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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상과 현실의 중국 역사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이철락
인터넷상에서 운주사에 관한 글을 찾아보니 많이 있는 데 그중 괜찮은 내용 몇가지를 읽고...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온 뼈아픈 세월을 살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설 야지에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여러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운주사 서쪽 산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미완성석불)님이 누워있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성한 대불사가 아닐까한다
운주사의 여러 창건설
운주사만큼 천불천탑의 거대한 불사를 이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창건에 얽힌 기록이 전무한 사찰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도 찾아보기 힘든 유례가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사적 추측에 의한 무수한 창건설과 시대적 추측이 무성하게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 그만큼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예도 드물다 하겠다.
최근에는 소재구씨에 의하여 몽고군에 의하여 조성되었다는 설까지 대두되고 있다. 그만큼 운주사는 해석하기에 따라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시대적 관련성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과 더불어 상상적 사고의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열어주고 있다 하겠다.
통일신라말의 선승 최도선이 건립했다는 설을 필두로 백제 유민들이 백제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창건했다는 설, 고려시대 명승 혜명이 건립했다는 설(동국여지지), 통일신라 말기에 능주 지방의 호족세력이 건립했다는 설, 능주 지방으로 이주해 온 이민족이 개창했다는 설, 돈많은 무역상이 뱃길의 안녕을 위하여 건설했다는 주장, 미륵 신앙의 혁명사상을 믿는 천민들과 노비들이 자신들의 해방구로 미륵 공동체 사회를 염원하면서 창건했다는 설, 심지어는 불교의 사원이 아니라 도교의 도관이었다는 주장, 범자(梵字) 옴마니반메홈이 새겨진 숫막새와 암막새가 발굴되었다는 점을 들어 밀교 사원이라고 보는 설, 칠성바위를 보고 칠성 신앙과 관련된 민간의 기복처로 보는 민간 신앙설(그리하여 와불을 민간의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남성의 성기라고 해석) 등 다양한 이설이 무성하다.
또한 이형의 석탑과 석불의 형태와 탑신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을 들어 우주인이 조성했다며 우주인 내왕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고려시대 몽고 침략시 몽고인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설, 의상의 법성게도의 밀교적, 신앙 의례적 및 민속적 소산 이라는 견해와 인근 쌍봉사에 주석한 만전(뒷날 최항)이 몽고 침략을 물리칠 영구적인 석조 백고도량을 베풀고자 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실증 단계에서는 추론에 불과한 정도이다. 혹은 역성 혁명을 꿈꾸다 발각되어 이곳으로 숨어들어 온 반역 집단이 조성하였다는 설, 그리고 이른바 '해방구'로서 세계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중세시대 천민과 노비가 주축이 되는 민중의 자치구역이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모든 것은 증거가 없기에 모조리 불확실한 가설에 불과하다. 그리고 최근에 제기된 몽고인 건설설도 그 증거가 불확실하기에 다른 여러 설과 마찬가지로 주관적 가설일 밖에 없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이 편찬 되던 해는 1481년인데 그의 몽고 침략 건설설은 127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과 200년의 차이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운주사 기록이 몽고 침략시기와 4-5대의 세대별 차이에 불과한데 그 대단위 불사에 대한 기록이나 단서가 될만한 민간의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다.
그러한 까닭일까? 운주사는 문학, 미술, 음악, 사진 등 다양한 여러 분야의 예술인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충동질해 주는것과 동시에, 외국인 방문객중 다시 가보고 싶은 한국의 문화재 중 가장 으뜸이 운주사란 사실은 참으로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하겠다.
운주사 천불천탑이 몽고군에 의해 조성됐다는 학설이 나왔다
軍 주둔지로 이용…학계 논란 일듯운주사 천불천탑이 1270년경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에 의해 조성됐다는 소재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주장은 획기적인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간 운주사는 고려 후기나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을 뿐 그 이상에 대한 사실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역사서에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조선시대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에 대한 간략한 기록만 눈에 띤다. 또 조선시대 후기의 기록인 도선국사실록에는 우리나라의 형국이 배와 같아서 땅덩이가 안정되지 못하므로 도선국사가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조성해 국토의 안정을 이룩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해 많은 학자들이 운주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절터를 발굴하기도 하고 조성불사의 역사적 배경을 추적하기도 했으며, 미술사적으로 분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운주사는 신비의 베일에 묻혀 있었다.
