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별같이 많고 탑이 기러기처럼 이어지던 형이상학적 도시, 경주. 그 경주가 지상에서 사라진 후 천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우리는 아직 옛 도시의 틀을 알지 못한다. 세계의 도시 중에서 천년 이상이나 되는 도시는 그다지 많지 않다. 6백년 도읍지였다는 서울은 열 두번째 고도에 속한다. 경주가 품은 천년의 가치가 바로 그렇다.
신라 천년의 왕도였던 경주에는 역사의 향기가 짙게 묻어나는 유적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어 흔히 야외박물관으로 불린다. 95년 이곳에 있는 불국사ㆍ석굴암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던 유네스코는 이를 제외한 52점의 문화재를 하나로 묶어 ‘경주역사유적지구’란 이름으로 새로이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다. 이 숫자는 일본의 역사 도시 교토의 그것보다도 많다. 교토는 불교 사찰과 함께 신사가 주류를 이루는 데 반해 경주는 불교와 왕실에 관련된 유산뿐만 아니라 천문대, 정원, 놀이시설 같은 것도 포함돼 있어 그 내용이 아주 다양하다. 그리고 그걸 통해 신라인들의 삶이 어떠했는가도 더듬어 볼 수 있다. 실로 ‘한국의 폼페이’인 것이다.
천년 만에 다시 찾아온 세계의 문명
경주는 다양한 모습을 지닌 도시다. 신라인들의 영원한 성지, 남산에서는 천년이 넘는 세월을 묵묵히 한 자리에서 견뎌온 무덤과 절터 등을 만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이어지는 선사인들의 생활상이 기록된 암각화며, 조선시대 양반들이 무리지어 살던 마을이 있다.
지금 경주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만날 수 있는 ‘2003 경주 세계문화 엑스포’를 보러온 이들로 북적거린다. 주제는 ‘천마의 꿈: 함께 그러나 다르게’. 문화와 첨단기술을 접목하고 재미와 감동을 늘리고 대중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늘렸다.
주제 전시 ‘세계신화전, 함께 만드는 꿈과 사랑’은 한 민족의 정신적 원형을 형성하는 신화를 통해 삶과 죽음, 우주관 등 세계 각국의 신화를 비교분석해볼 수 있는 자리다. 백결공연장에서 하루 두 차례 공연하는 주제공연 ‘에밀레-천년의 소리’는 에밀레종 제작에 관한 설화를 연극화한 것으로 판소리와 창가, 현대음악이 함께 어우러지며 택견과 선무도를 활용한 군무와 화려한 의상이 볼거리다.
에밀레극장에서 매일 16회 상영하는 주제 영상인 4D애니메이션 ‘화랑영웅기파랑전 : 천마의 꿈’은 놓치지 말 것. 15분간 상영되는 짧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천마와 만파식적, 화랑 기파랑과 선화 낭자의 사랑 등이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탄탄한 줄거리와 정교한 묘사가 돋보인다. 3D 입체영상물로 제작됐고 첨단시설을 갖춰 화면에서 연꽃잎이 휘날리면 객석에서 연꽃 향기가 나고 바람이 불고 안개가 깔린다.
입장객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참여행사도 열린다. 행사장 한쪽에 서라벌의 저자거리를 재현해 주막과 대장간, 난전, 진골댁 본가 등을 만들었다. 선덕여왕 행차식과 수문장 교대식이 치러지며 보부상놀이와 별신제, 남사당놀이, 주령구놀이 등이 펼쳐진다.
‘풍월주 게임방’에서는 문화엑스포측이 자체 개발한 3D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천년의 신화Ⅱ’와 보드게임인 ‘천년의 신화’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신화와 설화를 상징하는 천마부터 현대의 대표적인 캐릭터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한자리에 모은 ‘세계캐릭터·애니메이션전’도 볼거리.
특별행사로는 신화와 예술로 승화된 각국의 성문화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성문화전-에로스와 문명’이 돋보인다.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학문화축제, 거리 퍼포먼스, ‘한·중 현대 그래픽 전시회’ ‘누비전’ ‘차문화 특별전’ 등 기획전시가 행사기간 내내 7~10일간 열린다. 러시아 니쿨린 모스크바 서커스단의 특별공연도 펼쳐지며 세계 각국의 토속상품과 앤티크를 선보이는 세계벼룩시장도 마련된다.
