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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安東權氏)
□ 권씨(權氏)는 단일본(單一本)인가?
권씨는 모두 본관이 하나라고 한다. 본관이란 성씨가 발상한 고향. 따라서, 한국의 모든 권씨가 단일본이라면 우리 나라에는 안동권씨만이 있어야 한다.
우리 나라에 안동권씨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영가(永嘉)나 화산(花山) 등으로 권씨의 본관을 일컫는 수가 있다. 영가와 화산은 안동의 옛이름이니 본관이 안동과 마찬가지. 개성을 송도나 개경, 송경, 송악 등으로 불러도 다 개성을 일컫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과 같다.
그러나 예천권씨(醴泉權氏)는 다르다. 경북 예천을 본관으로 하는 권씨이기 때문이다.
본디 예천권씨의 조상은 성이 흔(昕)씨였다. 그런데 고려 29대 충목왕의 이름이 흔(昕)으로서 즉위하니 국휘(國諱)가 되어 이를 쓸 수 없게 되어 왕명(王命)에 따라 그 외가의 성 권씨로 바꾸게 되고 본관은 그대로 예천으로 하니 예천권씨가 되었다. 그 시조 권섬(權暹)은 안동권씨의 시조 태사공의 10세 외손이 되는데, 그 어머니가 권씨일 뿐만 아니라 증조모와 5대조모도 권씨였다. 이 예천권씨와 안동권씨는 동성이본(同姓異本)이자 내외손(內外孫) 관계에 있으므로 지금까지 통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예천권씨가 주로 경북의 예천지역에서만 세거하여 왔고, 인구도 안동권씨의 약 3백분의 1밖에 되지 않아 세상에 드러나게 알려지지를 않은 것이다.
또 양주권씨(楊州權氏)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그렇지가 않다. 바른 이름은 안동권씨의 정승공파(政丞公派)인데, 고려 충정왕 때 세자 시절의 공민왕을 따라 귀화한 중국인 학사 권상재(權尙載)가 안동권씨 태사공의 14세손인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의 사위가 되면서 왕상좌(王上佐)란 이름을 임금에게서 받으니 그 후손을 왕상좌파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 개국 후에 정헌공 왕후의 손자대에서 고려의 국성(國姓)인 왕씨에서 본디의 안동권씨로 복성하였는데, 왕상좌파도 고려의 충목왕이 권상재를 총애하여 왕씨로 사성하고 왕후의 사위만이 아닌 아들이 되게 한 뜻에 따라 정헌공의 본손(本孫)이 되니 예천권씨와 달리 안동권씨의 외손이 아닌 본손으로 입적된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양주권씨라 세칭한다고 해서 양주가 정승공파의 세거지이지 본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정승공파와는 우리 모두가 다 계촌(計寸)이 되고 통혼을 하는 따위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이상과 같이 예천권씨와 정승공파는 비슷한 시기에 왕명에 따라 탄생하였고 안동권씨의 외손인 것도 같은데, 전자는 동성이본으로 그 독립성을 유지했고 후자는 정승공 왕상좌가 고려인으로 귀화한 것처럼 그 후손도 권씨의 외손에서 본손으로 귀화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예천권씨가 이처럼 엄연히 있으니 모든 권씨가 단일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작
권행은 신라 말 경애왕 때 신라가 극도로 부패하고 잇단 민란으로 국운이 기울어져 있던 때 경상도의 고창(안동)의 별장을 지내던 지방 세력가였다.
신라 경순왕 3년, 929년 12월에 견훤은 영남 동북의 요충지로서 주변 여러 고을이 모두 고려의 영향 하에 있는 고창군(古昌郡.안동)을 공략하여 신라와 고려의 연결을 끊고 영남지역에서 고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대군을 휘몰아 나왔다. 이 때 신라 고유의 영토인 영남지역은 왕도 서라벌 일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고을이 그 성주의 향배에 따라 고려나 후백제에 항복 또는 부용(附庸)하여 각기 그 지배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 다만 고려에 항복하거나 후백제에 점령되기를 반복할 뿐 신라의 영향력은 거의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동북 영남의 중심인 고창(안동) 고을만은 요지부동으로 신라 종국(宗國)에 충성하면서 3천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적군이 함부로 넘보지 못했는데, 이 곳을 공략하면 일대가 평정될 것이므로 견훤이 이를 노린 것이다.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이 고창을 견훤에게 함락당하면 곧 신라 전체가 후백제에 병탄되고 후백제가 더 막강해질 것이므로 급히 대군을 거느리고 구원하여 이를 저지코자 하였다. 결국 고창 고을을 놓고 후백제와 고려는 자웅을 겨루는 대회전을 다시 벌이게 되었다.
