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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공과 감찰공, 두 형제 할아버지의 족보 번역 및 해설
이 글의 기획은 조우제(1942년 하림태생)님께서 했다. 감찰공 할아버지와 그의 형인 판서공 할아버지에 대해 알기 위해 족보를 들어다 보면, 족보 내용이 다 한문으로 되어있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조우제 아제님께서 평소 한문 불경을 번역해오고 있는 나(조성래, 1959년 하림태생)에게 번역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씀해왔다. 족보에 있는 한문은 조우제님께서 쳐 넣었다. 제가 이 글을 작성하는 데 일 주일이 걸렸다.
함안조씨 17대 판서공 趙信道(조신도, 1554-1595, 42세亡) 판서공파의 파조. 감찰공 조민도의 친 형, 증 병조판서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사촌 동생. 하림 고바우 정려각의 주인공
우선 함안조씨 그 윗대의 선조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9대. 천계(天啓, 고려 판도판서 정2품)
10대. 열(悅, 1419세종1년亡, 고려말 공조전서 정2품)
11대. 안(安, 벼슬하지 않고 일찍 별세함)
12대. 려(旅, 1420-1489, 70세亡, 증 이조판서 정2품)
13대. 고조부 금호(金虎, 1445-1533, 89세亡, 첨지중추부사 종2품)
14대. 증조부 수만(壽萬, 남계공, 1469-1491, 23세亡, 장사랑 종9품)
15대. 조부 응경(應卿, 1487-1549, 63세亡, 청백리 현감 종6품)
16대. 부 성(城, 1529-1558, 29세亡, 증 동지의금부사 종2품)
17대. 신도(信道, 1554-1595, 42세亡, 증 병조판서 정2품)
조신도의 자(字)는 중유(仲由)다. 1554년생으로 함안조씨 17대이다.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무과(武科)에 합격했다. 온양군수(溫陽郡守,종4품)로 있을 때 1592년 음력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 다음 해인 1593년에 대장(大將,정2품)으로 임명되어, 40세의 나이에 전쟁에 나갔다. 그 후 2년 동안 나라와 조정을 위해 전공(戰功)을 쌓아오다가 1595년 한강(漢陽江한양강)전투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殉節)했다. 그 때 42세였다. 사후에 조정에서 특별히 그 무공(武功)을 높이 평가하여, 정2품 벼슬인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오늘날 국방부장관)를 겸하는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늘날 국군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총사령관(도총관都摠管) 등의 높은 벼슬을 내려주었다. 또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갔을 때 함께 따라가서 왕을 모시고 지켜준 공신들에게 주는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 공신훈장을 받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훈장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조정(朝庭)의 서훈대장(오늘날 국가보훈처)에 기록되어 있다. 기타 상세한 것은 언행록(言行錄)을 보기 바란다. (언행록은 이 족보 책의 앞 부분에 판서공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정에서 부인에게는 사후에 정2품 벼슬인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를 내려주었다. 밀양박씨의 부친은 사헌부 감찰(감사원감사관, 정6품, 암행어사)을 지낸 박윤수(朴允秀)이다.
묘소는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선친 묘소의 왼쪽 옆에 있고, 해좌(亥坐) 방향의 쌍분(雙墳)이다.
묘비명(墓碑銘)은 안릉(安陵)이씨 이상의(李相義)가 지었다. 신도비명(神道碑銘)은 규장각(奎章閣) 부제학(副提學,정3품)인 연안(廷安)이씨 이병관(李炳觀)이 지었다.(규장각은 조선시대 왕실도서관이자 학문연구기관이다.)
다음은 위의 번역에 대한 한문 원문이다.
