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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레이트복싱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헤비피스트
신장 169cm
통산 전적 19전 17승 1무 1패
결정타 레프트 스트레이트
프로데뷔 78년 12월 7일
KO율 50%
스타일 파이터 (왼손잡이)
1982년 WBA 라이트급 챔피언전에서 경기중 사고로 사망.
1955년 전북 옥구군 옥산면 팔봉리 출생
1972년 속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무일푼으로 서울행 버스를 타고 상경
1978년 12월 박명수 선수를 4회 판정으로 누르고 프로 선수로 데뷔
1980년 7월 필리핀 원정에서 토니 후로렌스를 9회 KO로 제압
1980년 12월 이필구를 판정승으로 이기며 한국 라이트급 타이틀 획득
1982년 2월 김광민을 판정승으로 이기며 동양 챔피언 타이틀 획득
1982년 7월 일본 '이시도 다다오'를 5회 KO로 누르며 세계 챔피전 전초전에서 승
1982년 11월 LA에서 맨시니와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 경기 중 사망.
[사망원인 및 그에 대한 기록]
1982년 11월 14일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팰리스호텔에 마련된 특설 링에서 도전자 한국의 김득구(金得九) 선수와 챔피언(선수권자)인 미국의 맨시니(R. Mancini) 선수 간에 세계권투협회(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이 열렸다. 두 선수는 처음부터 격렬하게 맞붙어 긴장된 경기를 펼쳤다. 총 15회로 진행되는 이 경기에서 맨시니는 한때 KO(녹아웃) 직전까지 몰리기도 하였으나, 14회 시작 공이 울린 지 19초가 되면서 챔피언의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을 강타하였다.
김득구는 링에 쓰러진 뒤 레퍼리가 카운트 10을 헤아릴 무렵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일어섰으나 다시 링 바닥에 쓰러진 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나흘간의 뇌사상태 끝에 결국 심장과 신장을 2명의 동양계 미국인에게 기증한 뒤, 관에 실려 고국으로 돌아왔다.
김득구 선수의 사망으로 인해 세계 권투계에는 거센 논쟁이 일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권투의 잔혹성을 지적하였고, 미국 하원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청문회까지 열렸다. 결국 세계권투협회를 비롯한 국제 권투기구들은 15회 경기를 12회로 줄이고, 스탠딩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들을 마련하였다. 또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의 복싱 붐도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는데, 1897년 월터 크루트가 권투경기로 사망한 이후 김득구 선수가 사망할 때까지 총 340여 명의 권투선수가 사망하거나 식물인간이 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이름-김득구
"저는 권투를 했기 때문에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권투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더라면 주먹을 아무데서나 휘두르는 깡패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결국 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앞으로도 또 어떤 고난이 닥친다 해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 챔피언 승리 후 첫 인터뷰 中-
1955년, 전북의 한적한 마을에서 태어나 강원도 속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득구.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재혼, 이복형제들과의 불화 등 그의 삶은 어려서부터 험난했지만 14살 되던 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다.
서울로 상경 후, 김득구는 동아 체육관에서 김현치 관장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고 3년 간 아마추어 활동을 하다 1978년 4라운드 판정승으로 프로 권투계에 데뷔한다. 그리고 밤낮 없는 연습과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순차적으로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이 되며 승승장구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운명의 여인 이경미(가명)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인기관리를 위해 비밀 약혼식을 올리고 이들의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그로부터 1년 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얻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간다.
