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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6일 주일설교 1부 요한복음 1:1-5 (사도신경 강해 2)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신고리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력을 창녕에 공급하기 위해서 경상남도 4개 군을 통과하는데, 밀양이 한복판에 있습니다. 52개의 송전탑이 건설돼야 한전에서 창녕 지역에 있는 곳에 싼값으로 전력을 공급한다는 명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밀양에서 워낙 반대를 해서 1년 4개월 정도 공사를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땅을 수용하는 expropriation 이라는 개념이 국가주의 시대 때, 개인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시대에 접어든 때는 무수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청풍명월이라고 하는 제천에 가면 댐이 있는데, 그 댐은 4개 마을을 완전히 삼켜 수몰민을 만들었습니다. 충북단양의 그 수몰민들이 시흥에 와 있고 은평에 와 있습니다. 은평구 응암교회는 충복수몰민들의 정신적인 보금자리였고, 시화호, 안산에 갔던 많은 사람들도 사실 수몰민 지역입니다. 그때는 무시무시한 독재정권이었기 때문에 개인이 국가와 맞설 수 있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이고 국가가 개인의 땅을 마음대로 수용할 때 적절한 정신적 위자료와 재산권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밀양에 있는 자치단체 국회의원들, 중간단체장들이 전혀 밀양에 있는 특히 산평, 송전탑이 촘촘히 지나가는 산평리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한전은 밀양지역 사람들에게 가구당 450만원만 주고 무마하려고 합니다. 왜? 750W만 지나가기 때문에, 미미하기 때문에, 그리고 공시지가가 비싼 땅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 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상실감이 큽니다. 송전탑이 지나가면 땅 전체가 송전탑 아래서 이루어지는 노동이 되기 때문에 고향을 사실상 반쯤 잃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을 3한전이나 국가기관들 지방자치단체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숭례문은 누가 불태웠습니까? 일산에 토지수용이 되었던 한 할아버지가 수용지가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분노해서 숭례문을 태워버립니다. 만일 밀양에 유력자의 자녀가 있었거나 산평리 밀양 마을들에 유명한 사람들이 나왔다면 그렇게 못합니다. 울진 양산 영광 모든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 선 곳을 보면, 개인의 땅을 수용한 곳을 보면 유력자가 전혀 나지 않은 불모지입니다. 문제제기 할 수 없는 곳에서 항상 이뤄집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세운 입지조건은 바닷가와 가까움,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곳 + 영적 인격적 학문적 불모지입니다. 그런 곳이 울진 고리 양산 영광 등입니다. 토지공시지가만 가지고 보상하려고 하는 한전과 국가기관 또는 공공기관의 우매무지함, 그 동네 살았던 사람들의 고향을 잃은 슬픔, 영구적으로 폐기된 듯한 그 땅의 값어치,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은 무지막지한 수량경제학, 이것이 오늘날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피해자는 드러나는데 누가 가해자인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전은 보상할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창녕 사람들이 돈을 내서 밀양 사람들을 도와줘야 합니까? 창녕 사람들은 원자력 아니더라도 그냥 전기가 있어야 합니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누구를 향해서 분노를 터트려야 할 지 모르는 분산된 쟁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강정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먼저 밀양 지방자치단체나 밀양 국회의원들 밀양시장, 이들이 1차적인 중재를 해야 할 집단입니다. 그다음 밀양지식인들 그다음 전국단위 시민단체들은 3자적인 참여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뉴스에 8명이 잡혀 갔다기에 종혁형제와 태철형제가 나오는 줄 알고 계속 쳐다봤는데 일단 안 나와서 안심했습니다. 수녀님들이 밀침을 당하면서 소리 지르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한전이 악은 아닙니다. 밀양이 선이고 한전이 악은 아닙니다. 어둠과 빛의 싸움이 아니고 선과 악의 싸움은 아닙니다. 효율성과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고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싸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청난 위자료를 물어줘야 합니다. 한꺼번에 돈을 주지 않는다면 그 밀양 사람들에 대해서 장기적으로 고향을 상실한, 좀 과장해서 말하면 영구폐기 된 듯한 땅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위자료가 보상돼야 간신히 토지수용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토지수용의 역사가 국가주의 시대 때 엄청나게 많이 일어난 것을 이해하고 있고, 장항제련소, 이따이 이따이 병이 걸렸던 온산 원양 울산 지역 전부 수용됐습니다. 국가주의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봐야 합니다. 우리가 국가의 보호를 받는 국민이 된 이상 국가가 공적목적을 위해서 토지를 수용하는데 저항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만족해야 합니까? 상당한 정의감이 충족되는 방향으로 절충하는데 만족해야 합니다. 