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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좀 봐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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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멎은 거겠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잖아.
한낮이다. 방안은 어둑하다. 하나뿐인 창문이 닫혀 있다.
여자가 의자에서 일어선다. 방안엔 여자뿐이다. 옅은 어둠이 휘청, 흔들린다. 여자의 몸무게를 견디던 의자에서 작은 소리가 난다.
대바구니 모양의 의자는 벽과 벽이 만나는 귀퉁이에 놓여 있다. 댓살들이 영 점 일 밀리미터쯤 제각각 수축하며 내는 소리. 바람이 분다면 들리지 않을 소리다. 바람이 멎은 것이다.
포구의 모든 소리는 바람이 일으킨다. 퍼런 바다가 쉴 새 없이 일렁인다. 바람이 자면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그렇지 않다. 바람에 묻혔던 것들이 소리를 낸다. 여자가 두어 걸음 움직인다. 방바닥에 여자의 양말 스치는 소리가 난다.
여자는 사십 중반이다. 문득 움직임을 멈춘다. 흰 얼굴이, 옅은 어둠과 머리카락 그림자까지 드리워져 푸르다. 화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민얼굴. 곧은 머릿결은 귀밑에서 싹둑 잘려 끝선이 날카롭다. 드러난 목덜미가 서늘하다.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들이켜고 고개를 돌린다. 개개의 동작들이 두 박자쯤 사이를 두고 이어진다. 여자가 자세나 자리를 바꾸는 방식이다. 빛과 어둠, 공기의 흐름이나 소리를 방해하지 않는다. 여자의 눈길이 창문에 머문다.
창문은 닫혀 있지 않다. 늘 닫지만 늘 열려 있다. 좌우 문틀에 경칩이 박힌, 전통대문을 축소한 여닫이다. 유리는 없다. 두 손으로 열고 두 손으로 닫게 돼 있는 목재 창문을, 여자는 연 적이 없다. 언제나 닫을 뿐이다.
얇은 송판을 잇대어 만든 창문엔 나무 문양이 선명하다. 오랜 세월 바람과 햇살에 풍화되어 나이테 부분만 도드라졌다. 닫으면 한낮에도 방은 밤처럼 어두우나, 창문은 주먹 하나 드나들 만큼 벌어진다. 벌어지고 만다. 걸쇠를 걸어도 바람이 흔들어 연다. 퍼런 바다가 쉴 새 없이 일렁이는 곳이다. 포구의 바람은 모든 소리를 일으키고 모든 일상에 참견하며 모든 흔들리는 것들을 주관한다. 여자가 움직인다.
또 창문을 닫으려는 건가? 가까이 가 볼래?
나는 여자의 어깨 위로 날아가 앉는다. 방안엔 여자뿐이지만 나도 있다. 나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 같은 존재를 유령이나 귀신 혹은 영혼이라 부르나 나의 세상에선 서로 온비라고 한다.
무슨 뜻인지 모른다. 온비의 특징은 걷지 않고 허공을 부유한다는 것, 그리고 말의 기원을 따지지 않거나 따질 줄 모른다는 것이다. 능력의 한계가 분명치 않아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모른다. 해 봐서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온비는 혼자면서도 대화식으로 중얼거린다. 온비 안에,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가 공존한다는 뜻이다. 두 존재는 거의 동시에 같은 내용의 말을 하고 거의 동시에 같은 내용의 말을 듣지만, 거기엔 영 점 일 초의 간극이 존재한다. 간극은 음파를 간섭하여, 말하는 온비와 듣는 온비를 어지럽게도 간지럽게도 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게 무언지, 어째서 대화형식이어야 하는지 모른다. 몰라도 궁금하지 않다.
어깨에 앉으면 여자의 서슬이 좀 더 분명해진다. 체온과 맥박이 느껴진다. 그것만으로도 여자의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자는 창으로 손을 뻗는다. 햇볕에 온전히 노출되어도 여자의 창백한 손엔 그늘이 걷히지 않는다. 외부의 빛과 상관없이 몸 안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는 그늘. 여자는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나무 창문 좌우 걸쇠를 쥔다. 창문이 밀려 조금 더 열린다. 방안이 그만큼 밝아진다.
열려는 걸까?
건너다보이는 집은 슬라브 지붕이다. 왜 슬라브인지 모른다. 슬래브던가? 집은 온통 흰색이다. 바람 불지 않는 날은 옥상 위 푸른 하늘에 새털구름이 높다. 일 층과 이 층을 잇는 빗금 계단 하나와 위층의 짧은 가로 복도가 건물 외벽을 에두른다. 복도 가운데 서 있던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웃는다. 감을 던지면 받아먹을 수 있는 거리다.
남자가 손을 들어 알은체한다. 여자가 창문을 당겨 닫는다. 밤처럼 어두워진다. 걸쇠를 잠근다. 그 남자를 내 맘대로 슬라브족이라 부르든 말든, 사람들은 알 리 없다.
진짜 슬라브족은 감을 먹지 않는다지만 진짜 슬라브족이 아니므로 그는 감을 좋아한다. 그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다.
나는 이곳에, 불시착했다. 목적지가 예정돼 있던 게 아니어서 불시착이랄 것도 없었다. 어쩌면 이곳이 목적지일 수도. 하지만 나는 불시착이란 말이 좋다. 느닷없이 나는 이곳에 생성되었다.
바람이 먹구름을 걷어내며 포구에 햇살이 잠깐 비치던 순간이었다. 주황색 공이 허공을 빠르게 가르며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뚜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나는 여자아이 모습으로 생성되었다.
그 남자의 외침이었다.
“뚜리가 뭐야?”
그에게 주황색 공을 던진 과일가게 사내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스트라이크.”
남자가 대답했다.
“스트라이크가 왜 뚜리지?”
바람이 그치고 햇살 비치는 게 모두가 반가운 한낮이었다.
“야구 주심은 그러는 거야.”
던지고 받은 건 공이 아니라 감이었다.
“글쎄 왜 그러냐고?”
볕이 나자 포구에 활기가 돌았다.
“스트라이크는 길잖아. 줄여서 뚜리.”
남은 바람이 부두 위의 비닐봉지를 쓸고 갔다.
“줄인다고 뚜리가 되나?”
“크게 외쳐야 하니까. 수십 번 외쳐야 하니까. 귀찮으니까 쉽고 간단하게. 만성이 된 말이지. 그래서 뚜우리!”
“둘러대긴.”
“교토에 가 봐. 버스 운전사들도 힘드니까 그냥 무아쓰! 그래.”
“무아쓰?”
“만성이 된 말이지. 아리가토 고자이무아쓰가.”
“마아쓰.”
“무아쓰.”
“교토에 가 봤어?”
“가 봤어.”
“가서 뭐 했어?”
“감 먹었지.”
“에라이, 자 받아.”
과일가게 사내가 다시 주황색 감 하나를 빠르게 던졌고 남자가 받으며 소리쳤다.
“뚜우리!”
내가 생성되며 들었던 첫말이 뚜리였다. 남자와 과일가게 사내가 주고받는 언어가 낯설지 않았다. 불시착한 곳이 전혀 이방은 아닌 듯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가운데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면면은 낯설었으나 포구의 건물과 간판, 냄새와 빛깔은 친숙했다. 온비에게 나이 따위는 중요치 않으나, 나는 내가 열다섯 살이라는 걸 알았다. 알았으나 그다지 믿기지 않았고 감흥도 없었다.