드디어 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 마련된 특설링에서 레이 붐붐 맨시니와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을 갖는다. 맨시니가 절대 우세하다는 여론의 예상을 뒤집고 대등하게 싸우던 왼손잡이 김득구는 불행히도 14라운드에 맨시니가 던진 결정타를 맞고 쓰러진다. 그리고 나흘간의 뇌사 상태 끝에 장기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죽음 후, 전 세계는 권투에 대한 뜨거운 논쟁에 휩싸였고 세계적인 비난 여론을 견디지 못한 국제권투기구들은 15회 경기를 12회로 줄이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보호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작은 관을 하나 준비했다. 싸워서 지면 링에서 걸어나오지 않겠다'
`야생마' 김득구가 세계복싱협회(WBA) 라이트급 챔피언 `붐붐' 레이 맨시니에 도전하기에 앞서 밝힌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이 결의를 실행에 옮긴 채 이국만리 타향에서 불귀의 객이 돼 버렸다.
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호텔.
한 무명의 동양인이 미국의 강타자 맨시니를 맞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화끈한 경기로 복싱 관계자들과 관중의 손에 땀을 쥐게하고 있었다.
김득구가 1회 공이 울리자 마자 맨시니에게 저돌적으로 파고들어 불꽃튀는 대접전을 벌였고 좌우 훅과 원투 콤비블로를 터뜨리는 등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3회에는 오른손 받아치기를 성공시켜 맨시니를 휘청거리게 만들었고 9회까지 심판채점은 2명이 동점, 1명이 맨시니의 1점 우세로 돼 있을 정도로 김득구는 적지에서 무서운 파이팅으로 선전했다.
도전자답게 너무 잘 싸운 한판이었고 언론들은 미국프로복싱 사상 가장 화려한 경기였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의 갈림길이었던 10라운드.
맨시니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면서 엉겨붙자 김득구는 상대 뒤통수를 가볍게 쳤고 리처드 그린 주심은 반칙을 선언했다.
너무나 잘 싸우던 김득구는 다소 흥분된 상태에서 경기를 펼쳐 11회에는 오른손 단발을 맞고 왼쪽 무릎을 꿇었으나 주심이 보지 못해 그냥 넘어가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실점을 의식한 김득구는 14회 공이 울리자마자 결판을 낼듯 뛰어나가며 오른손 훅을 날렸으나 빗나가면서 맨시니의 강한 오른손 받아치기를 허용했다.
김득구는 다시 왼손 훅을 노렸으나 빗나갔고 맨시니는 결정타인 오른손 훅을 턱에 적중시켜 다운을 뺏었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로프를 잡고 일어났지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주심이 경기를 중단, 14회 19초만에 맨시니의 KO승을 선언했다.
이 때까지 정신력으로 버티던 김득구는 KO패가 선언되자 바로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져 산소호흡기를 부착했다. 상대의 오른손 훅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김득구는 뇌의 상층부에 심한 충격을 받았고 거의 꽂꽂한 자세로 캔버스에 뒤로 넘어지면서 뒷머리가 바닥에 부딪혀 충격이 가중된 것.
이후 병상에서 4일간의 사투가 이어졌고 챔피언 벨트를 매고 금의환향 하려던 김득구의 야망은 끝내 산화되고 말았다.
'챔피언벨트를 차지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서 돌아오겠다'며 알루미늄으로 된 모조관까지 준비했던 그는 진짜 관속에 잠든 채 귀국했다.
가난으로 배우지 못한 한을 두주먹으로 풀기위해 낙옆이 지는 76년 가을 어느날 동아체육관을 찾았던 김득구는 6년간의 복싱인생과 23년의 생애를 죽음으로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한국 프로복서의 투혼의 상징으로 세계프로복싱사에 값진 이름을 남겼다.
그는 사나이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건다'는 신화를 남겼다.
높이 날고만 싶었던 `작은새' 김득구의 사망은 또 여러가지 파급효과를 낳아 더 큰 주목을 받았다.
WBA와 WBC는 15라운드 경기를 12라운드로 바꾼 것을 비롯, 매라운드후 휴식시간을 60초에서 90초로 늘리고 스탠딩다운을 강화해 선수보호에 적극 나섰다.
라스베이거스가 속한 네바다주는 복싱을 계속 개최해야할지 여부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머리를 때리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라며 복싱반대운동도 일어났다.
