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루이스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는 1898년 11월 29일에 영국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루이스의 어머니는 그가 열 살도 되기 전부터 그에게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쳤고 소설을 읽혔다. 루이스는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지역의 예비 학교를 거쳐 잉글랜드의 맬번칼리지에 1년간 다니다, 이후 옥스퍼드에 진학하려고 서리(Surrey)의 그레이트 부컴에 머물며 W. T. 커크패트릭에게 수학한다. 열여섯 살이던 그 시절 이미 그는 왕성한 독서가였고, 로맨틱한 이야기와 북유럽 신화에 매료되었으며, 헤어날 수 없는 기쁨의 신비에 사로잡혔고, 걷는 습관이 몸에 배었으며, 잉글랜드 시골의 정취를 즐길 줄 알았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루이스는 무신론자인 커크패트릭에게 배운 치밀한 논리력 덕분에 훗날 기독교로 방향을 바꾼다.
열아홉 번째 생일을 루이스는 프랑스 최전선에 있는 참호에 도착하며 맞이한다. 그는 소머셋 경보병대 소위로 제1차 세계대전을 현장에서 몸소 겪었고, 교전 중에 부상도 입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입대 전에 입학해 잠시 다녔던 옥스퍼드의 유니버시티칼 리지에서 다시 학업을 이어 나갔다. 1920년과 1922년에 각각 학사 예비 시험과 최종 시험을 최우등으로 통과했고, 1923년에는 영어과목 최우등에 이어 논문으로 총장상까지 받았다. 이듬해 10월에 루이스는 유니버시티칼리지 강사가 되었고, 1925년에 같은 옥스퍼드의 매그덜린칼리지 연구원으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4년 후 마침내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루이스가 기독교로 회심한 것이다. 매그덜린에 쭉 재직하던 그는 1954년에 케임브리지로 초빙되어 모들린칼리지의 중세 및 르네상스 영문학 학과장이 되었고, 1963년 11월 22일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루이스는 당대의 뛰어난 교사였다. 설득력 있는 명민한 지성에 탁월한 말솜씨를 겸비했고, 무심코들 하는 말의 논리적 허점까지도 전광석화처럼 포착해 냈다. 비평이나 신학의 난해한 개념을 제시할 때면 으레 비유와 은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한번은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열띤 토론 끝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이 문제를 깨끗하고 더러운 손가락이라는 중립 지대에서 심층 논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광명을 얻어 문학의 싸움터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오래되어 발에 꼭 맞는 신발처럼 그는 자신의 사상을 진리에 맞추기를 좋아했고, 지극히 도발적인 생각도 깃털처럼 가볍게 제시하곤 했다.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학회에 갔던 한 내방객은 루이스를 이렇게 생생히 묘사했다. “트위드 스포츠 재킷은 오래되어 낡았고 코르덴 바지도 닳았으며, 깨끗이 빨아 입은 무늬 있는 셔츠에 별다른 특징 없는 예스러운 넥타이를 맸다. 얼굴 혈색이 좋고 건강미가 넘치는 데다 전체적으로 통통한 편이었고, 눈은 생글생글 빛났다. 그날 저녁의 주제는 역사의 의미였는데, 한 사학 교수가 따분한 논문에 코를 박고 끝도 없이 읽어 내려가는 통에 청중은 들으면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루이스의 발언 차례가 되자 즉시 이목이 쏠렸다. “그의 말은 재미있었다. 생생한 은유와 묘사가 그냥 쏟아져 나왔다. 원고 없이 자연스럽게 말하는데 멋있고 경쾌했다.” 평소 그의 강의에는 수강생이 북적였고, 학생들은 진정한 배움을 경험하곤 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무엇보다 작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그 대상도 몇백 명의 학생이나 사적인 관계망을 넘어 수많은 독자에 이른다. 그의 형은 그가 열세 살이 되기도 전에 소설을 써서 완성했다고 밝힌 바 있다. 간행된 책만도 시집, 소설, 단편 소설, 동화, 우화, 서한집, 문학 비평서, 언어학 연구서,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 학술서 등 40권이 넘는다. 학자로서나 창작 작가로서나 그는 칭송받았고, 어떤 양식을 택하든 실제로 그 두 자질이 합해졌다. 방대한 지식과 논리에 상상력이 한데 어우러진 루이스는 우리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반열에 올랐다.
간혹 대화 중에 너무 주장이 세고 지나치게 전투적일 때도 있었지만, 사실 루이스는 누구 못지않게 선량한 사람이었다. 새뮤얼 존슨 박사처럼 가공의 변증법으로 상대를 궤멸할 수 있는데도, 그의 마음은 남달리 겸손했다. 그는 학자로서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무릅쓰고 저서를 통해 정통 기독교를 변호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고, 특히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동료들 사이에서 실제로 적잖이 위신이 깎였다. 존슨처럼 루이스도 그리스어와 라틴어 원문을 비롯하여 언어 전반에 해박했으나, 끝없이 뻗어나가는 매혹적인 상상력만은 존슨과 대비된다.