남자는 키가 커서 옷차림이 더 허름해 보였다. 길고 지저분한 곱슬머리가 바람이 불 때마다 부풀었다. 까만 턱수염과 구레나룻에 개운치 않은 윤기가 흘렀다. 그를 뚜리라 부르려다 슬라브족으로 바꾸었다. 열린 창문을 여자가 닫으려 할 때, 건너편 슬라브 지붕 아래 그가 종종 보였다. 대개는 감을 먹고 있었다. 긴 팔을 들어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아리안계 같아 붙인 이름이었다.
처음 내려앉았던 곳은 남자의 어깨였다. 남자의 몸속이 텅 빈 듯했다. 냉기가 느껴졌다. 그치는 바람에 과일가게 선간판이 맥없이 쓰러졌다. 감을 매만지던 남자가, 내가 앉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모든 사람이 나의 낌새를 느끼는 건 아니었다.
어깨에 손을 얹은 두 번째 사람이 여자였다. 여자는 남자보다 좀 더 오래, 내가 앉은 어깨를 쓰다듬었다. 남자에게 냉기가 있었다면 여자에겐 그늘이 있었다. 여자에게 냉기가 있고 남자에게 그늘이 있다고 해도 무방할 무엇이었다. 다르지 않았다. 다르지 않은 그것이 나를 머물게 했다. 나는 그런 것에 깃들었다. 좀 더 차갑거나 좀 더 어두운 것에.
느닷없이 포구에 생성된 게 첫 불시착이었다면, 두 번째 불시착은 여자 곁에 머무는 거였다. 실은 모든 게 불시착이었다. 움직임의 의지도 이유도 온비 스스로 알 수 없었다. 모든 순간이 출발이며 도착이었다. 좀 더 차갑거나 좀 더 어두운 것에 깃든다는 사실이 온비의 방향성을 암시하는 듯하나, 반복되지도 연속되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매 순간이 시작이며 끝이었다. 나는 지금 여자 곁에 있을 뿐이다. 방이거나 어깨 위에.
맞아. 저 첼로 소리도 친숙해.
언제 귀에 익은 멜로디인지 모른다. 그때그때 온비가 깨달아 아는 기운이나 감정은, 기억 없는 흔적처럼 아득하다. 여자가 휴대전화 폴더를 연다. 푸른빛이 튕겨 나오며 첼로 음이 뚝 끊긴다. 크고 밝고 빠른 여성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여자는 말없이 한참을 듣다가 응, 응, 짧게 대꾸한다. 통화는 길게 이어진다. 송화자의 일방적인 말이 어둔 방에 흥건하다. 통화가 끝나면 여자는 휴대전화 폴더를 닫는다. 늘 그런 식이다. 폴더를 열고, 듣고, 가끔 짧은 대꾸를 하다가, 폴더를 닫는다. 누군가에게 먼저 거는 법이 없다. 거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다. 걸려오는 전화도 늘 한 여성에게서다. 그 여성을 나는 송화자라 부르기로 했다. 잦아들었던 바람이 다시 창문을 흔든다.
여자는 단층 통나무집에 묵고 있다. 작은 마당엔 갯잔디가 소복하다. 징검다리처럼 놓인 편마암을 밟으며 여자가 마당을 건넌다. 건너편 집 이 층 복도에서는 여전히 슬라브족이 감을 먹는다. 그 이층집도,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카페도, 여자가 끼니를 해결하러 가는 ‘큰 여’라는 식당도 온통 희다. 포구의 주도로 한쪽 편은 바다와 부두와 백사장이고 다른 한쪽 편은 흰 식당과 흰 주점과 흰 숙박시설이다. 언제나 퍼런 바다가 저 끝에서 일렁인다. 여자는 흰 벽을 지나 흰 벽을 따라 흰 벽을 느리게 걷는다. 포구의 바쁜 움직임과 확연히 구별되는 걸음이다. 오가던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고 여자를 바라본다. 긴 저지 카디건 자락이 바람에 날린다. 목에 두른 머플러 끝이 여자의 뺨과 콧등을 잇따라 스친다.
여자는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계절에도 한 달 동안 포구에 머물렀다. 여자에게 전화하는 송화자는 통나무집 주인이었다. 통나무집 말고도 몇 채의 건물을 소유한 사람의 여유와 자랑, 당당함이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여자의 휴대전화도 송화자의 것이었다. 있을 만해? 먼 내륙의 도시에서 날아오는 송화자의 말들이, 여자의 어깨에서는 천둥처럼 들렸다. 내 집이려니 해. 여자를 다독였다. 그 집 맘에 들면 너 줄게. 빈말 같지 않았다. 여자는 응, 응, 대답하거나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의 소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도 가족도 휴대전화도 없었다. 통화를 엿들어 알게 된 것들이다.
쉬려고 왔으나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무엇을 쉬어야 하는지 여자는 몰랐다. 세상과 격리되었던 수년 동안 여자는 충분히 쉬었다. 너무 쉬었어. 쉬는 걸 멈추는 게 쉬는 거야. 송화자의 말에 응, 응, 여자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송화자는 다독이고 격려하고 핀잔을 주었다. 자주 밖에 나가고 사람들 만나 얘기도 나누고 그래야지. 응, 응……. 너 출소한 지 일 년이 넘었어. 여자는 숨을 멈추었다. 한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송화자의 말이 얼마간 더 이어지다 끊겼다. 그들이 통화하는 방식이었다.
여자는 어둡고 텅 빈 방에 놓여 있었다. 오랜 세월 갇혀 있던 어둡고 텅 빈 방이 여자 안에 어둡고 텅 빈 방을 만들어 놓았다. 햇빛에 나서도 걷히지 않는 그늘의 근원이었다. 여자 안에 방이 있고, 여자가 방이라, 방에서 나가지 못했다. 나가도 방이었다. 열려도 닫았다. 통화를 엿들어 알게 된 것들이다.
뭘 바라보는 걸까,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요? 큰 여의 여주인이 대신 물어준다. 여자는 대답 없이, 보던 것을 본다. 큰 여 여주인의 눈길이 식당 밖, 길 건너, 파밭을 지난다.
“저 집 간판 말인가요? 크리스털 아귀찜?”
여주인이 식탁 위에 미역국을 내려놓는다.
“식당 이름이…….”
여자는 큰 여에서 늘 보말미역국을 먹는다.
“수정 아귀찜이었다우, 원래는.”
“수정…….”
“그래요, 수정이었지.”
“주인……이름인가요?”
“웬걸. 다방 이름이었어요. 한때 잘 나가던 다방 자리여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다들 아니까 수정이란 이름을 그대로 쓴 거지. 장사는 그러는 거니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여주인은 흥이 난다.
“그런데 수정 아귀찜은 장사가 안됐어요. 지나던 철학자인지 작명자인지가 일부러 들어와 크리스털로 바꾸랬대요. 바꿨더니 장사가 잘된다나. 눈에 띄긴 띄나 봐요. 크리스털 아귀찜. 호호.”
말하는 건 여주인뿐이다.
“나도 고둥미역국을 보말미역국으로 바꿔봤다니까요. 그 말이 그 말이지만 바꾼 뒤로 이거 먹으러 오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우. 정말.”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다. 묵묵히 밥 한술, 미역국 한술. 그 외의 것들은 먹지 않는다. 식당 유리창에 부딪힐 듯 갈매기들이 날아오다 멀어진다. 몸집이 크다.