국제행사로는 국내외 10개 극단이 참가해 신화를 소재로 한 ‘세계꼭두극 축제’도 열려 일본과 러시아, 중국, 스페인, 베트남 등의 인형극을 볼 수 있다.
신라 불국정토의 꿈, 경주 남산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신라인은 부처의 땅 불국정토를 건설하려 했다.그곳이 바로 남산이다. 신라인들은 골마다 절을 짓고 바위마다 불상을 만들었다. 자연과 예술이 조화되어 남산 전체가 하나의 노천 박물관으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곳이다. 남산은 보물 13점, 사적 12개소, 불상 1백3구, 탑 82기, 옛 절터 1백46개소, 왕릉 14기를 품고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가는 곳마다 신라유적이 산재해 있는 곳, 남산. 왜 경주 시민은 이곳을 사랑하는지 직접 들러보면 느낄 수 있다. 신라인 모두의 절이자 신앙이었던 남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남산을 통해 천년고도의 추억을 회상한다.
남산은 관광객의 필수 코스이기도 하지만, 경주 시민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서울 시민이 북한산을 사랑하는 것만큼, 경주 시민은 남산을 대표적인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경주 남산은 서라벌 남쪽 46미터의 금오산과 4백94미터의 고위산에서 뻗어 내린 약 40여 개의 등성이와 골짜기를 말한다. 동서로 4킬로미터, 남북으로 10킬로미터가 되는 타원형의 산으로, 한 마리의 금거북이 경주 벌 깊숙이 들어와 앉은 형상이다.
높지 않은 산이라고 만만히 봐서는 남산의 진면목을 놓치기 십상이다. 일반적인 등산처럼 시원한 바람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올라가도 남산은 포근히 안아준다. 5백여 미터도 되지 않는 낮은 산을 정복(?)하는 데는 3시간이면 족하다. 그러나 남산의 진면목을 보려면 가능한 한 천천히 올라야 한다. 천년이 간직한 역사의 내음을 놓칠지도 모르니.
남산을 올라가는 코스로는 20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세 개의 코스가 있다. 어느 코스를 따라 남산을 올라가든지, 천년 고도의 신라와 불국정토를 꿈꿨던 신라인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 혁거세의 탄생지, 첫 궁궐터, 망국의 비극이 서린 포석정, 도성을 지켜온 남산성과 왕릉 등이 즐비하다.
화려함조차 묻혀버린 거대한 도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경주를 여행하면서 절감하는 문구다. 어느 곳에 가든지 놓여 있는 불상과 탑들이 처음에는 모두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하지만 조금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각각의 특성과 의미가 들어 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이런 유물들로부터 감흥을 받기 어렵다. 경주를 여행하려면 사전 정보를 먼저 습득하는 게 좋은 여행의 밑거름이다.
신라 흥망의 역사를 간직한 포석정. 돌 홈에 물을 흐르게 하고 잔을 띄워 시를 읊었다는 곳,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무릇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했던가. 과연 전쟁 중에 이곳에서 잔치를 하고 있었을 왕이 있었을까. 후대 역사가는 의심을 하지만, 문헌은 패자의 슬픔보다는 승자의 승리감을 부풀리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원래는 거북 모양의 큰 돌에서 남산 계곡의 물이 흘렀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남산은 이 밖에도 봐야 할 것이 많다. 며칠간 남산만 돌아다녀도 이곳에 숨어 있는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다 맛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곳에서는 신라와 불교 문화의 융성한 시기를 상상해볼 수 있다. 각자의 상상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흔적들을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이 서양을 압도하던 중세에, 경주는 당시 세계 최고의 고도였던 중국의 시안 못지않은 대도시였다. 경주는 한국 문명의 시간과 공간을 담은 원형의 공간이었다. 경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고대와 중세를 거쳐온 역사고도가 살아남아 오늘날의 현대 고도로 이어진 경우는 아주 드물다.