김득구에게 얻어 맞아 왼쪽 눈과 오른쪽 팔을 심하게 다친 맨시니는 부상 정도가 심해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다.
(서울=연합뉴스) 김대호 기자
[그의 일대기]
김득구선수는 강원도 거진에서 여느 복서들과 마찬가지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김득구선수는 초등학교시절 육상선수로 활약하지만 늘 굶주림에 못이겨 한두번 쓰러진게 아니라더군요.
어떻게든 가난에서 벗어나보려던 김득구선수 어머님이 재혼을 하시게 되는데 새로운 이복 형제들이 막내인 김득구선수를 이 동네 저동네 데리고 다니며 상대방 아이의 나이와 체격에 관계없이 싸움을 붙혔다고 합니다.
어린 김득구선수는 새로운 형제들이 시키는대로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체격이 큰 애들과도 정말 물불을 안가리고 싸워댔답니다.헌데 이상하게도 김득구선수는 어릴적부터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도 코피가 안났다고 하더군요.(김득구선수가 선수시절에도 코피 안나기로 유명했습니다.)이렇듯 김득구선수는 어린나이부터 조금은 거칠게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재혼을 해도, 또 세월이 흘러도 가난에서 벗어날수 없자 김득구선수는 먼 친척이 살고 있는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김득구선수의 또 다른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빵공장 종업원부터 시작해 구두닦이,버스안에서의 볼펜장수등 거의 안해본 일이 없을정도 였답니다.그러나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김득구선수는 그 와중에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는군요.(선수시절에도 김득구선수의 독서량은 엄청났다고 합니다.)검정고시로 천호상고에 입학한 김득구선수는 학교 아마츄어 복싱부에서 약간의 기량을 쌓고 당시 노량진(나중에 퇴계로로 이전)에 있는 복싱도장인 동아체육관(관장:김현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데 이때부터 김득구선수는 본격적인 프로복서의 길을 준비하게 됩니다.
당시 동아체육관은 故전호연씨가 회장으로 있는 극동프로모션과 양대산맥을 이루며 국내 프로복싱계를 주도하는 굴지의 복싱도장으로써 그 유명한 박종팔,황준석,김환진,이승순,유명우,최문진등의 유명선수가 소속되어 있었습니다.이들 선수중 김득구선수는 맏형인 김환진(전WBA주니어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을 무척 좋아했었답니다.특히 김환진은 김득구선수의 모든 고민과 이야기를 들어주며 많은 도움을 준 선배라더군요.
김득구선수는 김현치관장의 지도를 받으며 착실히 차근차근 성장하면서 마침내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에 오르게 됩니다.국내챔피언이 된후부터 김득구선수는 서서히 매스컴에 주목을 받기 시작하며 복싱팬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는데 김득구선수가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계기가 바로 OPBF동양 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해 예상을 뒤엎고 챔피언인 탱크 김광민을 심판전원일치 판정으로 물리치며 동양챔피언이 되면서부터 입니다.
여기서 탱크란 닉네임의 김광민은 어떤 선수였나?를 잠시 살펴 보겠습니다.아시는 분도 많으시리라 보는데 김광민은 동생인 광수와 광섭이 모두 복서였습니다.스피드는 무진장 떨어지나 정말 저돌적이고,끈질기며,맷집좋은 파이터중의 파이터였습니다.특히나 김광민은 동양챔피언이 되기전 문화 체육관에서 벌어진 국내 라이트급 라이벌 4강전에서 고난도의 테크닉을 구사했던 김태호를 누르고 결승에 올라 핸섬보이 이이다노를 강력한 양훅으로 잠재운 강타자 오영호를 제압하며 한국 라이트급의 제1인자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세계타이틀(수퍼페더급과 라이트급)에도 두번이나 도전한 경험이 있는 백전노장이었습니다.