“흰 페인트를 칠하겠다면, 시에서 비용의 절반을 지원해 줘요. 왜 그러는지 몰라. 다른 색깔은 안 된대요. 민선 시장이 바뀌고 그러네. 어쨌거나 나도 흰색을 칠해버렸지. 온통 하얘지지 않겠어요? 호호.”
여주인은 식탁을 떠나지 않는다.
“거 모퉁이 카페 이름이 왜 메리 앤 폴인 줄 알아요? 거기가 원래 민박집이었는데, 젊은 서양인 남녀가 와서 약 먹고 죽어버렸어요. 3년 전에.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이름이 뭐였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대요. 둘 다 머리가 옥수수수염처럼 노랗고 생긴 것도 참 이뻤다는데…….”
여자는 귀를 닫았다. 밥 한술, 미역국 한술에 열중할 뿐이다. 이유 없이 흥을 내고 호호거리는, 양해 없는 여주인의 수다를, 견디지도 호응하지도 못한다는 걸 나는 안다. 얼마나 큰 갈매기들이 얼마나 자주 식당 유리창으로 몰려왔다가 멀어지는지 여자는 모른다. 방에서 나오지 못한 여자는 방 밖의 사람과 풍경이 낯설고 두렵고 불안하다. 가당찮다.
어둡고 텅 빈 방에서, 저주 같은 신체 하나로, 수년의 시간을 오롯이 기계처럼 견디는 인간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뻔뻔하고 수선스럽기만 한 바깥세상이 가당찮다. 선뜻 방 밖으로 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과거의 기억과 시간을 털고 사람 손 맞잡으며 어수선하게 갱생의 의지를 다지는 건 여자에게 더욱 참을 수 없이 가당찮은 일일 것이다.
“서울서 젊은 부부가 왔어요. 민박집을 사서 뚝딱뚝딱 고치더니 소꿉장난하는 집처럼 꾸미고 턱 하니 간판을 달데. 가장 흔한 서양 여자 이름이 메리고 남자 이름이 폴이라면서요? 여기서 카페는 장사가 안돼요. 맨날 두 부부가 주인이고 손님이지. 자기들끼리. 호호. 그게 다예요. 뭣 하는 거냐고 했더니 애도하는 거래요. 왜 이름도 나라도 모르는 서양 귀신들을 애도하나 몰라…….”
온비가 아니었나 보네?
나는 카페 부부가 온비인 줄 알았다. 카페 메리 앤 폴은 여자가 드나드는 마을 입구, 큰길가에 있다. 자주 그 앞을 오갔다. 카페 유리창 안으로 부부의 움직임이 보이곤 했다. 온비의 서슬이 강해서 그들이 온비인 줄 알았다. 서슬은 젊은 서양 남녀의 것이었다. 느낌만 있고 보이지는 않는.
나는 그들 부부가 조금은 궁금했다. 혼자서 카페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지만 여자가 함께 움직여주길 바랐다. 나도 송화자와 같은 맘이었으니까. 여자는 자주 밖에 나가고 사람들 만나 얘기도 나누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는 카페를 그냥 지나치곤 했다. 조금 전 큰 여에서도 여자는 여주인 혼자 떠들게 놓아두었었다.
“보다시피 여긴 파밭이 많아요. 비가 오면 운치가 돌지.”
여자의 침묵을 여주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 계절에도 왔었다니 여주인은 여자를 모를 리 없었다. 침묵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 여주인이 여자를 잘 안다는 증거였다. 끊임없이 떠들었다. 큰 여를 여자에게 소개한 사람은 분명 송화자였을 것이다.
“바닷가라 비도 바람도 많잖아. 비 오면 파밭에 나가 들어봐요. 소리가 그만이에요. 저 양반은 뭐라는 줄 알아요?”
여주인이 주방의 남편을 가리켰다.
“파밭에 비가 내리면 날 시몬이라 부르거든. 시몬, 너는 좋으냐, 파밭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이래요. 호호.”
주방의 남편이 멋쩍게 눈을 찡긋 했다. 여자를 향한 것이었으나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므로 내가 받았다.
여자는 말없이 밥을 먹고 말없이 일어섰다. 바람이 불어도 큰 여의 문 한쪽은 늘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냥 들어가고 나오면 되었다.
“비 내리면 꼭 파밭에 나가 들어 봐요. 숙제에요. 알았죠?”
여주인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하는 것을 여자는 등 뒤로 들었다. 뚱뚱한 갈매기가 여자의 정수리를 스칠 듯 낮게 날았다. 한가운데 까만 점 찍힌 갈매기의 노란 눈이 매서웠다. 부리도 눈과 같은 노란색이었으나 날카로운 그 끝만 선연한 붉은색이었다. 카디건과 머플러가 바람에 날렸다. 큰 여 남편이 중얼거리던 말을 여자는 듣지 못했다.
“변한 게 없어……큰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아. 늘.”
내 맘을 알아차린 걸까. 여자가 카페 문을 연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린다. 카페 같지 않고 수수한 가정의 거실 같다.
“아, 오셨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카페 여주인이 반색한다.
“안녕……메리.”
여자는 머뭇거린다. 구면인 듯하다. 남자 주인은 폴일까.
“어서 와요. 일라이저.”
남자 주인도 반긴다.
“안녕……하셨어요, 폴.”
역시 폴이다. 일라이저는 뭘까.
냉장고 뒤에서 슬라브족이 불쑥, 감을 들고 나타난다. 내 궁금증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가 말한다.
“내가 지은 이름이지. 일라이저.”
수염 자란 슬라브족 입 주변이 지저분하다.
여자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다. 집이었다면, 창문을 닫았을 것이다. 대신 여자는 유리창 밖으로 눈을 돌린다. 큰길 버스 정류장 나무의자에, 정수리가 훤히 드러난 사내가 앉아 있다.
“메리 앤 폴 냉장고에는 언제나 감이 있지. 필요하면 먹을 수 있게……. 알아요, 일라이저?”
슬라브족은 큰 여의 여주인과 다를 바 없다. 상대의 침묵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언제나 올 수 있는 곳. 언제나 감을 먹을 수 있는 카페. 모든 게 공짜. 다만 나처럼 돈을 내지 않는 사람에게만 공짜. 안 그런가요, 일라이저? 우리 아는 사이죠?”
슬라브족에다 메리, 폴, 일라이저까지……. 카페는 소금 내 풍기는 포구에 은밀히 자리한, 정체불명의 무국적 우화의 나라 같다.
“왠지 자식이라도 잃은 사람 같아. 그래서 지은 거잖아요, 내가. 일라이저.”
“그 감, 깎아 드릴까요?”
메리가 슬라브족의 말을 끊으며 묻는다. 메리는 여자의 눈치를 살핀다.
“감은 껍질째 먹어야 제맛. 거 왜 있잖아요. 유일한 통나무집이잖아요, 그 집. 이 마을에서. 거기 묵고 있잖아요. 엉클 톰스 캐빈 같은. 그래서…….”
“요즘 뭐 한다고 했어요? 응? 그 말 좀 해 봐요.”
슬라브족에게 폴이 서둘러 묻는다. 메리와 폴은 여자의 심기를 충분히 가늠한 듯하다. 삼십 대 중반인 그들은 초췌한 여자와 허랑한 슬라브족 때문에 더 젊고 빛나 보인다.