막아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창녕에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면 창녕 사람들의 전기가 끊어지고 을과 을의 피해가 일어납니다. 아마 그렇게 논리를 호도해갈 겁니다. 우리 시대에 일어난 이런 복잡하고도 우리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쟁점들이 우리 형제자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방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action 해야 하고 response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이번에 애를 많이 썼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효율성과 중앙집권적 국가통치체제에 맞서는 밀양 사람들, 이런 밀양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간 사람들을 위로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에너지도 중앙집권적 체제로 가지 않았나? 그래서 에너지도 지방자치시대로 가야 합니다. 에너지 지방자치시대는 풍력발전소, 태양열발전소, 태양열 발전은 3500만 원 정도 듭니다. 국가 많이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KW에 700원씩 한전에서 사줍니다. 풍력발전소는 설치비가 너무 비싸고 설치하자마자 고장 나면 독일에서 기술자가 와야 합니다. 풍력발전으로 자연경관을 해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송전탑만큼이나 흉물스러운 것이 진부령 대관령에 있는 풍력발전입니다. 결국 에너지주권시대, 에너지를 적게 쓰려면 대규모 중앙집권적 power station이 필요 없으려면 간디가 말했던 마을단위의 에너지수급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볼 때 물레방아 풍력 태양열은 마을단위는 전기는 공급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헤르만하우스는 3분의 1정도가 태양열입니다. 태양열은 하고 나면 남습니다. 그런데 한 번 설치할 때 굉장히 비싼데 여러분 혹시 자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면 사서 태양열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자택을 살 돈이 없기 때문에 사자마자 태양열을 할 겁니다. 3천 5백만원이 들지만 1년 내내 전기가 남아돕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는 중앙집권적인 폭압적인 강압적인 행정기구 안에서 우리의 행복권이 좌우되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케 된 개인들이 외부세력에 의해서 행복의 총량이 가감되지 않는 자유로운 세상입니다. 그 말은 성령 충만한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대한 폭압적 행정국가가 필요 없는 고도의 자치, 고도의 자율사회가 하나님나라입니다. 각자의 메시아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에너지 지방자치시대를 생각하면서 밀양사태를 평가해야 합니다. 저는 다만 밀양에 있는 산평리 주민들, 52개의 송전탑이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큰 보상, 정신적 위자료와 공시지가에 대한 보상, 그보다 훨씬 크게 지불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는 본문을 가지고 사도신경 2주 강의를 하겠습니다. 독생자, 오늘 불렀던 찬송은 외아들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건 아닙니다. 외아들은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그 개념보다는 훨씬 정교합니다. 독특하게 형성된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독생자가 어떤 말과 대비되는가를 보아야 하는데,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림 받는 두 그룹이 있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천군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번역됩니다. 출애굽기 13장 2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림 받습니다. 전부 다 집체적인 의미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납득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리하는 존재입니다. 천사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지상에서 육신을 입은 천사들입니다. 하늘의 천군천사나 이스라엘 백성은 집단적인 의미로 하나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독자로서 하나님아들인데 독특한 의미, 집단적이지 않은 의미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외경에 의하면 천군천사 3분의 1이 배반을 합니다. 3분의 1이 사탄의 꾐 빠져서 반역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들도 이미 반역을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반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 뜻에 반역해보지 않은 아들로써의 의미로서도 독생자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독생자를 믿는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알려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건 타 종교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매우 안일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알려준 하나님은 기독교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 죄와 허물은 있지만 기독교 성경이 알려준 이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도 타락했고 다른 종교도 타락했고 똑같이 죄와 허물로 얼룩져도 예수 그리스도가 알려준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다. 