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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사투리로 빛어낸 영롱하고 정감어린 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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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숙현|사진 · 김미옥(트래블채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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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을 이해하려면 세가지 코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영랑과 다산 그리고 청자이다.
강진에서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상가 이름이
영랑이요, 그 다음은 다산이다. 안내문의 경우
대개는 청자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영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 남도 교유의
정서가 잘 녹아난 리듬감이 살아있는 시들을
보여준다.
◀ 영랑생가.
뒤편의 대숲과 동백나무,모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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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김영랑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
안방에는 영랑의 초상화,
모란병풍,잘롱, 경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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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랑시어(詩語)들이 살아있는 생가」
강진으로 향하는 들머리. 강진
몇 km라는 사인 옆에 영랑의 생가 표시가 함께
붙어 있다. 강진 초입에서 영랑을 먼저 만나는
격이다. 「영랑」 없는 「강진」을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생가 표시를
따라 가는데 골목길 어귀에 영랑 세탁소가
보인다. 생가 인근에서는 웬만해서는 영랑,
혹은 모란이라는 상호를 달고 있다. 생가는
시내 중심지에서 불과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
황토에 아기 머리통 만한 돌들을 차례로 쌓아
올린 돌담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다. 영랑의
대표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빼곡이 적힌
시비를 지나 문간채를 통과하면 마당과 안채가
보이고 오른쪽에 사랑채가 나타난다. 생가는
영랑이 1948년 서울로 이주한 다음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본디 초가였던 것이 양철
지붕으로 바뀌기도 하고 안채가 변형되고 문간채가
완전히 철거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안채나 사랑채의
경우 기둥이나 서까래 · 대들보 같은
뼈대는 원형 그대로인 데다가 복원공사를 한
지 오래 되어 지금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영랑은
1902년에 태어나 서울로 이주하기까지 46년
동안 이곳에 살았다. 물론 서을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했지만 언제나 고향은 영랑에게 있어 시를
만들어 내던 산실이었다 80여 편의 시 가운데
60여 편을 이곳에서 썼다. 영랑의
시들 가운데 여러 편이 이 집의 구석구석을
모티브로 해서 탄생됐다. 데뷔작인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은 안채 뒤를 감싸고 있는 대숲과
이제는 제법 나이를 먹은동백나무 다섯 그루에서
태어났다. 안채 마당의 우물은 (마당
앞 맑은 새암은)을, 집을둘러싼 야트막한 돌담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장독대와 감나무는
(누이야 내 마음을 보아라)를 그리고 마당가에
심어둔 모란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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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쪽의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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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안 구석구석 영랑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이처럼 그의
시가 된 소재들이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랑은 집 뒤편에 자리한 아담한 북산으로 산책을 즐겨 다녔다.
지금은 주택들이 들어서 예전의 운치어린
숲길은 아니지만 시어를 고르며 사색에 잠기던
영랑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생가
아래쪽에 있는 향토문화관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일반 주택을 개조한 듯 주변 건물과
그다지 구별가지 않은 모습이 자연스럽다.
이층 건물에는 네 개의 아담한 전시실을 마련해
영랑의 시와 사진들을 비롯해 강진의 화가,
시인들의 작품을 전시해 두었다. 영랑의 아름다운
시들을 멋진 글씨로, 조각으로 바꾼 서예가,
조각가들의 솜씨도 볼 만하다. 생가와 향토문화관에는
항상 상주하는 안내인이 있어 영랑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영랑의 결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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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넉넉하고 풍요로운 청자골」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정감
어린 시어로 다듬은 영랑 김윤식.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강진은 따스하고 풍요운 영랑이
툇마루에 대나무로 짠 흔들의자에 앉아 굽어봤다는
구강포는 물이 들고남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시기별로 물때가 다르지만 썰물이면 마량 앞바다까지
훤하게 갯벌이 드러나고 밀물이면 바닷물이
차 들어와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해진다.
강진읍내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해안도로를
달리면 마량을 지나 장흥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
달리면 다산초당 앞을 지나 해남에 이른다.
해안선을 옆에 끼고 달리는드라이브도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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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고려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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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포와 강진만을 바라보기 좋은 곳으로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들수 있다. 영랑과 함께
강진을 대표하는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다산초당은
빽빽한 숲 속에 숨어 있다. 가파른 숲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다산초당이 나온다. 후세에
복원하면서 기와를 올려 초당의 운치는 사라졌으나
고즈넉한 숲속에 호젓하게 들어선 것이 보기
좋다. 유배지라기 보다 별장에 가까운느낌이다.
초당에서 동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가면 다산이
거처했던 동암이 나오고 더 가면 시야가 탁
트인 천일각이다. 다산선생이 울적할 때마다
올라 구강포 내려다보며 시름을 달래던 전망대에
후일 선생을 기려 세운 정자가 천일각이다.
초당에서 오솔길을 따라 만덕산을 넘어가면
백련사에 닿는다. 느긋하게 걸어 한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한적한 산책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봄철이면 길을 따라 동백꽃이 숲을 이뤄 장관이다.
다산은 이 길을 다니며 백련사 해장선사와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백련사는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고찰. 절 마당에서 강진만
전망이 기막히다. 백련사 앞에는 오래된 동백
숲이 펼쳐져 봄철이면 동핵꽃을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홍역을 치르기도 한다. 동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가면 고려청자 도요지가 나온다.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삼흥리에 요지들이 산재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청자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 옛날 방식 그대로 청자를
구워내며 그윽하면서도 신비로운 청자 빛을
재현해 내려고 애쓰고 있다. 강진 청자자료박물관에
가면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기품과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가마를 형상화한 건물 디자인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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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생가
안채 앞마당. 돌을 쌓아 올린 우물과 살구나무,
모란밭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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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
먼저 강진읍내로 가야한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목포,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까지 간다. 목포에서 영산강 하구언을
지나 2번 국도를 따라 강진까지 40여분 소요.
호남고속도는 광주 직전에 있는 광산
IC에서 빠져나와 13번 국도를 타고 나주를
지나 강진까지 1시간 정도 걸린다. 강진 초입부터
영랑 생가 표시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강진
군청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같은 도로상에
있다.
영랑생가 ☎ 061 -430 -36756 향토문화관 ☎ 061 -430 -3907
전국중년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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