“요즘? 아, 한번 다시 일어서 보려구요. 다시 한번 시작해 보려구요. 뭘 할지 막막해서요. 자격증이나 뭐 그런 거라도. 그래서 화약취급기능사, 그거 준비해요. 열심히 해요. 잘 부탁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 참. 10월이잖아요, 지금.”
폴이 하하, 웃는다. 메리가 여자에게 커피를 건넨다. 주문하지 않았어도 메리는 여자가 무얼 마실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서양인 젊은 남녀 말이에요…….”
슬라브족이 정색하고 물으려 한다.
“자격증 시험은 언제 있다고 했죠?”
폴이 얼른 되묻는다.
“왜 못 잊는 거죠?”
“아이 참. 또 그 얘기.”
“알던 사람들도 아니었으면서.”
“안 잊는 거라 했잖아요.”
폴이 허허, 웃는다.
“뭐가 달라? 안 잊는 거나 못 잊는 거나.”
“다르……죠. 허허.”
“뭐가 다른지 말 안 해 줬잖아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메리와 폴과 슬라브족이 여자를 주시한다. 잠시 적막이 감돈다. 바깥 정류장 사내의 성근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사내는 혼자서 뭐라 뭐라 외치며 한 손으로 허공을 휘젓는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통유리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던 여자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먼바다의 수면이 점점 부푼다. 사내 혼자 바람을 이기려는 듯 허공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갈매기가 사내의 머리 위를 어지러이 선회한다. 나는 사내의 이름을 허공이라 짓는다. 카페 안엔 슬라브족과 메리와 폴의 알 수 없는 대화와 웃음이 엉긴다. 여자는 방 밖에도 방 안에도 있을 수 없는 걸까. 얼어붙은 채, 이곳에서, 나는,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 준엄하게 묻는 듯하다. 허공이 허공에 삿대질한다.
“드실래요?”
슬라브족이 여자의 뒷머리로 감을 불쑥 내민다. 고개를 돌린 여자가 얼결에 주저앉는다. 감을 쥔 슬라브족의 때 낀 손과 손톱이 한동안 허공에 머문다. 여자는 까무룩 눈을 감는다. 감 빛깔이 곱다.
*
바로 그 자리야. 삼 일 전, 허공이 허공에 혼자 소리 지르던 버스 정류장 나무의자.
여자와 슬라브족이 나무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포구 사람들은 그렇게 착한 초등학생처럼 나무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더러는 서서 기다리고 더러는 정류장 주변을 하릴없이 서성거리기도 하지만, 끝내는 의자에 앉고 만다. 정류장마다 버스배차시간표가 빠짐없이 붙어 있으나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
잠깐 바람이 멈추었다. 하늘과 바다가 푸르다. 정류장 팻말, 나무의자에 앉은 두 사람, 후박나무 가로수, 흰 건물들 모두 작고 고즈넉해 보인다.
슬라브족 겨드랑이에 ‘화약류 취급기능사 최신판’이라는 책이 끼워져 있다. 맨발에 플라스틱 샌들. 발등이 검게 탔다. 이따금 다리를 떤다. 햇살이 두 사람의 등을 비춘다. 나무의자엔 두 사람뿐이다. 여자는 흰 양말에 흰 운동화다.
“안 잊었어요.”
슬라브족이 중얼거린다.
“미안했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감이요. 감이 맛있었거든요. 정말. 삼 일 전 저 카페에서 말예요. 미안했어요. 안 잊었어요.”
그의 말대로 삼 일 전 일이다.
그동안 송화자가 이곳 통나무집을 다녀갔다.
카페 통유리 안의 메리와 폴이 흐릿하다.
슬라브족과 여자는 각각 버스를 기다린다.
“맛있는 걸 혼자 어떻게 먹어요. 맛있는 건 나눠 먹어요. 해리도 언제나 그랬어요. 해리는 팔려갔어요. 외국으로. 벨기에로. 네 살이었어요. 네 살이었는데도 나눠 먹는 걸 알았죠. 다 내 잘못이죠. 일라이저도 해리도, 내가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어요. 내가 지켜야 하는 건데. 정말 죽고만 싶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아파요. 다 떠났으니까요. 해리도 일라이저도 볼 수 없어요. 내 탓이에요. 나는 외롭고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죽을 거 같아요. 손톱깎이 있나요?”
슬라브족이 손 거스러미를 앞니로 뜯는다.
다리를 떤다.
“도화선 만지다 보면 손이 이 모양이 돼요. 돈을 벌면 해리와 일라이저를 찾아올 수 있을까……. 아, 셸비를 원망할 수도 없고. 정말 미치, 미치겠어요. 닭도리탕 좋아해요?”
여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닭도리탕 좋아해요?”
하늘이 수평선 쪽부터 다시 흐리기 시작한다.
“잘하는 델 알아요.”
여자는 슬라브족의 책에 하릴없는 눈길을 던진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화약이 위험한 것만은 아니에요.”
조금씩 바람이 인다.
“거대한 바위를 자로 잰 듯 자르죠. 폭발물이라고 모든 걸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건 아니에요. 칼로 두부를 자르듯 정확하게 돌을 잘라요. 정확하게. 그 집 닭도리탕을 꼭 권하고 싶어요. 제가 사드릴 수도 있고요. 뭘 좀 많이 드셔야 할 것 같아. 일테면 닭도리탕 같은.”
빗방울 하나가 여자의 무릎에 떨어진다.
“직선으로만 자르는 게 아니에요. 원형, 삼각형, 아치, 별모양으로도 바위를 도려내요. 아, 정말 다이너마이트는 멋져. 장약 조절에 따라 폭발의 크기와 방향이 결정되는 거예요. 거칠게 떼어낼 건 거칠게, 정밀하게 파낼 곳은 정밀하게. 화약만으로도 조각 작품이 가능하다면 믿으시겠어요? 자유의 여신상 정도는 순전히 화약만으로도 조각할 수 있다는 거. 그런 폭발 조각 예술을 해리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수만 관중 앞에서 거대한 사각 석재가 순식간에 아리따운 일라이저로 변신하는 광경을 말이죠. 콰광쾅. 그러고 나면, 뿌연 돌가루 안개가 걷히고 일라이저의 아름다운 미소가 드러나는 거예요.”
슬라브족 발등에도 빗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냥 하고 그냥 듣고 그러는 게 아니잖아요. 그대 없이 못 산다는 말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사랑은 책임이나 의무나 양심이나 가책 같은 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그 사람이 없으면 정말 살 수 없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닌가요? 일라이저와 해리 없이 저는 정말 못 살아요. 살아 보려 애쓰며 자격증 따면 뭐 해요. 이러고 있잖아요. 해리 앞에서 일라이저 조각하는 꿈만 꾸잖아요. 꿈만. 현실에서 그러지 못한다면 다 소용없는 게 될 거잖아요. 그러니까 닭도리탕…….”
바람이 몰려올 기세다.
“더 수척해지기 전에 뭘 좀 많이 드셔야 할 것 같아요. 단백질로다. 가진 돈은 없지만 그것 사 들릴 수 있어요. 사 드리면 제 맘이 좋을 것 같은데. 기쁠 것 같아요.”
슬라브족이 머리를 긁적이며 크흐, 웃는다.