우리나라의 도시는 대부분 삼국시대부터 이름 지어진 천년 역사의 고도들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도시 문명의 역사가 길지 않은 유럽에는 도처에 천년고도가 있는데, 정작 우리에게는 그 어디에도 천년고도가 없다. 삼국시대의 고도인 평양, 부여 등은 이름만 남은 채 지상에서 사라졌다. 고려의 수도 개성도 지하의 역사 유적으로만 남아 있고, 6백년 역사의 고도 서울도 옛 고도의 모습은 종묘와 고궁으로만 남아 있다. 겨우 남아 있는 것이 경주다. 그렇지만 천년의 역사를 지닌 것에 비하면 고도로서의 위엄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문화 원형의 DNA
절이 별같이 많고 탑이 기러기처럼 이어지던 형이상학적 고도, 경주. 그 경주가 지상에서 사라진 후 천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우리는 아직 옛 고도의 틀을 알지 못한다. 세계의 천년고도에는 옛 고도와 현 고도가 공존하고 있으나 경주에는 옛 고도의 극히 일부가 과거와 단절된 채 산재할 뿐이다. 우리는 천년고도의 고도 구역이 어디에서 어디까지였는지도 모르면서 그 위에 새로운 고도를 지금도 끝없이 건설하고 있다.
땅만 파면 문화재가 나온다는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여행객이 언제,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느냐에 따라서 경주는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래서 경주는 매력적이다. 좀더 진지한 여행을 해도 경주는 그만큼의 뿌듯함을 동시에 전해준다.
경주는 빛바랜 사진 속에 남아 있는 고도다. 수학여행, 단체여행으로 경주에 가서 불국사 청운교·백운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하나 없는 이가 몇이나 될까. 덕분에 경주는 수학여행의 고도, 현재성을 상실한 퇴색한 고도로만 기억된다. 그러나 천년고도 경주는 불국사와 석굴암으로만 대표되는 곳이 아니다. 왕국의 고도에는 다양한 시대가 빚어낸 아름다움이 곳곳에서 철철 넘쳐난다. 그 가운데 신라의 고도, 경주의 면모를 보기에 가장 적당한 곳은 절터일 것이다. 절터로 떠난다. 황량하고 쓸쓸하지만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만의 상상이 가능한 곳, 시각이 사고를 제한하지 않는 곳. 빈 것이 내어놓는 아름다움을 찾아서.
불교란 원래 어떤 해답을 제시하려는 종교가 아니다. 문제를 던져주고는 그 해답을 스스로 찾도록 할 뿐이다.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 다음 천년을 설계하는 건 불국정토를 꿈꾸었던 신라인의 후손이 물려받은 업보와 같다.
●drive guide 경부고속도로 경주IC를 이용한다. 감포로 빠지는 국도 4번과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 언양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에도 유적지가 널려 있다. 경주시 관광안내소 054-772-9289
●drive tip 음식 쌈밥과 해장국이 유명하다. 대릉원 동쪽 편 골목 후문 쪽에 쌈밥집이 몰려 있다. 배추와 상추, 호박 등 다양한 야채와 양념장, 젓갈, 막장 등이 나온다. 정록쌈밥 (054-775-9333), 구로쌈밥 (054-749-0060), 삼포쌈밥 (054-749-5776) 등이 유명. 1인분에 6,000원. 경주역 부근 팔우정 로터리에 있는 해장국집 골목은 김치 장아찌와 해초, 콩나물, 메밀묵이 양념장과 함께 나오는데 담백하고 소박하다. 64년 역사의 경상북도 명품으로 꼽힌 황남빵 (054-749-7000)은 경주의 특산물. 25개들이 한 상자가 1만원.
●숙박 보문호 주변에 특급 호텔들이 몰려 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입장권을 제시하면 코오롱호텔 (054-746-9001), 콩코드호텔 (054-745-7000)은 30퍼센트, 경주 힐튼 (054-745-7788)과 호텔 현대 (054-748-2233)는 주중 40퍼센트, 주말 30퍼센트 할인해준다.
[사진 및 기사 제공 : 월간 Fav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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