으로 끌어간 바, 두 마
리 병아리 사이에 있었던 영문 모를 싸움질과 어미닭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르게 되
는, 긴장과 싸움질 그리고 해소라는 정황이 결코 단순하지 않은 생각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이름으로 올려진 대로 백석 시인의 것인가? 그 답에 이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해결할 문제가 있다. 생각을 따라가면서, 이 작품이 아주 특별한 경위로 발표된 백
석의 작품이라는 변증에 이르고자 한다.
3. 백석과 「병아리 싸움」
「병아리 싸움」이 백석 작품이라는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터무니는 오로지 시인의 이름으
로 지면에 올려진 '백석'이라는 데에 있다. 명확한 외적 증거인 셈이다. 그러나 이 시가 발
표된 때가 1951년 한창 겨레 상잔의 포화소리 요란한 경인전쟁 전중기였고, 그 곳 또한 백
석과는 인연이 먼 후방 남녘 항구 부산이다. 실린 자리도 문학 영역이나 백석과는 걸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대한상이군인회' 기관지『再建타임스』라는 엉뚱한 곳이다. 이 무렵 백
석은 그 상이군인들이 밤낮없이 성한 몸으로 전투를 하곤 했을 전선 북쪽 적진, 이른바 북
조선인민공화국이나 중국 쪽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 작품에 이름이 올려진 '백석'이 『사슴』을 낸 시인 백석인가 아닌가는
중대한 의문으로 떠오른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터무니가 되는 '백석'이라는 이름이 『사슴』
의 백석이 아니라, 우연히 또는 멋스러운 가명이나 필명을 찾다 '백석'을 고른 다른 시인이
나 투고자의 이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 편집자가 사실을 밝히는 주석을 지면에 남겨두
었더라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광복 뒤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살아왔고, 그 무
렵 적진 북쪽에 머물고 있을 시인의 작품이 전중기 전선 남쪽에서 발표되게 된 까닭을 말해
주는 어떠한 부차텍스트나 군더더기 말도 읽을 수 없다. 그 무렵 신문 편집에 관계했던 이
들이 살아 있다면, 사실 여부를 물을 수 있겠으나, 이 또한 벌써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이제 결정적인 터무니로 믿을 수밖에 없을 '백석'이라는 이름이 『사슴』의 백석이 아니라,
우연히 또는 멋스러운 가명이나 필명을 찾다 '백석'을 고른 다른 시인이나 투고자의 것이며,
「병아리 싸움」은 그 사람의 작품일 뿐이라고 말해도 대들 거리가 달리 없을 지경이다. 가
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외적 증거를 믿기 힘든 사정이니, 백석과 그의 작품 확정 문제는
다시 원점에 놓였다. 마침내 작품 자체나 주변 정황과 같은, 간접적인 내적 증거에만 기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작품 안쪽과 작품 바깥쪽으로 나누어 그것을 살피겠다.
1)작품 안쪽 증거
작품 자체로부터 암시 받는 내적 증거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점은 시어 선택에 있다. 「병
아리 싸움」에서는 다른 시인들과 유다른 백석 특유의 자장을 지닌 낱말을 몇 살필 수 있
다. 그 처음은 셋째 도막에 보이는 '조약'이라는 말이다. 도약(跳躍)은 흔히 '조약'으로 잘못
읽히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라, 의도된 말소리 뒤틀기로 말미암은 바다. '도
약'에 견주어 '조약'은 얼마나 작고 귀여운 말인가. "푸드득- 날센 도약과 함께"와 "푸드득-
날센 조약과 함께"는 그 맛에서 크게 다르다. 큰 장닭이라면 몰라도, 작은 병아리가 쌈박질
하기 위해 날아 솟구치는 모습에 '도약'이라는 말은 걸맞지 않게 큰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 점들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이가, 병아리를 다룬 이 시의 동시적 바탕을 살리기 위해 일
부러 '도약'을 '조약'으로, 흔히 아이들이 틀리게 읽기 쉬운 말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미 「旌門村」에서 어린 시절의 그러한 말장난 버릇을 백석은 넌지시 보여준 바 있다.