“시내 가시는 것 같은데……들를까요, 거기?”
빗방울이 굵어진다.
“들를까요?”
여자가 일어선다. 아무도 없는 나무의자에 오랫동안 혼자 앉아 있다 일어서는 사람처럼.
“저 좀 봐 줘요."
여자는 묵묵히 길을 건너, 카페 메리 앤 폴을 지나쳐,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통나무집이 보인다. 정류장의 슬라브족은 머리 위로 책을 들어 비를 가린다.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 사이 버스가 오고, 버스가 떠난다.
슬라브족이 정류장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여자는 알지 못한다. 그에게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도. 통나무집을 향할 뿐이다. 여자가 그에게 뭔가를 물었다면 나는 슬라브족을 좀 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허황한 그의 속내를.
온비의 말은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 대신 물어줘야 한다. 여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슬라브족의 사정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빗방울이 파밭에 떨어진다.
파밭에 비 떨어져요.
듣지 못할 줄 알면서도 나는 여자의 귀에다 소리친다. 파밭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왜 들으라고 했는지, 듣고 보니 알겠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파밭에 비 떨어지는 소리도 그런 것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파밭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특별해서라기보다는, 그런 게 있다고 큰 여의 여주인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말로 할 순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어떤 것.
숙제였잖아요! 다시 외쳤으나 여자는 내쳐 걷기만 한다. 나는 그녀의 어깨 위에서 힘껏 발을 구른다. 여자는 한 차례 자신의 어깨를 슬쩍 쓰다듬었을 뿐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작은 이물감에 지나지 않을 내 발버둥. 그 정도 능력으론 그녀를 흔들 수도 멈출 수도 돌려놓을 수도 없다. 여자는 무겁다.
무거운 것에 눌려 여자는 무거워졌다. 그 어떤 무게도 그것보다 무겁지 않다는 느낌. 이 느낌은 여자의 것일까 내 것일까. 파밭에 비가 떨어질 뿐이다.
무거움의 정체를, 충분히는 아니더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송화자가 이곳에 다녀갔다.
자기 몸뚱이만 한 낡고 검은 첼로케이스를 들고 나타났다. 끙끙거리며 옮기는데도 여자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송화자가 첼로케이스를 대바구니 의자 곁에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첼로케이스는 전날 카페 메리 앤 폴에서 얼결에 주저앉아 까무룩 눈 감던 여자처럼, 스르륵 방바닥으로 쓰러져 누웠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것이 여자의 물건이라는 것을. 낡고 검은 첼로케이스가 여자의 그늘을 닮았다는 것을.
“씨, 여기까지 갖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네.”
송화자는 갑갑하다며 나무 창문을 열어젖혔다. 수선을 피웠으나 여자는 반대편 벽에 꼼짝 않고 서서, 응시와 회피가 교차하는 눈빛으로 첼로케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그건……왜 가져와?”
“연주, 다시는 안 하겠다는 말, 백번도 더 들어 알아. 잘 알아. 착각 마. 연주하란 말 아니야. 니 물건이니까 니가 쫌 관리하라는 거지. 내 집도 좁아 죽겠어. 아유, 뭐 마실 거 좀 없냐?”
통화 때의 말투 그대로였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상대에게 쓰는 어투란 저런 거겠지. 나는 송화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는 전혀 딴판의 친구 하나쯤 아주 가까이 두게 마련일까.
여자에게도 송화자 같은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극과 극이 만나는 이치나 원리 따위 알 수 없을 때 나는 신기하다고 말해 버린다. 둘을 보고 있으면 순간순간이 신기했다.
송화자는 말하고 여자는 들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걷고 쉬고 웃으며 송화자는 이틀 내내 말했고 여자는 들었다. 여자를 데리고 송화자는 여러 곳을 들르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말을 했다. 메리 앤 폴과 큰 여는 물론 포구의 어전과 경매장과 공판장을 다니며 사람들과 떠들었다. 구면인 사람들을 모아 회를 사고 소주를 먹였다. 섣불리 여자에게 말 붙이지 못했던 포구 사람들이, 송화자와 함께인 여자에겐 농을 던지며 웃었다. 감옥에라도 갔다 온 사람 같잖아요, 깔깔. 여자는 입만 웃었다. 외국 생활 오래 해서 그래요. 송화자가 받았다.
송화자가 떠난 뒤 여자는 이틀간 열어놓았던 나무 창문을 닫았다. 닫히기 직전, 건너편 건물 이 층 복도에서 슬라브족이 손을 들어 올렸다. 묵례를 잊는 법이 없으니까. 창문이 닫히면서 그의 모습이 지워졌다. 한낮인데도 방은 밤처럼 어두웠다. 여자도 함께 지워졌다. 남은 어둠이 고스란히 무거웠다.
여자는 첼리스트였다. 캐나다에서 12년간 유학했다. 송화자는 여자의 거의 모든 것을 알았다. 아는 것은 여자에게 묻지 않았으므로, 나는 여자의 많은 것을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예술대학에서 강의하며, 순회공연 식으로 종종 지자체 시향과 협연했다. 송화자의 말을 앞뒤로 짜깁기하고 짐작을 섞으면 여자의 이전 모습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전혀 모를 것도 궁금한 것도 많았다.
“천 번째였다니, 너무했어. 너나 그나.”
송화자의 이 말을 나는 이해했다. 천 번째……. 여자의 남편이 여자의 이런저런 물음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기를 천 번째였다는 뜻이다. 천 번째 되던 날 여자가 남편의 뒤통수를 쟁반으로 가격했다. 그냥 천 번이 아니라 연속된 천 번이었다. 여자의 남편은 여자가 천 번을 물을 동안 단 한 차례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 천 번을 빠짐없이 기억했고, 천 번째가 되기까지 3년이 걸렸다. 천 번째 되는 날 플라스틱 쟁반이 두 동강 났다. 머리통은 멀쩡했다. 남편은 놀라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이유를 묻거나 비웃지도 않았다. 집안에 있던 딸아이마저 무슨 일로 쟁반이 부서졌는지 알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천 번째 되던 날도 여자의 가정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여자가 남편에게 무얼 물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었다. 천 번 다 같은 질문이었을까 다른 질문이었을까. 남편은 어째서 대답하지 않았을까. 같은 질문을 천 번 반복할 만큼 집요한 여자라면 과연 3년을 기다려 가격했을까. 특정 질문과 대답 말고 일상 대화는 하고 살던 부부였을까. 송화자는 다 알겠지만, 나는 몰랐다.
승용차에 어떤 이상이 있었는지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정비소 직원이 차량의 문제를 지적했는데도 차일피일 수리를 미뤘던 여자의 의중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여자의 남편은 일터인 대학병원까지 왕복 90분을 건강 속보로 출퇴근했다. 승용차 관리와 운전은 여자 몫이었다. 남편이 신장 175센티미터에 체중 68.5킬로그램의 건강한 내과의였다는 사실은 알면서, 어째서 그가 평일 오후에 차를 몰고 갑자기 용인에 가려 했던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송화자가 나 대신 물어 줄 리 없었다. 승용차는 가드레일을 받고 20미터 비탈로 굴러떨어지며 전소했다.
“거서 누가 돈 대준다캤나 보제?”
