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수제비를 먹고 자란 아들은 어머니의 인생을 대역전시켰다. 한국에서, 그리고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 겪은 어머니의 고생과 냉대는 아들이 미식축구의 정상에 오르면서 눈녹듯이 사라졌다. 눈물과 고통을 삼키며 애정으로 키운 아들의 성공. 지난 5일(현지시각) 미국 최고인기 스포츠인 프로풋볼리그(NFL) 수퍼볼(챔피언결정전) MVP(최우수선수)에 선정된 하인스 워드(Hines Ward· 30·피츠버그스틸러스)의 어머니 김영희(59)씨는 의외로 담담하고 차분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근교에 사는 김씨는 6일 조선일보와 전화인터뷰를 갖고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지원하고 장려한 것이 성공의 비결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태어나, 동대문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아들이 MVP가 됐는데 소감은.
“글쎄… 장하고 대견하죠(웃음). 포레스트파크 고교 3학년 때부터 워낙 상도 많이 받고 언론도 많이 탔어요. 수퍼볼 경기를 TV로 보고 나서 잠을 자다가 새벽 1시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엄마, 수퍼볼에서 이겼어’ 라고 하기에 ‘축하한다’고 했지요. 감기약 기운에 취해서 간단히 이야기하고 끊었어요. 나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싫어해요. 그래서 경기장에 잘 가지 않고 TV를 봐요.”
―하인스는 어떻게 키웠나요. 과외라도 시켰나요?
“(웃으며) 미국에 과외가 있나요? 그냥 남들 키우는 대로 키웠지.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면 예를 들어 밤 9시면 반드시 자도록 하지만 나는 밤 12시든 새벽 1시든 그냥 놔뒀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 버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아이를 꼼꼼히 돌볼 수 없었지요. 대신 아이에게 학교는 절대로 늦거나 빠지지 않도록 했어요. 1살 때 헤어지고 7살 때 재결합했는데 어릴 때부터 농구 야구 풋볼(미식축구) 등 운동을 잘해 동네경기에서 사탕을 타오곤 했지요. 운동은 자기가 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하라고 했어요. 대학입학 때에는 조지아 대학에 미식축구 선수로, 플로리다 대학에 야구선수로 동시에 특차전형이 됐고, 미식축구를 택해 조지아 대학으로 갔습니다.”
―하인스는 자신의 성공이 어머니 덕이라고 했는데….
“자기가 그런 느낌을 받았나 보지. 하인스가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새벽 4시에 나가 일을 해야 했어요. 비행장 기내식 제조업체, 음식점, 호텔 등에서 접시를 닦고 청소를 하고, 잡화점 계산대에서 일했어요. 한국말로 ‘막일’을 한 거지요. 시간당 4달러(약 4000원) 정도 받았어요. 항상 풀타임 하나에 파트타임 하나를 병행하는 ‘투잡스’ 생활이었고, 가끔 파트타임을 하나 더해 하루에 세 가지 일을 하기도 했어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미국에서는 부지런하면 살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휴가도 없었어요. 하인스가 프로에 입단한 98년부터는 한가지 일만 하고 있습니다. 생활이 이랬으니 우리 애가 (어머니 고생한 것을) 아는 것이겠죠.”
"외모만 보고 아들 따돌린 한국인들도"
―하인스의 생활은 어떠했나요?
“열 살이 되기 전부터 혼자 놔둬도 잘 지냈어요. 초등학교 졸업할 때 남학생 가운데 1등이었어요. 일이 바빠서 등·하교시키기가 쉽지 않아 고교 시절에는 포드 승용차를 사주고 스스로 차를 타고 다니게 했어요. 그러나 용돈은 많이 안 줬어요. 일주일에 점심값으로 20달러만 줬거든요. 아이들이 자랄 때 해달라는 대로 다해주면 나중에 부모 말을 안 들어요.”
(김씨는 아들이 프로 입단 8개월 뒤에 사준 스모나 조지아 지역의 대저택이 혼자 살기에 너무 크다며 헨리카운티의 작은 집으로 이사와 살고 있다. 아들이 연봉 수십억원씩 받고 있지만 그녀는 아직 동네 고교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가장 기뻤던 일과 힘들었던 기억은.
“아들이 SAT(대학수학능력시험)를 보고 4년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입학했을 때 가장 기뻤어요. 아들은 풋볼 장학생이었지만 학과는 경영학과를 다녔어요. 가장 어려웠던 일은 하인스 고교 시절에 자동차 보험료 등 납부금 부담이 커서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저소득층에게 주는 정부 지원을 받지 않았어요. 아들을 당당하게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항상 프라이드(자부심)를 가지라고 했어요.”
―하인스는 무슨 음식을 잘 먹었나요?
“수제비를 잘 먹었어요. 내가 좋아하니까 따라 좋아한 것 같아요. 나는 바빠서 밥을 제대로 차려주지 못했어요. 수제비는 김치 하나만 반찬으로 내놓으면 되니까 수제비를 자주 해먹었지요. 수제비 외에 짬뽕과 깍두기를 좋아하고, 된장찌개, 설렁탕도 잘 먹어요.”
―하인스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릴 때부터 한국과 베트남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어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에 대해 자부심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김씨는 잠시 주저하다가 어려운 말을 꺼냈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아픈 상처도 있어요. 하인스가 고교 시절에 한국 학생들이 학교 간 친선경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하인스가 야구를 잘 하니까 한 학교에서 초청을 해서 같이 야구를 했어요.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밥 먹으러 갈 때에는 행사 주최자가 한국 아이들만 데리고 가더군요. 그래서 내가 다시는 한국 아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했어요. 98년에 어머니 상을 당해 한국에 갔는데 인텔리처럼 보이는 한국 사람들이 뒤에서 침을 뱉기도 하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외모와 나이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더군요. 그런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잘 났는지….”
―한국은 언제 갈 계획인가요?
“아들이 4월에 가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는데 아들이 갈 때 내가 같이 갈지 말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한국에 몇 차례 갔다 오긴 했는데 98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한국에 형제도 없는 상태라…. 그래도 가끔은 한국에 가서 살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한국은 복잡해도 사람 사는 세상 같잖아요. 미국은 30년이 다 됐는데 사는 재미는 별로 없어요.”
(김씨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내 달라고 하자 “사진이 찍기 싫어서 ABC방송의 뉴스쇼 ‘굿모닝 아메리카’ 출연을 거부한 적도 있다”며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