○ 信道(신도)
▲判書公派祖(판서공파조)
字仲由(자중유) 明宗嘉靖甲寅生(명종가청갑인생) 武科(무과) 溫陽郡守(온양군수) 當壬辰倭亂(당임진왜란) 癸巳拜大將(계사배대장) 乙未殉節于漢陽江(을미순절우한양강) 特贈(특증) 資憲大夫(자헌대부) 兵曹判書(병조판서) 兼(겸) 知義禁府事(지의금부사) 五衛都摠府都摠管(오위도총부도총관) 錄扈聖原從一等勳(록호성원종일등훈) 又(우) 錄宣武原從勳(록선무원종훈) 見言行錄(견언행록) ○配(배) 贈(증)貞夫人密陽朴氏(정부인밀양박씨) 父監察允秀(부관찰윤수) ○墓(묘)咸安下林(함안하림)考墓左傍(고묘좌방)亥坐雙墳(해좌쌍분) ○墓碑銘(묘비명)安陵李相義撰(안릉이상의찬) 神道碑銘(신도비명)奎章閣(규장각)副提學(부제학)廷安李炳觀撰(연안이병관찬)
(번역자의 도움말)
1. 판서공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피난 가던 선조대왕의 가마를 호위하여 적과 싸우면서 무사히 피난시킨 뒤 다시 적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殉節)했다. "판서공"은 선조대왕이 판서공할아버지 사후에 할아버지께 병조판서(정2품,오늘날 국방부장관)의 벼슬을 내려줬기 때문에 부르는 이름이다.
2. 판서공할아버지와 감찰공할아버지는 2살 차이 나는 형제다. 판서공할아버지는 자식을 두지 못해 1970년대 초까지는 감찰공할아버지의 외아들 주부공 영기(英沂)할아버지를 판서공할아버지의 양자로 넣어두었다. 그런데 1970년대 초에 충남 서천에서 판서공할아버지의 친자(親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친필문서를 들고 와서 판서공할아버지의 외아들인 영복(英復)을 판서공할아버지의 친자로 넣어주고, 큰아버지 밑으로 양자로 들어가 있던 주부공 영기(英沂) 할아버지는 친부(親父)인 감찰공할아버지 밑으로 되돌아 왔다. 그 이전에는 하림에 판서공파도 있었고, 감찰공파도 있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1954년에 출판된 족보에는 우리 집은 판서공파로 되어 있고, 1972년에 나온 족보에는 감찰공파로 되어 있다. 판서공파의 종손은 조홍래(실안댁의 아들이자 승래, 삼래, 영래의 형)님이었고, 감찰공파의 종손은 조금제(51년생, 윤동댁 아들, 1976년생 조진우의 부친)님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판서공파는 서천의 친자손(親子孫) 쪽으로 넘겨주고, 하림의 판서공파는 모두 감찰공파로 돌아왔다. 현재 감찰공파의 종손은 고(故) 조홍래(1942년 하림태생)의 아들 조현호(1973년생)이다.
3. 판서공할아버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38세의 나이에 온양(溫陽)군수로 계셨다. 온양은 지금의 충남 아산지역이다. 조선시대 군수(종4품)는 지금의 군수와는 격이 달랐다.『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경기도 7인, 충청도 12인, 경상도 14인, 전라도 12인, 황해도 7인, 강원도 7인, 영안도 5인, 평안도 18인 등 전국 82군에 82명의 군수가 파견되었다. 군수로 임명되면 반드시 왕을 알현한 뒤 임명 지역으로 떠났다.
4. 호성공신(扈聖功臣)에서의 호(扈)는 따를 호이다. 이것은 군주의 뒤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성(聖)은 천자, 황제의 존칭이다. 즉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은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대왕이 의주로 피난 갔을 때 그곳으로 따라가서 왕을 끝까지 지켜준 공신들이다. 1604(선조37)년 6월 25일 한양에서 의주까지 시종 왕의 가마를 모신 사람을 호성공신으로 삼았다. 왜적을 정벌한 장군들과 군 식량지원을 요청하러 간 사신들은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삼았다. 이들 공신들에게는 그들이 공을 세운 신하임을 입증하는 증서인 원종공신녹권(原從功臣錄券)과 함께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호성원종공신에는 1, 2, 3등급이 있는데, 판서공할아버지는 1등공신이다. 1등 공신에게는 ① 벼슬아치의 품위를 한 계급 올려주고, ② 아들과 손자에게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관리로 특별 채용해주는 혜택을 부여하며, ③ 죄를 지었을 때는 그 후손에까지 너그러이 용서해 주고, ④ 그 부모에게 관직과 명예의 칭호를 내려주고, ⑤ 아들과 손자 중에 실제 근무처는 없고 관직의 명칭만 갖고 있는 사람에게 한 계급 올려주었다.