용인에 가려 했던 이유를 유일하게 짐작했던 건 여자의 어머니였다. 결혼 직후부터 개업하려 애쓰는 사위가 여자의 어머니는 탐탁지 않았다. 갱험도 돈도 쥐뿔 없시민서……. 못 미더운 마음은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재산이라면 병원 네댓쯤 가능했다. 구겨진 채 불에 탄 승용차가 발견되자 여자의 어머니는 탄식했다. 거서 누가 돈 대준다캤나 보제?
유일한 짐작이면서 유일한 자격지심이었다. 가족과 이웃이 보기엔 그랬다. 여자의 비밀은 어머니의 탄식에 묻혔다.
“그때, 너 대전이랬었니?”
“……응.”
여자와 송화자는 나란히 한 침대에 누웠다. 새벽 네 시까지 그들은 자지 않았다. 송화자가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별들이 쏟아졌다. 창문은 바람에 닫히고 바람에 열렸다.
“연주 대기 중이었던 거야?”
“……응.”
통화 때처럼, 송화자는 말했고 여자는 응, 응, 거렸다.
“마침 애 아빠한테서 용인 다녀오겠다는 전화 왔었다면서. 왜 차에 이상이 있다고 말 안 했던 거야? 이미 출발해 버려서?”
“아니.”
“그럼?”
“몰라.”
“몰라?”
“그냥…….”
“그냥 뭐?”
“말하고 싶지 않았어.”
“그랬……구나.”
송화자도 여자에 대해, 아니 사건에 대해 다는 몰랐다. 송화자답지 않게 조심스러워 했다. 네 시가 넘자 송화자가 말했다.
“저 좀 봐. 별들이 되게 징그럽다. 자자.”
여자는 창문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는 여자를, 방안의 어둠이 무겁게 짓눌렀다. 낮이든 밤이든 여자는 방안의 어둠으로 기어이 무거워졌다.
그날 대전 연주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연주회가 끝나고 여자는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사고 소식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경찰이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했고, 사고 현장과 시신이 안치될 병원의 위치를 물었다. 병원으로 옮길지 과학수사연구원으로 옮길지는 현장 수습이 끝나야 알 수 있다는 응답이 돌아왔다. 여자는 다이어리를 꺼내 지도를 펼쳤다. 용인 인근의 한 지점에 천천히 동그라미를 쳤다.
남편이 이상 있는 차를 몰던 중에 여자는 연주에 몰두했다. 한 치의 실수 없이 협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과실치사. 경찰의 전화를 받고 여자가 염두에 두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법정에서 달리 진술했다. 고의와 과실의 중간영역인 ‘인식 있는 과실’ 따위를 포기하고, 스스로 살인죄와 그에 해당하는 형량을 받겠다고 했다. 모든 잘못은 저에게 있으니까요…….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짐한 거였다. 돌아오던 길에 걸려온 또 한통의 경찰 전화를 받고서.
사고 차량 안에 시신 한 구가 더 있었다. 여자의 딸이었다.
방과후였기는 하지만, 중학생 딸이 그 시각에 어째서 아빠와 함께 지방도시로 향하고 있었던 건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왜 남편은 딸아이와 함께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고 있는 두 사람, 남편과 딸은 새카만 재 덩이가 되었다.
남편과 딸을 죽인 죄인으로 여자는 자신을 고발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뒤로도 고발은 그녀 안에서 지속되었다. 무거움의 이유가 그것이라고 짐작되는 순간, 그 어떤 무게도 그것보다 무겁지 않다는 느낌의 정체를 알게 됐다. 이 느낌이 여자의 것일까 내 것일까 궁금했으나, 내 것은 아니었다. 온비의 감정의 진폭은 인간보다 터무니없이 좁다. 옅고 지속력이 없어 순식간에 바래 버린다. 무거움과 무거움의 느낌 모두 여자의 것이다.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여자가 말했다. 여기 이 포구 어떠냐는 송화자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송화자가 승용차 트렁크에 여행 가방을 넣고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나, 간다.”
“응.”
“언제든 연락해. 또 올게.”
“혼자 있을 수 있어.”
“이상한 사람 많다며?”
“있을 수 있어.”
“하기야……이 포구에 이상한 사람 하나 더한 거니까. 너도 만만치 않잖아.”
“망할 것.”
“어쭈, 제법인데……. 니 입에서 그런 말 나오는 거 보니 사람 꼴 돼 가는 것 같다. 진작 애 아빠한테도 그럴 것이지.”
“그게……혼자서 되는 일이었을까?”
송화자가 왼손을 들어 흔들었다.
“간다.”
“응.”
송화자는 떠났고 여자는 남았다.
이번엔 허공과 함께잖아. 정수리 훤한 아저씨.
정류장 긴 나무의자에 앉아 여자가 버스를 기다린다. 오 일 전에는 슬라브족과 함께였던 자리. 이번에는 허공이다. 허공은 여자와 나란히 앉지 않고 정류장 팻말 주변을 서성거린다. 여자의 카디건 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인다. 날은 잔뜩 흐렸다. 여자는 오 일 만에 통나무집을 나왔다.
전과 달리 허공은 삿대질 대신 턱으로 허공을 젓는다. 외치지 않고 중얼거린다. 바지 주머니 깊숙이 두 손을 찔러 넣고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쉴 새 없이 말한다. 여자가 말했던, 이상한 사람 중 하나. 여자의 카디건이 펄럭일 때마다 허공의 성근 머리카락이 회오리친다. 몸이 작고 왜소하다. 추운 듯 목을 움츠린다. 여자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 뒤의 바다가, 검게 끓어 넘친다.
“저것이 원래 도요지 도요. 도요야. 날개 길고 꽁지 짧은 게 도요지 뭐. 도요야. 오고 가는 나그네새인데 안 가지. 저건. 그냥 겨울새지 뭐. 그러다가 사시사철 있는 거지. 그래서 갈매기지. 괭이갈매기…….”
‘저것이’라고 하면서 허공은 그것을 보고 있지 않다.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땅을 보고 힐끗 여자를 보고 지나가는 자동차와 바람에 흔들리는 후박나무를 어지러이, 둘레둘레 바라볼 뿐이다. 이것을 보는가 싶으면 저것을 보고, 저것을 보는가 싶으면 어느새 이것을 본다. 허공의 눈동자는 정지하는 법이 없다. 어떤 대상에게든 그의 눈길은 영점 일 초 이상 머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허공은 여자와 한 번도 눈을 마주친 적이 없다.
“우는 소리가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괭이 괭이 닮아서 괭이갈매기. 고양이 소린가? 익숙한 소리를 갖다 붙인 것뿐이지. 고양이 소리긴. 그냥 저 갈매기 소리지. 고기 잘 찾아서 어부들한테 도움이 되더만, 이젠 과자 맛 알아서. 에이, 바다에 안 나가. 쓸데없어. 지나가는 아기 과자나 뺏어 먹고. 쓰레기나 뒤지고…….”
여자는 휴대전화를 열어 시각을 확인한다. 고개를 빼고 길 끝을 바라본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눈을 찌른다.
오 일 동안 여자는 통나무집에서 시금치나물을 데쳐 먹고, 자고, 송화자가 두고 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몇 장 읽었다. 책 표지에는 이슬라 네그라 자택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네루다 사진이 실려 있었다. 여자는 첼로케이스를 열었다가 닫고, 열었다가 닫았다. 식료품이 떨어졌다.