주홍칠이날은旌門이하나 마을어구에있었다.
「孝子盧迪之之旌門」- 몬지가 겹겹이앉은 木刻의額에
나는 열살이넘도록 갈지字둘을웃었다
- 「旌門村」 가운데서.
또래 아이들과 '정문' 앞을 지나다니면서 "열살이넘도록" 그 글자를 보고 웃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 '갈지字' 둘이 내놓고 발음하기 힘들었을 '보지' '자지'의 끝말처럼 여겨진 까닭
일 것이다. 이런 경험은 '도약'과 '조약'의 읽기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시어에 관한 한
거침없었던, 경험의 구체성을 살리기 위한 백석다운 낱말 선택이다.
두 번째는 둘째 도막에서 보이는 "들짱이 날것만같다"라는 말이다. 평안도 지역말이다. 본디
'들짱이 나다'는 '바닥 나다', '다 소비 되다', '다 없어지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두 마리 병
아리가 "독오른 주둥이"로 "간알픈 심장"을 서로 '쪼아박아' 장차 이루어질 일이다. 그러니
문맥으로 보아 시줄 "들짱이 날것만같다"는 '곧 다 죽게 될 것만 같다'는 뜻이겠다.
셋째와 넷째 도막에서 거듭 씌어진 '면두'라는 말도 눈여겨볼 일이다. 이 말 또한 '들짱이
나다'와 마찬가지로 닭의 볏, 벼슬을 뜻하는 평안도 지역말인 까닭이다. 평안도 정주 사람인
백석의 글에서는 초기 「닭에 채인 이야기」에서 이미 '면드레'로 한 차례 씌어진 바 있다.
'맨드레', '면두라미'와 같이 지역민에게 조금씩 달리 씌어지기도 하는 이 말은 '面頭'라는
한잣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석의 글말고는 찾기 힘든 용례를 보여준다. 다만 백
석이 처음 이 말을 썼을 때인 1935년대와는 달리 '면두'라며 평안도 사람이 아니더라도 문
맥을 빌어 알 수 있을 본디 말을 썼다. 따라서 이 시는 적어도 1935년대와 거리를 둔 뒷날
에 씌어진 작품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앞에서 살핀 바, 시 「병아리 싸움」은 '조약'과 같은 재치, 감각이 뛰어난 한잣말 부려쓰기
나 '면두', '들짱이 나다'와 같은 평안도 토박이말 부려쓰는 버릇에서 백석 특유의 말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게다가 통사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세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꼭히 백
석의 특유한 말솜씨라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첫 도막에 보이는 도치와 마지막 도막에 나
오는 "어미등에 품에"에 같은 자연스런 되풀이는 글쓴이의 언어감각이 결코 녹녹치 않음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다섯 도막 모두를 서술형으로 끌어가면서도 시의 숨길에 불균형이나
어색함을 자아내지 않고 순조롭게 말길을 틔운 일도 시인의 세련된 언어 제어력을 엿보게
한다.