녹훈(錄勳) : 임금이나 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를 상훈(賞勳)대장에 기록함. 판서공할아버지 족보에 “록호성원종일등훈(錄扈聖原從一等勳)”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갔을 때 판서공할아버지가 따라가면서 선조를 지켜준 1등 공신으로 서훈대장에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다. 판서공 조신도(趙信道)할아버지는 호성원종1등공신(扈聖原從一等功臣)으로 선정되어, 조정의 서훈대장(국가보훈처)에 기록되어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려주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3등 공신으로도 선정되어서 조정의 서훈대장(국가보훈처)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기록되면 조세감면 등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5. 묘비(墓碑)와 비석(碑石)은 같은 말이다. 이것은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으로서 그 무덤에 묻힌 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왕이나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서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큰 비석을 이르던 말이다.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신도비에 새긴 글이다. 중국에서는 천자 및 제후들이 다 신도비를 세웠다. 우리나라의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왕릉의 신도비로서 태조의 건원릉신도비(建元陵神道碑)와 세종의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가 있다. 또 사대부의 신도비는 큰 위업과 공훈을 세웠거나 도덕과 학문에 투철한 분들의 묘 앞에 7, 8척(尺)되는 큰 비가 서 있다. 그 비의 머리 부분에는 이수(螭首,용틀임 머리)가 있고, 아래에는 귀부(龜趺,거북 받침대)가 떠받치고 있어서 위용을 보인다. 조선시대 이후의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功業)과 학문이 뛰어나서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는 군왕보다 더 위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신도비를 세워서 그 학덕(學德)과 업적을 기리도록 했다.
6. 판서공할아버지는 사후에 조정에서 특별히 그 무공(武功)을 높이 평가하여, 정2품 벼슬인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오늘날 국방부장관)를 겸하는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늘날 국군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총사령관(도총관都摠管) 등의 높은 벼슬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판서공할아버지의 신도비는 하림리 남계공할아버지 재실(하림 윗 재실) 뒤 편 가남골에 있는 선영의 묘소 앞에 세워져 있다. 판서공할아버지의 산소는 감찰공할아버지, 15대 하구정 조응경(1487-1549, 63세亡) 할아버지, 16대 조안 등의 산소와 함께 모여 있다.
○ 함안조씨 17대 감찰공 趙敏道(조민도, 1556-1592, 37세亡), 사과(司果,종5품무관직), 감찰공파의 파조, 증 병조판서(정2품) 판서공 조신도(信道)의 2살 아래 동생, 증 병조판서(정2품)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사촌 동생. 하림 고바우 정려각의 주인공
함안조씨
9대. 천계(天啓, 고려 판도판서 정2품)
10대. 열(悅, 1419세종1년亡, 고려말 공조전서 정2품)
11대. 안(安, 벼슬하지 않고 일찍 별세함)
12대. 려(旅, 1420-1489, 70세亡, 증 이조판서 정2품)
13대. 고조부 금호(金虎, 1445-1533, 89세亡, 첨지중추부사 종2품)
14대. 증조부 수만(壽萬, 남계공, 1469-1491, 23세亡, 장사랑 종9품)
15대. 조부 응경(應卿, 1487-1549, 63세亡, 청백리 현감 종6품)
16대. 부 성(城, 1529-1558, 29세亡, 증 동지의금부사 종2품)
17대. 신도(信道, 1554-1595, 42세亡, 증 병조판서 정2품)
17대. 민도(敏道, 1556-1592, 37세亡, 사과(司果,종5품무관직), 증 사헌부감찰 암행어사 정6품)
조민도의 자는 계유(季由)이다. 함안조씨 17대이고, 1556년에 태어났다. 종5품 무관직(武官職)인 사과(司果)에 종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2일 째 날인) 1592(임진)년 4월 25일 37세에 경북 상주(尙州)전투에서 순절했다. 사후에 조정에서 특별히 그 무공을 높이 평가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감사원감사관, 암행어사, 정6품)의 벼슬을 내리고, 마을 입구에 정려비(旌閭碑)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자세한 것은 언행록을 보기 바란다. (현재 함안 군북면 하림 마을 입구인 고바우에 감찰공할아버지의 정려비각(旌閭碑閣)이 있다. 언행록은 묘비명과 <13충록(十三忠錄)>과 이 족보 책의 앞 부분에 감찰공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이고, 파평윤씨의 부친은 직장(直長,종7품) 윤인흡(尹仁洽)이다. (윤인흡은 나중에 군수(종4품)를 지냈다.)