‘운주사 탑상의 조성불사’를 발표한 소재구 학예연구관은 천불천탑의 양식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몽고의 전통적인 양식에 가깝다는 점에 주목했다.
마애불상과 누워있는 쌍석불(雙石佛), 북두칠성 모양의 원반석 등을 비롯해 불상·탑들이 평지와 계곡을 가리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자리잡은 모습이 탑을 많이 세우는 몽고의 흔한 양식일 뿐 아니라 탑에 나타나는 X자형 무늬 등이 몽골 등 일부에서만 나타나는 특유의 도안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대한 불사가 아무런 기록도 없고 미완에 끝났다는 것은 발원자가 전통불교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타국의 집권세력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고려를 지배한 몽고의 지배층이 고려의 석재와 석공인력을 동원했을 것이라는 것.
한편 소 연구관이 조성시기를 1270년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오랜 항쟁 끝에 고려가 몽고에 항복했으나 일부에서 남서해를 중심으로 항쟁이 계속됐고, 이에따라 몽고군이 이를 저지하려는 시기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몽고군이 남서해에서 가까운 화순지역을 군사기지로 삼는 동시에 그들이 신봉했던 라마교의 성지를 이 시기에 조성했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추정이라는 것이다. 또 이곳에 자리 잡은 몽고군은 군사활동과 함께 고려의 민중을 강제로 동원해 그들의 전통적인 양식에 따라 천편일률적으로 길쭉한 타원형 얼굴에 긴 코가 표현되고 손 모습까지도 이국적인 형상을 조각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로 꼽고 있다.
특히 군사활동 등으로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들은 암반석이 있는 곳에 적당히 기초를 마련하고 수많은 불상과 탑을 봉안했으나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미완에 끝났다는 것.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산중 암반에 돌을 끊어낸 자국이 선명하고 여기 저기 석재들이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고려와 조선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도 이러한 원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소 씨의 파격적인 주장은 앞으로 운주사를 둘러싼 많은 논쟁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오른쪽 석상은 불상이 확실하지만 나머지는 불상이라기 보다는 유목민족의 석인상에 가까움.
(이유: 운주사의 석상들이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할 시기에 만들어졌으므로 몽고군들이 고려에 와서 여러가기 목적 즉, 전쟁의 승리, 영토 표시, 몽고군 간부들이 신봉하고 있을 불교에 대한 신념 등이 여러 요인들이 결합하여서 유목민족 고유 전통인 석인상을 세우면서 고려 스타일의 불상도 세웠다고 가정할 수 있다고 봄~~)
아무리 봐도 유목민족의 석인상과 동일한 느낌임
중간 석상은 불상같기도 하지만 왼족 석상은 유목민족의 석인상과 비슷함.
불상보다는 유목민족 석인상에 가까움.
확실이 유목민족들의 석인상과 동일함.
X자와 마름모 스타일의 독특한 탑???
유목민족의 석인상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든 석불이라고 생각됨. 오른쪽 석상들은 석인상과 아주 흡사함.
몽고 등의 유목민족들이 와서 보면 아마도 자기들 동네 석인상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할 정도로 초원지대의 석인상과 아주 흡사함.
석불 좌우는 아무리 봐도 석불은 아니다라고 생각됨.
초원지대 유목민족들이 세운 석인상도 자세히 보면 두손을 가슴에 둔 형태가 많이 있으므로 단순히 석상의 두손이 불교스타일(합장 비슷한 것?)이라고 불상이라고 하면 오류라고 생각됨.
쌍배불상는 그 유래가 없는 특이한 형상이라................
쌍배불상은 중국에 몇개 본적이 있는 데, 지금 당장 생각나는 쌍배불상들은 중국 절강성 대자암 미륵불상, 하북성 석가장 융흥사, 호북성 무한 귀원사에 있는 쌍배불상인데, 귀원사는 몽고족이 믿는 라마불교를 신봉했던 청나라때 지었고 또 대자사가 바로 원나라때 설립되었음 (대지사의 미륵불상은 근래에 만들었는데 아마도 이전 불상의 힌트를 가지고 만들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듬). 용흥사도 원나라때 아주 흥성했다고 함.