게다가 이 작품의 글감 또한 토속적인 병아리 싸움질에서 따 왔다. 무엇보다 그러한 '동시'
적 정황의 작품을 '시'라는 갈래로 일군 일은 백석이 다른 시인에 견주어 유별난 점이다. 여
느 작품이었다면, '동시'라는 갈래로 발표 되었을 법한 작품이다. 성인시와 동시 사이의 경
계가 묽은 시인은 많지 않다. 어릴적 체험이나 동시적 상상력은 백석 시의 중요한 특성 가
운데 하나가 아닌가. 아예 경인전쟁 뒤에는 북한 문단에서 백석이 살아남기 위해 번역뿐 아
니라 아동문학 평론과 동시 창작에 힘껏 골몰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글감 처리나 '시'라
는 갈래 규정을 눈여겨볼 때, 「병아리 싸움」이 백석의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낱말 표기도 이 시가 발표되었을 1951년 무렵 남한의 주류적인 것과 다르다. 둘째
도막의 '간알픈'이라는 시어는 자연스레 '가냘픈'이 되어야 했을 터이다. 띄어쓰기 또한 좀
더 정돈되었어야 했다. 이 작품에 씌어지고 있는 표기법은 남과 북에서 아직까지 국가 단위
의 표기체계가 자리잡히기 앞선, 혼란기적 상황이 반영된 이어붙이기 방식인 셈이다. 같은
시기에 실린 다른 시의 낱말들과는 나뉘는 옛투가 물씬 배어 있는 모습이다. 적어도 「병아
리 싸움」이 발표된 시점과 작품 창작 시점 사이에 거리가 있음을 암시 받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병아리 싸움」은 경인전쟁 이전, 남북 분단이 굳어진 1948년보다 앞서 씌어진
것일 확률이 높다. 이미 1945년 광복 초기에 조만식의 통역비서를 하기도 했으나, 그의 몰락
과 함께 이내 북한사회에서 문학·문단 활동의 자리가 좁혀들었을 백석의 작품을 서울에 남
아 있었던 그의 벗 허준이 몇 차례 남쪽 발표로 이끈 적이 있었다. 「병아리 싸움」 또한
비슷한 경로를 밟았을 경우라 짐작된다. 광복기 어느 시점에 발표하기 위하여, 또는 그밖의
다른 사정으로 백석의 작품이 가까운이에게 주어졌고, 그것이 발표 기회를 갖고 있지 못하
다가, 피란기 그 지인에 의해 남쪽 부산에서 발표된 것이다.
앞에서 살핀 대로 「병아리 싸움」은 여러 가지를 양보하더라도, 최소한 평안도 지역말을
잘 아는, 예사롭지 않은 시력을 지닌 시인이 쓴, 경인전쟁 앞 시기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됨됨이로 볼 때, 그러한 조건을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작품 발표 때 구
체적이고도 명료하게 적혀 있는 바와 같이 『사슴』의 시인 백석이 분명하다. 창작 연대도
광복기거나, 적어도 광복을 앞뒤로 삼은 짧은 시기로 좁혀들게 되는 셈이다. 이 점은 작품
바깥쪽의 내적 증거들을 살피면 더욱 수긍되는 바다.
2)작품 바깥쪽 증거
첫째, 작품 바깥쪽으로 본 내적 증거로 가장 분명한 점은 백석이 이미 기성 문단에 널리 알
려져 있는 유명한 시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함부로 그의 이름을 빌리거나, 그와 같은
가명을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뜻 아니게 필명이나 가명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가 이미
문단에 얼굴을 낸 시인이었다면 백석이라는 이름은 피했을 것이다. 만약 백석의 존재를 몰
랐을 습작기 일반인이나 학생 작품이었다면, 그것을 실을 때 『再建타임스』의 '시' 자리에
올렸을 리가 없다. 『再建타임스』 지면 배치의 버릇에 따라 활자 크기를 줄여 실었거나, '
학생시'라는 이름을 표제에 밝혔을 것이다. 그런데 「병아리 싸움」은 양명문, 장수철과 같
은 기성시인들의 작품이 실린 자리에 꼭 같은 꼴의 지면 배치를 받고 있다. 기성시인 백석
의 작품이라는 뚜렷한 증거다.