고창 성주는 김선평(金宣平. 김태사로서 안동김씨 시조)인데, 이 때 이 곳의 병마를 기르면서 함께 수호하는 이는 신라의 종실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김행(金幸)과 또 한 사람 고을의 명망있는 존장인 장길(張吉. 장태사로서 안동장씨의 시조. 정필(貞弼)이라고도 함)로서 3인이 그 지주(支柱)였다.
견훤의 대군은 고창을 에워싸고 있고 구원병을 거느리고 온 고려 태조는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싸움에서 불리할 경우의 회군 대책을 의논했다. 2년 전에 공산(公山) 싸움에서 참패했는데, 이번에도 후백제군이 강성하여 여기에서 패하면 죽령(竹嶺)이 막혀 퇴로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었다. 의병이 많아 정병(精兵)이 아닌 고창의 신라군은 외로운 항전으로 상황이 어려웠다. 고려군이 싸움에 밀려 퇴각할 경우는 죽령을 넘는 길이 백제군에 차단되어 사잇길을 마련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 형세를 보고 김행은 '견훤의 부도(不道)함은 의리로 보아 우리가 더불어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바인데, 지금 우리는 소병력이어서 힘으로 보복할 수가 없는 데다 필쟁지지(必爭之地)에 근거하고 있은즉 결국 어육이 되고 말 것이니, 어찌 왕공(王公. 고려 태조)에게 투귀(投歸)하여 저 역적 견훤을 섬멸하여 위로는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고 아래로 민명(民命)을 살려 우리의 통분을 쾌히 씻지 않으리오' 하고는 마침내 김선평 성주와 장길을 설득, 고려 태조에게 귀부(歸附)해 고려군을 맞아들였다.
고창의 요충에서 결사항전하던 신라군을 얻게 된 고려 태조는 의기가 치솟아 후백제군과 싸움을 벌였다. 고려군은 고창 북쪽 10리쯤의 병산(甁山)에, 후백제군은 석산(石山)에 진쳤는데, 거리가 5백보였다. 격전 결과 고창의 신라 의병과 연합한 고려군이 대승했다. 견훤은 대패하여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사로잡히고 죽은 자가 8천에 이르러 그 시체로 냇물이 막혀 거꾸로 흘렀다. 순식간에 일대의 30여 고을이 모두 고려의 것이 되면서 대세가 후백제의 승세에서 고려의 것으로 기울었다.
공적을 의논하고 포상을 행하면서 고려 태조는 김행을 보고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를 밝혀 귀순 하였으니 권도(權道)(형편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일을 행하는 도리)의 적절함에 통달한지라 권도가 있다 할 것이다' 하고 권씨(權氏)로 성을 내리고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동쪽을 안정시킨다는 뜻)로 하며 벼슬을 주어 대상(大相)(고려 초기 재상급 벼슬의 넷째 등급)을 삼았다.
뒤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 봉공수작9封功授爵)(공신을 책봉하고 작위를 내림)할 때에 공에게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의 호를 내리고 작위를 태사(太師)(삼공의 으뜸)로 승차하였으며, 안동고을을 그 식읍(조세를 공신이 받아 쓰도록 한 고을)으로 삼게 하였다.
이에 새로운 '김행'이란 이름에서 '권행(權幸)'이란 이름이 된 공은 태사의 벼슬을 받아 태사공(太師公)으로 불리게 되었고 안동권씨, 즉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권씨의 시조가 되면서 안동 고을의 실제 영주가 되어 이를 그 자손이 세습하게 되었다.
□ 대표적 인물
고려 개국과 함께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안동권씨는 무수한 인물을 배출한다. 고려시대 추밀원부사공을 지낸 권수평(權守平)은 고려사에 청빈한 관리의 표상으로 기록된 인물. 그 아들 권위는 태자의 태사로 권씨가문 최초로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로, 권수평의 증손이다. 찬성사 권단의 아들인 권부(權溥)는 자신을 포함해 그의 아들 5형제와 그의 사 위 3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져서 명성을 떨쳤다. 당대9봉군(當代九封君)은 역 사상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서면서 안동권씨는 3백5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찬란한 꽃을 피운다.
