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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양식, 만나(출 16:1-31)
인간은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만족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존재입니다.
자기 만족을 채우고자 하는 속성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불만족스러운 환경을 만나게 되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원망하는 반응”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원망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보다 현재가 못하다”라고 느낄 때,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을 것이 변변치 않은 현재의 광야 생활과 애굽에서의 풍족했던 과거 생활을 들먹이며,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들 마음 속에, 분명히 하나님은 계셨지만, 또한, 원망도 그들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둘째는 “자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은 원망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해서, 어려움에 빠지면, 어떻게 변명해서라도, 그 상황을 잘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 반응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굶어 죽게 되는 상황에 놓인 이유가 모세와 아론 때문이라고 원망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곧바로 천국으로 올라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금방 들어갔다면, 아마 이런 원망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광야는 물도 없고, 풀도 없고, 나무 그늘도 전혀 없는 곳이었습니다.
먹을 양식도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열 번 이상 원망하는 죄를 범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아홉 번씩이나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열 번째 원망에 대해서는 참으시지 않고, 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민 14:21-2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번째 원망할 때에, 두 가지 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는,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재앙으로 쓰러져 죽는 벌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스물 살 이상 된 사람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죽는 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처한 환경을 바라보면서, 원망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은 그 원망이 죄가 아니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망이 죄임을 깨닫고, 그들이 돌아서기를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원망은 지푸라기를 지고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의 소리를 들으시면서도 하늘을 열어서 새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어찌 보면, 참 속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많은 원망과 불신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언제나 내려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다고 원망했으며, 먹을 양식이 없다고,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과 불만을 토했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원망의 소리를 들으시자, 원망에 대한 심판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 양식을 내려 주심으로, 그들이 배부르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78:24절을 보면,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라고 했으며, 시편 105:40절을 보면,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늘 양식으로 배부르게 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먹을 양식이 필요함을 알고, 이미 주시기로, 계획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려 40년 동안이나 만나라는 특별한 양식을 내려 주시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힘을 얻어,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만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려 주신 신령한 양식인 만나란 어떤 것입니까?
첫째,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스러운 양식입니다.
“만나”란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전 처음, 이 특별한 양식을 보고,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 하늘 양식의 이름이 “만나”가 되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 주신 하늘의 신비한 양식이었습니다.
루터는 “만나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내려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만나에 대해서, 느헤미야는 “주의 만나”라고 했습니다.
시편 78:25절에서는 만나를 “권세 있는 자의 떡, 곧 천사의 떡”이라고 했으며, 시편 105:40절에서는 “하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나란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요 6: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음식”(고전 10:3)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신 8: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만나는 참으로 신비한 하늘 양식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도 먹어보지 못했던 신령한 하늘 양식이 바로 만나였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지나던 사람들은 여행길이라서, 곡식을 재배할 수도 없고, 잡아먹을 가축도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형편과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원망의 소리를 들으시면서도, 꼭 필요한 것이기에, 하늘 양식을 직접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분명히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인 신비스러운 양식이었습니다.
비와 같이 내릴 정도로 풍성하게 쏟아졌습니다.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간 매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40년간 먹은 기적의 양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님도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령한 양식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직접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원 얻을 인류가 먹어야 하는 하늘의 양식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살과 피를 인류의 양식으로 내어놓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요 6: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광야에서 새 힘을 받아서 올라갈 것입니다.
만나는 만들어지는 과정도 신비스러웠습니다.
밤에 이슬과 함께 만나가 내렸습니다.
고요한 밤에 대지를 적시는 이슬처럼 고요하게 임했습니다.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민 11:9)
13-14절 말씀입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아멘.
만나는 이슬이 마른 후에 나타났는데,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은 모습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맛도 꿀 섞은 과자처럼 달았다고 했습니다.
만나는 밤의 비와 같이, 이슬과 같이, 광야 지면에 내렸으며, 먹기에 좋았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만나는 정말로 신비스러운 양식이었습니다.
그 출처도 신비스럽고, 그 모양도 신비스럽고, 그 힘도, 작지만, 사막의 더위를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영양이 풍부하게 담긴 귀한 양식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려 주신 신령한 양식인 만나란 어떤 것입니까?
둘째, 만나는 매일 매일 거두어 먹는 그 날의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아멘.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스러운 것이었지만, 우리가 먹어야 하는 그 날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아침 시간마다 일어나 거두러 나가야만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한 달치가 한꺼번에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 주어지는 양식이었습니다.
더 많이 거둔 자나 덜 거둔 자나, 똑같이 자기 식량에 준하는 하루 양식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이상 거둔 만나에는 벌레가 생기고, 썩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아멘.
만나는 날마다 꼭 필요한 만큼 내려오기에, 그날 그날 나가야 되고, 거두어야 되는 하루 동안의 양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각 개인 개인의 식량대로, 더함도, 모자람도 없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양식이었습니다.
하루의 식량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매일 매일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출 16:8,12,18).
그래서 광야에서는 굶어서 죽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려 4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의 만나를 거두어야 합니다.
육의 양식, 영의 양식이 매일 매일 만나처럼, 내려지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이 원리를 붙들고 일어나, 나가기를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은 이 신비스러운 양식을 결코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 각 사람에게 알맞는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어나 나가서, 자기가 먹을 양식을 거두어야 합니다.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고, 오늘 주어지는 양식을 모아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하루 하루 주시는 신령한 하늘의 양식으로 풍요를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려 주신 신령한 양식인 만나란 어떤 것입니까?
셋째,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시험하고 훈련하는 도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그냥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먹는 만나를 통해서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만나를 거두는 것을 통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해 놓으신 규칙대로, 만나를 거두어 먹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훈련 시키셨습니다.
만나가 하늘로부터 매일 떨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이스라엘 가운데 임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항상 하나님이 정한 시간, 정한 장소, 정한 방법으로 우리가 행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매일 거두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각 사람에 맞게 한 오멜씩 거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더 거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덜 거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이상한 것은 저울에 달아보니, 다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남겨 놓았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아픔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두 배로 거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22-24). 그러시면서,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아서 그 다음날 아침까지 보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전에는 그 다음 날만 되면, 상하던 만나가 여섯째 날 거두었던 만나는 그 다음 날인 일곱째날 아침까지 전혀 상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일곱째날 거두러 나간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만나를 구경도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만나를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라는 신령한 양식을 통해서, 시험하며, 훈련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대로, 거두고 먹는 훈련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만나는 내려 주지 않으시지만, 지금도 또 다른 의미의 만나를 통해서, 우리를 훈련 시키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의 신령한 양식인 만나를 먹었던 것처럼, 우리는 영적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6일 동안만 일하고, 양식을 거두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육의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의 양식, 하늘의 양식도 필요합니다.
날마다 영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예배하는 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