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친 우한용선생의 20221204일 "양명학에 대한 만상" 이라는 글을 보고.
양명학의 극단적 성향의 이지李贄(이탁오1527-1602)는 '분서焚書'(읽고 태워버릴 책)에서 양명학의 진수인 童心說을 논한다.
夫旣以聞見道理爲
부기이문견도리위
心矣則所言者皆聞
심의즉소언자개문
見道理之言非童心
견도리지언비동심
自出之言也
자출지언야
무릇 이미 견문과 도리를 마음으로 여긴다면, 말하는 바의 것은 모두 견문과 도리의 말이요, 동심에서 스스로 나오는 말이 아니다.
견문과 도리를 마음으로 보는 입장이 성리학이다. 동심은 인간 본성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인간의 왜곡된 경험이 인간본성인 동심을 왜곡시킨다. 동심은 良知良能이다.
이 글을 읽다보니, 언듯 얼마 전에 제가 올린 맹자 관련 글이 생각이 난다.
여기에 20221004에 쓴 글 전문을 그대로 옮긴다. 이로 보면 양명학 전통의 뿌리는 맹자에게서도 찾아질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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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맹자의 위대함을 이 문구에서 느낀다. 두고두고 되새겨볼만하다.
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대인자부실기적자지심자야.
(孟子 離婁 下 12장)
(赤붉을/벌거둥이 적)
큰 이라는 것은 (어릴 적) 벌거숭이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장자의
吾喪我 개념에 맞먹는다.
예수도
니체도
하이데거도
싸르트르도
비트겐슈타인도
소크라테스도
톨레도
탁낫한도
달라이 라마도
석가도
공자도
헤라클레이토스도
이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赤子之心이라 했으니 본성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어떤 이가 말했다. 나는 그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후 곰곰히 되씹어보니 여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유학에서 본성하면 性善이니 性惡이니 하는 것이 언필칭 따라나온다. 이와 더불어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따라붙게 마련이다.
이게 문제이다.
이것들을 깨끗이 청소해내지 않으면 다시 구태의연함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
벌거숭이 마음이라!
이런 것들이 말끔히 다 청소되어 흰 백지가 되었을 때의 마음이 벌거숭이 마음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벌거숭이는 아무런 것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벌거숭이다. 마음에 아무런 때도 묻지 않아 純一하다.
이 마음은 석가가 출가하여 삼년이든가 고심하여 얻은 마음의 경지이다.
이 마음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저 지금뿐이다.
지금이 지나면 또 지금이다.
이 마음은 달이 강물에 비치는 것과 같은 경지이다. 달이 구름 속에 사라지면 그뿐인 마음이다. 그 마음은 달이 없어졌다고 안타까워할 줄도 모르는 마음이다. 그래 달을 다시 그리거나 그리워할 줄도 모른다.
이렇게 때가 낀 마음(我)을 다 잃어버린 뒤의 純一한 마음(吾)이다.
吾喪我이다.
(20221204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