■ 권근(近, 1352~1409) 호 양촌(陽村). 시호 문충(文忠).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고려 공민왕 때 17세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려 우왕 때 성균 대사성, 예의판서 등을 역임. 조선 태조 때 사병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공을 세웠다.
예문관 대제학, 대사성, 의정부 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왕명으로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입학도설'은 후에 이황, 장현광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의 저서로는 양촌집, 사서오경구결 등이 있다.
■ 권제(蹄, 1387~1445) 권근 2子. 호 지재(止齎), 시호 문경(文景).
태종 때 집현전 부제학, 한성부윤을 지내고, 세종 때(1429년) 명나라에 진헌사로 다녀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435년 이조판서에 승진, 1436년 '동국연대'를 편찬하고, 다음해에 예조판서를 지내고, 지중추원사, 지춘추원사 등을 지냄. 1440년 '고려사' 편찬에 참여, 1445년(세종 27년)우찬성이 되어 정인지,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왕에게 바침.
■ 권벌(1478~1548) 시호 충정. 호 충재(沖齎).
고려 중종 때 예조판서를 지냄. 선조초에 좌의정에 추증됨.
■ 권철(轍, 1503~1578)
권율의 아버지. 명종 때 3정승을 두루 지내며 오랜 기간 정권에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허물을 말하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 충장공 권율(慄, 1537~1592) 호 만취당. 시호 충장. 영의정 권철 아들.
임란 때 광주 목사로 금산군 이산사에서 왜군을 대파, 전라도 순찰사로 수원 독왕산성에서 적을 대파하고, 행주산성에서 3만 대군과 싸워 적병 2만4천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행주대첩의 공을 세워 도원수에 오르고 '행주치마'의 유래를 낳음. 정유재란에서도 공을 많이 세워 죽은 후에 영의정 추증.
■ 충의공 권응수(權應銖)
1584년(선조17)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를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을 탈환하고, 병마우후가 되었다. 다시 문경 싸움에서 적을 격파하고,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 방어사에 특진되었다. 그 후 충청도 방어사 겸 밀양부사 등을 역임하고, 1604년 선무공신 2등으로 화산군에 봉해졌으며, 도총관을 겸했다. 좌찬성에 추증, 경북 영천의 귀천서원에 제향되었다.
■ 권협(1542~1618) 시호 충정
임진왜란 때 장령으로 서울 사수를 주장. 1597년 정유재란 때 고급사로 명나라에가서 원나라 군사를 끌어들이는데 성공, 귀국후 호조참의에 오르고 1604년 길창군에 봉해짐. 1607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광해군 때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했다.
■ 권상하(尙夏, 1641~1721) 호는 수암(遂菴). 시호는 문순(文純).
조선의 학자. 송시열의 수제자. 송시열이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되자 이별을 고하고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음. 숙종이 총애하여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이, 송시열로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임. 글씨에도 뛰어남.
■ 권일신(日身, ?~1791)
조선시대의 천주교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의 사위. 남인의 학자로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다 1782년(정조 6년)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1782년 청나라에서 영세 받은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1787년 지금의 명동성당(1898년 축성) 부근 명례방(明禮坊)에서 이승훈, 정약전(丁若銓) 등 조선의 교인들이 모여 직제를 결성하여 조선천주교회를 창립, 주교가 되어 1789년 교우 우모(禹某)를 북경에 보내 북경에 온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이승훈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갔으나 노모 때문에 신앙에 동요가 생겨 배교했다.
■ 권람(權擥)
1450년(세종32) 식년문과에 장원하고, 감찰을 거쳐 다음해 교리로서 <역대병요>를 함께 편찬하던 수양대군과 뜻이 통하여 그의 참모가 되었다.
1453년(단종1) 김종서(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 때에 앞장서서 정난공신 1등으로 우부승지에 특진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발탁되고, 좌익공신 1등으로 대제학에 승진, 길창군에 봉해졌다. 우찬성, 좌찬성, 우의정을 거쳐 1462년 좌의정에 올라 다음해 부원군으로 진봉.
활을 잘 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저서에 <소한당집>이 있다.
