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낙인)
갈6:1~18
대만 신학자 C.S. 송(송천성)은 장영대학교수 입니다. 세계적인 신학자인데 이분은 성경을 이야기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고 합니다. 성경 속에 들어 있는 그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이고 불교의 상징은 꼬부라진 십자가이지만 연꽃이 꼬부라진 십자가보다는 더 불교적인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상징의 꽃은 백합화이지만 불교의 연꽃만큼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독교의 상징마크는 십자가입니다. 대만의 C.S. 송 교수는 불교의 상징인 연꽃과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비교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연꽃은 물 위에 떠 있으면서 물결에 따라서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그래서 자연의 변화에 자신을 순응하면서 적응시키되, 결코 자연을 거역하거나 충돌함이 없고, 매우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서 십자가는 땅위에 튼튼히 굳게 버티고 서 있다. 반석 위에 서 있으면서 땅이 갈라지고 지진이 일어나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연꽃처럼 환경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어떤 환경에 휩싸여서 따라가거나 변질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거기에 적응하고 순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고하게 십자가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하나님을 섬기며 나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합니다. 골고다 언덕위에 그려져 있는 십자가 성화 그림들을 보면 대부분 검은 구름과 더불어 폭풍이 휘몰아치는 언덕위에 나란히 십자가 3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그림들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기독교는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고난과 역경과 죽음 앞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서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정신이고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고 절대적인 종교이지만 타 종교와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십자가의 정신이 아닙니다. 세계사 속에 십자군전쟁이 있었습니다.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젊은 기독교인들이 전쟁에 참여하여 적군을 무찌르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무지한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 꼭두각시 노름에 이용당한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기독교가 반공이데올로기에 노예가 되어서 무조건적으로 북한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말도 이승만이가 반대세력을 척결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용어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이 만든 대통령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려고 하면 그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를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애국자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애국자가 아닌 사람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갑니다.
이북에 의해서 2,25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정부는 총 6차례 발표가 있었습니다. 6월25일 낮 12시 국방부 담화문이 있었고, 6월 26일 새벽 6시에 무초(John Muccio) 미국 대사의 입장 발표가 있었고, 아침 8시에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생방송이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담화는 없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여 이틀이 지나고 3일이 다 지나갈 무렵 6월 27일 밤 10시에 겨우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라디오방송을 통해서 밤10~11시까지로 3번 반복 방송되었다고 합니다. 이 방송을 작성한 방송국이 서울이 아니라 대전 KBS 방송국입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3시에 특별열차를 이용해서 대구까지 피난갔다가 주변 사람들이 너무 멀리 왔다고 하자 다시 기차를 되돌려서 대전역에 내려서 KBS 방송국 담당자들을 불러서 녹음을 해서 방송을 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말로 녹음을 한 것입니다. 자신은 150만 서울 시민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쳐서 대구까지 갔다가 대전까지 도망친 사람이 이렇게 거짓말로 방송을 녹음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국민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반공이데올로기로 반대자들을 좌파니 빨갱이로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도 북한 식당종업원들의 집단탈출 망명을 공개하며 주도한 국정원이 수세에 몰리자,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려고 하자 국정원이 탈출자들을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북에서 탈북자송환을 요청하며 강하게 나오고 세계여론과 국내 여론이 불리하게 되자 진실을 밝히려는 국민들을 이북에 동조하는 국론분열자로 박근혜 대통령이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거짓으로 경영이 되어서는 결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갈라디아서의 결론부분입니다. 1~에 형제가 죄악의 길을 걷고 있으면 동조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 주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 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7~에서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이말 뜻은 거짓말 하지 말라. 일시적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고, 세상은 속일 수 있어서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은 우롱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인간들에게 조롱을 당하거나 우롱당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짓말을 하게 되면 일시적으로는 위기를 모면하고 벗어날 수 있지만 영원히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8~말씀 육체 물질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물질과 함께 썩어지고 성령, 믿음을 좇아서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영생을 거둔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에서 십자가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 줄 것은 십자가 정신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바로 희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밑에서 내 자신은 죽어서 없어지고 새롭게 창조되어 져야한다고 강조 합니다. 그리고 17절에 바울 자신은 십자가의 흔적 예수님의 상처자국을 지니고 다닌다고 합니다. 엣날 성경에서는 예수의 흔적이고 했습니다. 흔적[痕跡] 흉터痕, 자취跡입니다. = 어떤 일이 진행된 뒤에 남겨진 것들. 혹은 그 자취= 무엇이 시간적 혹은 공간적으로 지나가거나 있다가 남기고 간 흔적. 형사범들에게 흔적은 증거자료가 됩니다. 뱀이 지나간 흔적이 있고 짐승들이 지나간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흔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티그마타'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들에게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위하여 쇠를 달구어서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 낙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 낙인이 찍혀 있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육체적 고난으로 인하여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의 정신 십자가의 정신으로 물러서지 않고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극복(승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온 몸에 예수의 흔적,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라고 하는 상처 흔적이 있었지만 사도바울에게는 십자가의 낙인, 예수님의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의식을 통하여 그 흔적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증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할례는 십자가의 낙인은 아닙니다. 할례는 흔적은 될 수 있지만 내가 남기는 것이기 때문에 낙인은 아닙니다. 낙인은 스스로 찍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혹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찍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흔적, 예수의 상처자국은 하나님이 나에게 찍어준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나에게 찍어준 것이 낙인입니다. 낙인이 찍히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것입니다. 사전적인 뜻은 “씻기 어려운 부끄럽고 욕된 평판을” 낙인 찍혔다고 합니다. 나와 여러분들은 죄인으로서 하나님 사랑의 포로가 되어서 용서받고 사랑의 종으로 하나님에게 예수님에게 낙인찍힌 종들이고 노예들입니다. 종과 노예들은 자기의 삶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 삶과 행복과 안일을 추구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초기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낙인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00교회 목사라고, 장로라고,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낙인이 없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희생입니다. 희생을 각오하고 내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비유하신 밀알의 정신입니다. 밀알 하나가 이 세상 사회 속에 떨어져서 썩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내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을 각오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살다가 고난을 당하거나 받게 되는 마음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흔적이고 상처이며 하나님이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내 것이라고 인을 쳐주신 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상처자국을 온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의 흔적, 낙인의 상처와 아픔을 한 두 개 정도는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016년 7월 3일
푸른교회 담임목사 박 영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