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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풍회 2016년 8월 강원도 강릉 답사 안내
1. 출발일시 : 2016년 8월 21일(일요일)
2. 출발장소 :
양재역 1번 출구 서초구청 맞은편 수협 앞 (08시 00분)
죽전 경부고속도로 정류장 (08시 15분)
영동고속도로 덕평 휴게소 (08시 30분)
강릉 선교장 앞 (11시 00분)
3. 연락처
회장 태영훈 : 010-8285-7942부회장 이인호 : 010-3126-7992부회장 김영태 : 010-9880-3669총무 신여경 : 010-7488-2727
4. 답사지
1) 강릉 오죽헌(烏竹軒)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강릉시 죽헌동 201)에 위치하고 있다. 보물 제165호인 오죽헌은 약 600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민가주택 중 가장 오래된 집으로 알려져 있다. 뒤뜰에 색이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 이황(1501~1584)과 함께 조선시대 가장 큰 학자로 손꼽히는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집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오죽헌은 율곡의 친가가 아니라 외가, 즉 신사임당의 친정집이다. 율곡의 친가는 경기도 파주 임진강변 화석정 근처다. 밤나무가 많아서 호를 율곡(栗谷)이라 했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덕수이씨)는 미관말직으로 강릉에 근무하던 중에 강릉의 거부 신명화의 둘째 딸인 신사임당과 혼인하게 되었다. 혼인 후 이원수와 신사임당은 오죽헌에서 19년 동안 살았으며 4남3녀를 두었다. 율곡은 세 번째 아들이다. 신사임당은 동해의 검은 용이 집으로 날아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는데 그 때문에 율곡의 어릴 적 이름을 현룡(玄龍)이라고 하였고,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하였다.
오죽헌은 조선 중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지었으며 그의 아들 최응현(참판 역임)이 물려받았다. 슬하에 아들이 없자 둘째 사위 이사온(용인이씨)이 오죽헌을 물려받았다. 그 또한 슬하에 아들이 없이 외동딸만을 두었다. 이가 곧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인데, 서울의 신명화(평산신씨)와 결혼해 오죽헌에서 살았다. 이들 부부 역시 슬하에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두었다. 그중 둘째 딸이 신사임당(본명 신인선)이며 신명화는 유독 둘째딸을 아꼈다. 사임당은 아들 노릇을 하다시피 했는데 정성을 다하여 친정부모를 섬겼다. 결혼 후 몇 달 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치루고 홀로 된 친정어머니를 모시며 살았다.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는 92살까지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딸 다섯을 모두 앞세우게 되었다. 그러자 율곡 등 외손자들이 외할머니를 보살폈고 용인이씨는 생전에 딸들과 외손자들에게 각각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율곡에게는 봉제사를 맡기고 서울집인 수진방을 물려주었고, 또 다른 외손 운홍 권치균에게는 배묘(配廟)를 맡기고 강릉의 오죽헌을 물려주었다. 권치균은 집주변에 오죽이 많은 것을 보고 집을 오죽헌(烏竹軒)이라고 이름 붙였다. 현재 율곡기념관에는 용인이씨의 유산상속서인 이씨분재기가 전시되어있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사임당은 결혼 19년 후인 38세에 서울로 올라와서도 시댁에 머무르지 않고 친정 살림집은 수진방(지금의 청진동)에 살았다. 여기서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사친시’를 지었는데 오죽헌 안채에 걸려있다. 이원수는 이러한 신사임당에게 부부의 정을 못 느낀 모양이다. 그는 말년에 주막에서 술을 팔던 여인에게 정을 느끼고 첩장가를 가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로 인하여 부부가 싸우다가 신사임당이 뇌출혈로 쓰러져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재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원수는 이를 거부하고 주막 여인 권씨와 재혼을 하였다. 부인을 데리고 사는 게 아니라 모시고 살았던 이원수로서는 신사임당 보다는 사람 냄새나는 권씨부인에게서 위로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퇴계와 율곡
조선의 자부심인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는 35살의 나이 차이가 난다. 두 사람은 일생을 통해 딱 한번 만났다. 율곡이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고, 성주 처가로부터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도산의 퇴계를 방문하였다. 율곡의 나이 23세이고 퇴계의 나이 58세 때였다. 2박3일의 짧은 시간동안 교류하며 상대방의 인품과 학문을 알아보고 서로를 존경하고 아꼈다. 이후에도 서신 왕래를 거듭하며 학문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도와 달리 후세에 두 사람을 조종으로 한 학파가 형성되고 결국에는 당파가 갈리게 되었다.