김광민과 한번씩 맞붙어본 경험이 있는 선수들은 한결같이 "다시는 저 새끼랑은 시합 안한다"라고 할정도로 김광민은 저돌적이고 지겹도록 달라붙는 스타일의 선수였지요.
김광민VS김득구선수의 동양타이틀전겸 라이벌전은 복싱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빅이벤트였습니다.김광민보다 스피드에 앞선 왼손잡이 김득구선수는 시종일관 김광민을 사정거리를 두어가며 "30초공격" 즉,2분30초정도는 아웃복싱을 구사하다 라운드 종료30 여초를 남기고 연타공격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도해 탱크 김광민을 완벽히 누르고 동양챔피언에 오릅니다.전 지금도 그 경기가 생생히 기억나는데 복싱을 머리로 해야된다라는걸 그때 깨닫게 되더군요.
김득구선수의 스타일은 왼손잡이 파이터였는데 엄청나게 뛰어난 복서는 아니었습니다.주먹은 그다지 강하질 않았으나 연타능력이 매우 좋아서 찬스를 잡으면 끝을 보는 스타일이었습니다.특히 짧게치는 주먹(숏블로)이 일품이었지요.맷집은 자타가 공인할정도로 좋았고요......
순서대로 한국챔피언과 동양챔피언이된 김득구선수는 승승장구 하며 또 한명의 국내 라이벌 강타자였던 유흥석과의 라이벌전도 기대되었으나 이미 김득구선수는 세계랭킹에 진입해 있기에 라이벌전보다는 세계타이틀에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동양라이트급 타이틀을 두,세차례 방어해가던 김득구선수가 드디어 WBA라이트급에 도전하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상대는 미국의 강타자 백인 레이 맨시니였습니다.
세계타이틀 날짜가 잡힘과 동시에 김득구선수는 김윤구,조희동 두명의 트레이너와 함께 세종호텔에 캠프를 치며 운동선수로써도 감당키 어려운 강도높은 트레이닝을 받게됩니다.가끔 TV 스포츠뉴스 시간에 나와 인터뷰 할때의 김득구선수의 모습은 정말 애처로울 정도로 말라있었습니다.(그 당시 깡마른 얼굴에 너무나 조리있게 말잘하던 김득구선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상대인 챔피언 레이 맨시니는 상당히 저돌적이고,주먹이 강한 백인 선수고 헝그리 복서가 아닌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선수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김득구선수가 만족할만한 훈련 성과를 거두고 김현치 매니져,그리고 김윤구트레이너와 함께 맨시니와의 세계타이틀을 위해 김포공항을 떠나던날 인터뷰에서 " 만일 패하면 링에서 살아서 내려오지 않겠다"라는 비장한 말을 남기는데 이때 이미 사투는 예견되어 있었습니다.어떤 분들은 김득구선수가 관을 짜가지고 갔다라는 말을 하시는것 같은데 저도 그 얘기는 많이 들었으나 그게 사실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라스베이가스에 도착한 김득구선수는 호텔 방에다 " 맨시니 너를 죽인다 "라는 섬짓한 문구를 써서 벽에 붙히며 전의를 불태웠고 그곳에서 마련해준 복싱짐에서 스파링을 할때도 온갖 괴성을 지르며 화이팅 넘치게 주먹을 휘둘렀답니다.복싱전문가들과 도박사들은 이 시합의 예상을 9대1 이나 8대2정도로 맨시니의 압도적인 우세를 점쳤다가 시간이 갈수록 김득구선수의 화이팅이 넘쳐흐르자 경기 전날에는 6대4까지 좁혀졌다는 얘기가 있습니다.경기 전날에는 김득구선수를 비롯한 스탭진과 MBC중계방송팀이 함께 호텔방에서 미국 마이에미 오렌지볼에서 벌어진 WBA주니어 웰터급 타이틀매치 챔피언 신시네티의 폭풍 아론 프라이어VS 도전자인 링의 귀공자 알렉시스 아르게요와의 세기의 대결을 다같이 지켜봤다고 합니다.