둘째, 시를 올린 시인과 편집진의 됨됨이에서도 백석의 시라는 암시를 얻는다. 『再建타임
스』에는 학생시나 상이군인들의 시, 추천시, 편집진 가운데서 가명으로 올린 것으로 보이는
시, 그리고 이미 시단에 알려진 기성시인의 것과 같이 여러 유형의 작품이 실리고 있다. 그
런데 '시'라는 난에 실리고 있는 시는 기성시인의 것이나 사내 편집진이 가명으로 실은 것
으로 여겨지는 작품에 그친다. 적어도 언론·문필 활동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던 이의 것임
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 시를 올린 기성시인들은 유별난 됨됨이를 지녔다. 상대적으로 월남한 시인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까닭이다. 1913년 평남 평양 출신으로, 그 무렵 육군종군작가단으
로서 반공시를 많이 발표하고 있었던 양명문이 다섯 차례나 시를 싣고 있다. 같은 평양 출
신으로 피란시기 제주와 부산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1916년생 장수철이 수필 1편
을 비롯해 네 차례에 걸쳐 시를 발표하고 있어 또한 빈도가 잦다. 시를 세 차례 발표한,
1910년 함북 경성 출신 함윤수와 수필 두 차례를 비롯해 1편의 시를 발표하고 있는 김성애
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리고 같은 평양 출신으로 1918년생 박남수와 1919년생 김영삼 시
인은 1편씩을 올리고 있다. 이 신문의 문예면 담당자나 주요 편집진이 북한에서 월남한 이
나, 그들과 각별한 연관이 있는 이들일 것이라는 점을 확연하게 일깨워주는 사실이다.
『再建타임스』는 첫호에서 1951년 12월 5일 10호까지는 편집인을 '대한상이군인회 회장',
인쇄인을 사장으로서 월남한 상이용사 강태수, 곧 회의 부회장 이름을 올렸다. 부사장은 최
동희, 편집국장은 강영환이었다. 채규철은 주간겸 업무국장으로서 발령이 나 있었다. 그러다
가 1951년 12월 15일 11호부터 주간 최동희, 편집국장 채규철의 이름도 지면에 올리기 시작
했다. 여러 사람들이 대한상이군인회 안에서 『再建타임스』 발간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일의 처음부터 책임을 지고 도맡았던 이는 월남한 상이용사 강태수 사장과 이북에서 그의
스승이나 막역한 선배로 연을 맺고 있었음직한 채규철, 그 아래서 꾸준히 함께 일한 강영환
임을 알 수 있다.
강영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일곱달 남짓 편집국장과 주간이라는 주요 자리를 거
친 채규철은 시인이자 소설가였다. 1954년의 기록인 「현재 한국문학인총람」에 따르면
1913년 평북 후창군 출신이다. 평북 "강계 영실중학교를 나온 이래 시작 등을 발표하는 한
편 『再建타임스』 주간 등 역임"하였고, "저서로는 시집 『민족의 윤리』 소년동화집 『우
리동무』등이 있다." 그리고 1954년 "현재 상업에 종사중"이라 기록했으니, 채규철은 『再建
타임스』와 대한상이군인회 일을 그만 둔 뒤 문학활동으로부터 차츰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再建타임스』에 작품을 실은 여러 월남시인들은 정도 차이는 있을 것이나, 채규철과 남다
른 인연을 맺고 있었던 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출신지에서 채규철과 같은 평북, 평남 지역
이 압도적이다. 선후배 연배로 학연에서도 이저리 걸릴 만한 관계에 있다. 그들을 『再建타
임스』와 이어준 고리는 나이나 경력으로 보아 젊은 부회장이었던 월남 상이용사 강태수보
다 오히려 기성문인이었던 채규철일 가능성이 높다. 그 무렵 월남했던 지역민이나 문학예술
인들은 서로 잦은 교분을 나누고, 도민회니 피란지 임시학교를 중심으로 유별난 응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채규철과 이들 월남시인들도 『再建타임스』를 이음매로 자주 연결이 되
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월남하지는 않았지만 재북시인 백석 또한 채규철과 같은 고향 사
람이다. 백석의 작품이 다른 월남시인과 마찬가지로 『再建타임스』와 연을 맺을 개연성은
그만큼 큰 셈이다.