○ 묘소는 하림 선친 묘소의 오른 쪽에 있고, 해좌(亥坐)방향이다. 부부합장묘이다. 묘비명은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정8품)인 기성(箕城) 황헌(黃瀗)이 지었다.(황헌은 나중에 종2품까지 올라간 문신이다.)
다음은 위의 번역에 대한 한문 원문이다.
○ 敏道(민도)
▲監察公派祖(감찰공파조)
字季由(자계유) 明宗嘉靖丙辰生(명종가청병진생) 司果(사과) 壬辰四月二十五日殉節于尙州(임진4월25일순절우상주) 特贈(특증)司憲府監察(증사헌부감찰) 命旌閭(명정여) 見言行錄(견언행록) ○配坡平尹氏(배파평윤씨) 父直長仁洽(부직장인흡) ○墓(묘)下林考墓右(하림고묘우)亥坐(해좌)合窆(합폄) 墓碑銘(묘비명)承文院(승문원)副正字(부정자)箕城(기성)黃瀗(황헌)撰(찬)
(번역자의 도움말)
1. 위의 족보 내용을 보면 감찰공할아버지는 생전에 종5품 무관벼슬인 사과(司果)였다. 사과(司果)는 200명 단위의 군부대 지휘관이다. 만약 감찰공할아버지께서 37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하지 않았고 61세까지만 사셨더라도 아마 정2~3품 자리까지는 충분히 올라갔을 것이다.
사과(司果) : 고려시대 2군 6위에 200명 단위의 군부대 지휘관으로 있던 정6품 낭장(郞將)이 조선 초기까지 그대로 이어지다가 1394년(태조3) 종5품 부사직(副司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466년(세조12)에 관제를 정비할 때 이것을 다시 ‘사과(司果)’로 고쳐서 〈경국대전〉에 실었다.
2. 감찰공할아버지의 처가의 가계도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감찰공할아버지의 처가도 우리 집안 못지않게 대단한 집안이었다. 감찰공할아버지의 장인 윤인흡은 나중에 군수(종4품)를 지냈다. 윤인흡의 장남(감찰공할아버지의 큰 처남) 윤덕순(尹德純)은 무과에 급제하여, 장흥부사(長興府使, 정3품)를 지냈고, 차남(감찰공할아버지의 둘째 처남) 윤덕흔은 군수(종4품)를 지냈다. 또 윤인흡의 장인 정희등(鄭希登,1506~1545)은 사헌부장령(掌令,정4품)을 지냈다.
감찰공할아버지의 장인의 동생, 즉 처삼촌은 윤인함(尹仁涵,1531~1597)이다. 그는 양주목사(정3품)와 황주목사를 지내고, 1584년에 동지사(冬至使, 조선시대에 매년 동지에 정기적으로 명과 청에 보내던 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호조참의와 형조참판(종2품)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기도 하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주부윤(종2품)이었다. 조정에서 윤인함은 문신이라서 전쟁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다. 그런데, 경주성이 함락되자 윤인함은 바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 수 백 명을 죽였다. 그 뒤 윤두서의 추천으로 호서관찰사(종2품,충청도지사)가 되었다가 곧 파직되고, 호조참의에 재임한 뒤 1596년 형조참판(종2품)이 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 때 영위사(迎慰使)를 겸해 명나라 장수를 영접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가 죽었다.
3. 이와 같이 감찰공할아버지는 친가와 처가가 다 대단한 집안이어서 장래가 촉망되는 장교였는데, 왜적이 쳐들어오자 군사, 교통의 요충지인 경북 상주로 달려가서 왜적을 막아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2일째 되는 날인 1592년 4월 25일에 37세의 나이에 경북 상주전투에서 국왕과 나라를 위해 장렬히 순절(殉節)했다. 감찰공할아버지는 무관(武官,사과司果)이었다.
