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로 간 생송장 조선은 공식적으로 순장 제도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 사람으로 순장된 사람들이 있었다. 이웃한 명나라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진 헌공(秦 獻公)이 기원전 384년에 순장을 법률로 폐지한 바 있었으나, 중국의 순장은 명나라(1638〜1644) 때에도 남아 있었다.
1424년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가 죽자, 후궁 등 30여명이 순장되었다.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에는 명나라에 다녀온 사신의 증언이 전한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음식이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울음 소리가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메어져 죽게 되었다.” 이때 희생된 여성 가운데 조선에서 공출되어 영락제의 후궁이 된 한씨(韓氏)가 있었는데, 그녀는 한확의 누이였다. 한확은 누이가 여비(麗妃)로 책봉되자 광록시 소경이란 벼슬을 받았다. 1425년 홍희제가 사망하자 이번에도 후궁 5명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순장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28년 한확은 자신의 또 다른 여동생을 선덕제의 후궁으로 보냈다. 한확이 여동생과 함께 명나라로 떠나는 행차를 보고, 도성 안 사람들과 사대부의 여성들은 ‘그의 형 한씨가 순장(殉葬)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이었는데, 이제 또 가는구나.’하며 이를 생송장(生送葬)이라 불렀다. 조선은 법령인 [경국대전(經國大典)]조차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따라 하였지만, 사람을 죽여서 순장하는 풍습만큼은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에는 변형된 순장이 있었다. 변형된 순장 - 과부재가금지법 남편이 죽은 후, 아직 죽지 않은 부인을 일컫는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부인은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한다는 순장 풍습의 그림자가 남아있다. 왕실의 여인들은 대왕대비, 대비가 되어 왕을 능가하는 큰 권력을 쥐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인들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면 죽은 것만도 못한 대접을 받았다. 고려시대의 여성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재혼이 자유로웠으며, 3번 혼인을 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여성의 3번 혼인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재가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477년(성종 8년) 조선에서는 과부재가금지법(寡婦再嫁禁止法)을 제정ㆍ시행했다. 이에 따라 재가를 한 사족(士族) 여성의 자손은 과거에도 응시할 수 없도록 막아버렸다. 이로 인해 여성의 행복추구권 하나가 상실되었고, 남편을 여읜 여성은 미망인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의 사회 전반적인 확산은 일반 상민들 또한 재가를 수치스럽게 여기게 만들었다. 과부재가금지법은 남자들의 경우 아내가 죽었을 때에 다른 부인을 들일 수가 있지만, 여성들은 긴긴 세월을 수절(守節)을 해야 하는 불평등한 법규였다.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강요된 강제적 윤리 규범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타의에 의해 여성이 수절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여성들은 정조(貞操)를 잃을 경우 지니고 있던 은장도로 자결하는 것이 가문의 명예를 보존하는 길이라고 교육을 받았다. 남편은 하늘이므로, 지상의 존재인 아내가 함부로 하늘을 바꿀 수 없다는 ‘불경이부(不更二夫)’라는 말로 여성의 재가금지가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3년 상을 마친 후 자결한 여성에게 열녀문(烈女門)을 하사하여 기린 것은 과부는 곧 미망인, 즉 살아있는 순장자임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열녀문은 죽음을 기다리는 모범수에게 내리는 상장과도 같았다. 부녀자에게 열녀가 되기를 강요하고,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열행(烈行)이 강요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순장품과 같은 소유물처럼 취급되었다. 변형된 형태의 살아있는 순장자인 미망인이 사라진 것은 과부의 재가가 허용된 1894년 갑오개혁법 이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재가금지에 대한 의식과 윤리는 1950년대까지도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사라져야 할 신분제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순장은 신분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풍습이다. 이것은 무덤 주인공이 저승에서 행복하기 위해, 따라 죽는 자의 행복은 무시해버리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을 위한 풍습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는 삼국시대 말에 순장 풍습이 사라져갔지만, 순장 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죽은 남편을 위해 여성에게 자결을 강요하거나, 죽은 남편을 위해 여성의 행복 추구 권리마저 빼앗아 버리는 변형된 순장을 강요했다.
인류가 온전히 평등해지는 시대가 되려면, 특정한 개인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순장과 같은 풍습이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순장은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빼앗아버리고, 삶을 힘들게 만들었던 나쁜 제도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