* 혹시 이러한 쌍배불상은 몽골족이 신봉하는 라마불교와 관련된 것이 아닌지도 연구해볼만함.
중국 어디에서 본 듯한 스타일의 원형탑
오대산, 내몽고 등 라마불교 스타일이 남아 있는 절에 가보면 원형탑 스타일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데 ....
대웅전앞에 있는 흐르는 산천수
중국 오대산이나 다른 중국 산에서 본 기억이 있는 원형탑 같음~~~
위는 확실히 불상임
불상보다는 유목민족 석상에 가까운 스타일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억이 있는 원형탑
원형탑 - 나중에 중국의 원형탑과 연관이 있는 지 연구해 볼만함
거북바위 위 칠층석탑
거북이 형태의 바위
이 와불이 일으나면 세상이 바뀐다는 전설이 있다고 함....
(와불인지 석인상인지???)
거북바위 아래의 석불과 석인상들
중간에 있는 석불상과 좌우의 석인상들
역사기행에서 빠질 수 없는 멋있는 차 한잔
아래사진들은 중국 , 몽골 초원지대의 석인상들
신강 이리지역
신강 이리지역
신강 이리지역
신강 이리지역
신강 이리지역
신강 이리지역
신강 이리지역
몽고에 있는 돌궐족이 세웠다는 석인상들
몽골에 있는 석인상
아래사진들은 중국에서 본 양배불상들임
용흥사에 있는 쌍배불상(남쪽방향은 아미타불이고 북쪽방향은 약사불임)
용흥사는 수나라때 사원으로 개조되었지만 몽고족의 원나라때 대규모로 증축한 절로서 혹시 이 쌍배불상도 원나라때것이 아닌지???
무한 귀원사에 있는 쌍배불상
귀원사는 몽고족과 마찬가지로 라마불교를 신봉하던 청나라때 지으진 사원임. 위의 쌍배불상을 근래에 조성한 것이지만 이전의 근거를 가지고 지으진 것이면...
절강성 대자암에 있는 쌍배불
대자암은 몽고족의 원나라때 지으졌음.
중국 하남성에 있는 원나라때의 원형탑(중간 높은 탑은 명나라때의 탑임)인데 운주사의 원형불탑과 스타일이 거의 비슷함.
곤륜산의 결론
정확한 이유는 연구를 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운주사의 와불은 운주사 와불이 세워진 시대적으로 관련이 있는 몽고족의 영향이 확실히 있었다고 봄. 석상은 유목민족의 석인상과 거의 비슷하며 농경문화의 한국의 상황과는 이질적인 문화라고 판단됨.
일부 역사학자나 불교관련 학자들 등 - 외세에 의해 지어졌다는 데 대하여 너무 거부감을 느끼지 말고 세상을 넓게 보면서 인정해줄 것은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듬.
어떠한 역사적인 내용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자료를 직접 찾아보고 또한 관련이 있는 지역에 가서 탐사를 한 후에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하는 데, 그냥 국수주의적인 시대의 논리에 맞지 않는 사고로 우리나라 역사가 최고라는 황당한 사고방식을 가지면 안됨~~ 공자도 우리나라 민족이었다는 사람도 있는 데..
*****참고: 이러한 이야기도 인터넷상이 있습니다.**********
전남 영암군, 강진군, 보성군은 국내 최대의 차생산지다.
봄이면 골짜기마다 융단처럼 깔려있는 차밭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든다.
특히 부근 화순군에는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雲住寺)가 있어
차밭을 둘러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일대에서 해방직후까지 생산, 판매된 '돈차'가
운주사 석탑과 석불처럼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차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그럴듯한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와불 등 특이한 양식의 운주사 석불과 석탑이
고려를 정복한 원나라가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
이 지역에 주둔시켰던 몽골연합군이 조성한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차 또한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돈차는 지름 3-5㎝, 두께 1㎝ 크기로
찻잎을 동그랗게 압축시켜 만든 후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꾸러미처럼 꿸 수 있게 만든 차.
엽전처럼 생겼다고 '돈차'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해방후 전라도 장터에서는
'청태전(靑苔錢)'이나 '전차(錢茶)'라는 상표가 붙은 돈차를 볼 수 있었다.
