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하루방의 의미와 사용 시기
하루방은 할아버지라는 뜻이다. 따라서 돌하루방은 ‘돌할아버지’이다. 조선시대, 아니면 고려시대, 그것도 아니면 삼국시대에 만들어졌을까?
정답은 일반상식을 뒤엎는다. 돌하루방의 공식화는 불과 수십년 안짝, 해방 이전만 하더라도 돌하루방이란 말은 없었다고 한다.
제주도 민속학자 김영돈(문화재 전문위원)의 증언을 들어보자
본디 이 석상은 ‘돌하루방’이라 부르지 않았다. 광복 전후쯤 해서 도민들 사이에서 장난삼아 ‘돌하루방’이라 부르기 시작하자, 누구나가 그 뜻을 쉽게 드러내는 말이라 너도나도 애용함으로써 널리 번져갔다. 이 ‘돌하루방’이란 말이 상당한 세력을 뻗치게 된 것은 1971년 8월 20일 제주도 문화재 위원회에서 민속자료 제 2호로 지정할 때 ‘돌하루방’을 갑론을박 끝에 문화재 공식 명칭으로 쓰면서부터이다. ----한라일보 1993년 2월 1일자
2. 돌하루방의 기원
돌하루방의 기원 문제는 몽골기원설, 남방기원설, 제주자생설 등 여러 가지이다.
1) 몽골기원설
최근 몽골학게 일각에서 제기된 몽골 영향설은 반드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몽골 지배기에 몽골 석인상의 영향으로 돌하루방이 이루어졌다는 견해이다. 비교민속학적 차원에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기는 하나 워낙 반론이 드센 형편이다.
울란바토르 대학 바이에르 교수의 <칭기즈 칸의 혈통을 이어받은 칸, 귀족들의 돌초상 13-14C)에 의하면,
몽골 각지에 약 500여기의 석인상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 훈촐로로 불리는 석인상은 고대 유목민족의 습관이나 신앙 및 사회제도 등을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훈촐로에는 우리의 돌하루방과 외형이 너무도 비슷한 것이 있고 한때 몽골의 지배기도 있어 몽골과 제주의 친연성이 그럴듯하게 제기된다. 몽골 벌판의 훈촐로가 탐라까지 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몽골의 드넓은 초원은 고요한 들판이 아니었다. 많은 세력들의 피어린 싸움이 전개되었으니, 어느 시기에나 초원의 지배권을 놓고서 다투었다. 중앙아시아의 중심 무대로 칭기즈 칸이 발흥한 곳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석인상조차도 돌궐, 위구르, 몽골 제국 등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세 종류의 석인상이 별도로 존재한다. 생김새에서 일부 친연성이 있다고 해서 몽골영향설을 주장하는 시각은 무리가 아닐는지. 바로 인근의 알타이 지방에는 전려 다른 투르카이 양식의 석인상이 전해진다. 이처럼 중아아시아 곳곳에 전해지는 석인상이 시기와 지역을 달리하며 차이가 나타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몽골 석인상과 제주의 돌하루방이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는데서 착안하여 공통성을 주장하는데, 이것 또한 설득력이 없다. 우리나라 육지의 벅수도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들 벅수도 몽골 모자의 영향 탓인가? 게다가 몽골의 석인상들은 대개 손에 식기 따위를 들고 있으며 의자 앉아 있다. 상호간에 교섭이 전혀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문화에도 문화적 공통성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2) 남방기원설
돌하루방의 ‘출생내력’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런데 단서 하나가 발견되었다. 제주도 돌챙이(석수장이) 한 명이 남도를 갔다가 잘생긴 조선 후기 돌벅수를 만났다. 돌챙이의 고향은 정의현, 지금의 성읍 민속마을이다. 돌챙이는 돌아와서 입상을 만들었다. 물론 그는 손에 익히고 있던 탐라식의 조각 형식을 기반으로 해서, 새롭게 들어온 양식을 결합하여 돌하루방을 창조하였다. 이렇게 추론하면, 돌하루방과 벅수 연관설이 분명해지는 듯하다. 그동안 육지부의 석장승 및 벅수와 돌하루방을 연관짓는 이들이 의외로 드물었다. 정의 고을에서는 돌하루방을 지금껏 ‘벅수머리’로 불러왔단다. 육지부의 벅수와 상통하는 말이 아닌가. 벅수가 전남, 경남 일대에 가장 많이 산재하므로 돌하루방도 남해바다를 건너온 전승물이 아닐까, 물론 제주도 사람들의 남방전래설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제주도의 옛 고을에서 지금껏 ‘벅수머리’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무슨 근거로 예사로이 넘길 것인가.