나머지 모든 종교가 말한 하나님은 얼룩진, 계시가 불완전한 하나님입니다. 온전한 예수님이 알려준 하나님, 독생하신 하나님이 알려준 하나님만이 싱크로율 100%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100% 동일체이기 때문에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 뜻과 완벽하게 공감하고 일치하고 서로 교감하면서 하나님 뜻을 수행하는 아들입니다. 독생자, 완전 일치했습니다. 만유인력법칙이 r²이 분모이고, 거리의 제곱의 반비례합니다. M * m이죠. r²이 0가 되면 값이 뭐가 되죠? 분모가 0이 되면 힘이 무한대가 되잖아요. 모든 수를 0으로 나누면 힘은 무한대가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거리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품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결속력은 무한대란 뜻입니다. 무한대에 결속감을 가졌던 친밀감을 가졌던 인격적 교감을 가졌던 그 아들이 이 세상에 파송됐습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다시 말해서 죄 짓고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방황하던, 궤도를 이탈했던 행성과 유성처럼 우주에 무질서하게 다녔던 별들을 독생자 예수님이 우주의 중심에 다시 소환하여 자신께 결속시켜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낸 겁니다. 독생자의 접촉, 독생자가 붙든 별들, 그 영혼들은 하나님을 따라 중심으로 도는 항성의 궤도로 다시 재진입합니다. 그래서 독생자는 출생과 신분에서 독특한 아들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한 번도 반역하지 않고 극한 순종 100% 순종의 극한성을 대표했기 때문에 또 독생자입니다. 여기 일반원리가 도출됩니다. 하나님께 100% 순종한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서 제대로 살면 독생자 주변에 궤도를 이탈했던 항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독생성자급 사람들은 그가 사는 세상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내는 길이요 진리이고 생명이 되는 인생을 시범보인다는 뜻입니다. 이게 일반원리입니다. 우리가 독생성자가 아니라도 독생성자급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 주변에 숱한 우주의 파편처럼 떠돌던 영혼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주님을 발견한 것과 방불한 발견을 한다는 뜻입니다. 너무 중요한 일반원리입니다. 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할 때는 나는 독생성자급 인간이 하나님께 죄인들의 영혼을 소환시켜서 되돌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라는 것과 원리가 같은 겁니다. 나사렛 예수 그 분이 독생자였던 것을 믿는 역사적인 회고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일반 원리가 치환할 수 있는 진리가 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또 독생자인 이유는 예수님은 출생과 신분에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아들로서 독생자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 무한대의 결속감을 가진 아들입니다. 두 번째 우리 주님은 한 번도 범죄하지 않고 극한 순종을 드려서 죄 많은 이 세상에 오셔서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의 인생을 되돌린 십자가의 극한순종을 드린 독생자입니다. 순종의 극한성을 통해서 독생자임을 드러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순종의 극한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지금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대리통치자, 지금도 세상을 아버지 하나님 뜻대로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아들로서의 독생자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적인 대리통치자로서의 독생자입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를 믿습니다, 하는 것은 세 가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독생자를 믿으면 이런 독생성자 같은 사람이 주형됩니다. 창조됩니다. 이런 독생자를 고백할수록 독생성자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게 돼 있습니다. 왜? 믿음은 모방과 동화와 추종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가 독생자임을 믿는 순간 나한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게 참 중요합니다. 제가 제 경험을 분석해봅니다. 제가 독생자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은 79년 11월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독생자에 대해서 알기 시작하고 6, 7개월 동안 intensive한 공부가 있었습니다. 아주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정말로 정말로 공부했습니다. 그때는 내 영혼 목이 말랐기 때문에 이분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를 몹시 초조해 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강렬한 intensive에 사로잡혀 7개월 동안 공부한다면 신앙인이 되거나 불신앙인이 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제가 그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 관악산 기숙사 가동에서 걸어서 142번 버스를 타고 신촌 대현동에 오는 그 먼 거리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목이 말랐느냐면 그 공부하러 간 거리가 지루하지 않고 돌아오는 거리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까 불렀던 찬송가 438장으로 바뀌었는데 옛날에는 찬송가 495장이었습니다. 