셋째, '백석'이 『사슴』의 시인이 아니라 다른 이일 가능성도 짚어두어야 될 일이다. 경인
전쟁 전중기에만 하더라도 작품 발표 때 호나 필명, 가명일 듯한 이름이 흔히 쓰였다. 그런
관례는 전후 문단이 재편·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사라져 버렸지만, 그 일이 흔
했던 광복 이전의 시기와는 또 다른 당대적 의미를 짚어볼 수 있다. 먼저, 필진 확보의 어려
움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이 점은 원고료 지급의 어려움과도 맞물린 것으로 보이는데, 많은
경우 한 사람의 내부 필진에 의해서 여러 차례 본명과 가명이 함께 씌어질 가능성은 늘 있
었다. 게다가 피란문단에서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했다. 별다른 재주나 직업을 갖지
못한 이들은 전업작가로서 적은 원고료나 배급쌀에 목을 매고 어려운 살림을 할 때였다.
『再建타임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급한 경우, 될 수 있는 대로 내부 필진으로
지면 처리를 하면서 원고료를 아끼거나 거꾸로 그 수입에 의존해야 할 일이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북쪽 출신 문인의 생계난은 남쪽에 터를 둔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는 없었겠다. '백
석'이라는 이름이 『사슴』의 시인 백석과는 무관한 이가 발표를 위해 내세운 가명일 가능
성도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놓치지 않으면서 지면을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시나 산문을 발표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소속이 분명한 학생시나 일반 투고시를 제외하
고 아무런 표지가 없는 작품의 필자 가운데서 백석과 유사한 이름을 갖고 있는 이를 찾아보
면 여럿이 나타난다. '美石'이라는 이가 두 차례 시를 내놓고 있다. 습작기 수준에다 한자
투성이로 된 거친 시여서 「병아리 싸움」과 작품 격차가 너무 난다. '石村'이라는 이가 '촌
극' 「역사」를 싣고, '白雄'이라는 이도 한 차례 나온다. 「6.25 예술대회를 보고」라 이름
붙인 시평이다. 정도가 심한 한잣말투로 이 또한 「병아리 싸움」의 섬세한 언어감각에서
벗어난다. '功石'도 시 한 편을 남기고 있다.
그대와 나
처음 만난 사이
어느새 십년전친구인양
이렇게 마주서 웃는군요
무엇이 좋으냐구요
글세 그것이 인생인 것을
- 처음 만난 사람 가운데서.
소박한 인생시다. 전문 습작과정을 겪지 않은 이의 작품이다. 이 또한 「병아리 싸움」에서
보이는 문재에서 한창 떨어진다. 이런 점에서 「友情」이라는 시를 싣고 있는 '石淵' 또한
마찬가지다. "五十을 다못살어도 / 두사이에 심은 정은 / 한百年 살꺼나"로 시작하는 이 작
품의 품은 낮다. 앞선 '공석'에도 못 미친다. '俊石'이라는 이 또한 한 차례 시를 발표하고
있다.
오색 령롱한 아침해살 타고
새乙자로 고개 치켜든 오리
자웅을 결하려 가는드시
둥둥 두둥실 떠간다
-줄임-
물속깊이 목을 담거
두나래 활개치며
임진난 거북선마냥
둥둥 두둥실 떠간다
가벼운 실바람
물결은 잔잔이 이는데
호랑나비 물오리등에
둥둥 두둥실 떠간다
- 舊稿中-
- 「물오리」 가운데서.
『再建타임스』에 실린 시 가운데서 그나마 백석의 「병아리 싸움」과 가장 가까이 밀어다
놓을 수 있는 작품이다. 글감에서 그렇고, 동시적 감각을 보여주면서도 동시라 하지 않고 그
냥 '시'로 발표하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준석' 또한 '백석'과 마찬가지로 본명 같
지는 않다. 『再建타임스』 다른 자리에서는 이 이름을 볼 수 없다. '백석' 또한 마찬가지다.
낱말도 예스러운 데가 있다. '령룡한'이라 적어 첫소리 ?을 둁으로 막지 않았고, 소리이어붙
이는 표기를 따랐다. 그러나 이 작품이 백석의 「병아리 싸움」과 다른 점은 확연하다.