■ 권부(權溥)
1280년(충렬왕6) 문과에 급제, 첨의사인을 거쳐 1289년 밀직사, 우부승지, 예빈윤, 지공조, 사림시독학사가 되었다. 1302년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온 후 밀직사사, 도첨의참리를 역임, 1309년(충선왕1) 정조사로 다시 원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에 찬성사 판총부사가 되고, 1313년 영가군에 봉해졌다. 충숙왕 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했고, 첨의정승 판총부사, 영도첨의사사를 지냈으며, 부원군에 진봉,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이 되었다. 일찍이 <사서집주>의 간행을 청하여 주자학 발전에 공헌했다.
□ 병기달권(炳幾達權)과 반경합도(反經合道)
안동권씨가 탄생하게 된 것은 고려 태조가 태사공에게 사성해서인데 이때 고려 태조가 태사공에게 성을 내리면서 한 말이 넉 자로 요약되는 병기달권(炳幾達權)이다.
병기달권 :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권도(權道)에 통달한다는 뜻인데 철학적으로 의미가 매우 심장한 말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권도를 달리 반경합도(反經合道)라고도 한다. 풀이하면 경법(經法), 즉 대경대법(大經大法)으로 돌아와 도리에 합치된다는 뜻. 여기에서 반(反)자를 돌아온다는 뜻으로 풀어야 하는데 반대된다는 뜻으로 풀어 반경합도를 대경대법에는 반대되나 도리에 합치되는 것이라고 오역(誤譯)해 놓는 수가 있다. 참으로 중대한 실수이자 망발이다. 권도(權道)란 크고 곧은 길과 같은 대경(大經)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크고 곧은 길로만 걸을 수는 없듯이 세상에서는 권도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부득이한 경우에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대처하는 일종의 편법이 권도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쓰는 것은 지극한 도리를 아는 성현이나 가능한 것이지 아무나 함부로 쓰면 혼란과 반역이 속출하여 세도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걱정해서 옛사람들이 많이 이야기를 하였다. 맹자는 일찍이 권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수(嫂)(형제의 아내)가 물에 빠졌을 때는 손을 뻗어 건지는 게 권(權)(임시응급)인데 무릇 권이 도(道)가 되는 것은 변사(變事)(변고의 사태)를 이로써 구제하는 바이며,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지 않기도 해야 하거니와 (사후에는 반드시) 경법(經法)으로 돌아와야 선(善)이 되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권도(權道)라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같은 권도를 행할 때에는 기미를 밝히 살펴 행하고 행한 뒤에는 반드시 경법으로 돌아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역(逆)이 되는 것이다. 또 반경(反經)에 대해서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권(權)이란 무엇인가? 경(經)으로 돌아온 연후에 선(善)한 것이다' 하였고 '사기(史記)'의 자서(自序)에서 사마천(司馬遷)은 '발연(勃然)히 반경(反經)하여 권에 합치되고 상도(常道)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맹자'의 진심편(盡心篇)에서는 '군자는 경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경이 바르면 서민이 흥하고 서민이 흥하면 여기에서 사특(邪慝한) 것이 없어진다' 하고 그 주(註)에서 해석하기를 '반(反)은 돌아간다는 것이고 군자가 국가를 다스림에 상경(常經)으로 돌아가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로 교화가 이루어진다고 일컫는다'고 하였다. 이같은 권도를 쓰는 것은 위태로워 성현만이 이를 써야 하고 쓸 수 있다고도 한다. 그래서 이를 쓰는 사람은 성현이고 올바로 쓴 사람 또한 성현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의 어려움에 대해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뜻을 세우는 것은 가하여도 도(道)에 나가는 것은 가하지 못하고 도에 나가는 것이 가하여도 권(權)을 행하는 것은 가하지 못하다.' 또 정자(程子)는 '한당(漢唐) 이래로 권도를 아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권도란 성인이 크게 쓰는 것이니 성인이 아니면 능히 행할 수가 없고 하늘을 몸받아 도를 행하는 자가 아니면 능히 권(權)을 행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아무나 행할 수가 없고 또 행해서도 안되는 어려운 권도를 태사공은 행하였다. 이것이 범상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권도임을 극명히 인정한 것이 고려 태조이며 그래서 병기달권(炳幾達權)의 넉자로써 정의하고 권씨로 성을 내린 것이다. 고려 태조는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에게 성을 내린 군주. 그 가운데 태사공에게 내린 권씨의 성처럼 특이한 사연과 의미로 성을 부여한 것은 없다. 안동권씨의 성자(姓字)에는 일반 성씨의 글자와 다른 내력과 특성과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의 성씨에서도 이처럼 철학적인 명제를 띤 성씨가 탄생한 예가 거의 없다. 그 명제란 어떤 명분 앞에서 대의를 가리고 운명을 택하는 권도의 응용은 성현의 경지에 이른 이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병산대첩(甁山大捷) 당시에 내린 시조 태사공의 결단은 그래서 한 시대의 역사 정신으로 평가해야 되거니와 이같은 성씨의 특성으로 인해 권씨는, 대대로 후손이 한결같이 성품이 곧고 강건하며 어떤 일에 대처하여 비굴하거나 저열하지 않아 우리 겨레의 중심적 기질로 바탕을 이루며 1천여년 동안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주역으로 많은 역할을 해 왔고 그 자취가 여러 문헌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 權은 권세를 뜻하는가?