제가 그 찬송가 참 많이 불렀거든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제가 79년에 이 찬송가를 엄청 많이 불렀던 이유는 처음으로 내 안에 오랫동안 주인노릇 하던 부정적인 원기, 그걸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을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는, 김회권의 인생에 똬리를 틀고 있던 근원적인 지배력이 예수를 믿는 순간, 내가 고백하고 무릎 꿇고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실제로 없어졌습니다. 제가 이 경험을 뚜렷이 한 이유는, 그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세상에 대해서 포괄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늘 웃고 다닌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매우 냉정한, 매우 경쟁심이 심한, 쉽게 말해서 공부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심한 공부를 해서 뭔가를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이 세계에 대해서 메시아적 사명감을 갖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돌볼 여유도 갖지 않았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내 안에서 지금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아담 이후 인류 안에 있는 원죄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438장을 너무 많이 불렀고,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보혈찬송 속죄찬송 죄 사함 찬송을 정말 많이 불렀습니다. 왜? 그때 그 찬송 빼고는 나의 경험을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그런 경험이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후 하나님께서는 나를 1년 정도 격앙상태에 두신 것 같습니다. 1년 동안 격앙 상태에 있었는데 계엄군이 밀려오고 80년대가 되면서 그 상태에서 신학적으로 성경을 많이 읽는 학문적 모드로 빠졌습니다. 전두환이 탱크로 밀어 붙이면서 우리를 몹시도 괴롭혔기 때문에, 그 격앙상태가 전두환 군부세력이 가져온 검은 흑암에 나의 기쁨이 많이 훼손당했습니다. 그때는 '중한 죄짐 벗고 보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 찬송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금관의 예수>를 불렀습니다. 아아 어둠의 거리, <혀 짤린 하나님> 이런 찬송을 불렀습니다.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을 내가 보고 싶다, 공의로운 역사, 거리와 광장과 도시 한복판에서 우리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음을, 정의가 살아있음을,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이 이 도시도 사랑하고 이 대한민국도 사랑함을 알려달라고 소리치는 항거가 시작됐습니다. 제가 속죄를 경험하고 죄사함을 경험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속죄를 받지 못한 상태에 있고, 제 주변의 대부분도 속죄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저만 뜨거웠고 속죄의 능력을 느꼈습니다. 그 상태에서 오랫동안 대치가 계속된 겁니다. 그렇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내 속죄의 보혈의 감격으로 조금씩 바꿔가기 시작합니다. 저랑 지속적으로 접촉한 사람들은 전부 다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랑 지속적으로 접촉한 사람들이 저에게서 들려온 복음을 들으니까 점점 전도가 됐습니다. 점점 전도가 되니 사람들이 이제는 목사가 될 사람이다, 말씀의 종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공동체가 저에게 신학공부를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전도했던 사람, 성경을 가르쳤던 사람들에 의해서 신학교로 가라는 파송을 받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복음의 사역자로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깨닫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나에게 일어난 일은 완전케 됨도 아닙니다. 그리고 세계가 갑자기 바뀐 게 아닙니다. 저에게 일어난 일은 아담원죄의 파괴력 지배력, 원천 지배력은 없어졌지만 아담 원죄 본성의 잔재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일생 동안 십자가를 지면서 싸워가야 할 몫은 아직도 내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1년 동안 격앙됐을 때는 내가 완전케 됐다고 느꼈습니다. 1년 동안에 하나님께서 구름 위에 사는 것처럼 만들어주셨을 때는 그걸 허니문 피리어드라고 말합니다. 그때는 내가 신선이나 된 것처럼 천사가 된 것처럼 완전케 된 것처럼 느꼈는데, 그 상태가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오니까 내가 아담 원죄의 가장 근원적인 힘은 분쇄했지만 내 존재 안에는 아직도 아담 인류의 죄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고, 경우에 따라서 내 안에 있는 작은 죄들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서 6, 7, 8장에서 매번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427장 부를 건데 또 191장으로 바뀌었네요. 제가 번호를 알아 놓으면 바꾸고, 가사를 다 알아놓으면 조사를 바꿔놓고, 누가 이런 농간을 부리는지, 대한성서공회입니다. 