「물오리」는 앞선 작품에 견주어 품이 마냥 낮다. "임진난 거북선마냥" '물오리'가 "둥둥
두둥실 떠간다"는 표현은 한참 못 미치는 쪽이다. 시어 선택이 예스럽다고 하나, 「병아리
싸움」에서 본 '면두'니, '들짱이 나다'와 같은 평안도 특유의 토박이말 선택과는 달리 소박
한 예스러움일 뿐이다. 두 작품은 동시적 발상법이나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는 점말
고는 연관이 없는 셈이다. 처음부터 작품 층위가 크게 달라, 「병아리 싸움」에 견주어 시의
공력이 한 수 아래인 이의 작품이 「물오리」다. 게다가 백석이라면 '충무공'을 손수 끌어다
놓고 찬탄하는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석과 '준석'은 사뭇 다른 이였을 뿐 아니라,
'준석'이라는 이름을 올린 이가 자신의 작품에다 '백석'이라는 이름까지 끌어다 놓았을 가
능성은 엷다.
오히려 나로서는 이 '준석'이란 사람이 백석의 작품을 찾아 올린, 백석과 교분이 남달리 깊
었던 이가 아닌가 짐작된다. 그럴 경우 떠오르게 되는 이는 둘이다. 백석과 같은 해인 1912
년생 김성애와 그 한 해 뒤인 1913년생 채규철이다. 김성애는 함남 정평 출신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중국에서 자라 배우고 머물면서 교사와 언론인으로서 활동했다. 광복기 남쪽으로 내
려와 『서북신문』 문화부장을 거쳤고, 시인이자 소설가로 활동한 사람이다. 김성애 와 백석
이 만날 수 있었을 기회는 광복을 앞뒤로 한 짧은 시기 - 그녀가 중국 동북삼성에 머물고
있었던 1940년대부터 평양으로 들어섰을 광복 초기까지 - 였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동년
배인 백석을 만났을 수도 있었고, 백석이 자신의 작품을 김성애에게 건넸을 수도 있다. 이
경우라면 「병아리 싸움」의 창작 시기는 경인전쟁기보다 훨씬 아래로 내려서게 된다.
그러나 경인전쟁기 김성애는 『再建타임스』의 편집에 끼여들 입장에 있지 않았다. 광복과
북한 체제 개편 과정에서 어려운 일을 겪은 뒤 월남하여, 다시 서울에서 지닌 것을 모두 잃
은 채 인천길로 화급하게 탈출해 내려온 이가 그녀다. 남쪽 생활 자체가 매우 곤궁하고 어
려운 처지였을 김성애 시인이 백석의 작품을 온전히 갈무리해두고 있다 내어놓았을 가능성
은 없다. 게다가 '준석'이라는 이름은 여자가 자신에게 붙이기는 어려운 이름이다.
『再建타임스』에 백석의 작품을 올렸을 가능성이 있는 다른 한 사람은 채규철이다. 그가
『再建타임스』의 실질적인 출판 기획을 오래도록 도맡았을 뿐 아니라, 작가였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밝혔다. 그야말로 기성 문인들의 작품을 올리는 '시'란에 '준석'이라는, 남쪽
문단에서는 아주 낯선 이름으로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기성' 작가였다. 백석과는 한 살 아래
로 같은 평북 출신이어서 남다른 친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준석'이란 바로 채규철이 사내
필진이나 비슷한 자격으로 올린 가명일 가능성이 짙은 셈이다.