퇴계를 조종(朝宗)으로 한 영남학파는 주리론(主理論)으로 동인이 되고, 율곡을 조종으로 한 기호학파는 주기론(主氣論)으로 서인이 된다. 주리론은 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이(理)로 보고 있다. 인간의 심성론의 주요 논재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설명함에 있어 인간의 선한 본성인 사단(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이(理)가 발동한 것이고, 선과 악이 섞여있는 칠정(희:기쁨, 노:노여움, 애:슬픔, 구:두려움, 애:사람, 오:미움, 욕:욕망)은 기(氣)가 발동한 것이다. 반면에 주기론은 우주 만물의 존재 근원을 기(氣)로 보고, 모든 현상은 기가 움직이는데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이(理)는 단순히 기를 주재하는 보편적인 원리에 불과하다. 즉 사단칠정은 모두 기가 발동하여 된 것이며,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측면만 가리키는 개념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퇴계는 머리가 아주 명석했던 것 같진 않다. 과거도 상당히 늦은 34세에 급제했으며, 그가 지은 책을 보면 상당히 애매하고 지루하게 글을 썼다.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다가 건강을 핑계로 관직을 그만 두고 학문에만 열중한다. 퇴계는 매우 예의 발라 제자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 퇴계가 60대로 성균관 대사성(서울대 총장)으로 있을 때 30세로 이제 막 장원급제한 인물인 기대승과 8년간 논쟁 중에도 예를 갖추었다. 퇴계가 노력형이라면 율곡은 천재형이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한 이래 28세에 문과급제까지 9번의 시험을 모두 장원(수석)을 하였다. 율곡은 이조전랑,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선교장(船橋莊)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강릉시 운정동 431)에 위치한다. 강원도내에서 개인주택으로는 가장 넓은 집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교장(船橋莊)이란 이름은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배를 타고 건너다닌다 하여 배다리마을(선교리)라고 부른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 집은 조선 영조 때(1703)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령대군 11대손인 이내번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9대째 살고 있다.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저택으로 안채, 사랑채, 별당, 정각, 행랑채 등 민가로서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강릉 삼대 양택지의 하나로 유명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내번은 전주에 살다가 강릉으로 옮겨와 처음에 경포대 주변 저동에 살았는데, 어느 날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뒤쪽에 그리 높지 않은 산줄기(시루봉)가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는 천하 명당을 발견하고는 곧 새집을 짓고 이사했다고 한다. 그 뒤로 가세가 크게 번창하여 만석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청난 부(富)를 쌓았다고 한다.
총건평 1,051.24m²(318평)으로, 긴 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 밖에는 수백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 준다. 선교장은 건물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과 생활용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풍치가 아름답다. 선교장의 사랑은 열화당이라하며, 여기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다.
* 안채
안채는 170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로 세종의 형인 효령 대군의 10대손인 이내번이 창건한 것으로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안방과 건너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부엌이 안방에 붙어 있다.
* 열화당(悅話堂)
열화당은 남주인 전용의 사랑채로서 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15년(1815)에 건립하였으며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悅親戚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열화당은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동별당(東別堂)
안채와 연결된 주인 전용의 별당건물로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쪽에 2개, 서쪽에 1 개의 온돌방을 만들고 앞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뒷면과 동쪽은 좁은 툇마루를 돌렸다.
* 활래정(活來亭)
활래정은 선교장 정원에 판 인공 연못 위에 세운 정자로 순조16년(1816)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세웠다. 정자명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 중 "위유두원활수래(爲有頭源活水來)"에서 땄다고 한다. 이 건물은 마루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활래정은 벽면 전부가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옆에 접객용 다실이 있다.
