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행히 화상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리 길지않은 인생을 살면서, 불행한 일도 많았고
행복했던 순간들 또한 많았지만, 그날의 사건은 나로 하여금 산다는것에 대한 많은 상념을 갖게 했다. 사는일이 너무도 벅차고 힘에 겨워서, 솔직히 차라리 죽을까? 하는 고민도 숱하게 해보았고, 부끄럽지만,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긴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늘 나의 삶을 이어 주는건, 가족이었다. 부모님을 비롯한, 내 형제들... 그리고 결혼후에는 아내와 두 아들들...
이들이 내삶의 버팀목이고, 그 자체로 의미이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머리와, 강단있는 육신, 불굴의 의지... 이런것들을 물려받은 덕에, 사는동안 내내, 넘어지되, 아주 쓰러지지않는 삶을 살아왔다.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 아닐수 없다. 병원에 있는 서너달 동안도 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 다음해 4월에 시행된 고등학교입학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할수 있었다.
내 삶의 고비고비마다엔 늘 나를 돕는 손길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분이 바로, 한남동주유소 소장님이셨던 여 진 소장님이시다. 중국의 춘추시대와 진나라의 명재상인 여불위의 후손인가? 여씨라면 기껏해야 몽양 여운형선생 정도가 내가 아는 여씨의 전부이다. 여 소장님은 원래 미륭상사 남영동주유소에서 계셨는데, 그 곳에서 일반 주유원으로 있던 나를 좋게 보시고 훗날 한남동으로 부임하면서 나를 데리고 오셨다. 그 분은 나를 많이 신임하고 이뻐해 주셨다.
내가 늦은 공부를 하게끔 도와주신 분이기도 했고, 내가 어려움에 처한 고비고비마다 그 분은
큰형님처럼, 때론, 어버이처럼 나를 돌봐 주셨다. 그 당시 연세가 오십 중반쯤이셨으니...
지금쯤, 팔십이 한참 지난 노인이 되셨을것이다. 어디에 사시는지...궁금하다. 그 분을 만날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넙죽 큰절이라도 올리고, 그 때 받은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그럴수가 없다.
전에도 서술했지만, 내가 있던 주유소는 전국에서 매출랭킹 1위의 업소인데다가 하루에도 현금만 해도 5~6천만원 가량이 들어오는, 그야말로 주유소 한개가 왠만한 중소기업 이상의 몫을 하는, 그런곳이다 보니, 그 곳의 소장으로 부임하려고 로비까지 해야 한다는 소문이 있을정도였다.
그런곳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이 바로 카운터였는데, 특히나, 야간카운터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한남동주유소가 위치한 곳이 한남동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기전, 한남대교가 막 시작되는 지점이어서, 막 강남개발이 활발해지던 시기였기에, 매우 중요한 교통요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한남동은 바로 옆에 이태원과 미 8군이 있었고, 국무총리 공관, 육군본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외인빌리지, 각국의 공관과 대사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외국의 공관차량이나 대기업의 운장들(그당시엔 회사차 운전수들을 운짱, 또는 운장 이라고 불렀다.) 이 급유를 위해 하루종일 줄을 이었는데, 그 수가 만만치 않았었다.
관용차 기사들이나, 회사차 운전수들에게는 회사에서 아예 한달치 연료를 쿠폰 형태로 지급하는데, 20리터짜리 쿠폰을 한달 평균 주행거리를 계산하여 지급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사용하고 남는 쿠폰이 있게 마련인데 기사들은 그 남는 쿠폰을 회사나 공관에 반납하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주유소에 와서 현금으로 바꿔 가곤 했다. 사실은 불법적인 일이고, 또 주유소에서도 쿠폰을 현금으로 바꿔주면 읺되는데, 그런 일들이 공공연한 비밀로 행해지고 있었다.