'준석'은 작품 「물오리」를 '구고중'에서 꺼집어냈다고 적었다. 생각을 더 키워보면 옛 글
뭉치에서 작품을 고르다 절친했던 백석의 것을 찾게 되어 그것을 먼저 올리고, 다시 자신의
것도 지면에 올렸으리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준석'이라 이름 붙인 일이 예사롭지 않고, 백
석의 '병아리'와 '준석'의 '오리'가 소박하게 연결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채규철은 '준석'을
비롯해 『再建타임스』에 유달리 잦은 바, '石'을 돌림자로 삼은 이름의 사내 필자거나, 그
일에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끼친 이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백석과 가까운 관계에 있
었을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분이 더 깊어질 수 있었다면 그 시기는 광복 초기 북한에서 김일성주의와
는 다른 민족 우파 활동, 곧 조만식과 백석이 길을 같이 할 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일이 여기까지 이른다면 이 작품의 의의는 예사롭지 않다. 채규철이 남쪽 문단에서 쉬 잊혀
져간 일과도 연관이 있을 법한 까닭이다. 그는 남쪽 문단과 그리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피란문단에서도 다른 문학활동은 찾을 수 없다.
게다가 같은 월남문인이며 대표적인 극우 인사 오영진이 내고 있었던 『주간문학예술』에
장수철, 박남수와 같은 이들이 작품을 실은 데 견주어 채규철은 끝내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1954년 현재 그는 상업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최규철이 남한 문단에
편입되지 못한 것은 그의 노선이나, 문학 감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갖게 한다.
그는 서북청년단과 같은 골수 반공주의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남쪽에 내려와 상이군인회
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하게 될 만한, 북한에서 남다른 문화자본과 기반을 쌓았던 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병아리 싸움」이 남쪽 매체에 실린 일은 월남문인이자 편집자였던 채규철이 비록
적으로 맞서 북에 남아 있을지언정, 결코 계급주의자는 아님이 분명한 백석 시인에 대한 곡
진한 마음이 담긴 표현일 수 있다. 일찍부터 간수하고 있었던 백석 시를 자칫 용공 시비를
자초할 지도 모를 후방 매체에 거리낌없이 올린 까닭이다.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
다. 광복 초기 북쪽에서 간행된 매체에 실린, 교분이 깊었던 백석의 작품을 발견하고 채규철
이 그것을 간수해두었다가, 『再建타임스』가 실을 만한 마땅한 작품을 얻지 못하자 재수록
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작고문인의 작품이나, 이미 발표된 작품이 재발표되는 일은
『再建타임스』에서 여러 차례 있었다. 편집의 필요에 따라 작품 대필뿐 아니라, 허락없이
잘 알려진 남의 작품을 옮겨오는 일은 그 무렵 언론계에서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었던 셈이
다.
4. 「병아리 싸움」의 뜻
백석의 시 「병아리 싸움」은 매우 이례적인 길로 세상에 알려진 작품이다. 시인과 경인전
쟁 이전부터 여러 연이 깊었을 작가 채규철이 일찍부터 간수하고 있었던 그 작품을 자신이
편집을 맡은 대한상이용사회 기관지 『再建타임스』에 실었다. 이 글은 그 사실을 뚜렷히
하기 위해 몇 가지 점에서 그 터무니를 작품 안밖으로 나누어 찾아본 것이다. 그리고 이 일
이 지닌 뜻은 아래와 같다.
첫째, 백석의 작품에 대해 갖게 된 세간이나 학문공동체의 관심은 그 연조가 길지 않다. 빈
자리가 많을 터이다. 그 가운데서 백석의 작품 발굴 또한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될 일거리
다. 그런 까닭에 이번 「병아리 싸움」의 발굴은 백석 시 한 편을 우리 근대문학사의 자산
가운데 하나로 더하는 즐거움을 준다.
둘째, 「병아리 싸움」은 시로 발표되고 있으나 동시에 가깝다. 그리고 이 작품은 채규철이
백석과 남다른 교분을 자주 나누었을 시기, 곧 을유광복을 앞뒤로 하는 짧은 시기에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석이 동시 창작이나 아동문학 평론에 관심을 보인 시기는 흔히
알려지고 있는 바와 같이 경인전쟁이 끝난 뒤, 그가 새로 북한문단에 편입되기 시작한 1950
년대 중반 무렵부터가 아니라, 적어도 훨씬 앞선 광복 초기까지 내려선다. 백석의 작풍에는
초기 『사슴』 무렵부터 동시적 상상력이 깃들 자리가 넓었다. 이 작품을 빌어 후기 아동문
학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으로 나아가는 자연스런 징검다리를 한 곳 확인할 수 있었던 셈이
다.