그래서 427장 '세상 모든 욕망 다 버리고 나의 모든 정욕은 십자가에 이미 못을 박았네 어둔 밤이 지나고 무거운 짐 벗으니 주의 영이 함께 하리라' 주의 성령의 동행을 성실하게 감당하지 못하면 엄청난 원죄적 죄성이 다시 몰려온 것을 경험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오래 사는 사람일수록 크게 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목회자 수도사들이 넘어지는 이유도 그겁니다. 일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유혹을 받습니다. 전병욱 목사 같은 사람들이 넘어지는 이유, 그 사람들이 기도하는 게 헛것이 아닙니다. 진짜 경건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일탈하면 원시 바다 같은 큰 구름이 와서 덮쳐버립니다. 그러면 실족하는 겁니다. 이런 거룩한 삶의 준위가 낮은 사람들은 덮치지도 않고 성령 충만도 없고 그냥 사탄편 비슷하게 그냥 갑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투항했다가 투항상태를 계속 심화시키지 못하면 어느 순간에 죄가 너무 거세게 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 수도사들이 사순절 끝에 항상 창녀를 찾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주교라는 사람들이 수도하다가 마지막에 일탈하는 이유도 힘이 있습니다. 이건 찰스 스펄전도 느꼈던 겁니다. 찰스 스펄전도 로마서 7장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이것은 사도바울이 믿기 전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게 아닙니다, 지금 사도바울의 마음에 있는 투쟁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도 이런 투쟁이 있다고 말했거든요. <천로역정>의 존 번연도 말했습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홈 인 하기 전 마지막까지, 처음에 환락산이 있고 절망의 무덤이 있어요. 그런데 천국 들어가기 직전에 내 모든 경건의 일생들을 다 물거품으로 만드는 미끄러지는 길이 있거든요. 이 말은 무얼 가리키느냐?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서 완전케 되지 않습니다. 완전케 되는 그 일은 지상에 남아 있는 동안 살아가면서 성령의 도움 받으면서 채워가야 할 미래의 과업이지, 완전케 됐을 때 얼마나 기쁜가를 맛보게는 해줍니다. 완전케 되는 것은 긴 지상 시간의 순례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한 겁니다. 저는 빌립보서 3장 14-21절을 요즘 많이 깨닫습니다. 제가 옛날에는 저한테는 없는, 제가 20대 때는 느끼지 못한 싸움이 있습니다. 왜? 지금 저는 권력도 있고 돈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권력을 남용하고 싶은, 남용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옛날에는 내가 권력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때는 절망하지 않는 것이 매우 좋은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단계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업이 다릅니다. 10대, 20대 때는 지금 이 세상의 부조리성에 짓눌리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주는 것만 해도 굉장한 겁니다. 그러나 50, 60대 때는 인생의 완성기에 들어가고, 굉장히 보유한 것이 많을 때는 절제하고 겸손하고 나누고 베풀고 엄청난 덕목이 개발되지 않을 때는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옛날에는 나에게 나눌 것이 없었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런데 굉장히 도와달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장애인 단체도 어떻게 알았는지 핸드폰 번호를 알아서, 한 번 인연이 맺어져 계속 도와줍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설명하기가 매우 복잡하다고 합니다. 인천에 있는 비누 만드는 다울장애인협회라고 매번 전화를 합니다. 그런데 거절할 수 없는 애절함으로 합니다. 우리 나이에서는 자기의 권력을 비신화화시키고 해체할 만큼 과감한 급진적 결단을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전부 다 무너질 수 있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출세하고 높아지는 것은 굉장한 경건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지금 가난한 실업자들, 매우 적은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적게 먹고 살아가는 것도 인생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누지 않으면 망한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독생자는 지금 현재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통치합니다. 그런데 독생자의 통치가 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가? 여기가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이래로 당신이 한 행위를 사람을 통해서 완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주님은 통치하지만 인간이 통치를 재현해주지 않으면 주님이 통치하지 않는 것처럼 되는 그 계약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지금 주님이 우편보좌에서 통치합니다만, 주님의 영에 공감하는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집단적으로 개별적으로 각 처에서 순종해주지 않으면 주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계약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주님은 분명히 교회를 돕고 계십니다. 저는 압니다. 제가 불순종하는 가운데 있을 지라도 저는 압니다. 주님은 저에게 숱한 감동을 주시고 제게 순종을 유발하시고 순종을 설득하십니다. 