“고양이는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안 돼. 불행이 닥쳐. 데본렉스, 라가머핀, 버미즈, 봄베이, 샤투르스, 스핑크스, 소말리, 싱가퓨라, 자바니즈, 코렉, 이그저틱, 터키시반. 고양이가 시체를 뛰어넘으면 시체가 움직여. 시체를 뛰어넘게 하려고 해도, 살리려고 해도 시체가 없어졌는걸. 찢기고 흩어졌는걸 뭐 다. 가루처럼. 괭이는 고양이의 준말. 곤충, 새, 설치류를 먹어. 먹는 게 갈매기와 똑같아. 그래서 괭이갈매기인지도 몰라. 고양이는 갈매기처럼 살찌고 갈매기는 고양이처럼 살이 쪄. 콰광쾅. 폭발 소리 들리고 나서 더 쪘다구. 분명 더. 파인솔, 데톨, 헥사클로로펜 같은 페놀 세정제는 정말 고양이에게 치명적이야…….”
문득 여자가 허공에게 묻는다.
“버스 지나간 지 오래됐나요?”
누군가에게 먼저 묻기는 처음이다. 맥락 없기는 해도 허공의 기억과 지식에는 단편적인 정확성이 있다. 그걸 믿고 물었을까.
“부동액은 한 숟갈만 먹어도 즉사야.”
허공은 힐끗 여자를 바라봤을 뿐이다.
“버스 지나가는 거 못 봤어요?”
다시 여자가 묻는다.
“갈매기는 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4막 희곡이지. 갈매기.”
허공은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다. 말도 눈길도 주고받을 수 없는 사람. 어쩌면 여자는 그래서 허공에게 말 붙일 엄두를 냈는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오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 때문에.
오갈 수 있는 사람과는 여자 쪽에서 침묵하거나, 짧게 응대할 뿐이다. 거의 모든 말을 송화자가 했고 여자는 응, 응 거렸다.
나, 간다.
응.
송화자가 가고 난 하루 뒤 여자는 첼로케이스를 열었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몇 번을 망설였던 만큼 케이스를 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고, 조심스러웠던 만큼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에 놀랐다.
악보 몇 장과 약음기와 정제수지 따위에 놀랄 여자가 아니었다. 여자는 첼리스트였다. 숨을 멈춘 채 바닥으로 쏟아진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그러다 집어 든 것이 사진이었다. 희미한 빛에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간신히 드러났다. 아이는 백목련 아래서 활짝 웃고 있었다.
음, 그렇게 된 거였군.
여자아이는, 나였다. 여자는 내 어머니였다. 그리된 거였다. 감회가 없을 수 없겠으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온비였다. 그리된 거였어……. 나는 여자에게로 폴짝 뛰어올라 툭툭 어깨를 쳤다. 여자가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나의 존재감이란 그 정도였다.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나 정한도 그만큼이었다. 새삼스레 엄마라 고쳐 불러지지 않았다. 모든 온비는 자기연민에서 멀어져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온비의 세상에선 자기연민에 가까운 말이 르상이다. 그걸 불필요한 감정으로 여기는 이유도 모르겠다.
여자는 오 일 동안 첼로케이스를 열었다 닫고 열었다 닫았다. 아주 활짝 열지는 않고 한 뼘쯤. 열 때는 느렸고 닫을 때는 창문 닫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냉장고의 식료품들을 꺼내 조금씩 데쳐 먹었다. 바람 불 때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바람 불지 않을 때는 시금치 씹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했다. 냉장고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여자는 식료품을 사러 나섰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허공이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며 탄식한다.
“어이쿠.”
성근 머리카락이 회오리친다. 뭔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표정. 그의 눈길이 여자에게 영 점 일 초 머물고 흩어진다.
“아 참 저 손끝, 손등. 모습. 아이쿠야. 맞아.”
자신의 말을 여자가 듣고 있다는 걸 허공은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저, 저, 첼로.”
여자의 귀가 뻣뻣해진다.
“코다이 무반주 첼로 소나타 8번이었든가, 작품 8번? 실내 수영장 다이빙대에서 연주했던. 유명했던 그 2005년 8월 7일 연주 실황 동영상. 아이쿠. 내가 여기서 첼로, 첼리스트를. 맞나? 맞을까. 아이쿠야. 갈매기.”
쉴 새 없이 움직여 들여다볼 순 없지만, 허공의 까만 눈동자는 어둡고 한없이 깊어 나 같은 온비쯤 통째로 빨려들 것 같다. 여자의 귀가 붉어진다.
“외부 기온 섭씨 32도. 엠비시 문화산책. 그날 실내 수영장 수온을 4도쯤 낮춘 훌륭한 연주. 시원하게.”
허공은 생각나는 대로 쏟아 놓는다. 그런 사람이다. 그럴 때 함께 터져 나오는 정확성에 여자는 진저리친다.
“절……알아요?”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어딘가 화난 듯 묻는다.
“섭씨는 셀시우스 온도체계. 셀시우스의 중국어 음역이 섭이사라서 섭씨.”
“절……아냐구요?”
화나서라기보다는, 어딘가 두려운 듯 묻는다.
“화씨는 화렌하이트 온도체계. 화렌하이트는 화륜해라서 화씨.”
여자가 벌떡 일어선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식료품은 떨어졌다. 큰 여로 향한다.
큰 여에서, 여자는 보말미역국에 쌀밥을 말아 배불리 먹었다.
큰 여의 여주인은 그다지 수다스럽지 않았다.
여자의 식탁에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바람이 불었고, 고양이만 한 갈매기들이 식당 큰 창문 유리로 떼 지어 날아왔다 날아갔다. 여자는 지금 통나무집 숙소로 향하는 중이다.
조금씩 비가 내린다. 허공은 여전히 정류장 팻말을 맴돌며 허공에다 말을 쏟는다. 카페 메리 앤 폴 앞에서 여자는 메리와 폴과 마주친다. 두 사람 모두 노란 우비 차림이다.
“큰 여에 다녀오세요?”
메리가 묻는다. 메리도 폴도 침울하다.
“네.”
여자가 두 사람을 살핀다. 메리는 흰 국화 몇 송이와 종이컵을, 폴은 양초와 매트리스와 종류를 알 수 없는 술병을 들었다. 메리가 고개를, 주억거린 뒤, 말한다.
“네, 그래요. 역시……안 잊으려는 거죠.”
그러면서 잠시 머뭇거린다.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메리의 그 말을 나는 들었으나 여자는 듣지 못한다. 메리는 머뭇거렸을 뿐이니까.
“그럼……다녀오세요.”
여자가 먼저 발길을 돌린다. 메리와 폴이 어디를 가려는 건지 여자는 아는 걸까.
“출입통제가 오늘 풀렸다고 해서요…….”
메리가 중얼거리고 폴과 함께 정류장 쪽으로 향한다. 여자가 통나무집에 가까워지자 비가 조금 더 굵어진다. 메리와 폴은 도라곶에 가는 것이다.
아까, 큰 여의 여주인이 물었다.
“접안시설 발파현장에서 멀지 않댔죠?”
그녀의 남편이 대답했다.
“도라곶이라잖아. 공사장에서 오백 미터쯤 될걸. 그래서 다들 공사장에서 나는 폭음인 줄 알았다잖아.”
여자는 보말미역국에 흰 쌀밥을 말아먹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거겠죠? 얼른 눈치 못 채게.”
