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항의 아름다운 저녁노을
홍천 은행나무숲을 나와 구룡령을 넘어 한계령으로 향한다.
한계령을 오르는 길은 단풍관광을 온 관광버스와 승용차로 인해 꽉 막혀 있다.
오색약수와 주전골에서 단풍을 구경하려고 생각중이었는데....
그곳에 온 관광들의 차량으로 길이 막혀 있으니 그 생각은 접기로 한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밀려있는 오색약수를 지나
한계령까지의 단풍 드라이브는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관심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한계령에서 다시 오색으로 내려가기엔 길이 너무 막혀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미시령을 넘어 설악산으로 향한다.
하지만 미시령을 넘어 설악동으로 들어가는
길 또한 관광을 온 차량으로 꽉 막혀 있다.
설설 기다시피하여 설악동 입구까지 간 시간이 5시가
다 되어 들어가봐야 소용이 없겠다 싶어 차를 돌린다.
속초에서 1박 후 아침 다시 들리기로 하며....
속초항 근처에 숙소를 정한 후 속초항 및 아바이마을
주변의 저녁 풍경을 담아본다.
↓구룡령에서 바라본 단풍....

↓달마봉에서 내려다 본 속초시 전경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구호준
9월9일 속초항 해관을 넘어설 때는 이미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9월8일 오전 10시에 훈춘에서 버스를 타고 러씨야 자루비노에서
다시 동춘호를 갈아타고 16시간으 항해를 했었다. 가없는 바다를
넘으면서 아파야 했던것은 남북분단의 설음이였었다. 버스를 타고
두만강을 넘어 서울을 오면 몇시간이면 되련만 분단의 아픔은 결국
낯설은 러씨야 땅까지 밟게 해야 했던것이다.
헌데 그 아픔을 지우기도 전에 속초항에서 외국인이란 이유로 다시
배에서 두시간을 넘게 줄을 서있어야 했던것이다. 중국조선족이나
러씨야 고려인이 30여명인데 수백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배에서
내린 뒤에야 우리를 내리라고 하는것이였다.
두번째로 하는 한국행, 어쩌면 한국땅을 밟기 전부터 이미 나는
고국이 아닌 외국땅을 찾았다는 또 다른 치유할수 없는 상처를 받고 있었다.
짐을 챙겨갖고 힘들게나마 해관을 나서는데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김우영!
지난 8월 중국에서 있은 한.중문화교류에 서로 만났었던
한국의 유능한 소설가가 직접 속초까지 마중을 나와준것이였다.
허나 김우영소설가보다는 그 옆에 생화를 들고 서있는 여인의 모습이였다.
김우영의 부부수필에서 이미 많이 얼굴 익혀왔던 그의 부인 김애경여사였다.
"구호준선생님이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꽃을 안겨주면서 밝게 웃어주는 김애경여사의 앞에서
할말을 잃고 허둥대야 했다. 비록 멀리 중국에서 찾아온 손님이라고
하지만 한낮 초로에 묻혀있는 나를 위해 부부가 동반하여 왔다는데서
찾아든 감동을 어찌 입으로 말하고 글 몇줄로 표현할수 있을가?
"고생했겠어요. 식사를 못했겠는데 강릉가서 식사부터 할가요?"
김우영선생님은 중국에서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그렇듯 자상하고 따스하다.
"네."
배에서 몇시간 줄을 서있고 해관을 넘느라고 또 시간을 허비하다보니
점심도 먹지 못했었지만 별로 시장기를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김우영소설가 부부를 만나는 순간에 나는 이미
그들의 마음 전부를 먹은것이 아니였을가?
사모님이 직접 운전을 하면서 우리는 강릉으로 향했다.
"사모님을 홀로 중국에 보내지 마세요.
넘 이쁘니깐 한국 돌아오지 못할거예요."
평소에 별로 롱담을 못하는 나지만 사모님의
얼굴을 훔치면서 가벼운 우스개 한번 던져본다.
"참,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아도 잘 접대해 드릴건데요."
부인은 내 롱담을 가볍게 웃어 넘겨준다.
김우영소설가와의 두번째 만남, 부인과의 첫 만남이였지만
나에게는 자상한 형님이나 누님을 만난듯 마음 편하다.
차창으로 흘러가는 속초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인연의 소중함을 가슴에 새겼다. 분단의 아픔이나 살아가는 환경이
서로가 틀려도 민족은 하나, 마음도 하나니
정으로 쌓아가는 우리가 되여 한다는것을....
↓아바이마을 해변....



속초항에서 해넘이를....










낚시를 하는 분들의 실루엣이 멋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