석장승이 많기로 소문난 지리산 일대, 남원시에서 지리산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주천면 호기리에 돌미륵 장승이 1기 서있다. 1850년 마을민의 현몽에 의해 논에 묻혀 있다가 발견되어 1987년도에 현 위치에 세워졌다. 첫눈에 누구나 돌하루방과 비슷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 돌미륵 장승을 보면 돌하루방과 흡사한 벙거지를 쓰고 퉁방울눈에 주먹코다. 육지의 일반 장승과는 사뭇 다르다. 돌하루방의 친척을 뭍에서 찾아냈다고나 할까
조선 후기 전국에 넓게 퍼진 석장승, 또는 벅수와 같은 민중 돌조각품과 제주도의 돌하루방은 비슷한 점이 많다. 그의 조형적 상통점을 따져보면 주먹코, 왕방울눈, 파격적인 해학성, 푸짐한 표정--- 서로 닮은 게 하나 둘이 아니다. 각각의 민중적 조형물들은 나름의 풍토속에서 자라나왔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 성격은 하나로 보인다. 소박하고 질박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친근한 조형성이 말이다.

3) 제주자생설
제주도 돌하루방이 조선 후기 장승문화에서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오늘날 같은 돌하루방의 조형성이 갖추어지기까지는 제주도 본토의 토착적 요소들이 총화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화란 어떤 영향관계에 놓였다 하더라도 일방적인 경우는 없다. 늘 상대적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게 마련이다. 국가적으로 읍성을 축조하면서 육지부의 석상과 같은 의미에서 돌하루방을 세운 것은 분명하나, 토착적인 제주도 석상 전통이 그 밑바탕을 이루었음은 분명하다. 제주도에는 돌하루방의 여러 친인척이 살아왔다. 농사를 주관하는 마을신인 조천석(朝天石), 제주시 동서쪽을 지켜주는 동자복, 서자복 마을 미륵, 동자석, 거욱대 따위가 그것이다. 모두 현무암을 깍아 만든 점에서도 돌하루방과 정서적, 조형적 연대를 보여준다.
조천석은 농사신으로 돌하루방과 전혀 다른 형태이다. 그러나 돌하루방말고도 다양한 석상 전통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물의 하나이다. 동자석은 말 그대로 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아이 형상의 석상인데 쌍으로 서서 무덤을 지킨다. 거욱대는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다. 돌하루방이 읍성 경계와 수호신 기능을 했음과는 다르게 거욱대는 육지부의 석장승과 비슷한 기능으로 돌하루방의 창조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풍부하고 다듬기 쉬운 용암석을 이용한 다양한 이들 석상 전통들이 큰 물줄기를 형성하면서 전해오다가 육지부의 석상과 결합, 제주도만의 독특한 돌하루방 문화를 낳은 것으로 보여진다.
3. 돌하루방의 종류 및 숫자
제주도의 돌하루방은 똑같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지역마다 다르다. 정의와 대정 마을의 것은 몸집이 제주목것에 비하여 작지만 얼굴과 코가 유난히 크다. 머리에는 벙거지를 연상케하는 모자가 쓰워져 있다. 얼굴에 비하면 몸집이 작아 불균형을 연출하지만 작고 조신해 보이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제주도 기념품으로 사가지고 오는 돌하루방은 대개 제주목 것을 닮았다, 정의와 대정의 귀여움이 넘치는 돌하루방 마스코트를 사고 싶은데 제무목 출신뿐이다. 자본주의 대량생산이 낳은 병폐다.
돌하루방의 전체 숫자는 제주목(제주시)21기, 대정고을 12기, 정의고을 12기,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2기(제주시에서 옮김) 모두 합해서 47기이다.
4. 돌하루방의 기능
돌하루방의 기능은 무엇일까?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제주시의 문화유적>(1992년)의 한대목을 인용하여 보자
‘주민들의 돌하루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면, ’문지기 노릇을 한다.‘ ’수위, 방어의 노릇을 한다‘. ’묘소의 동자석과 기능이 같다.‘ 거오기(방사탑)를 촌락 동산에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사(防邪)의 기능을 한다.’ 수호신격이다.‘ ’주현청 소재지의 존엄성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등등이다. 이런 생각 속에 돌하루방의 주술종교적 기능, 수호신적 기능, 위치 표지 및 금표적 기능이 다 들어 있으며 육지부의 장승이나 거욱대의 변형으로 제주도 특유의 종교와 문화를 표현한 석상을 축조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제주도민들에게 돌하루방은 단순한 읍성수호신의 의미만 가진 게 아니다. 이제 돌하루방은 제주도의 문화적 상징이자 자부심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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