돈차를 끓일 때는 차와 함께 대추나 말린 감껍질도 같이 넣어 끓였다.
황갈색인 돈차는 끓이면 진한 황색으로 쓴맛이 강하지만
묽게 타면 녹차맛이 났다고 한다.
장날이면 장터에서 100개씩 꾸러미에 꿴 채 팔리던 돈차는
차라기보다는 감기나 배 아플 때 한두 개씩 불에 살짝 구운 후
끓여 마시면 아픈 것이 낫던 '약제'로 생각됐다.
또 몇년전에는 한국제다 등 몇몇 차생산회사에서
돈차를 대량 생산했으나 찾는 사람이 없어 지금은 사라졌다.
돈차가 사실은 몽골의 차라는 주장은
유목민족이 대부분 그렇듯 차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몽골연합군이
천혜의 차생산지인 이곳에 주둔하면서
휴대하기 편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동전모양의 차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리에서 비롯됐다.
동국미술인회 김익홍씨는 지난 93년 몽골 남쪽지방을 여행할 때
목동들이 말안장에 노끈에 꿴 차꾸러미를 달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말해
이같은 추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김씨는 몽골여행중 현지인들로부터
즉석에서 짠 말젖에 이 차 한덩이를 넣고 끓인 마유차를 대접받았다며
강진, 보성 등 이 지방에서 생산됐던 돈차는
바로 몽골인들의 풍습이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단정했다.
김씨는 또 운주사 석탑의 원반형 옥개석탑이나
마름모꼴 무늬에 네잎 꽃무늬가 들어있는 문양,
빗줄기 같은 수직선 무늬들은
몽골과 티베트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들인데다
석불의 표정과 이미지도 몽골 곳곳에 흩어져 있는 불상의 그것과 흡사하다며
이들 석탑과 석불도 몽골로 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건축 전문가로 문화재전문위원인 신영훈씨도
운주사 석탑과 석불이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씨에 따르면 일본 침공에 두차례나 실패한 몽골연합군 군사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하면서 운주사가 있는 부근에 집단 거주했다.
이들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이곳의 점판암을 쪼개
석탑과 불상을 조성했다는 게 신씨의 견해다.
학자들은 우리나라 차문화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쇠퇴하게 된 것은
몽골의 침략과 병자호란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침략에 성공한 몽골족이나 만주족이
품질 좋은 조선차를 대량으로 착취하는 바람에
차농민들이 차생산을 중단한 경우가 많았다는 주장이다.
병자호란 이후 이조판서를 지냈던 나만갑의 <유한록>에는
청나라에 바친 공물중 200담의 차가 들어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담은 짐꾼 한 사람이 질 수 있는 무게로 약 40-50㎏.
200담이면 10톤 가까운 무게인데 지금으로서도 어마어마한 양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약 350여년전
이곳에 주둔했던 원나라 군사들이 이곳 차를 본국에 보내기 위해
우리 백성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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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몽골)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여담이지만..
최근 중국 교육부는 '고교역사교학요강'에서
"송(宋)의 충신인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 등은 걸출하지만
민족 영웅이라고 할 수 없다" 고 밝혔다고 합니다.
이들은 중국 역사의 한 부분인 금(金 - 여진), 원(元 - 몽고)의 성립과정에서
구(舊)왕조를 지키려고 했던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이 한족 중심 사회인 중국의 소수민족 껴안기 정책의 일환인지,
(중국 소수민족의 총인구는 전체인구의 약 8% - 그러므로 한족은 92% - 정도에
불과하나, 이들의 거주지역 분포는 중국 대지의 약 6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관의 관점에서 중국의 민족 전쟁을 분석해 나가는 작업인지는
두고 볼 일이겠지만..
아직도 국정교과서에 친일파들의 글이 여전히 실리고 있는
(친일 전 찰나의 애국적 행위를 영겁으로 포장하여)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실로 부러운 역사 재정립 작업의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한국일보] 화순 운주사 / 몽골의 흔적이런가.. '돈차'와 천불천탑
인터넷에 자료를 찾던 중 대학원 석사논문들도 적지 않는데 내용이 좀....
첫댓글 생김새나 자세를 보니 아주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동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