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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소개한 세례요한
누가복음 3:15-22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세례 요한의 외침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격적이고 기대에 찬 소식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세례요한의 외침은 메시야의 오심을 전하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혹시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이신가 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1. 그리스도를 소개한 세례요한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5-17)
백성들이 그리스도(메시아)를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했습니다(15절).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메시야가 곧 도래하리라는 기대가 팽배했습니다. 더욱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 가운데에 메시야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선포되자 그들의 메시야 대망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고조되는 메시야 대망의 분위기 속에서 세례 요한이 바로 그 메시야가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말씀 선포에는 그만큼 능력과 확신이 있었으며 그의 세례는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유다 지파 출신도 아니었으며 또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사 11:1; 29:18,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어 백성들을 반신반의(半信半疑)하게 만들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야를 기다렸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후 백성들과 귀족들과 왕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갔습니다. 포로중에 있던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함과 같이 70년이 차게 되자 메데, 파사왕국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고레스왕이 칙령을 내려 이스라엘백성 중 팔레스틴으로 돌아갈 자는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1차로 제사장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인도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성전을 재건합니다.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율법을 가르치며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그들의 신앙이 형식적이 되어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책망하시는 말씀을 보면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면서 평화를 원했지만, 그들에게 평화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변질될 때마다 주변국가들을 통해 괴롭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파 왕국을 멸망시킨 후 헬라제국에 속하게 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헬라제국이 마케도니아, 셀레우쿠스, 프롤레마이의 세 제국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스라엘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가장 큰 제국인 셀레우쿠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카비 반란으로 하스본 왕조라는 독립국가를 잠시 이스라엘은 자유를 누리지만, 헬라제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 연안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로마가 등장하면서 로마제국의 속국이 됩니다(주전 63년). 후에 에돔출신의 헤롯이 로마의 안티오의 신임을 얻어 유다의 왕으로 임명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고통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시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 메시야가 오시면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자신들의 죄를 사하시고 자신들을 압제자의 손에서 해방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 혹시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오해하고 질문할 때, 세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힙니다. 세례요한이 이스라엘백성에게 대답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16절) 요 1:20 에서는 세례 요한이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스스로 강하게 부인하는 내용이 나오는 반면, 여기서는 자신의 사역과 메시야의 사역을 비교함으로써 메시야의 탁월성을 밝히 드러내 보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물은 흔히 정결케 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물은 정화(淨化) 의식, 예를 들면 제의적으로 정결함을 인정하는 의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의식에서는 가능한 흐르는 물이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정화 의식 외에도 물은 때로는 특별한 형태의 의식의 집행 과정에서 신성한 용도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적인 예식이 죄를 씻어 버리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기 전까지의 예비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였지만 자기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시는데 그 분의 신을 메는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과 그리스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맨발로 다니거나 샌달을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실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예배나 애곡, 금식 등을 할 때는 보통 샌달을 벗었습니다. 이때 노예들은 주인들의 샌달을 묶거나 풀어주며 또 필요하지 않을 때는 샌달을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이렇듯 주인이나 주인의 방문객들의 신발을 풀고 묶어 주며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은 가장 낮은 노예의 의무였습니다. 요한처럼 이렇게 능력있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발에 신기운 하찮은 신발끈조차 풀어드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면 도대체 예수는 얼마나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까?
세례요한은 메시야가 오시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인기가 높아지고 세례요한의 인기는 떨어지는 것을 제자들이 그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요한은 자신을 마치 신랑의 친구로 비유하면서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면서 기뻐하면 신랑의 친구는 그 기뻐하는 신랑의 웃음소리로 기뻐한다고 하면서 그는 흥해야하고 자신은 쇠하여야한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를 소개합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6하-17절)
성령 세례와 불세례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문을 보면 헬라어 전치사 '엔'('...안에' 혹은 '...로써')이 '성령'과 '불'을 동시에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세례 요한의 이 예언이 바로 욜 2:28의 성취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1:5)을 뜻함이 틀림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이나 불과 같은 사역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화(purification) 작업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면(사 40:3; 겔 36:25-27; 욜 2:28,29) 성령은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불은 심판과 새롭게 함(refinement)이나 정죄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본문에서도 성령과 불은 이러한 복합적 의미로 쓰인 듯합니다. 또한 그렇게 자주는 아니더라도 성경에서 성령은 분명히 메시야와 관련되어 언급되었습니다(사 11:1, 2). 메시야께서 오시면 그는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이었습니다.
성령과 불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요한은 농사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듭니다. 농부들은 키를 가지고 곡식의 열매를 키질합니다. 그러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구별됩니다. 무거운 것(알곡)은 키에 남게 되어 타작마당에 쌓이게 되고 가벼운 것(쭉정이)은 모아져 불살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와 불신자를 이렇게 구분하실 것입니다. 즉 그가 재림하실 때 타작마당을 정(淨)하게 하듯이 심판의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말은 영원한 심판과 멸망을 가리킵니다(욥 20:26; 사 34:9,10; 66:24; 마 5:22; 13:42,50; 막 9:43-48). 그리고 이러한 추수와 타작이 심판과 관련되어 묘사된 예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납니다(시 1:4; 잠 26장; 사 41:15; 렘 15:7; 계 14:14-20). 요한의 이 경고는 매우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심판이란 자신들과는 무관하며 오로지 이방인들에게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의 왜곡된 특권 의식을 지적하고는 회개를 통하여 타작마당의 심판에 대비하도록 경고합니다. 이와같은 요한의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는 날에 성취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예수님께서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시고 악인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지옥으로 던지실 것입니다(벧후 3:7).