흔히 權자를 '권세권자'라 불러 이 글자가 권세, 즉 권력과 세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안다. 더구나 조선 후기 우리 나라의 안동김씨가 크게 융성하여 막강한 세도를 장악했던 일 때문에 안동권씨도 같은 권세의 성족인 줄로 아는 수가 많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안동권씨는 대개 청빈한 편이어서 권력과 부와 재물을 많이 쌓은 사람이 적다. 주로 학자와 선비가 많고 득성 이래 권씨에서는 역적이나 패륜아 또는 도적 등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별로 나오지를 않았다.
권(權) : 권(權)은 '저울 권자'이다. 그래서 저울을 뜻한다. 저울은 무게를 헤아리고 사물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것을 권형(權衡)이라 하는데 권형이 발전해 권세도 되었다. 權자를 파자(破字), 즉 나누어 보면 먼저 나무목(木)자가 있다. 옛적에 나무는 지상에서 가장 굳건한 기준이었다. 한곳에 붙박혀 자라기만 하되 움직이지 않으며 비바람에도 휘거나 굽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에 초두(艸頭), 즉 초(艸)자가 있으니 이는 온갖 풀이다. 그리고 입구口자가 둘이 나오는데 이는 여러 사람과 그들의 말이다. 마지막에 남는 것이 새추자인데 이것은 여러 날짐승이다. 다시 조합하면 큰 나무를 기준으로 하여 온갖 초본식물과 인류와 금수가 모여 직분에 따른 질서를 이루는 모양이 된다. 이것은 또한 여러 글자가 형편에 따라 모였다가 분리될 수도 있어서인지 '일시적' 또는 '임시적'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어서 권설(權設)이라 하면 임시로 베푸는 것이 되고 권지(權知)라 하면 어떤 일을 시보(試補)로서 맡아본다는 뜻이 된다. 그리하여 권도(權道)라 하면 이같은 임시적 개념의 임기응변과 저울질한다는 개념의 권형(權衡)이 대경대법(大經大法)에 합치되어 승화(昇華)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칭하며 이로부터 앞서 말한 병기달권(炳幾達權)과 반경합도(反經合道)의 철학적 명제가 도출되었던 것이다. 물론 권(權)자는 '권세'를 뜻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저울'을 뜻하고 '임시' 즉 임기응변의 철학적 명제를 띠고 있는 것. 이 權자를 쓰자면 글자의 기준이 되는 나무목(木)자를 먼저 써야 하거니와 이 木자의 내려긋는 획끝을 삐치면 안 된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게 획의 끝을 삐쳐올리면 나무의 뿌리가 뽑힌 것과 같아 안 된다거나 또는 예천권씨(醴泉權氏)가 안동권씨와 차별하기 위해 나무木의 내려긋는 획끝을 삐쳐 올린다는 등의 설이다. 이는 아마도 조선 후기에 들어 생겨 정착된 속설인 것 같다. 안동권씨의 상징적인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와 1701년에 만든 '신사보(辛巳譜)'에도 權자의 나무木 내려긋는 획끝이 다 삐쳐 올라가 있기 때문. 이는 글씨 쓰는 이의 취향에 따라 삐쳐올리기도 하고 굳건히 내려긋기만 하기도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 족보를 가장 만든 안동권씨
안동권씨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족보를 만든 것이 자랑. 그것이 '성화보(成化譜)'라는 한국 최초의 족보인데 조선 성종 7년 병신(丙申), 1476년에 출간되었다. 이 때가 중국 연호로 명나라 헌종(憲宗)의 것인 성화(成化) 12년이었는데 우리가 지금 서기를 쓰듯이 당시 중국 연호를 썼기에 이 시기를 성화연간(成化年間)이라 하고 성화연간에 나온 족보라는 뜻으로 '성화보'라 세칭하게 되었다. 달리 '성화병신보(成化丙申譜)'라고도 하는데 본디 명칭은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이 성화보가 나온지 1백여년 뒤에 문화유씨의 '가정보(嘉靖譜)'가 나왔다. 가정은 명나라 세종의 연호. 이로부터 각 성씨의 족보가 잇따라 나와 우리 나라로 하여금 세계에서 따를 자가 없는 족보의 선진국이 되게 하였다. 이 족보로써 우리 나라를 이길 나라와 민족은 세계에 없다.