저는 대부분 순종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주시는 순종의 마음이 교회에 주시는 순종의 마음이고, 이것이 성도들의 순종의 마음인데 우리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주님의 감동을 받자마자 즉각적으로 순종한다면 주님이 우편보좌에서 통치하심을 사람들은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불용성처럼 순종하고 불균등으로 순종하고 비대칭적으로 순종합니다. 순종을 너무 많이 한 사람들은 순종하고 대부분은 순종하지 않고, 주님의 성령에 감동을 받지 못한 채 무덤덤하게 하루하루를 무감동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의 우편보좌 통치는 비실재하고 현실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입니다. 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는 마지막 고백은 이런 뜻입니다. 제가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지금도 성령을 보내셔서 감화감동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다음 각주가 붙어서, 그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은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당신의 통치를 드러내길 기뻐하는 독생자를 믿습니다, 이 고백이 진짜 마지막 고백입니다. 이 마지막 고백을 해야만 사도신경을 고백한 겁니다. 저는 이 마지막 고백, 우리 주님은 왜 우리를 매개하지 않고 직접 통치하지 않고 왜 성도를 매개해서만 통치하기를 원하시는가? 우리 주님이 우리를 너무나 존귀하게 대우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나라 하나님 나라 통치에 공동통치자로 초청하려는 원대한 목적 때문에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로 불러내시기 위하여 우리의 매개된 순종, 자발적 순종, 공동체적 순종을 통해서만 주님이 이 세상을 돌보고 자애롭게 다스리심을 보여준다는 거죠. 이걸 믿는 것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독생자를 믿습니다, 마지막 뜻입니다. 마지막 뜻 여기가 가장 방점이 찍혀야 합니다. 좀 어렵습니까?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려울지 몰라요. 저는 이걸 깨닫고 정말 감격합니다. 이걸 10년 전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5년 전에도 깨닫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이 깨달음이 저한테는 깊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나날이 수첩을 적고 깨닫습니다. 제 마음은 항상 뜨겁습니다. 그런데 6-7년 전에 일산 두레교회에서 제가 가르칠 때 이렇게 깊게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렇게 깨닫습니다. 마무리합니다. 나는 우리 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는 마지막 신조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성령 감화감동을 통하여 세상과 교회와 성도를 통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는 사람들의 순종을 통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을 독생성자로 형질변화를 시키고 독생성자 같은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셔서 죄를 극복하고 죄를 흡수하고 죄의 피해자가 되고 죄의 모순에 짓이겨지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세상을 끌어안는 무한책임적인 참여를 통하여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라고 저는 믿는 거죠. 결국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독생성자급 성자로 형질 전환시켜서 파송함으로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믿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이 우리를 상시적으로 많이 감동시켜야만 우리는 독생자가 되고, 독생성자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거룩한 피로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키듯이 우리 집안 우리 회사에 독생성자급 인물이 나타나면 그 주변이 전부 다 영생의 통치권 내로 접수가 됩니다. 한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회사에 한 사람 집안에 한 사람 교회에 한 사람, 그 언저리 주변은 주님의 우편보좌의 통치를 받는 직할 영역, 즉 성령의 감화감동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곳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가향교회가 가향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성령의 상시 감화감동을 받는 공동체가 되는 것, 이게 하나님께서 가향교회를 통해서 통치권을 확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가향교회에서 배출된 인물들은 세상에 파송된 독생성자급 제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을 통치하기 원하시는 겁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독생성자급 형질전환한 성도가 되어서 세상에 파송당하는 감격으로 초대하는 고백임을 믿습니다. 주님이여 우리 안에 아담 인류의 원죄를 부수시고 성령의 통치에 감동감화 받는 본성 그런 성향을 훨씬 많이 창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계명을 듣습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만날 때마다 사랑을 설렘을 얻습니다. 우리가 우주적 공교회에 속할 때마다 이 교회가 하나님 우편보좌 통치의 거점이 되어서 이 세계의 모든 문제를 흡수하고 분석하고 분해하여 하나님 통치를 관철시킬 거룩한 전임기관이 된 걸 믿습니다. 주님 지금 우리교회는 그 이상에 접근하지 못했지만 주님이여 성령께서 자애로운 우리를 통치해주시면 우리가 주님의 통치 대행기관이 될 줄 믿습니다.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