20리터짜리 쿠폰 한장이면 그 당시 휘발유값이 리터당 800원이었는데, 원래대로 하면 16,000을 내줘야 하는데, 실제로는 11,000원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쿠폰 한장에 5,000원의 차액이 생기고, 여기에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보통 많이 가져오는 기사들은 100장 이상씩 가져오는게 그 액수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면 또 그만큼의 차액이 발생하고 그 차액은 고스란히, 주유소의 과외소득이 되는데 문제는 그 과외소득의 수혜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였던것이다. 보통은 소장이 그 과외소득을 가져가고, 또 그 일을 무마하기 위해 사무실 직원들에게 일정액을 배분해 주고, 또 따로 소장은 본사의 윗분들에게 일정액을 상납하는.... 꽤 복잡하고 추한,
거래관행이 그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야간 카운터가 매우 중요한 자리가 되었다.
대개의 세상일이 그렇듯, 검은거래나 어둠의 일들은 주로 밤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여소장님은 나를 많이 신뢰하셨다. 적어도 나는 돈에 대한 부당한 집착이나 욕심이 없었다.
게다가 고지식하여서 내가 받는 월급외에는 단 한푼도 부당한 돈에 마음을 둬 본적이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 주유소에는 보통, 주야간 열명 정도의 주유원과, 두명의 여사원, 그리고 두세명 정도의 남직원이 있었다. 밤 열시가 넘어서 영업을 마칠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무실에 이모과장님이 다른 남직원 한명과 사무실로 들어서는것이 아닌가? 나는 일어나서 오셨냐는 인사를 하고, 다시 제자리에 앉아 내 업무를 보고 있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그 직원이 내 책상 앞으로 오더니 큰 사각 대봉투를 쓱 내미는 것이 아닌가? 얼뜻 보기에도 꽤 묵직하고 두툼한것이 뭔가가 가득 든것이 느껴졌다. 그랬다. 그 봉투속에는 꽤 많은 수량의 주유쿠폰이 들어 있었다. 그 쿠폰의 이면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그는 주로 회사나 관공서에 자동차용 연료를 납품하기 위한 영업을 관장하는 직원이었는데, 요샛말로 쉽게 말하자면, 백화점 상품권을 판매하는 일을 보는, 그런 사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관리하던 업체나, 관공서의 운짱들과 모종의 어두운 거래를 하는것이었는데, 회사에 자동차를 관리하는 부서가 있고, 그들은 회사에 필요이상의 자동차연료쿠폰을 결제올려서 발행하고, 그 필요이상의 과발행된 쿠폰을 빼돌려서 주유소직원과 짜고, 현금화 하는...그런 구조였던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육천원짜리 쿠폰을 만원정도에 사서 그걸 모았다가 야간에 카운터 보는 직원과 짜고, 현금이 많이 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그 차액을 착복하는데, 그 액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새로온 소장과 함께온, 약간은 어리숙하게 생긴 촌놈앞에 그는 어깨에 잔뜩 힘을 넣고서는 마치 전쟁터에서 막 잘라온 피묻은 적장의 머리라도 되는듯이 내 책상앞에 툭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의 의기양양한 기세에는 너무도 당연하고, ' 뭐~? 못마땅한거 있어? '라고 말하는듯한 당당함이 넘쳐나고 있었다.
" 과장님! 이게 뭡니까?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채 눈을 들어 그를 보며 말했다.
" 뭐? "
피식! 웃으며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뒤로 약간 돌리며,
" 이 자식이....?"
그는 금방이라도 내게 주먹이라도 날릴듯한 기세로 어이가 없다는듯이 비아냥 거렸다.
난, 그 속에 어떻게 그리도 많은 쿠폰이 들어있고, 또 그사람은 왜 내앞에 그리도 거만한 모습으로
서 있을수 있는것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호락호락 그의 위세에 눌릴수가 없었다.
여진소장님이 남영동주유소에서 데려오면서 특별히 내게 당부하신 일이 있었다.