이런 역설은 학자로서만 아니라 루이스의 개인 생활에서도 똑같이 돋보인다. 그는 기억력이 출중한데도, 자신의 저서와 기사를 열거할 때면 머리가 멍해지다시피 했다. 편지 쓰기를 삶의 큰 짐으로 여겨 싫어하면서도, 전 세계에서 보내 오는 시신에 많은 시간을 들여 대부분 친필로 답장을 썼다. 고독이나 소수의 친한 사이를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대학 집무실에 불쑥 찾아오는 이들도 느긋하고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각종 철학의 정수를 훤히 꿰고 있으면서도, 감정만은 아주 소탈하여 놀이의 요소가 그를 떠난 적이 없었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있기를 싫어하던 그가 즐거운 동화를 썼다는 것이 그 중거다.
그는 또 자연을 워낙 좋아해서 창문을 열어 놓고 밖에 서서 경치를 즐기면서 비서에게 구술한 적도 있으나, 어쨌든 평생을 학자로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서 지냈다. 본인도 인정했듯이 사교성이 부족한 그였지만,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소신껏 실천하여 환자의 병상을 지키고 직접 빈민을 섬겼다. 수입의 3분의 2를 기부했으며 소득세만 아니었다면 그 이상도 했을 것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서부 전선에서 중상을 입었는데도, 자신의 군복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현대 세계가 그야말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로 늘 활기를 잃지 않았다. 명실상부한 지성인이면서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봉했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신비주의자였다.
미시적으로 보면 역설이 많은 루이스지만, 사실 전체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신자의 참모습이 세상에 워낙 낯설다 보니 그가 이상해 보이기 쉬울 뿐이다. 그는 인간의 공로에 별로 비중을 두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저서를 최대한 깎아서 말했고 더러는 아예 제목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신앙 서적을 써서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도 있으련만,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위해 타인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연을 사랑한 그였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그것을 절대화하려는 순간 퇴색해 버린다”는 점도 잊지 않았다. 요컨대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 위계질서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고, 덕분에 인간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작금의 편만한 관행에 별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자신의 표현으로 그는 “배교한 청교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개종한 이교도 였고, 남들이 금기를 버리는 데 필요했던 시간만큼이나 금기를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린 사람" 이었다. 그는 구식 서구인으로 자처하기를 어쩌면 너무 즐기면서, 현대적 요소라면 거의 무엇이나 공격했다. 하지만 그런 싸움 이면에는 영적 실재의 세계가 있었다. 예컨대 루이스는 뒤틀린 교만을 보고 우려하며, 교만을 “극한의 본질적 악 완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 상태"라 칭했다. 오늘날에는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는 이런 영적 죄를 겉으로 드러나는 죄보다 훨씬 악하게 여겼다.
그는 당연시되는 평범한 것들에서 깊은 만족을 얻을 줄 알았다. 풀잎 하나, 나무 위로 떨어지는 햇살, 대학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킬른가를 걷던 즐거운 귀가길(그는 “나는 단조로운 것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동화, 쾌활함, 겸손, 개와 고양이에게까지 다하는 예의, 인간의 참된 형제애, 한 사람 한 사람의 독특한 개성(그의 가정부에게서 내가 직접 들었는데, 그는 그녀와 긴 대화를 나눈 뒤 들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곤 했단다), 삶이라는 끝없는 기적 등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에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슬란과도 다르지 않았다. 아슬란은 사랑이 많지만 결코 길들여진 사자는 아니어서, 거침없이 아이들을 밀쳐 넘어뜨리거나 적잖이 할퀴어서라도 더 큰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 루이스도 자기 세대를 사랑하여 할퀴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그 할큄은 그가 인간의 진정한 필요를 똑똑히 보고 거기에 맞춘 것이지, 평소 중독되어 있는 우리의 값싼 욕구에 영합한 것이 아니다. 고통이나 기적 같은 큰 문제를 비교적 작은 책으로 해결하려는 그의 시도에 반론을 제기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문제에 최소한 기본적인 답이라도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냄새를 맡고 여우를 쫓는 사냥개처럼 답을 찾아 나섰다. 그는 문제보다 답을 더 좋아했다.
루이스의 기독교 저작은 놀랍도록 '일관성을 보인다. 내 책 The Christian World of C. S. Lewis(C. S. 루이스의 기독교 세계)에도 언급했듯이, 그의 몇 가지 중심 주제는 다음과 같다. 그는 정통 기독교의 실체 및 깊은 진실성을 옹호하려 했고, 모든 인간이 천국이나 지옥에서 영생하도록 되어 있어 지금은 그 둘 중 한곳에 맞게 자신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확신했다. 또 인간은 하나님께 명백히 순종해야 하고, 대체로 현대 사조의 중심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으며, 자아를 하나님보다 높이는 것이 아마도 인간에게 가장 끈질긴 유혹일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빛이 인간을 품고 있으며, 세상의 많은 신화는 그 빛의 그림자라는 믿음도 자주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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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 S. 루이스의 문장들, C. S. 루이스, 두란노서원,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