성화보 : 중국에서 성씨보(姓氏譜)는 대개 우리 나라보다 4세기쯤 앞선 11세기 북송 시대에 일반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이 방면에서 뒤에 훨씬 더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도 처음에는 왕가의 계보만 있어왔다. 그러나 왕가의 계보는 단선적(單線的)인 것이어서 이를 족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시대로 들어와서 백성이 모두 성씨와 계보를 가지게 되었다. 고려는 문화 정책을 펴 이것이 없는 자는 시험을 보아 관리 등으로 취직할 수 없게 하였다. 그래서 너도나도 자기의 계대를 증명하는 세계표(世系表)를 만들어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가첩(家帖)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가첩 또는 가승(家乘)은 각자가 그 직계만을 단선으로 적어 내려오고 그 방계(傍系)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것을 모두 모아 종합해서 가까운 방계는 물론 안동권씨 전체를 총괄하는 '족보'를 만들어 책자로 출간한 것이 '성화보'이다. 이것은 인류사적으로 의의가 아주 큰 발명이고 사람의 계보를 최초로 민주화시킨 쾌거이다. 이로부터 우리민족은 족보를 제2의 호적으로, 때로는 세속의 호적보다 한 차원 높은 불변의 기록으로 숭상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와 정부나 학계에서는 이같은 족보를 괄시하며 한국인의 버려야 할 인습처럼 생각하여 마지않는다. 급속히 변화하는 세대는, 특히나 외래 종교인들의 경우는 아직도 족보를 챙기는 우리 겨레의 습성을 부끄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일본 신민화하려던 일제 암흑기에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출판된 서적이 족보였다. 이처럼 족보에는 우리의 근본과 주체를 지키려는 얼이 서려 있다. 지금 외세와 외래 정신의 대변자와 같은 지식인, 학자, 교육자, 정치사회 지도자들이 아무리 족보를 백안시하고 퇴출시키려 하여도 우리 나라에서 절대량의 족보는 계속 출판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나라는 족보 선진국의 명성을 좀체로 잃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남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의 말처럼 족보가 이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와 문화가 무형에서 유형의 가치를 발휘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그 때에는 이 관념이 큰 괴력을 발휘, 남이 따를 수 없는 민족의 저력이자 하나의 국가 경쟁력으로 작용하는 원천이 될지도 모른다.
□ 안동권씨 유적지와 집성촌
시조 권행의 묘소는 경북 안동군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 능골에 있으며 향사는 매년 한식일과 10월 중에 한다.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시조 권행과 김선평, 장정필을 모시기 위해 983년(고려 성종 2년)에 세운 삼태사묘는 경북 안동시 북문동 24번지에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제향한다.
□ 성세
안동권씨(安東權氏)-629,291(2000년) / 558,574명. (1985년)
집성촌은 경북에 많음 / 경북 영주시 영중동 / 봉화군 봉화면 유곡리 / 안동시 법상동 / 예천군 용문면 저곡동 / 강원도 평강군 일원 /
□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
강(姜), 고(高), 권(權), 구김(金), 신김(金), 노(盧), 동(董), 이(李), 임(林), 문(文), 박(朴), 장(張), 전(全), 조(曺), 최(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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