어떤 경우라도 소장이 모르는 쿠폰거래가 있어서는 않된다. 그리고, 자신이 부임하기전에 있었던 사무실 직원들과 절대로 한통속이 되어서는 않된다. 즉 자신을 왕따 시키는 일을 엄히 경계시키신 것이다. 그 들은 야간카운터와 그저그렇게 짜고서 쿠폰장사의 막대한 이익을 마치,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듯이, 오래된 관행으로 분배하며, 착복했던것이다.
" 야! 이거 500장이야... 현금 들어온거 있지? 그거 계산해서 현금으로 내놔 봐..."
그는 마치, 자신이 엊그제 맡겨둔 돈이라도 달라는듯이 말하고는 제 책상으로 가서 담배까지 한개피 뽑아물고 나를 째려보는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나는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 과장님! 이러지 마십시오. 이건 옳지 않습니다. "
" 본사 방침도 그렇고요...이건 소장님께서 절대로 못하게 하신....."
" 퍽!!"
그때였다. 바로 내 옆쪽에 서있던 같이온 젊은 정모라는 남자 사원이 갑작스럽게 주먹으로 내 얼굴을 가격하는것이 아닌가? 그는 군대를 마치고 회사에 온지 얼마 안된 신입이었는데, 얼굴이 상당히 잘생기고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공수부대 출신이라고 늘 자신을 자랑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대로 보기좋게 한방을 맞고 뒤에 있던 의자로 주저 앉았다.
하도 순식간에 맞은 일격인지라, 어떻게 해볼 여지도 없었다. 얼른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는데 뭔가 뜨거운것이 내 턱을 타고 흐렀다. 코피였다. 울컥! 하고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책상을 밟고 올라서서 그 자식에게로 몸을 날렸다. 한 동안 우리 둘은 그렇게 뒤엉켜서 서로 주먹을 주고 받았다. 경비아저씨가 달려오고 주유원들이 몰려와서야 싸움은 가까스로 끝이 났다. 나도, 그자식도, 얼굴이고 옷이고 엉망이었다. 둘은 마치, 성난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며 분을 못참아했다.
그 다음날, 소장님이 출근하셔서 사건의 전모를 들으셨다. 소장님은 나와 그 남자직원, 그리고 이모과장, 세사람을 사무실로 부르셨다. 엉망이된 나와 그 사원의 얼굴을 보시더니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흔드시더니 내게 큰소리로 나무라셨다.
" 너 이자식! 감히, 주유원 주제에 사무실 직원을 폭행해? 니가 깡패야? 어? "
" 이 자식 너 깜방에 가고 싶어? " " 얼른 사과해! ..."
그랬다. 소장님과, 사무실직원들 사이에도 모종의 암묵적인 불법의 카르텔이 성립되어 있었던것이다. 돈, 그것이 무엇이길래..... 나는 이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을 목도하면서, 다시한번
치를 떨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뒤에 소장님은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나를 위로해 주셨다. 잘했다고....그래서 내가 너를 믿는거라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일이 있고부터 나는 사무실 남직원들에게 그야말로 왕따가 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직원들과 경비아저씨, 소장님, 심지어는 두명의 여직원들까지도 나를 많이 믿고 따라 주었다.
그러나.... 그 일이 또다시 닥칠 내 불행의 씨앗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고검을 패스하고 다시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반에 재등록하고 여전히 공부와 일에만 열심을 내고 있었다.
.............. 다음 5회에 계속...........
첫댓글 오라버니,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올 곧은 사람이 이 혼탁한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오랜 풍상을 겪은 고목처럼, 지금은 이 오라비도 그다지 올곧지는 못하단다. 노회한 정객처럼,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못된(?) 중년이 되어가고 있지. 다만, 오페라의유령에서처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세상을 유희하고는 있어도, 내심에서는 늘 양심과의 전투를 하고 있는....
대쪽같이 서 있는 나무은 바람에 꺾끼거나 뿌리체 뽑히는 게 세상인 것 깉아요 내가 아는 우리신랑은 남 못 할일 시키고 눈물나게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거센 바람에 몸을 맞길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