김득구선수는 아르게요의 승리를 점쳤다고 하는데 결과는 아론 프라이어의 일방적인 KO승이 되어 김득구선수가 몹시나 아쉬워 했다더라구요.(나중에 이철원 아나운서께서 이 얘길 하신 걸 제가 기억합니다.)
드디어 운명의 1982년 11월14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가스 시져스 팰리스 호텔 특설링.(당시 위성중계는 MBC였고 캐스터는 이철원,해설은 장경 기자였는데 나중에 밝혀졌지만 완전 생중계가 아니고 경기가 끝난후 한,두시간인가 지나고 방송해주며 생중계라고 국민들을 속인것이래요.그래서 MBC가 엄청 비난 받았습니다.)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초의 라이트급 세계도전이자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라스베이가스 시져스 팰리스호텔 링위에 선 헝그리 복서 김득구선수와 기량도 기량이지만 백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더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있던 챔피언 레이 맨시니는 1회전 부터 탐색전없이 서로의 간격을 50 여센티이상 거리를 두지않고 난타전을 전개,시져스팰리스 호텔에 운집한 관중들과 국내에서 일요일 오전 손에 땀을쥐며 테레비를 시청하던 온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갑니다.
특히 김득구선수는 왼손잡이 이기때문에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링 중앙에서 치열한 난타전을 벌였습니다.특히 김득구선수의 왼손 훅과 맨시니의 오른손훅이 서로의 안면을 강타 할때마다 양 선수의 고개가 심하게 젖혀질 정도의 무서운 난타전 이었습니다.
맨시니역시도 챔피언이었지만 도망을 간다거나 고의로 홀딩을 한다거나 하는 치사한 모습은 전혀 없었지요.
그러나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맨시니보다 나이가 많은 김득구선수의 발이 무뎌짐과 동시에 안면이 심하게 부어올랐습니다. 물론 맨시니의 얼굴도 많이 부어올랐지요.종반에 접어들 무렵 이미 점수에서 열세인것을 인식한 김득구선수는 카운터로 받아치며 챤스를 잡으려고 애를 써봤으나 어느덧 13회 종료 공이 울립니다.
판정으로 가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던 김득구선수는 운명의 14회 공이울리자 마자 링 중앙으로 튀어나오다 이때 맨시니의 짧은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허용하며 뒷걸음치다가 다시 연타를 맞고 쓰러집니다.미국 관중들은 환호했고 테레비를 시청하고 있던 우리 국민들은 아무런 말도 할수가 없었습니다.쓰러진 김득구선수는 끝까지 일어나 보려고 링을 잡고 안간힘을 썼으나 안타깝게도 또다시 쓰러지며 병원으로 후송됩니다.
그날 밤 9시 뉴스에 뇌를 심하게 다친 김득구선수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다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복싱팬들은 물론 온 국민이 충격에 빠지게 되지요.미국병원에서 최선을 다해 뇌수술을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미국거주 한국의 한의사들이 침요법으로 끝까지 김득구선수를 살려보려고 애를 썼으나 3일후인가 4일후 김득구선수는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김득구선수의 홀어머니는 망연자실했고 전 국민이 슬픔에 잠기었습니다. 여기에 더더욱 가슴져미는것은 김득구선수의 약혼녀가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제 기억으론는 그 당시 김득구선수가 26세인걸로 알고 있는데 복싱을 하려고 나이를 약간 줄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진짜 나이는 29살 정도 였다고 합니다.
비록 김득구선수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남긴것은 너무도 크고 훌륭했고 또 멋있었습니다. 그의 후배복서들 뿐아니라 고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특히나 많은힘을 주었습니다. 김득구선수가 세상을 떠난 후 태어난 아기가 벌써 성인이 되어 있을텐데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하고 유명했었는지 알고는 있을 지 모르겠군요.......
자료출처:RING SIDE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