셋째, 『再建타임스』에 「병아리 싸움」이 실리게 된 일은 채규철과 같이 백석을 익히 알
고 있었을 월남문인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이 일은 광복기 평양에서 백석이 김일성
주의 노선에 맞닿은 문학활동은 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현재로서는 우익 인사 조만
식의 통역비서였다는 풍문만 알려지고 있었다. 이 작품으로 그런 자리를 좀더 기울 수 있게
된 셈이다. 만약 백석이 '북조선문학예술총연맹'과 같은 데서 확실한 자리를 차지한 채 활동
했던 계급주의자였더라면, 그 무렵 사회 분위기로 보아 그것도 적진에서 다쳐 돌아온 상이
용사의 기관지에 작품이 실리는 이례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다. 적어도 백석의 시
와 삶에 대한 사상 검증에 확신을 가졌거나, 깊은 데까지 자신감을 지닌 이가 결정한 일이
다.
넷째, 마침내 「병아리 싸움」은 광복기, 북쪽을 선택하기도 어려웠고 남쪽을 선택하기는 더
욱 어려웠을, 백석의 깊은 속내를 짐작하게 해준다.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바, 병아리
가 둘로 나뉘어 서로 싸우다가 한 어미 품에 아무렇지도 않게 안겨 하나가 되듯이, 둘로 나
뉘어진 겨레의 삶이 그리 되었으면 하는 희원과 그리 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낙망이 그것
이다. 사람 세상이면서 날개짐승의 모습에도 못 미치는 겨레 현실에 대한 안따까움이 옹근
시다. 그런 점에서 「병아리 싸움」은 뒷날 그의 동시가 오롯이 지향하고자 했던 알레고리
적 짜임새까지 일치감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백석을 가까이 기억할 수 있었을 많은 이들은 북에서 떠밀려 내려온 뒤, 남쪽 문단에 제대
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전쟁기를 거치면서 문학사의 뒷자리로 잊혀졌다. 김광
주, 모윤숙, 조연현과 같은 이른바 문협 정통파들에 빌붙어 새삼스럽게 새 삶을 얻는 이도
있었다. 함락과 수복에 이르는 '적치 90일' 동안 서울에 남아 '문학가동맹'에 들었던 문인들
도 공산당의 '만행'을 애써 말로 외치고, 글로 뿌리며 한국사회로 다시 올라서기 위해 눈을
두리번거릴 무렵이었다. 그 무덥고 긴 8월, 남녘 항구 부산의 한 자리에서 백석은 벼슬 붉은
맨드라미 같이 고요히 익고 있었다.
백석을 베껴 읽었던 북녘 시인 윤동주를 문학사 위로 끌어올린 이는 고석규였다. 함경도 출
신 그 젊은 평론가가 차거운 청동처럼 굳어버린 심장을 안고 타향에서 쓰러지고, 시인 한무
학이 북녘 고향 가까운 인천 갯가를 떠돌다 끝내는 이 땅을 버리고 바다 건너 건너로 떠날
일을 입술 깨물며 결심하고 있었을, 그 여러 해 앞선 1951년이었다. 광복기를 앞뒤로 한 시
기 북한에 대한 학맥·인맥, 문학사회학적 정보에 마냥 눈밝고 귀밝은 이가 나와 더욱 온당
하게 이 사실을 변증해 주기 바란다.
(『시와비평』 3호, 2001년 전반기,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
카페 게시글
백석종합자료실
백석의 미발굴 시 「병아리 싸움」변증 / 박태일
삶과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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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06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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