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변씨(原州邊氏)
시 조 휘(諱): 변안렬(邊安烈),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
원주(原州)는 강원도 원성군(原城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인데 신라시대에 북원소경(北原小京), 940년(고려 태조23)에 원주(原州)로 고쳤다.그후 일신현(一新縣), 정원 도호부(靖原都護府),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 등을 거쳐 원주목(原州牧)이 되었으나 1310년 성안부(成安府)로 강등, 1353년(공민왕 2) 치악산에 태(胎)를 안치하고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1895년(고종 32) 원주군(原州郡)이 되었으며, 1955년 일부가 원주시(原州市)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
원주 변씨(原州邊氏)는 황주 변씨(黃州邊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고려 말의 절신(節臣)인 변안렬(邊安烈)을 시조(始祖)로 한다. '원주변씨족보(原州邊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조부(祖父)인 변 순(邊 順)이 1268년(고려 원종9) 원(元)나라 사신(使臣)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서 원세조(元世祖)를 알현(謁見)하고 심양(瀋陽)의 장수(將帥)로 있다가 천호후(千戶侯)에 봉작을 받았고, 안렬(安烈)은 조카 숙(肅:안렬의 형인 안백의 아들)과 함께 공민왕(恭愍王)과 왕비(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하고 환국하여,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을 격퇴시켜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경(京都)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에 책록,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의 호(號)을 받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겸 조전원수(助戰元帥)이 되어 나 세(羅 世), 조사민(趙思敏), 이성계(李成桂), 류 실(柳 實) 등과 함께 운봉(雲峰), 부령(扶寧)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한방언(韓邦彦)과 함께 단양(丹陽)과 안동(安東)지역에 침입해 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왕을 폐립(廢立)한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제거하고 쫓겨난 우왕(禑王)을 복위(復位) 시키려다가 김 저(金 佇)와 함께 순절하였다. 특히 그는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진 절신으로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부흥을 위하여 강인한 절개를 굽힐 줄 몰랐으며 원주 원씨(原州元氏) 원 이의 딸과 혼인하여 사적지(賜籍地)인 원주(原州)에서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은 원주(原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李太祖)는 안렬의 충절(忠節)을 기리고 그의 아들 3형제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어 맏아들 현(顯)은 봉상시사(奉常寺事)를, 둘째 이는 도총제(都摠制)를, 막내 예(預)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사(訓鍊院事)를 각각 역임하였고, 손자 상복(尙服:이의 아들)은 덕천옹주(德川翁主)와 혼인하여 원주위(原州尉)에 봉해졌다. 한편 예조 참판(禮曹參判) 상회(尙會)의 아들 수(修)는 호조 및 병조, 형조, 공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충청, 경상, 함경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면천 군수(沔川郡守) 계윤(季胤)의 아들 협(協)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이르렀고, 주역(周易), 천문(天文), 지리(地理), 수학(數學)에도 정통하였으며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특히 협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호쾌하고 도량이 넓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여섯살 때 샘에 빠진 일이 있었는데 우물 안에서 돌을 붙들고 밤새 버티고 있다가 새벽에 물을 길러온 아낙네들에게 큰 새끼를 빨리 가져오라고 호통쳤다고하며, 1565년(명종 20)에는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귀양온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장살(杖殺)함으로써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때 난정을 개탄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던 사촌 동생 희리(希李)와 함께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로 낙향했던 희예(希乂)의 아들 광(廣)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고, 그의 아들 영청(永淸)은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임금으로부터 표리(表裏:은사나 헌상하는 옷의 겉감과 안감)와 안마(鞍馬)를 하사 받았으며, 단아하면서 근엄한 성품으로 공직에 있으면서 대구 부사(大丘府使)로 재임중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데 성력을 다했고 부모 봉양을 잘 하는 사람에게 쌀과 고기를 지급하는 등 밝은 치적을 거두었다.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한 양걸(良傑)은 임진왜란 때 강화(江華)를 방비하는데 공을 세우고 명(明)나라 낙오병(落伍兵)들의 반란을 재치로 진압하여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되었으며, 왕자(王子)가 관련된 살인사건을 가차없이 다루다가 선조의 뜻에 거슬려 동래(東來)로 유배, 뒤에 수원 부사(水原府使)와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공조 좌랑(工曹佐郞) 열(悅)의 아들 응정(應井)은 임진왜란 때 조 헌(趙 憲), 정 담(鄭 湛) 등과 더불어 금산(錦山) 전투에서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자, 적장도 그의 충의에 감복하여 무덤을 크게 만들고 <조선국충간의담(朝鮮國忠肝義膽)>이라 쓴 푯말을 세웠고,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고향에 내렸다.
또한 만취당(晩翠堂) 영순(永淳)의 아들 경회(慶會)는 임진왜란 때 임 흘(任 訖), 금윤선(琴胤先) 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많은 훈공을 세웠으며,
선조조(宣祖朝)에서 무과에 급제한 흡은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공헌하여 진무이등공신(振武二等功臣)로 원흥군(原興君)에 봉군되어,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던 극태(克泰:경회의 현손)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외 효종(孝宗) 때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출정하여 러시아군을 격파시켰던 급(급)과 경종(景宗) 때 통역관(通譯官)으로 '노걸대신석(老乞大新釋)'을 편찬한 헌(憲)이 유명했으며, 근대에 와서는 의병대장(義兵大將) 학기(鶴基)가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충절(忠節)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원주 변씨를 더욱 빛냈다.
근대에 와서는 면와(勉窩) 태균(台均)의 주관으로 1924년 경북 봉화읍 거촌리(慶北奉化邑巨村里)에 구양사(龜陽祠)를 세워 백산(栢山) 경회(慶會)와 봉은(鳳隱) 극태(克泰)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3월과 9월의 중정일(中丁日)에 제향(祭享)하여 왔다.
그후 1984년 후손 교우(敎雨)가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에 따라 강당(講堂)을 중수(重修)하고 그 규모를 확장하여 묘우(廟宇), 전사청(典祀廳), 장서각(藏書閣), 동서재(東西齋), 주사(廚舍), 삼문(三門), 문루(門樓)를 비롯한 기타 부속건물의 신축사업비를 전담하고 구양서원(龜陽書院)이라 이름하여 시조 대은공(大隱公), 백산공(栢山公), 봉은공(鳳隱公)을 향사(享祠)하고 있으며, 약국(藥局)을 세워 봉화군(奉化郡) 지역 영세민에 대한 의약품 무료지급과 사회자선사업가로서의 눈부신 활약으로 철탑산업훈장(鐵塔産業勳章)과 새마을 포장(褒章)을 수상했고 사회봉사 부분의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어 명문(名門) 원주 변씨의 전통을 살렸으며 문중단결(門中團結)을 위하여 전국에 산재(散在)한 증손(曾孫)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 변씨(原州邊氏)는 남한에 총 9,698가구, 39,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