원래 세례는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었던 것처럼 물속에 잠기었다가 물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속에 잠기는 순간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는 물속에 잠기게 되면 죽게 되므로, 물속에 잠길 때 죽었다가 물속에서 나올 때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내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 내 영혼이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죄 씻음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됨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물세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물세례는 외부적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표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표입니다. 그러나 내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들어오시고 우리의 죄를 다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날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 중에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심으로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 입니다. 메시야의 두 번째 사역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키는 곡식 속에 있는 잡것을 갈라내는 도구입니다. 키를 흔들며 바람에 날릴 때 알곡은 그대로 키에 담기지만 가라지는 바람에 날이어 땅에 떨어 집이다. 그래서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넣지만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2. 옥에 갇힌 세례요한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3:18-20)
요한의 메시지는 신랄한 경고와 책망이었음과 아울러 '좋은 소식'이었습니다(18절). 타작마당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엥겔리제토'는 사복음서에서 줄곧 '복음을 전파하다'는 내용으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통한 절대적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자신의 사역을 마감하게 됩니다.
분봉왕 헤롯은(19절) 1절에서 등장한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입니다. 요한은 백성에게는 '권하여' 말씀을 전하였지만 헤롯에게는 '책망'을 했습니다(19절). 요한의 책망은 헤롯의 무분별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은 A.D. 26년경 그의 첫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Aretas)의 딸을 버리고 그의 조카이자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적 전통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패륜(悖倫)이었습니다(레 18:16; 20:21). 또한 헤롯의 난잡한 생활과 악행은 유대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헤롯에 대한 공공연한 책망은 많은 백성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불만과 요한의 직선적인 공격은 헤롯의 권력 구조에 위기감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헤롯은 자신에 대한 반감 분위기의 진원지(震源地)라고 생각한 세례 요한을 체포하게 됩니다. 이로써 헤롯의 악행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헤롯은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둡니다(20절). '더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티데 미'는 '더하다', '첨가하다'등의 뜻 외에도 '같은 종류의 또 다른 행동을 하다', '계속해서 하다'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악을 뉘 우칠 줄 모르고 더욱 큰 죄악으로 빠져들어갔던 헤롯의 타락된 심성을 잘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활동이 백성들 가운데서 계속되는 한 자신의 행동에 여러가지 제약이 따를 것이고 나아가 자신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질 것을 염려한 헤롯은 악한 권력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탄압으로 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에는 해로디아의 농간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게 됨으로써 헤롯 정권의 윤리적, 도덕적 상황은 참담할 지경에 이릅니다. 누가는 본서에서 요한을 체포한 죄를 해롯이 저지른 악행 중에서 가장 악한 죄였다고 기록하였다. 그것은 해롯이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요한에게 손을 대어 그의 복음 전파를 침묵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불의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을 말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한편 요한의 죽음에 관해서는 9:7-9과 막 6:17-29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3.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3:21-22)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21절).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죄인이 아닙니다(히 4:15). 그러나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자신이 구원할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되시기 위하여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마 3:15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례를 받으므로 '모든 의(義)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며 세례를 받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인의 자리에 들어가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편 마샬(marshall)은 '백성들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요한의 활동이 절정에 달한 것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세례가 요한의 사역의 정점에 위치하였다는 뜻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기도를 했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첫번째 기도모습이다(6:12; 9:18,29; 22:4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사역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생 동안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의 혼신을 다하는 기도는 하늘을 열리게 합니다. 마가의 경우는 누가보다 하늘이 열렸다는 사건을 훨씬 더 생생하게 기술합니다(막 1:10).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제 곧 계시나 말씀을 주시려고 한다는 상황적 암시를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오랜 침묵의 기간을 깨시고 다시금 그의 능력과 권위를 행사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울러 이는 예수님께서 본래 하늘에 계시던 분이며(요 3:13)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암시합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강림하였습니다(22절).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현현(顯現)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24:10,11; 33:11; 신 5:4). 그러나 이곳에서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했다고 전합니다. 누가는 성령이 임할 때 오직 예수님만이 그것을 의식했고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였다는 식의 별다른 보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곳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성령 강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비둘기 같은 형체가 내려오는 것만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편 '비둘기'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학자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온유하고 평화스런 속성을 나타낸다고 봄이 무난할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성령 임재는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리라 하신 약속(사 42:1)과 성령이 그 새로이 생겨난 가지에 임할 것이란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사 11:2). 또한 예수님이 하늘나라의 일을 위하여 위임을 받고 그 일을 시작하기 이전의 준비 절차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22절). 하늘로부터의 음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직접적으로 공표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가페토스'는 '사랑하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아들'이나 '딸'을 붙여 사용할 때는 '외아들', '외동딸'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가페토스'는 예수님이 유일한 아들, 즉 독생자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한편 이 구절은 변화산에서 들려진 음성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사 42:1).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천사들(욥 1:6; 2:1)과 이스라엘 국가와 이스라엘의 왕들(출 4:22; 삼하 7:14; 호 11:1)에 적용시켰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그 말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서 잉태될 것이라는 천사의 수태고지(受胎告知)에서도(1:32)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아들...기뻐하노라'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유일무이하고도 특별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냅니다. 요컨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동 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향한 공생애를 시작하고, 성령도 성자가 그 일을 감당하도록 협동하여 힘을 공급해 주시며, 성부도 그 일을 시작한 아들에게 하늘을 열고 땅을 향해 기쁨과 승인의 음성을 발하였던 것입니다.
적용: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
세례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 소개하기 위해 광야에서 준비하였고,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 그리스도의 사역을 준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세례를 받기위해 나오실 때, 그분을 그리스도라 담대하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히므로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후회 없이 고백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우리도 주님을 위해 사역한다고 말하면서도 때로는 사역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전하기보다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설교를 하거나 간증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했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를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려면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의 서문에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겸손하게 복종시키며 나아가야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롬 14:8) 고백하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합니다(고전 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