4. 감찰공할아버지의 묘비명을 쓴 황헌(黃瀗)은 조선후기 어영대장(종2품), 병조참의(정3품), 도총부부총관(종2품)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감찰공할아버지 묘비명을 쓴 이런 인물을 봐도 감찰공할아버지가 얼마나 주목받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 이 글은 다음 카페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遺事)>에 실린 글입니다. 주변의 함안조가 일가와 판서공파 및 감찰공파의 후손들에게 널리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정 조성래(1959년 하림 태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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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관정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ㅡ민도할아버지께서 형인 신도할아버지 보다 3년이나 먼저 돌아가신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그 시대의양심이요 선구자 입니다.
1942년생 조우제 입니다. 감찰공 할아버지가 그 시대의 양심이요, 선구자라는 조직래 님의 글에 대해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비록 사과라는 낮은 직급이지만, 그 죽음을 각오한 용맹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명장(유명한 장수)입니다. 그 당시의 왜놈은 쳐죽여야 마땅한 처사였습니다. 어찌 의분이 솟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조성래 님이 이 글을 작성하는데 1주일이 걸렸는데, 아마도 옥편도, 사전도, 역사도, 인터넷 검색도 했겠지만, 기본적인 실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판서공 및 감찰공 할아버지에 대한 이렇게 알기쉽게 자세히 기록한 내용은 아마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함안조씨 감찰공파, 우리는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조우제 아제님은 선조(先祖)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셔서 잘 알고 계십니다. 사실 족보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한문이 된다고 족보를 잘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한문 뿐만 아니라 인물, 역사, 관직명, 지리, 시대상황 등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으면, 족보에 내포되어 있는 정보를 다 읽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헌 해석학이 바탕이 되어 있으면, 족보 번역 및 해설도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사전이 잘 나와 있어서 인물이나 관직명은 크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명사전에 나와 있지 않는 인물은 작업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들어갑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정자(正字)로 되어 있지 않는 한자의 판독입니다. 옥편에 나와 있지 않는 글자를 만나면, 침침한 시력이 더욱 나빠져서 두통을 일으키고, 탈진 상태에까지 가기도 합니다. 족보상에 중요인물 몇 분은 힘이 들드라도 작업을 해놓을 작정입니다. 자신의 조상에 대해 관심이 있는 몇몇 후손들을 위하여
조직래(1947년생)형님께서 위의 글을 읽고, 저에게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관정 연일 고생이 많구나 ㅡ눈도 침침하고 머리도 띠잉 할기다 ㅡ글중에 남계공 수만 할배부분이 잘못된듯 ㅡ할배는 23세에 죽었고 그때 아들 응경과 딸이1명 있었다ㅡ그래서 동생 절도공 수천할배가 고생을 많이했을기라 ㅡ참고하시길 바라네.
조성래 왈, 네, 형님. 육십갑자로 년대를 표기해 놓은 것은 까딱하면, 60년 오차가 나기 쉽습니다. 다시 확인 후 오류가 확실하면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일 내 남계공 조수만(趙壽萬) 할아버지 족보를 번역해 올리겠습니다.
조직래(1947년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남계공 조수만(趙壽萬) 할아버지 생몰년대를 수정하였습니다. 남계공 조수만(趙壽萬) 할아버지 족보에는 "예종己丑(기축)생, 辛亥(신해)七月十一日卒"이라고 되어 있어서 그 생몰년대가 1469-1491년 23세亡과 1469-1551년 93세亡 둘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남계공할아버지는 하림 윗재실 주인공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설마 23세에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93세까지 사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계공 조수만(趙壽萬) 할아버지는 23세에 돌아가신 것으로 확인 되었다. 족보책 앞에 실린 남계공할아버지 언행록을 보니 "成宗(성종)辛亥(신해)七月十一日卒"이라고 되어 있어서 1491년에 돌아가신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23세까지밖에 못 살은 분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재실을 지어드렸을까?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남계공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아쉬움으로 후손들이 재실을 지었을듯.남계공이 돌아가셨을때 부친 금호할아버지는 생존해 계셨고 동생이신 절도공 수천할아버지가 부모님 형님댁 조카들을 돌보고 부양 했겠죠.절도공은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엄청 돈독하신 분이니까.13충중 최고 윗선조가 절도공이죠.고향 하림에 계시는 절도공파 친족과 잘지내야 합니다.옛날에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