“아주 정교하고 세밀했다나 봐. 기술이. 살점은 가루처럼 흩어져서 갈매기들이 다 먹고, 뼈 몇 개만 남았는데 그것조차 씻은 듯 깨끗했다더라구. 그만큼 정밀했던 거겠지. 기술이.”
“어떻게 알았대요, 그 사람인 줄은?”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밥 한 그릇만 더 주시겠어요?”
여주인이 여자에게 밥공기를 가져다 놓았다.
“책이 있었다지 아마. 자격증 수험서인가…….”
여자는 남은 미역국에다 밥 반 공기를 덜어 넣었다.
“힘들긴 힘들었었나 봐요. 근데 책은 어떻게 온전했을까?”
“질기니까, 책은……. 그 사람, 그 정도까지인 줄 몰랐던 내가 부끄럽네.”
도라곶이에요, 도라곶.
메리와 폴이 가는 곳. 끝내 안 잊으려, 애도하러 가는 곳. 나는 여자의 귀에다 소리친다.
들렸던 걸까. 깨달은 걸까. 여자가 걸음을 멈춘다. 정류장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정류장에는 메리도 폴도 허공도 없다. 살찐 갈매기들이 정류장 팻말 위를 사납게 선회할 뿐이다.
“도, 라, 곶.”
여자가 낮게, 바람처럼 뱉는다. 한동안 서서 아무도 없는 정류장을 바라본다.
움직임을 멈춘 채 숨만 들이켜다 고개를 돌린다. 통나무집을 향해 발을 뗀다. 늘 그렇듯, 개개의 동작들이 두 박자쯤 사이를 두고 이어진다. 슬라브족의 사정 따위는 여자를 끝내 흔들 수도 멈출 수도 돌려놓을 수도 없는 걸까. 하기야 그만큼 여자에겐 무거운 것이 있으니까. 그보다 무거운 게 없다면 없겠으니까. 여자의 무거움이란 그런 거니까.
파밭에 계속 비가 떨어진다. 숙제라니까요! 여자는 듣지 못한다. 느리게 걸어 통나무집에 당도한다. 징검다리처럼 놓인 편마암을 밟으며 갯잔디 소복한 마당을 가로지른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어둔 방에 여자 혼자다. 여자의 눈길이 창문에 머문다. 주먹 하나 드나들 만큼 벌어져 있다. 언제나 닫지만 언제나 열리는 문. 여자가 두어 걸음 창 쪽으로 움직인다. 방바닥에 여자의 양말 스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
여자가 창으로 손을 뻗는다. 그늘 걷히지 않는 창백한 손.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나무 창문 좌우 걸쇠를 쥔다. 창문이 밀려 조금 더 열린다.
슬라브집이 건너다보인다. 감을 던지면 받아먹을 수 있는 거리.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은 어두운 하늘이 옥상에 닿는다. 이 층 복도엔 아무도 없다. 이쪽을 바라보고 웃던 남자의 손짓은 이제 잔영일 뿐이다. 여자가 창문을 당겨 닫으려 한다.
제발, 엄마.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저를, 그 일을, 잊지 않으려 한다면 모를까, 잊지 못하는 건 바라지 않아요. 파밭에 비 떨어지는 소리도, 안 듣는 게 아니라 못 듣는 거잖아요. 그러니 닫지 마세요. 적어도 하루쯤은 열어두세요. 저 빈 복도나마 봐 주세요.
여자가 걸쇠를 잠근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여자의 어깨에서 발을 구르고 구른다. 제발. 제발. 제발.
여자는 손을 들어 어깨를 한 번 쓰다듬는다. 온비의 능력은, 그 정도다. 깜깜하다. 여자는 오늘도 어둔 방이 된다. 그 방은 무겁다.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건 그러나 여자의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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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슬라브 지붕 아래 사는 남자 슬라브족 ㅋㅋㅋ
슬라브족은 얼굴색이 붉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인물, 슬라브족이 누구였는지 궁금해집니다.
슬라브족은 외로운 사람. 구효서의 잡설 사족 시작.
너무나 가여운 여자. 자신을 용서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의도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
너무나 가여운데, 더 가여운 것은 자신보다 혹은 자신처럼 외로운 사람을 보지 못한다는 것.
온비? 발음이 예쁜 말인데, 좀비의 상의어인가요? 예쁜 귀신을 말한다면 공연히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 '아랑사또전'이 생각납니다. "잊지 않으려 한다면 모를까, 잊지 못하는 건 바라지 않아요.'"온비의 이 말 한 마디에 소설의 모든 것이 함축됩니다.
노을님! 선생님은 온면을 드십니다.
맞아요 좀비의 상의어. 내가 이 소설만을 위해 만든 말. 그리고 메리 앤 폴은 무언가를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 여자는 무언가를 잊지 못하는 사람. 메리 앤 폴은 타인 중심. 여자는 자기 중심. 사족 작열.
좋은 소설이었어요.(제가 이런 말 해도 되나요? ㅋㅋ)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 외로움에 사무친 사람들... 그녀, 슬라브족, 허공.... 슬라브족은 스스로 폭발해버렸네요. 마음이 폭발했던 그녀처럼... '메리 앤 폴,에선 여고시절 듣던 팝송의 싱어 '피터 폴 앤 메리'가 생각났어요. ㅋㅋ 전 연상작용이 너무 심한 사람이라.... 구샘의 소설은 읽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됩니다요.
'구샘의 소설은 읽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됩니다요.'
노을님 생각에 한 표 꾹!
심지어 소설을 모르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공부가 됩니다.^^
온비. 큰여. 소설 속 이름들도 제 개인적으로는 매력적으로 보이는.ㅋ
피터 폴 앤 메리는 소설가 박민규님의 소설 제목이랑도 같음.
(1960~1970년대 미국을 무대로 밥벌이로써의 포르노와 돈에 대한 이야기라던데 읽지는 못했어요)
<저 좀 봐 주요>를 필사하면 훨 더 공부가 될까요?
시조 공부하던 친구가 자주 필사하던 모습이 생각나서리.
소설이 아니라 단편 영화를 본 것 같은.
아, 정말. 파밭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는 어떨까?
파밭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네요.
여자는 주인공인데 이름도 없어요.
그치만 이름도 거추장스러울 것같아 이름 없음이 차라리 자연스러운 여자!
6월이었으면 제법 더운 때였는데.
창문을 열어제끼는 계절에 한사코 창문을 닫는 여자를 쓰셨군요.
온비, 생소한 단어예요. 은비.금비.단비......온비는 처음.^^
나는 알것 같아요. 파의 공간을 때리는 비소리는 연주나 다름없죠.
맞아요. 한사코 창문을 닫는 여자를 쓰고 싶었어요. 바람이 그걸 열어도 자꾸 닫기만 하는 여자. 그런 사람이 슬라브족의 처참한 외로움을 알까요.
가족이 서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네요. 어둔 방에서 빨리 빠져나오게 되길...
어둔 방에서 빠져나오는 법: 문을 열고 남의 어둠을 들여다 보는 것.
네!!!
허공을 부유하는 온비. 주인공의 중학생 딸이 온비?? 나두 온비가 되고파~
부부는 죽어서도 엮여. a..e..c
온비가 되고 싶다고라고라고라? 온비가 되면 나이 안 먹게 되니까? ㅋ.
온비가 되면 시공을 초월해서 자유롭잖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