* 기타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 서재겸 서고로 사용하던 서별당이 있는데 소실되었다가 1996년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건물의 전면에는 행랑채가 있다. 또한 건물의 측면에는 원래 창고였으나 개화기때 신학문을 가르치던 동진학교(東進學校)터가 있다.
3) 허균·허난설현 생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생가는 강릉시 초당동 477-8에 위치한다. 이곳 교산(蛟山)은 야산의 형태가 용이 되지 못한 구렁이인 이무기가 기어가듯 구불구불하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고향을 지극히 사랑했던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고 지었다. 혀균은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며 정치가로, 경상감사 허엽과 강릉 김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허균의 가문은 대대로 대문벌이었고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의 아버지와 두 형도 모두 뛰어난 수재로, 동인의 중진이었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주기파(主氣派)에 속하는 학자였다. 동서인이 대립할 때는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어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허균의 5남매 중 위로 남인의 영수가 된 우성전의 처인 누이와 큰형 허성은 전처의 소생이었고, 작은형 허봉과 누이 허난설헌 그리고 허균은 후처의 소생이었다. 그러나 남매간의 우애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열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은 허균은 유성룡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이달에게서 시를 배우게 된다. 허균이 글을 배우는 동안 그의 뛰어난 재주를 접한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무엇이든지 한 번 들으면 기억했고, 당시(唐詩) 수백 수(首)를 며칠 만에 줄줄 외워버렸다. 이를 본 사람들은 허균을 일컬어 신동이나 천재라고 하기보다는 ‘귀신의 정(精)’이라 하였고, ‘도깨비의 화신’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하였다.
허균의 사상과 학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이달이다. 이달은 당시 원주의 손곡리에 살고 있었다. 당시(唐詩)를 연구하여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당시에 통달한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 하지만 가난한 데다 적자가 아닌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출셋길이 막혔음을 알고 나서 술과 방랑으로 세월을 보냈다. 불합리한 사회구조 때문에 스승이 재능과 큰 포부를 펼칠 수 없음을 가슴 아파했던 허균은 세상을 새롭게 보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친하게 사귀며 그들의 운명에 연민을 갖게 된다.
허균의 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관직에 임명되자마자 파직되기를 밥 먹듯이 하였다. 공주목사를 거친 뒤 서른아홉의 나이에 삼척부사로 부임한 그는 동헌 뒷방을 깨끗이 치운 후 불상을 모셔두고 불경을 읽었다. 조정의 언관들이 가만둘 리 만무하였다. 허균을 파직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두 달 만에 봉불(奉佛)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황해도도사 시절에는 기생들을 관아에 끌어들였다고 해서 파직되었고, 수안군수로 재직할 당시에는 부처를 받들고 토호를 함부로 다루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의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허균은 우여곡절 끝에 모반자로 능지처참 가산몰수 형을 선고받은 채 51세에 처형되었다. 허균은 그가 살았던 삶이 순탄하지 않았던 탓에 살아 있을 당시도 그러했듯이 죽은 뒤에도 여러 가지 평가를 받았다.
허난설현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 18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허난설헌의 이름은 허초희(許楚姬)이다. ‘난설헌(蘭雪軒)’은 초희의 호이며, 난초(蘭)의 청순함과 눈(雪)의 깨끗한 이미지를 따서 ‘난설헌’이라 지은 것이다. 허난설헌은 8세 때인 1570년(선조 3년)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으며 뒷날 주옥같은 시 213수를 남겼다. 허난설헌은 15세 때인 1577년에 서당 김성립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났다.
남동생 허균은 집안에 흩어져 있던 허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서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1608년에 ‘난설헌집’을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 실려 있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藩)과 양유년(梁有年)의 서문이 책머리에 실려 있다. ‘난설헌집’은 1692년 동래부(東萊府)에서 중간(重刊)하였다.
4) 경포대
경포대해수욕장에서 자유시간
첫댓글 숭풍회 풍수지리연구회 답사일정입니다....몇 번 가봤던 곳이지만,,,풍수지리상 어떤 것들이숨겨져 있을까 무척 궁금해집니다....기대만땅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